All Chapters of 이혼 서류는 내가 먼저 냈다: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11화. 추적 성분

하람은 노트를 가져가지 않았다.화면 속 작은 등이 금고 문을 열고, 열세 번째 노트를 꺼냈다. 원료장 선반 위에 노트를 펼쳐 놓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냈다.찰칵.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화면이 번쩍이는 게 보였다. 한 장, 넘기고, 한 장. 하람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두 번이나 같은 장을 다시 찍었다. 초점이 안 맞았던 모양이었다.여덟 분이 걸렸다. 7월 19일과 똑같이.하람은 노트를 제자리에 꽂고 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동안 금고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서린은 그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2시 14분. 하람이 일어났다. 작업실 구석 CCTV 쪽으로 걸어가더니 외장 하드가 꽂힌 작은 기계 앞에 섰다. 한참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고는 불을 끄고 나갔다.서린은 휴대폰 영상을 저장했다. 날짜와 시각이 화면 구석에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건물 CCTV의 15분은 또 지워졌겠지만, 이 영상은 지울 수 없었다.그녀는 노트북을 덮었다. 창밖이 아직 캄캄했다.한 시간쯤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금고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던 작은 등이 자꾸 떠올라서였다.* * *"그냥 두라고요?"아침 일곱 시, 지현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서린이 보여 준 영상을 세 번이나 돌려 본 뒤였다."네. 오늘도 평소처럼요.""서린 씨, 이건 이제 증거가 있잖아요. 얘가 금고 열고 사진 찍는 게 다 찍혔는데—""사진을 누구한테 보내는지는 안 찍혔어요."서린은 커피를 두 잔 내렸다. 한 잔을 지현에게 건넸다."하람 씨는 오늘 사진을 넘길 거예요. 병은 두 달 전에 넘겼으니까 이번엔 서두를 거고요. 저쪽은 병이 바닥나기 전에 배합을 받아야 하니까.""그래서요?""그래서 제가 따라가 볼게요."지현이 커피를 내려놓았다."서린 씨가 직접요? 들키면 어떡해요. 하람이가 서린 씨 얼굴을 아는데.""하람 씨가 아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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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가정법원

"재판까지 가겠다는 거냐."회장실의 향나무 냄새는 오늘따라 짙었다. 차명헌 회장은 돋보기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건 서류를 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정하지 않았다."회장이 도혁의 말을 천천히 되풀이했다."저쪽은 정했다더라. 일주일 안에 답 없으면 소장 넣는다고. 변호사가 그러던데. 증거 목록도 봤다. 네가 3년 동안 몇 시에 들어왔는지, 하루도 안 빼고 적혀 있더구나."도혁의 얼굴이 굳었다. 회장이 그 목록까지 봤다는 건 몰랐다."그걸 법정에서 읽힐 생각이냐. 태강그룹 3세 차도혁, 결혼 3년 동안 아내와 둘이 저녁 먹은 날 0일. 기자들이 좋아하겠다.""……할아버지.""나는 네 이혼에 관심 없다. 네가 3년 전에 그 아이를 들일 때도 관심 없었다. 네 아비가 정한 일이었고 너는 따랐지.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아이를 붙잡겠다고 법정까지 끌고 가는 건, 그건 내 이름 걸린 일이다."회장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붙잡고 싶으면 사람으로 붙잡아라. 법으로 붙잡지 말고."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사람으로 붙잡는 법을 그는 알지 못했다. 3년 동안 그 사람은 늘 거기 있었다. 붙잡을 필요가 없었다."사흘 안에 정리해."회장이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대화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도혁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협의로 가겠습니다.""아,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전무님. 그럼 저쪽에 날짜 잡자고—""하나만 전해 주세요.""네."도혁은 창밖을 보았다. 한강 위로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3주년 저녁에도 해는 저렇게 졌을 것이다. 그는 그 시각에 공항에 있었다."한 달이면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울며 빌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변호사가 잠시 말이 없었다."……그대로 전할까요?""그대로요."그 말이 승아를 거쳐 서린에게 전해진 것은 한 시간 뒤였다. 승아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욕을 했다. 서린은 끝까지 듣고 나서 짧게 말했다."그대로 답해 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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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소문

