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20

80 فصول

11화. 레티시아

레티는 손수건을 댄 채 차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은색 리본 끝이 틈에 끼었다. 손끝으로 빼내려다 말고 상자를 밀었다.“노라, 이건 찬장에 넣지 마.”“선물 보관실로 옮길까요?”“응. 다른 차하고도 섞이지 않게.”노라가 상자 밑으로 쟁반을 받쳤다. 종이와 마른 잎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레티는 코에서 손수건을 떼고 창문을 열었다.밤바람이 들어오자 조금 숨을 쉴 만했다.「내일 찾아뵙겠습니다.」상자에서 떼어 낸 쪽지에는 다정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전생에도 그라시안 대공은 선물을 자주 보냈다. 겨울이면 몸을 따뜻하게 하라며 차를, 봄이면 황태자비의 집무실에 꽃을 보냈다.차를 싫어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이번에는 말할 수 있었다.레티는 쪽지를 뒤집어 놓았다.“내일 손님상에는 저 차 말고, 우리가 가진 차를 내자.”“어느 걸로 준비할까요?”“볶은 보리차. 진하지 않게.”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손수건에 밴 냄새까지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봄 셋째 달 12일 아침, 레티는 식당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오른쪽 의자는 에런이, 왼쪽 의자는 유리엘이 빼 둔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손을 등받이에 얹고 있었다.“제 의자는 하나인데요.”“이쪽이 창에서 멉니다. 아침 바람이 찹니다.”에런이 오른쪽 의자를 조금 더 당겼다.유리엘은 왼쪽 의자를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내 자리다.”“전하께서 앉으시려고 빼신 거군요.”“그래.”유리엘은 앉지 않고 레티를 보았다. 에런도 여전히 서 있었다.‘의자까지 눈치를 보겠네.’레티가 오른쪽 의자에 앉자 에런이 식탁 쪽으로 천천히 밀어 주었다. 그와 동시에 유리엘이 접힌 냅킨을 레티 앞에 놓았다.“고맙습니다.”“차도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잔은 내가 가져왔지.”유리엘이 손잡이를 레티 쪽으로 돌렸다. 에런은 그 잔에 차를 따랐다. 물줄기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맞은편 노엘이 빵을 물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누나, 나도 의자 안 밀고 앉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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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죽은 제가 끓였습니다

레티가 창문 손잡이를 내리자 뒤에서 노라가 물잔을 들어 보였다.“바깥 구경은 여기까지 하세요. 물도 다 식었어요.”“불이 아직 켜져 있어서.”“별채에도 등이 있는걸요.”맞는 말이었다. 레티는 할 말을 잃고 창가에서 물러났다.노라가 커튼을 당겼다. 동쪽 창의 불빛이 천 사이로 가늘게 남았다가 사라졌다. 레티는 뒤집어 둔 종이를 다시 펴지 않고 그 위에 빈 종이를 올렸다.“모레 시장에 가자.”“무엇을 사시려고요?”“작은 저울을 보려고. 찻잎을 담을 통도.”“제가 목록을 적을까요?”“같이 적자. 혼자 적으니까 자꾸 다른 걸 쓰게 돼.”노라가 펜을 들고 레티 옆에 섰다. 레티는 맨 위에 저울을 적었다. 이번에는 이름 대신 살 물건이 종이를 채웠다.▽봄 셋째 달 14일,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볕이 났다.레티는 작은 저울의 접시를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한쪽으로 기울었던 접시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옆에 놓인 저울은 그 자리를 눌러도 가운데 막대가 조금 비뚤어졌다.“이쪽이 더 낫네요.”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펼쳤다. 노라가 값을 치르는 동안 에런은 레티가 고른 작은 통 두 개를 받아 들었다.“이것도 마차에 실어 두겠습니다.”“제가 하나 들 수 있어요.”“뚜껑이 잘 맞는지 보셔야 하니까, 아가씨께는 빈손이 필요합니다.”레티는 이미 확인한 뚜껑을 다시 열었다가 닫았다.‘말도 참 잘 붙인다.’황궁에 다녀오겠다던 유리엘의 마차가 골목 입구에 멈춘 것은 그때였다. 웨스가 문을 열자 유리엘이 내려 레티의 손에 든 통을 보았다.“샀나?”“네. 저울도 골랐어요.”“더 볼 것은.”“오늘은 이것만요. 차를 담는 도구부터 익히려고요.”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레티가 통을 건네기도 전에 에런이 포장된 저울을 상인에게서 받았다.“깨지기 쉬운 건 제가 들겠습니다.”“그럼 통은 내가 들지.”두 사람의 손이 레티 앞에 나란히 남았다.“통은 두 개니까 하나씩 드세요.”레티는 정확히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노라가 빈 바구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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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짐은 내가 들지

