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Chapter 41 - Chapter 50

80 Chapters

41화. 오늘도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레티는 대답하지 않고 등불을 들어 올렸다.문턱을 넘자 정원의 바람이 외투 자락을 밀었다. 뒤에서 문은 바로 닫히지 않았다. 레티는 돌아보지 않고 장미 정원 쪽으로 걸었다.유리엘의 마지막 말이 걸음마다 따라왔다. 그 방에 두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레티가 아홉 해 동안 혼자 앉아 있던 방을 유리엘은 알고 있었다.‘알고 있었으면서.’등불 손잡이를 쥔 손이 아직 따뜻했다. 조금 전까지 장갑을 벗은 손을 잡고 있던 손이었다. 약지의 가는 은빛 흉터가 손가락을 굽힐 때마다 접혔다가 드러나던 것을, 레티는 너무 가까이에서 보았다.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나를 꺼내면 나머지도 모두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장미 정원 가운데서 레티는 한 번 멈췄다.물푸레관 창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 앞의 그림자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레티는 다시 걸었다. 본관 현관에 닿았을 때 등불의 기름이 거의 다 타 있었다. 레티는 그것을 현관 탁자에 내려놓았다. 돌려주러 가지는 않았다.“주무세요, 전하.”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레티는 그 말을 혼자 하고 계단을 올랐다.▽노라가 커튼을 걷자 찬 공기가 침실에 들어왔다.“창문을 조금만 열까요?”“네.”“아침 식사는 곧 준비된답니다. 에런 경이 일찍부터 부엌에 내려가셨어요.”레티는 거울 앞에 앉아 소매 단추를 채웠다. 한 번 잘못 끼운 단추를 빼고 다시 끼웠다. 노라가 빗을 들고 다가오다가 멈췄다.“아가씨, 그건 어제 입으신 옷인데요.”레티가 거울을 봤다. 의자에 걸어 둔 옷을 그대로 집어 입은 모양이었다.“그럼 갈아입을게요.”“제가 꺼내 드릴까요?”“푸른색으로요. 가게에서 입기 편한 걸로.”노라는 옷장 쪽으로 돌아섰다. 평소라면 목걸이도 고르자며 서랍을 열었을 텐데, 오늘은 옷만 꺼내 왔다.침실 창 아래에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정원사가 낙엽을 담은 수레를 밀고 있었다. 여름 내내 열어 뒀던 창을 노라가 반쯤 닫았다.가을 첫날이었다.레티는 머리 끝에 묶인 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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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손님으로 왔다

“네. 부탁드릴게요.”레티가 대답하자 에런이 먼저 마차로 걸어갔다. 낮은 발판을 발끝으로 눌러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레티는 계단 위를 돌아봤다.“다녀올게요, 전하.”“그래.”유리엘의 손이 난간에서 떨어졌다. 계단을 내려오지는 않았다.마차에 오른 레티는 무릎 덮개를 펼쳤다. 에런이 빈 차 통을 좌석 아래에 넣고 도시락을 옆에 놓았다. 뚜껑 위로 덮개의 끝이 걸렸다.“상자는 돌아오실 때 제가 가져가겠습니다.”“안에 든 건 제가 다 먹어도 되고요?”“그렇게 싸 뒀습니다.”레티는 조금 웃었다. 마차 문이 닫히기 전,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봤다.유리엘은 여전히 계단에 서 있었다.▽가을 첫째 달 3일 아침, 레티는 물푸레관으로 향했다.장미 정원에서 한참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오늘도 가게 일만 생각하며 지나갈 수는 없었다. 찻잎 무게를 재다가 추 하나를 두 번 올리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웨스가 문을 열어 줬다. 유리엘은 창가 책상에서 일어나 서류를 덮었다.“앉아.”“서 있어도 돼요.”의자를 빼려던 손이 멎었다.레티는 책상 끝을 봤다. 흰 장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을 보면 그 밤에 들은 말부터 떠올랐고, 얼굴을 보면 전생의 닫힌 문부터 떠올랐다.“아홉 해였어요.”유리엘은 움직이지 않았다.“전하를 기다리지 않은 날을 세는 편이 더 빨랐을 거예요. 