기사는 그날 저녁 여섯 시에 떴다.「[단독] 태강그룹 3세 차도혁 전무, 결혼 3년 만에 파경… 가정법원서 포착」사진이 두 장 붙어 있었다. 한 장은 손으로 카메라를 막는 도혁. 다른 한 장은 계단을 내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높이 묶은 머리와 흰 셔츠는 그대로였다.첫 기사는 짧았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는 사실, 최근 첼리스트 유세아와의 공항 목격담. 그게 전부였다.두 번째 기사는 밤 아홉 시에 떴다. 다른 매체였다.「차도혁 부부 파경 원인은? "아내 측이 먼저 집 나가"… 재계 "혼인 당시부터 잡음"」「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차 전무의 부인 한모 씨는 결혼 당시 부친 회사의 부채 문제로 태강 측과 얽혀 있었으며, 결혼 생활 내내 시댁과 갈등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씨는 최근 일방적으로 집을 나간 뒤 변호사를 선임한 것으로 전해졌다.」세 번째 기사는 자정을 넘겨 떴다.「[단독] "위자료 300억 요구"… 차도혁 전무 부인, 이혼 조건 둘러싸고 태강과 줄다리기」그 기사 아래 댓글이 천 개를 넘었다.「역시 빚 때문에 시집온 여자ㅋㅋ 3년 버티고 300억이면 꿀이네」「첫사랑 돌아오니까 한몫 챙기고 나가려는 거지」「남자가 불쌍하다 진짜」「재벌 며느리 되면 다 저렇게 되나」* * *서린은 옥탑방에서 그 기사들을 읽었다.처음부터 끝까지, 댓글까지 전부. 천천히. 조향사가 새 원료의 성분표를 읽듯이. 누가 이 문장을 썼는지, 이 단어는 어디서 왔는지.부친 회사의 부채 문제. 시댁과 갈등이 잦았던. 일방적으로 집을 나간.전부 사실이었다. 그리고 전부 거짓이었다. 사실들을 골라 한 줄로 꿰면 거짓말이 되었다."……어머님이네."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기사 속 문장의 결을 알 수 있었다. '재계 관계자'가 쓰는 말투가 아니었다. 3년 동안 본가 식탁에서 매일 듣던 말투였다. 빚 대신 들어온. 시댁과 갈등이 잦은. 일방적으로.진주 목걸이의 복수였다.휴대폰이 쉬지 않고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대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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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옷 가방 두 개

입장문은 오후 두 시에 나갔다.승아의 법률사무소 이름으로, 기자들에게 메일 한 통. 그리고 사무소 홈페이지 공지 한 줄. 서린이 쓰고 승아가 고쳤다. 아니, 승아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몇 번 읽어 보더니 이대로 가자고 했다.「한서린 씨 법률대리인 입장한서린 씨는 차도혁 씨에게 재산분할과 위자료를 일절 청구하지 않았습니다.두 사람이 작성한 협의이혼 합의서 제3조에 그 포기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해당 조항을 첨부합니다.한서린 씨가 결혼할 때 가져온 것은 옷 가방 두 개였습니다. 나올 때도 옷 가방 두 개를 들고 나왔습니다.이 밖의 보도에는 대응하지 않겠습니다.」첨부 사진은 한 장이었다. 합의서의 한 페이지. 다른 조항은 전부 가리고 제3조만 보이게 했다. 그 아래 찍힌 도장, 한서린.사진 속 도장은 조금 비뚤었다. 한 달 전 새벽, 부엌 식탁에서 혼자 찍은 것이었다. 손이 떨려서가 아니었다. 두꺼운 식탁보를 걷지 않고 종이를 올려놓아서 바닥이 평평하지 않았다.* * *반응은 한 시간 만에 뒤집혔다.「300억 요구했다며? 합의서에 한 푼도 안 받는다고 도장 찍혀 있는데?」「300억은 누가 만든 숫자임?」「옷 가방 두 개로 들어가서 옷 가방 두 개로 나왔다… 이 한 줄에 눈물 남」「태강은 사생활이라 언급 안 한다며ㅋㅋ 300억 기사 부인도 안 하더니」「그럼 어제 기사 뿌린 '재계 관계자'는 누구야」서너 시간 뒤, 한 인터넷 매체가 기사를 냈다.「"위자료 300억" 보도, 근거 없었다… 차도혁 부인 측 "재산분할·위자료 전액 포기"」그리고 그날 밤, 결정적인 기사가 하나 더 나왔다.「[취재후] '재계 관계자'는 누구였나… 첫 보도 기자 "태강가 가까운 인사에게 들었다"」기사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댓글이 대신 밝혔다.「태강가 가까운 인사 = 시어머니 아님?」「진주 목걸이 사건 들었는데 ㄹㅇ임? 시어머니가 가짜 진주를 4대째 가보라고 며느리한테 걸어 줬다던데」「그 집 친척이 단톡에 풀었다던데ㅋㅋㅋ 며느리가 냄새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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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윤이안