레티가 문을 닫으려는데 에런의 어깨에서 담요 한쪽이 흘러내렸다.문을 잡은 손을 놓고 조심히 다가갔다. 담요 끝을 들어 올리자 에런이 눈을 떴다.“아가씨.”“더 주무세요. 물만 마시러 나왔어요.”에런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레티가 담요를 어깨 위에 얹으며 고개를 저었다.옆 의자에서도 외투가 움직였다. 유리엘이 눈을 뜨고 레티의 슬리퍼부터 보았다.“발 시리다.”“방에 들어갈 거예요.”“열은.”“내렸어요. 노라가 확인했어요.”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레티는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저를 방까지 데려다주실 필요는 없어요. 바로 여기니까요.”에런이 열린 문과 레티를 번갈아 보았다. 유리엘은 담요를 접었다.“두 분도 침대에서 주무세요.”레티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복도에서는 한동안 의자를 미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문을 닫았다. 노라가 머리맡의 종이꽃을 바로 세워 주었다.▽봄 셋째 달 18일, 레티는 종이꽃 옆에 세워 둔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시장에 가서 물어볼 것을 적은 종이였다. 찻잎 보관하는 법, 물을 붓는 때, 함께 섞어도 되는 잎. 아래로 내려갈수록 글씨가 작아졌다.노라가 외투를 펼쳐 들었다.“오늘은 비가 안 온대요.”“그래도 우산은 챙기자.”“벌써 마차에 있어요. 담요도요.”“담요까지?”“두 장이요.”레티는 잠시 노라를 보았다. 노라는 외투 깃을 펴며 덧붙였다.“아가씨 것은 따로예요.”‘담요도 세 사람 몫이네.’현관에는 에런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비어 있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차를 배우러 가신다고 들었습니다.”“구경만 하고 올 수도 있어요.”“그럼 빈 바구니로 돌아오겠습니다.”레티가 계단을 내려가자 에런이 마차 문을 열었다. 발판 옆에는 유리엘이 서 있었다. 황궁에 갈 때 입던 긴 외투 대신 단추가 적은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전하도 시장에 가세요?”“그래.”“황궁에는요?”“다녀왔다.”레티가 하늘을 보았다. 아침 볕이 공작저 지붕에 막 올라와 있었다.유리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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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건 그냥 고양이입니다