식사가 식으면 치우라고 했고, 전하께 여쭤볼 일이 생기면 시종을 불렀어요.”“알아.”“알고 계셨으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레티의 손가락이 가방 끈을 꺾었다. 끈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 손을 폈다.“저는 전하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싫어하지 않았다.”“그걸 지금 말씀하시면 제가 그때도 알았던 일이 되나요?”유리엘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책상 위 물잔은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유리엘은 잔을 들지 않고 목 아래를 한 번 눌렀다.“레티시아.”“네.”“그때는…….”말끝이 나오지 않았다.레티는 기다렸다. 창밖에서 정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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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연무장은 처음이시죠

레티는 마지막 글씨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장부를 덮었다. 표지 아래로 삐져나온 끈을 안에 넣고, 계산대 옆 의자를 밀었다.문밖에서 노엘이 유리창에 손바닥을 붙였다.“누나, 아직 안 끝났어?”레티가 문을 열자 노엘이 곧바로 들어왔다. 뒤따라온 에런의 손에는 빈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노엘 도련님께서 직접 모시러 가겠다고 하셨습니다.”“에런 형님이 약속했어. 쉬는 날에 연무장 구경시켜 준대.”노엘은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레티의 가방을 집었다.“누나도 같이 가.”“내 가방은 왜 네가 들어?”“같이 가겠다고 할 때까지 내가 들 거야.”레티는 문에 걸린 팻말을 뒤집었다.“그럼 집까지 들어 줘.”노엘이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곧 어깨가 한쪽으로 내려갔다.“여기 돌 들어 있어?”“장부.”“누나는 매일 이런 걸 들고 다녀?”에런이 가방 아래를 받쳐 주었다. 노엘은 끈을 놓지 않은 채 한 발 앞으로 걸었다.“그럼 연무장 가는 날에는 내가 안 들어도 되지?”“그날은 장부를 안 가져갈게.”노엘이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가을 첫째 달 12일 아침, 식탁 위에는 빵 바구니 대신 작은 가죽 장갑이 놓였다.노엘이 자기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장갑을 꼈다. 손가락을 쫙 폈다가 주먹을 쥐고, 다시 폈다.“딱 맞아.”레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밥 먹을 때는 벗어.”“벗었다가 잃어버리면?”“접시 옆에 둬.”노엘은 장갑을 벗어 접시 양옆에 하나씩 놓았다. 오른쪽에 앉은 에런이 장갑 한 짝을 집어 안쪽 솔기를 확인했다.“손바닥이 아프면 바로 말씀하십시오. 억지로 쥐면 손목까지 아픕니다.”“시합할 때도?”“그럴 때는 더 빨리 말씀하셔야 합니다.”유리엘이 빵 접시를 노엘 앞으로 밀었다.“먼저 먹어.”“전하 형님은 안 가?”“일이 있다.”노엘의 손이 빵 위에서 잠깐 멎었다.“그럼 내가 이기면 얘기해 줄게.”“져도 말해.”“왜?”“다음에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노엘은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 에런이 우유잔을 조금 가까이 놓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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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멀리 두면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레티는 초대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두꺼운 종이가 손끝을 따라 조금 밀렸다.“참석한다는 답은 아직 보내지 않으셨죠?”공작이 안경 너머로 레티를 보았다.“그래. 전하와 먼저 상의하려고 했단다.”“저도 같이 들을게요.”에런이 레티 곁에 서서 초대장 아래쪽을 살폈다. 