서린은 계단참에서 걸음을 멈췄다.작업실 문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컸다. 회색 울 코트에 짙은 남색 목도리. 머리카락은 조금 길어 귀를 덮었고, 안경은 쓰지 않았다. 동양인의 얼굴이었지만 서 있는 자세가 어딘가 이국적이었다. 오래 다른 나라의 공기를 마시며 산 사람의 자세.지현이 문을 반쯤 막고 서 있었다. 남자는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문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죄송하지만 여기는 개인 작업실이라서요. 약속 없이는—""압니다. 약속 없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며 계단 위를 보았다. 서린과 눈이 마주쳤다.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한 번, 천천히 들이쉬었다. 코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린은 그 동작을 알았다. 조향사가 방 안의 공기를 읽을 때 하는 동작이었다. 그녀 자신이 3년 동안 수없이 해 온."……당신이군요."남자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지현이 놀라 서린을 돌아보았다. 서린은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남자 앞, 한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윤이안 씨.""네.""어떻게 알았어요?"이안이 웃었다. 조금 쑥스러운 듯한 웃음이었다. 서른두 살 브랜드 대표의 얼굴보다 편지 속 스물두 살 학생의 얼굴에 가까운."손목이요. 리넨이 조금 많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나무 계단. 그 나무는 N이 3번에서 한 번 썼던 오래된 향나무입니다. 10년 동안 그 나무를 그렇게 쓰는 사람은 한 명밖에 못 봤습니다."서린은 저도 모르게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새벽에 뿌린 옥탑의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들어오세요."* * *작업실 창가 작은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지현은 차를 내오고는 원료장 쪽으로 물러났다. 물러난 척했다. 귀는 이쪽을 향해 있었다. 하람은 병원 간다며 조퇴한 뒤였다.지현이 내온 차에는 향이 거의 없었다. 작업실에서는 향이 진한 차를 마시지 않았다. 코를 흐리지 않으려고. 이안은 찻잔에 코를 한 번 대 보더니 조금 웃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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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성수동

도혁은 나흘째 네 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잠이 들면 새벽 두 시에 깼다. 깨면 도어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그는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았다. 3년 동안 아내가 그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을 자리였다.거기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 다시 잠이 왔다. 그래서 그는 요즘 소파에서 잤다.아침에 셔츠를 입으며 그는 습관처럼 서재 책상의 작은 유리병을 집었다. 손목에 한 번 뿌렸다. 첫눈. 언제부터 그게 습관이 됐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전무님, 향수 쓰세요?"엘리베이터 안에서 강민재가 물었다. 5년 동안 처음 하는 질문이었다."……왜.""아뇨, 처음이라서요. 좋은 향입니다. 겨울 냄새 같아요."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눈 밑이 거뭇했다. 셔츠 단추는 제대로 채워져 있었다. 드레스룸 안쪽 벽을 미는 법을 이제는 알았다. 월요일은 흰색, 화요일은 하늘색. 공책에 적힌 대로.* * *오전 열 시, 22층 대회의실.「라벨티 니치 퍼퓸 TF — 3차 회의」긴 테이블에 여덟 명이 앉아 있었다. 라벨티 대표, 마케팅 본부장, 연구소장, 그리고 그룹 전략실 사람들. 상석에 도혁이 앉았다. 할아버지가 석 달 전 이 TF를 만들며 그에게 맡겼다. 태강의 뷰티 사업은 10년째 제자리였다. 백화점 1층에 매장은 있지만 아무도 태강의 향수를 기억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름 하나를 원했다. 사람들이 기억할 이름.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작은 유리병 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N이 세상에 내놓은 향 전부였다. 1번부터 6번까지. 파리 편집숍에서 한 병에 수십만 원씩 주고 사 온 것들이었다. 회의 때마다 누군가 시향지에 한 번씩 뿌려 돌렸다. 오늘도 시향지가 도혁 앞으로 왔다.그는 별생각 없이 여섯 장을 차례로 맡았다. 1번은 차가운 풀. 2번은 달콤한 나무. 3번에서 그는 비에 젖은 돌을 맡았다. 세아의 손목과 같은 돌이었다.그리고 6번에서 그는 멈췄다.앞의 향들이 날아간 뒤 마지막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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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숙려기간