레티가 펜을 돌려주자 노라는 손수건으로 펜 끝을 닦았다.“손님 아래에는 뭘 쓰실 거예요?”“아직 몰라. 자리가 좁아서 더 못 쓰겠어.”유리엘이 접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큰 종이를 쓰면 되지.”“먼저 가게가 들어갈 자리를 봐야겠어요.”에런이 바구니를 마차에 싣고 돌아섰다.“시장 안쪽에 빈집이 몇 군데 있습니다. 길부터 알아보겠습니다.”“나도 알아보지.”레티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알아보시는 건 좋아요. 미리 사 두시면 안 돼요.”바구니 손잡이를 놓던 에런의 손이 멈췄다. 유리엘은 마차 문을 잡은 채 레티를 보았다.“아직 안 샀다.”‘아직이 걸리네.’레티는 발판에 올라서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제가 보고, 제가 정할 거예요.”에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엘도 짧게 대답했다.“그래.”▽봄 셋째 달 20일, 레티는 작은 수첩을 들고 현관으로 내려갔다.이번에는 질문을 적을 자리도 넉넉했다. 첫 장에는 창문, 물, 손님 자리라고 적혀 있었다. 노라는 그 아래에 부엌을 하나 더 적었다.“차를 끓이려면 있어야 하잖아요.”“맞아. 잎을 둘 선반도.”현관 밖에는 에런과 유리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런은 접은 종이를 펼쳐 골목을 가리켰다. 유리엘 곁에서는 웨스가 다른 종이를 들고 있었다.“두 장이나 필요해요?”“비어 있는 곳만 표시했습니다.”에런의 종이에는 길과 작은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웨스의 종이에는 집마다 창문의 방향까지 적혀 있었다.레티는 두 종이를 차례로 보고 수첩을 덮었다.“오늘 다 볼 수 있을까요?”“마차로 돌면 된다.”“골목 안쪽은 걸어야 합니다. 아가씨께서 피곤하시면 나머지는 다른 날 보시고요.”유리엘이 웨스의 종이에서 몇 군데를 짚었다.“큰길 옆은 빼.”“왜요?”“시끄럽다.”에런도 제 종이의 네모 하나에 줄을 그었다.“여기는 짐마차가 자주 멈추는 곳입니다. 창을 열기 어려울 겁니다.”레티는 남은 곳을 손끝으로 짚었다.“그럼 여기부터요.”두 사람의 눈이 한곳에 멎었다.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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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첫 춤은 내 차례다

유리엘은 레티가 수첩을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다 웃었나.”“네.”레티는 대답하고도 입술을 한 번 더 눌렀다. 유리엘이 손을 내밀어 수첩 아래쪽을 가리켰다.“떨어뜨리겠다.”웃느라 힘이 풀린 손에서 수첩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레티는 얼른 가슴에 붙였다.“안 떨어뜨려요.”“그럼 가자.”마차 앞에서 에런이 문을 잡고 기다렸다. 레티가 가까이 가자 발판을 내려 주었다. 유리엘은 반대편으로 돌지 않고 레티 뒤에 섰다.“머리 조심해.”“제가 봐 드리겠습니다.”에런이 문 위에 손을 댔다. 유리엘의 손도 같은 곳으로 올라갔다가 멈췄다.레티는 두 손 아래로 고개를 숙여 들어갔다.‘마차 문도 좁아졌네.’자리에 앉아 수첩을 펼쳤다. 마음에 든 집 옆에 표시를 하나 더 하고 나니, 그 아래에 남은 빈칸이 보였다.레티는 거기에 집세라고 적었다.▽봄 셋째 달 27일 아침, 집세와 계약 조건을 적은 종이 옆에 길쭉한 상자가 놓였다.레티는 숫자에 대고 있던 손끝을 거두었다. 노라가 상자를 책상 끝으로 밀어 넣었다.“동쪽에서 왔어요.”“별채에서?”“전하께서 보내셨어요. 오늘 무도회에 입으시라고요.”뚜껑을 열자 짙은 파란 천이 드러났다. 레티는 얇은 종이를 걷고 드레스를 들어 올렸다. 창가에서 볼 때는 파랗고, 책상 쪽으로 옮기면 거의 검게 보였다.목둘레에는 작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소매는 팔꿈치 아래까지 내려왔고, 허리에 붙인 장식은 납작했다.노라가 치맛자락을 받아 바닥에 닿지 않게 들었다.“예쁘네요. 무거운 장식이 없어서 춤추기도 편하시겠어요.”레티는 옷 안쪽을 살폈다. 목을 긁을 만한 뻣뻣한 안감도 없었다.전생에 입었던 무도회 드레스는 늘 누군가 골라 놓은 옷이었다. 허리끈을 더 조일지 물었고, 레티는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옷을 받자마자 움직일 때 불편할 곳부터 찾고 있었다.“맞는지 입어 봐야겠어.”“치수는 저한테 물어보셨거든요.”노라가 드레스를 든 채 살짝 웃었다.“언제?”“며칠 전에요. 아가씨께서 계단 오르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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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둘째 춤은 제가 추겠습니다