사냥터로 들어가는 시각과 모이는 장소가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저는 기사단에 내려온 안내를 확인하겠습니다. 초대장과 다른 내용이 있는지 보겠습니다.”“부탁드려요.”노엘이 품에 안고 있던 가방을 탁자 아래로 내렸다. 장갑 한 짝이 입구에 걸렸다.“그럼 나는 못 가?”공작이 대답하기 전에 레티가 장갑을 가방 안으로 넣어 주었다.“네가 갈 수 있는 자리인지 먼저 알아봐야 해.”“나 오늘 검도 배웠는데.”“그래서 더 잘 알겠네. 시작하기 전에 규칙부터 들어야 한다는 거.”노엘이 입을 다물었다. 잠깐 뒤 가방을 다시 끌어안았다.“그럼 기다릴게.”레티는 초대장 끝에 찍힌 대공의 인장을 보았다. 붉은 밀랍 가장자리가 고르게 눌려 있었다.“전하께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가을 첫째 달 14일 아침, 식탁 오른쪽에는 에런이 앉아 있었다.레티는 접시 옆에 내려놓은 작은 주전자를 잡았다. 뚜껑이 들리기 전에 에런이 손을 내밀었다.“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무겁지 않아요.”“손잡이가 뜨겁습니다.”왼쪽에서 접은 냅킨이 주전자 손잡이 위에 얹혔다.“이걸 써.”유리엘이 냅킨 끝을 잡고 있었다. 에런은 주전자 몸통이 기울지 않게 아래를 받쳤다.레티는 두 사람의 손 사이에 놓인 손잡이를 내려다봤다.“차 한 잔 따르는 데 사람이 너무 많이 들어가네요.”에런이 웃으며 손을 조금 물렸다.“전하께서 냅킨을 놓으시면 제가 따르겠습니다.”“받침만 잡아.”“그럼 아가씨 손은 쉬셔도 되겠습니다.”‘주전자한테 물어봐야 하나.’레티는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좋아요. 두 분이 따라 주세요. 저는 마실게요.”유리엘이 주전자를 기울이고 에런이 찻잔을 가까이 옮겼다. 찻잔은 넘치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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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답은 봄에 주세요

유리엘이 봉투 끝을 잡았다. 레티는 안에 든 봉인을 꺼내 초대장 옆에 놓았다.“상자에 붙어 있던 거예요. 차를 꺼내면서 떼어 뒀어요.”“잘했다.”“에런 경이 봉투에 넣어 두라고 하셨어요. 손으로 자꾸 만지면 가장자리가 상한다고요.”유리엘은 봉인을 집으려던 손을 멈췄다. 서랍에서 얇은 종이를 꺼내 그 위로 옮겼다.레티가 초대장과 봉인을 나란히 맞췄다. 두 곳에 찍힌 무늬는 하나였다.“이제 누구 물건인지 모르는 척할 수는 없겠네요.”“그래.”유리엘이 의자를 더 가까이 당겼다. 레티의 팔꿈치가 닿지 않을 만큼만 거리를 남겼다.“브리그 경이 확인한 안내도 같이 보자.”레티는 봉투 안에 남은 종이 조각까지 탁자에 털어 놓았다.▽가을 첫째 달 16일, 아침 식탁 오른쪽에는 에런이 앉았다.레티가 창 쪽을 보자 에런이 먼저 일어났다.“바람이 찹니다. 조금 닫겠습니다.”왼쪽에서 유리엘이 의자 등받이에 걸린 얇은 숄을 들었다.“이것도 덮어.”“창을 닫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돌아갈 때도 복도는 춥다.”에런이 창을 반쯤 닫고 돌아왔다. 유리엘은 레티가 손을 내밀 때까지 숄을 든 채 기다렸다.“무릎에 덮으시면 식사하시기 편하겠습니다.”“어깨가 먼저 차가워졌다.”“소매가 접시에 닿습니다.”레티는 숄을 받아 두 번 접었다. 무릎 위에 놓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천 한 장도 회의를 거쳐야 하네.’노엘이 빵 바구니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누나, 안 쓰면 나 줘. 내가 춥다.”“너는 어제도 그 소리 하고 빵을 감쌌잖아.”“방에 가져가면 식으니까.”그레고리가 작은 접시에 빵을 하나 담아 노엘 앞에 놓았다.“오늘은 드실 만큼만 가져가시면 되겠습니다.”노엘이 숄에서 눈을 떼고 접시를 당겼다. 에런은 창가에 놓인 레티의 찻잔을 안쪽으로 옮겼다. 유리엘은 받침 아래로 접힌 냅킨을 깔았다.레티가 잔을 들려다 손을 멈췄다.“이번에는 잔을 데우시는 거예요?”“탁자가 차다.”“창에서도 멀어졌으니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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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탄 건 제가 먹을게요