골목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빵집에서 저녁 빵이 나오는 종소리가 울렸다. 자전거 한 대가 세 사람 사이를 비켜 지나갔다. 도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린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안만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누구야."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았다. 시선은 이안에게 가 있었다.서린이 대답하기 전에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윤이안입니다. 메종 리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도혁의 눈썹이 움직였다.메종 리안. 그 이름을 그는 알았다. TF 회의 자료에서 몇 번이나 본 이름이었다. 파리의 니치 향수 하우스. 라벨티가 N의 연락처를 물으러 사람을 보냈던 곳. 그리고 대표가 한국계라는 것까지."메종 리안 대표가 성수동 골목에서 뭘 합니까.""개인적인 일입니다."이안의 대답은 정중했다. 그러나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도혁은 그 정중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기가 회의실에서 쓰는 종류의 정중함이었다."개인적인 일."도혁이 그 말을 되풀이하며 서린을 보았다."그 개인적인 일에 네가 있는 거고.""전무님."서린이 조용히 불렀다. 도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왔다."지금 숙려기간이에요.""알아.""그럼 아실 텐데요. 숙려기간은 서로 생각하라고 있는 거지, 서로 따라다니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전무님이 물으실 이유 없어요."도혁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따라온 거 아니야.""그럼 성수동엔 왜 오셨어요."도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N을 찾으러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모님 휴대폰 신호가 성수동에서 잡혔다는 보고가 머릿속 어딘가에 계속 걸려 있었다는 것도. 그 둘이 합쳐져 결국 그를 이 골목까지 끌고 왔다는 것도.그는 대신 서린의 등 뒤, 빨간 벽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거기 네 작업실이야?"서린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이안이 그걸 보았다. 도혁은 보지 못했다."아는 분 공방이에요. 향 배우러 다녀요.""향을 배워?""네.""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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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답장

도혁은 세아의 손 아래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천천히.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 얹을 수 없도록,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제안서는 TF로 정식으로 넣어. 다른 제안이랑 똑같이 검토할 거야.""오빠.""그게 절차야."세아의 얼굴에서 웃음이 아주 잠깐 빠져나갔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웃음은 조금 딱딱했다."알았어. 절차대로 할게. 근데 오빠가 책임자니까, 오빠 마음이 제일 중요하잖아."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의 손목을 보았다. 하얀 손목. 거기서 올라오는 향."향이 달라졌네."세아가 멈칫했다."……어?""저번이랑 달라. 돌 냄새가 없어졌어. 대신 쇠 냄새가 나.""아, 이거."세아가 손목을 무릎 위로 내렸다. 웃음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준비된 웃음이었다."원래 병을 거의 다 써서, 같은 공방에 연락해서 새로 받았어. 할머니가 다시 만들어 주셨는데, 손으로 하는 거라 매번 조금씩 다르대. 그게 핸드메이드의 매력이잖아."같은 공방. 할머니. 다시 만들어 주셨다.도혁은 그 말들을 하나씩 들었다. 그리고 책상 서랍 속 메모를 떠올렸다. 빈 구시가지, 개인 공방 1곳, 업주 3년 전 은퇴, 폐업.세 번째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문 닫은 공방에서 새로 받은 향."그렇구나."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일어났다."피곤해서 먼저 갈게. 제안서는 TF로 넣어."세아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라운지 창에 비친 그의 뒷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수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제품 냄새 이상해. 한 시간 지나면 쇠 냄새 나. 오빠가 알아챘어. 당장 조향사한테 고치라고 해.」* * *다음 날 아침, 서린은 작업실 원료장 앞에 서 있었다."셋째 칸, 갈색 병이요."지현이 선반에서 작은 갈색 유리병을 꺼냈다. 라벨에 서린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머스크 T-7」.가짜 노트 속 그 원료였다. 노트에는 이렇게 적어 두었다. 「머스크 T-7 — 자체 배합 원료. 원료장 셋째 칸 갈색 병.」 시판되는 이름이 아니었으니, 노트대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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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계속해