레티는 에런이 내민 손 위에 손을 얹었다.“기다리셨죠?”“한 곡입니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에런은 레티가 발을 옮기기 전에 손을 조금 낮췄다. 유리엘이 옆으로 물러나자 둘 사이에 길이 났다.“밑단이 길다.”유리엘의 말에 에런이 레티의 구두 쪽을 보았다.“조심하겠습니다.”“돌 때 오른쪽이 늦어.”레티는 유리엘을 돌아보았다.“제 발 이야기를 그렇게 자세히 하셔야 하나요?”“다치지 말라고.”에런이 웃음을 눌렀다.“제 오른쪽도 늦어서 괜찮습니다.”레티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둘 다 늦으면 누가 맞추지.’에런과 함께 가운데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첫 곡보다 악기 소리가 가벼웠다. 에런은 레티와 마주 서서 등에 손을 댔다가 위치를 조금 고쳤다.“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괜찮아요.”“춤은 많이 추지 못했습니다.”“미리 사과하시는 거예요?”“끝나고도 해야 할까 봐 먼저 말씀드립니다.”첫 음이 울렸다. 에런이 한 걸음 나왔고 레티가 뒤로 물러났다. 두 번째 걸음까지는 맞았다. 세 번째에 에런이 옆으로 가려다가 멈췄다.레티도 멈췄다.둘 옆으로 다른 쌍이 부드럽게 지나갔다.“방금은 앞으로였죠?”“그런 것 같습니다.”“확신이 없으신데요.”“아가씨께서 가시는 쪽으로 가겠습니다.”“둘 다 기다리면 여기 서 있게 돼요.”에런의 입가가 올라갔다. 레티는 다음 음에 맞춰 손을 조금 움직였다.“이쪽이에요.”“네.”에런이 따라왔다. 넓은 어깨가 돌아가자 레티도 발을 옮겼다. 이번에는 맞았다. 바로 다음 걸음에서 에런의 구두가 레티의 구두 옆을 스쳤다.에런이 아래를 보았다.“밟았습니까?”“아직요.”“아직이라는 말씀은 조금 무섭습니다.”레티가 웃자 에런도 웃었다. 틀린 걸음은 곧바로 고쳤고, 못 따라온 박자는 지나가게 두었다. 사과하느라 걸음을 더 놓치지는 않았다.레티는 손끝의 힘을 풀었다.“검을 들고 움직일 때는 빠르시잖아요.”“그때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압니다.”“지금은요?”“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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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돈은 됐어요, 손을 빌려주세요

레티는 손등에 닿은 장미 잎을 살짝 밀어냈다.“오늘은 웃을 일이 있었어요.”에런이 레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춤을 잘못 춘 것도 포함됩니까?”“그건 경이 먼저 말씀하셨으니까 포함할게요.”“다음에는 다른 일로 웃게 해 드리겠습니다.”레티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 대답을 고르는 사이 유리엘이 외투를 들고 나왔다.“바람이 차다.”유리엘이 외투를 펼치자 에런이 레티의 긴 치맛자락을 살폈다. 문턱 가까이 내려온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돌아가실 때 이쪽이 걸리지 않게 조심하십시오.”레티는 외투 안으로 팔을 넣었다. 어깨를 덮은 천에서 마차 안에 두었던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이제 돌아가요. 내일은 제 구두도 쉬어야겠어요.”“마차를 가까이 대라고 했어.”“내리실 때 발판은 제가 확인하겠습니다.”레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구두보다 이 사람들이 더 바쁘네.’문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레티는 장미 화분을 한 번 돌아보았다. 잎에 맺힌 물방울이 실내 불빛을 받고 있었다.▽봄 셋째 달 29일 아침, 레티는 책상 위에 금화를 늘어놓았다.노라가 옆에서 세다가 손을 멈췄다.“금화 30개예요.”“응. 다시 세어 봐도 늘어나지는 않네.”“주머니 밑도 확인했어요.”노라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작은 실밥만 떨어졌다.레티는 금화 옆으로 종이를 당겼다. 맨 위에 집세를 적고, 아래로 찻잎과 잔, 주전자, 수리에 쓸 돈을 나누어 적었다.한 해 집세는 금화 18이었다. 남는 돈으로는 새 가구를 마음껏 들일 수 없었다.레티가 잔 항목 옆에 짧은 선을 그었다.“처음부터 많이 사지는 않을 거야. 손님이 늘면 그때 더 사면 돼.”“그럼 깨진 잔은 제가 꼭 세어 둘게요.”“깨질 걸 먼저 세지 말고.”“장부에 칸만 만들어 놓겠습니다.”노라가 웃으며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레티는 집주인에게 받은 계약서 초안을 접었다.책상 끝에는 생일에 받은 차 상자를 넣어 둔 서랍이 있었다. 레티는 그쪽으로 손을 뻗지 않고 계산을 적은 종이만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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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붓은 이렇게 잡는 거예요