레티는 리본을 감싼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봄까지 생각만 하고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죠?”에런이 벤치에 놓인 빈 종이를 접었다.“궁금한 일이 생기시면 그때 물으셔도 됩니다.”“곤란한 질문이어도요?”“대답하기 전에 조금 오래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레티가 작게 웃었다. 에런은 먼저 일어나 벤치에 깔았던 천을 걷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리본을 달라거나 손목에 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레티는 본관 계단 앞에서 리본을 주머니에 넣었다. 끝이 구겨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한 번 펴서 넣었다.▽가을 첫째 달 20일, 마고는 레티의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에 펼쳐진 숄을 집었다.“이걸 가져가. 단풍하고 잘 어울리겠다.”“소풍 갈 준비를 도와달라는 말은 안 했어.”“그럼 왜 불렀어?”레티는 화장대 서랍을 닫았다. 하늘색 리본은 안쪽 작은 상자에 넣어 둔 참이었다.“물어볼 게 있어서.”“가게 일?”“아니.”“황태자 전하?”레티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고가 숄을 내려놓았다.“에런 경도?”“목소리 좀 낮춰.”마고는 문이 닫혔는지 확인하고 의자를 끌어왔다. 레티와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앉더니 두 손을 모았다.“말해 봐.”레티는 에런이 리본을 돌려줬다는 것부터 말했다. 오래전 연못에서 자신을 구해 준 기사도 에런이었다는 것, 혼인 서약을 부탁했을 때 기뻤다고 했다는 것까지.유리엘에 대해서는 조금 더 오래 말을 골랐다.“전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게 있어. 그런데 이제 알았다고 해서 지난 일이 다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그렇지.”“에런 경은 다정하시고.”“그렇지.”“전하도 요즘은…….”마고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레티는 숄의 술을 손가락으로 정리했다.“내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으셔.”“그게 제일 큰일이네.”“왜?”“네가 말할 때 얼굴을 보고 듣는 남자는 위험해.”‘그럼 귀 막은 남자를 골라야 하나.’레티가 손을 멈추자 마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읽은 소설에서는 이런 때 둘을 같은 자리에 불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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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봄이 오면 말하려 했다

레티는 빈 바구니에 흰 천을 덮었다.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유리엘이 먼저 바구니를 들었다.“그것도 제가 가져갈게요.”“빈 건 내가 든다.”에런은 접시를 포개다가 레티의 숄이 벤치 아래로 흘러내린 것을 집었다.“그럼 아가씨는 이것만 챙기십시오. 돌아갈 때는 바람이 찹니다.”레티는 에런이 털어 준 숄을 받았다. 유리엘은 바구니를 옆으로 옮겨 레티가 일어날 자리를 비웠다.쿠키가 남아 있던 때보다 빈 바구니를 더 조심해서 들고 있었다.▽가을 첫째 달 22일 저녁, 레티는 가게 장부를 덮고 손목을 돌렸다.하루 종일 찻잎을 나눠 담았더니 왼손 엄지 아래가 뻐근했다. 저녁 식탁에서도 숟가락을 쥔 손을 몇 번 펴야 했다.“손목이 불편하십니까?”에런이 물었다.“봉지 묶는 일을 좀 많이 했어요.”“내일부터는 끈을 미리 잘라 두십시오.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집게를 쓰면 된다.”유리엘이 레티의 손 옆에 놓인 냅킨을 당겼다. 모서리를 말아 손목 아래에 받쳤다.“묶는 동안 눌러 둘 집게를 가져다주지.”“끈도 필요합니다.”“집게도 필요하고.”“둘 다 주시면 잘 쓸게요.”레티가 말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봉지는 내가 묶는 거 맞지?’