답장은 짧았다.서린은 세 번 썼다가 세 번 지웠다. 처음에는 너무 길었다. 두 번째는 너무 차가웠다. 세 번째는 너무 친절했다. 네 번째에 그녀는 필요 없는 것을 전부 빼고, 마지막에 한 가지만 남겼다.「라벨티 니치 퍼퓸 TF 귀하제안 감사합니다. 만나 뵙겠습니다.날짜는 제가 정하겠습니다.장소는 태강그룹 본사로 하겠습니다.— N」지현이 어깨 너머로 화면을 읽었다."날짜는요? 언제로 해요?""확인기일 다음 주 월요일이요."지현이 달력을 보았다. 그리고 서린을 보았다."……이혼 끝나고요?""네.""왜 굳이요? 지금 보내면 당장이라도—""지금은 제가 아직 그 사람 아내니까요."서린은 메일의 예약 발송 버튼을 눌렀다. 날짜를 골랐다. 한 달 뒤, 확인기일 당일. 시각은 오후 세 시."법원에서 판사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한서린은 차도혁의 아내예요. 그동안에는 N이 태강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아내가 남편 회사에 몰래 들어가는 게 되니까. 그건 싫어요.""법원 나오고 나면요?""그때부터는 남이죠. 남이 남의 회사랑 일하는 거예요."예약 발송이 설정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서린은 메일함을 닫았다.지현은 한참 서린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서린 씨는 이혼도 조향하듯이 하네요.""그런가요?""순서가 있잖아요. 뭐가 먼저 올라오고, 뭐가 나중에 남고."서린은 대답 대신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지현은 예약 발송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서린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그 사람, 골목에서 봤을 때요. 안 흔들렸어요?"서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았다. 어제 저녁 도혁이 서 있던 인쇄소 앞에 오늘은 종이 뭉치만 쌓여 있었다."흔들렸어요."지현이 놀라 서린을 보았다."그 사람이 첫눈을 뿌리고 있었어요. 제가 3년 전 현관에서 맡은 냄새를, 이제 그 사람이 매일 뿌리고 다녀요. 그걸 맡는데 안 흔들리면 거짓말이죠.""그럼…….""흔들리는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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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확인기일

한 달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서린에게는 그랬다. 옥탑방의 향은 열네 번 바뀌었다. 리넨을 넣었다 뺐다, 나무 계단을 진하게 했다 옅게 했다. 열다섯 번째에 그녀는 비커를 내려놓았다. 더 손대지 않기로 했다. 아직 이름은 없었다.하람은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간다며 조퇴했다. 서린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지현도 묻지 않았다. 금고는 더 열리지 않았다. 원료장의 갈색 병도 더 줄지 않았다.이안은 파리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날 성수동 삼겹살집에 한 번 더 왔다. 이번에는 혼자 고기를 굽겠다고 우기다가 두 점을 태웠다. 서린은 웃으며 집게를 빼앗았다. 공항에 가는 택시 안에서 그는 메일을 한 통 보냈다. 「경쟁 입찰자, 준비 완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린은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보며 조금 웃었다.도혁에게 한 달은 길었다.그는 연락하지 않았다. 울며 빌지 말라고 한 사람이 먼저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휴대폰 통화 기록에서 「한서린」을 찾아 엄지를 올려 두었다가 내린 게 몇 번인지 그는 세지 않았다. 세면 그녀의 수첩처럼 될 것 같았다.한 번, 성수동에 갔다.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고 빨간 벽돌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2층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한 시간 동안 차 안에 앉아 있다가 시동을 걸었다. 들어가지 않았다.소파에서 자는 게 익숙해졌다. 드레스룸의 셔츠는 요일에 맞춰 입었다. 냉장고 문 안쪽의 두통약은 공복에 먹지 않았다. 식빵은 냉동실 둘째 칸에서 꺼냈다. 공책에 적힌 대로 사는 한 달이었다.그 공책에 적힌 대로 살수록, 그 공책에 적히지 않은 사람의 빈자리가 커졌다.그 한 달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이 있었다.윤정숙은 태강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회장실에 불려 간 다음 날이었다. 공식 이유는 건강이었다. 재단 직원들은 아무도 그 이유를 믿지 않았다. 그녀가 30년 동안 가장 아끼던 자리였다. 자선 바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사진을 찍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던 자리. 그 자리를 잃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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