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붓털 끝에서 마른 가루가 조금 떨어졌다.레티는 붓 아래로 손바닥을 받쳤다.“일단 놓아 주세요.”“여기에?”“네. 손잡이가 아래에 있어서 그대로 뒤집으면 가루가 묻어요.”붓을 받아 든 레티는 넓적한 부분을 털고 나무 손잡이를 유리엘 쪽으로 돌렸다. 유리엘이 다시 잡자 손가락이 손잡이 맨 끝에 모였다.“조금 더 위를 잡으셔야 해요.”유리엘의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는 털 바로 위까지 갔다.레티는 입술을 누르다가 결국 웃었다.“그 사이요.”“사이가 넓군.”“그러니까 편한 곳을 찾으시면 돼요.”노라가 가게 안에서 창을 여는 동안 레티는 통의 뚜껑을 살폈다. 굳은 칠이 테두리에 붙어 있었다. 손톱으로 건드리려는데 유리엘이 붓을 다른 손으로 옮겼다.“그건 내가 하지.”“뚜껑만 열어 주세요. 아직 칠하시면 안 돼요.”“왜.”“벽부터 닦아야 하거든요.”유리엘은 통과 벽을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붓을 깨끗한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먼저 말해 줘.”레티는 물통 옆에 놓인 천을 집었다.“오늘은 닦고, 마르면 칠해요.”“알겠다.”유리엘이 천을 받아 창 아래에 무릎을 굽혔다. 레티는 걷어 올린 소매가 다시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소매가 젖겠어요.”유리엘이 팔을 내밀었다. 레티는 천을 내려놓고 접힌 소매 끝을 한 번 더 올려 주었다. 셔츠 천 아래의 팔은 붓을 어설프게 잡던 손과 달리 단단했다.레티가 손을 떼자 유리엘은 곧바로 벽을 닦기 시작했다.노라가 물통을 가져오며 말했다.“아가씨, 이쪽 소매도요.”유리엘이 반대쪽 팔을 내밀었다.‘일을 두 번 시키는 데도 재주가 있네.’레티는 그 소매도 같은 높이로 접었다.▽여름 첫째 달 1일, 벽은 칠할 수 있을 만큼 말라 있었다.에런은 창가에 나무판을 늘어놓고 있었다. 새로 들인 판은 선반 받침에 쓸 만큼만 샀다. 쓸 수 있는 옛 판은 닦아서 함께 놓았다.“이건 잔을 올릴 곳입니까?”“네. 손님들이 고를 찻잎은 조금 더 아래에 둘 거예요.”에런이 벽에 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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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그 서랍은 열지 마십시오