맞은편의 노엘은 남은 빵을 반으로 갈랐다. 하나는 에런 앞에, 하나는 유리엘 앞에 놓았다.“누나 손 아프니까 오늘은 제가 공평하게 할게요.”“네가 먹던 빵이잖아.”“안 먹던 쪽이야.”그레고리가 새 빵을 내려놓고 노엘의 접시를 조용히 돌려줬다. 노엘은 군말 없이 두 조각을 도로 가져갔다.식사가 끝날 무렵 유리엘이 레티를 불렀다.“레티시아.”레티는 냅킨을 접던 손을 멈췄다.“잠깐 시간을 내 줄 수 있나.”“지금요?”“네 방 앞에 가져다둘 것이 있다.”유리엘의 손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검은 장갑의 손가락이 한 번 접혔다가 펴졌다.레티는 손목 아래에 받쳤던 냅킨을 빼냈다.“제가 기다릴게요.”에런은 레티 앞의 빈 잔을 가져갔다.“따뜻한 물을 올려 보내겠습니다. 손목에 대고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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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그날은 그녀 옆에 있어

레티는 마지막 편지를 내려놓고, 내일 유리엘에게 줄 쪽지를 당겼다.다음에는 문을 두드리라는 문장 아래로 펜을 가져갔다. 잉크가 종이 위에 작게 번졌다.「봄까지 기다리지 마세요.」한 줄을 더 쓰고 나서야 펜을 놓았다.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레티는 편지를 순서대로 포개고 빈 봉투를 그 위에 얹었다. 마지막 장만 따로 접어 첫 봉투 안에 넣었다. 나중에 다시 찾으려면 그편이 쉬웠다.물을 마시려고 잔을 들었다. 다 식어 있었다.‘이 많은 말을 혼자 하고.’레티는 잔을 내려놓고 촛불을 껐다.▽다음 날 아침, 유리엘은 식당 문 옆에서 레티를 기다리고 있었다.“못 잤나.”“조금 잤어요.”유리엘의 시선이 레티의 손에 든 종이로 내려갔다. 레티는 쪽지를 내밀었다.“다 읽었어요.”유리엘은 종이를 받았지만 바로 펴지 않았다.“화났나.”“몇 군데는요.”“어디.”“다음에는 기다리지 말라고 쓴 데요. 기다리는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잖아요.”유리엘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그렇군.”“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도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요.”“그것도.”“그리고…….”레티는 유리엘의 손에 들린 쪽지를 가리켰다.“거기 썼어요.”유리엘이 종이를 폈다. 짧은 글을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레티는 식당 안에서 그릇 놓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알겠다.”“읽기만 하지 마세요.”“문을 두드리겠다.”유리엘은 종이를 원래대로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레티는 먼저 식당으로 들어갔다. 의자를 당기려는데 에런이 일어섰다. 반대편에서는 유리엘의 손이 등받이에 닿았다.“오늘은 제가 하겠습니다.”“이미 잡았다.”“아가씨가 앉으실 쪽은 여기입니다.”두 사람이 의자를 가운데 두고 멈췄다.레티가 손을 뻗어 등받이를 눌렀다.“밀지만 않으시면 돼요.”에런이 먼저 손을 뗐고, 유리엘이 의자를 뒤로 조금 당겼다. 레티가 앉자 에런은 물잔을 가까이 놓았다.“따뜻한 물입니다.”유리엘은 접시 옆으로 흘러내린 냅킨을 올려놓았다.레티는 냅킨을 펴서 무릎 위에 얹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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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이 냄새, 알아요