레티는 무릎 위의 종이를 접어 빵 부스러기를 모았다. 유리엘이 빈 바구니를 당겼고, 에런은 바닥에 놓인 칼을 천으로 닦았다.“남은 빵은 제가 가져갈게요.”레티가 손을 뻗자 두 사람이 동시에 바구니 손잡이를 잡았다.유리엘이 먼저 말했다.“짐은 내가 들지.”“연장도 가져가셔야 합니다. 바구니는 제가 들겠습니다.”“연장은 둘이 나누면 돼.”“그러면 바구니도 나누시겠습니까?”레티는 두 손 사이에서 빵 하나를 꺼냈다.“노엘 몫만 남기고 여기서 더 드세요. 들고 갈 게 줄겠네요.”에런이 칼을 다시 꺼내려 하자 레티가 빵을 반으로 갈랐다. 이번에는 부스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유리엘이 접힌 종이를 내려다봤다.“빵 탓이군.”“맞아요.”레티는 두 사람에게 반씩 내밀고 일어났다. 에런이 방석을 거두고, 유리엘이 레티의 치맛자락에 붙은 작은 나무 조각을 손끝으로 떼었다.열린 문으로 노라가 들어왔다.“물통은 뒤에 엎어 놨어요. 창도 잠글까요?”“응. 내일은 조금 늦게 와도 되겠다.”레티는 찬장 문을 닫기 전에 잔을 한 번 더 살폈다. 노엘의 작은 잔도 제자리에 있었다.가게 안은 낮보다 조용했다. 망치와 붓이 치워진 자리가 넓어 보였다. 레티는 문밖으로 나와 간판을 올려다봤다.봄날의 찻잔.해가 저물어 글씨가 선명하지 않았지만, 손잡이가 작은 잔 그림은 알아볼 수 있었다.“잠그세요.”레티가 열쇠를 내밀었다.유리엘의 손이 먼저 나왔고, 에런은 문이 닫히지 않도록 손잡이를 붙들었다.“잠금쇠가 아직 조금 뻑뻑합니다. 문을 당기면서 돌리시면 됩니다.”“이렇게.”잠금쇠가 짧게 울렸다.에런이 손잡이를 내려 잠긴 것을 확인했다. 유리엘은 열쇠를 레티의 손바닥에 돌려줬다.“잃어버리지 마.”“제 가게 열쇠인데요.”레티는 앞치마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천 너머로 열쇠의 모양을 한 번 눌러 보고 마차 쪽으로 걸었다.▽공작저에 도착하자 노엘이 현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무릎 옆에는 연습용 목검이 놓여 있었다.레티가 바구니를 들자 노엘이 벌떡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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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이번엔 안 마셔요

레티는 손잡이를 놓고 열쇠를 뽑았다. 손바닥에 남은 자국을 엄지로 문지른 뒤, 가게 열쇠와 떨어진 작은 접시에 올려놓았다.서랍은 닫혀 있었다. 그런데도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종이를 흔들 때마다 그쪽을 보게 됐다.레티는 책상 위에 남은 포장 끈까지 치웠다. 물을 마시고 침대에 누웠지만, 손가락에는 차 봉지의 접힌 부분이 닿던 느낌이 남아 있었다.▽노라가 내민 초대장에는 대공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레티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봉투를 받았다. 창밖으로 여름 첫째 달 5일의 늦은 햇빛이 들어왔다.「하르벨 공작과 가족, 황태자 전하와 브리그 경을 저녁 식사에 초대합니다.」공작저로 온 초대였지만 이름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레티는 아래쪽에 찍힌 그라시안 대공의 서명을 한 번 더 봤다.“아버지는요?”“벌써 준비를 마치셨어요. 도련님께는 식탁에서 생선 뼈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계세요.”“생선이 나온대?”“도련님께서 물어보셨는데 공작님도 모르셨어요.”레티는 초대장을 접었다. 서랍에 넣으려다가 잠긴 맨 아래 칸을 보고 손을 바꿨다. 초대장은 책상 위에 남겼다.노라가 옅은 회색 드레스의 등 뒤를 여몄다.“목걸이는 어떤 걸로 하실래요?”“작은 걸로. 목에 붙지 않는 것.”레티는 거울 앞에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목걸이 줄이 살갗에 닿자 손끝으로 조금 띄웠다.“덥니?”“저는 괜찮아요. 아가씨께서 더우세요?”“조금.”노라는 창을 더 열고 얇은 손수건을 챙겼다. 레티가 장갑을 끼는 동안, 책상 위의 초대장이 바람에 들렸다가 내려앉았다.▽현관 앞에서는 유리엘과 에런이 한 마차 문을 보고 있었다.에런이 발판을 내리자 유리엘이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손이 서로 다른 곳에 닿았는데도 시선은 한 번 마주쳤다.“제가 모시겠습니다.”“문은 열었다.”“발판이 조금 높습니다.”유리엘이 레티에게 손을 내밀었다.“그러니까 잡아.”에런은 발판 옆에 서서 바닥이 흔들리지 않도록 눌렀다. 레티는 유리엘의 손을 잡고 올라선 뒤 에런에게 고개를 숙였다.“고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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