레티는 담 끝을 돌아 마당으로 들어갔다.“미끼도 돌아올 길은 알아야겠죠.”에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엘은 펼친 지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들었나.”“숄을 찾으러 왔어요. 숄보다 더 큰 걸 두고 가실 것 같아서요.”레티는 탁자 끝에 접힌 숄을 집었다. 빈 의자를 당겨 앉자 에런이 지도를 레티 쪽으로 돌려놓았다.“어디서 기다리면 돼요?”유리엘이 천막 옆의 표시를 짚었다.“여기. 숲 입구가 보인다.”“돌아오시는 걸 제가 볼 수 있겠네요.”“그래.”“시간이 늦어지면요?”“웨스를 먼저 보내겠다.”레티는 길을 따라 손끝을 옮겼다. 숲에서 나오는 길이 천막 뒤편으로 이어졌다.“뒤로 돌아오지 마세요. 제가 보는 데로 오세요.”유리엘은 지도 위에 놓인 레티의 손을 잠깐 봤다.“그렇게 하지.”에런이 숲 입구와 대공의 천막 사이를 짚었다.“아가씨께서는 이 길 안쪽에 계시면 됩니다. 제가 함께 있겠습니다.”“두 분 모두 약속하신 거예요.”레티는 숄을 팔에 걸쳤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의자에서 일어났다.▽가을 둘째 달 5일, 사냥터에 도착했을 때는 천막마다 깃발이 올라가 있었다.마차 문이 열리자 마른 풀 냄새와 말 냄새가 들어왔다. 레티는 치맛자락을 모으고 발판을 살폈다. 유리엘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땅이 고르지 않다.”반대편에서 에런이 발판 아래 돌을 치웠다.“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레티는 유리엘의 손을 짚고 내려섰다. 에런은 바닥에 닿으려던 숄 끝을 받쳐 주었다.“고마워요.”“내 손인가.”“숄입니다.”“돌도요. 셋 다 고마워요.”노라가 뒤에서 찻잎 바구니를 안고 내려왔다. 수첩을 꺼낼 손이 없는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입술만 움직였다.‘외우는 데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하르벨 가문의 천막은 숲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앞은 넓게 비어 있었고, 뒤로는 참가자들이 오가는 길이 났다.레티는 짐을 내려놓기 전에 출입구를 모두 확인했다. 지도에서 본 길 끝에 웨스가 서 있었다. 레티와 눈이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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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꼬리만 잘렸다

에런이 자루를 든 하인 앞에 섰다.“잠깐 내려놓으십시오.”하인은 손에 감긴 끈을 놓지 못한 채 레티를 봤다. 벌어진 자루 입구로 흙 묻은 뿌리 몇 개가 보였다.유리엘이 한 걸음 다가왔다.“누구의 짐이지.”“약사님 것입니다. 안쪽에 두라고 하셔서…….”“델로인가.”“예, 전하.”레티는 숄로 코와 입을 조금 가렸다. 바람이 멎자 냄새도 거의 사라졌다. 가까이 다가가 다시 맡아 보고 싶었지만, 가게에서 가루를 다룰 때 들었던 주의가 먼저 떠올랐다.“흔들지 말고 내려놓으세요. 입구도 닫아 주시고요.”하인이 자루를 바닥에 놓았다. 에런은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에게 다른 길을 가리켰다.유리엘이 웨스를 불렀다.“이 짐을 누가 옮겼는지 확인해. 그대로 두고.”웨스가 자루 옆에 섰다.천막 안에서 천이 들리는 소리가 났다. 대공이 잔을 든 채 나왔다. 레티 일행을 본 대공의 눈이 유리엘의 팔로 향했다.“직접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팔은 좀 어떤가?”“확인할 것이 있습니다.”유리엘이 자루를 가리켰다.대공은 잔을 시종에게 넘겼다. 잔 밑에 받쳐 든 손수건은 젖은 곳 하나 없이 반듯했다.“약재인가 보군. 델로가 사냥터에서도 쓸 수 있게 챙겨 온다더니.”“무슨 약재인지 아십니까?”레티가 묻자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약사에게 맡겨야지요. 나는 잎과 뿌리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그럼 약사를 불러 주세요.”“지금은 다른 천막을 돌고 있을 겁니다. 내일부터는 사냥을 나갈 사람이 더 많으니까요.”유리엘은 자루와 천막을 번갈아 봤다.“돌아오면 나에게 보내십시오.”“그렇게 하지.”“짐은 옮기지 마시고요.”대공이 잠깐 말을 멈췄다. 천막 문을 잡은 시종의 손도 그대로 멎었다.“내 짐을 조사하겠다는 뜻인가?”“약재를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숙부께서도 무엇인지 모르신다니.”유리엘의 목소리는 낮았다.대공은 바닥에 놓인 자루를 내려다보다가 비켜섰다.“확인하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이르지.”레티는 숄을 내리지 않았다. 에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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