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탁드릴게요.”레티가 대답하자 에런이 먼저 마차로 걸어갔다. 낮은 발판을 발끝으로 눌러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레티는 계단 위를 돌아봤다.“다녀올게요, 전하.”“그래.”유리엘의 손이 난간에서 떨어졌다. 계단을 내려오지는 않았다.마차에 오른 레티는 무릎 덮개를 펼쳤다. 에런이 빈 차 통을 좌석 아래에 넣고 도시락을 옆에 놓았다. 뚜껑 위로 덮개의 끝이 걸렸다.“상자는 돌아오실 때 제가 가져가겠습니다.”“안에 든 건 제가 다 먹어도 되고요?”“그렇게 싸 뒀습니다.”레티는 조금 웃었다. 마차 문이 닫히기 전,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봤다.유리엘은 여전히 계단에 서 있었다.▽가을 첫째 달 3일 아침, 레티는 물푸레관으로 향했다.장미 정원에서 한참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오늘도 가게 일만 생각하며 지나갈 수는 없었다. 찻잎 무게를 재다가 추 하나를 두 번 올리는 일도 그만하고 싶었다.웨스가 문을 열어 줬다. 유리엘은 창가 책상에서 일어나 서류를 덮었다.“앉아.”“서 있어도 돼요.”의자를 빼려던 손이 멎었다.레티는 책상 끝을 봤다. 흰 장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손을 보면 그 밤에 들은 말부터 떠올랐고, 얼굴을 보면 전생의 닫힌 문부터 떠올랐다.“아홉 해였어요.”유리엘은 움직이지 않았다.“전하를 기다리지 않은 날을 세는 편이 더 빨랐을 거예요. 식사가 식으면 치우라고 했고, 전하께 여쭤볼 일이 생기면 시종을 불렀어요.”“알아.”“알고 계셨으면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레티의 손가락이 가방 끈을 꺾었다. 끈이 구겨지는 것을 보고 손을 폈다.“저는 전하께서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싫어하지 않았다.”“그걸 지금 말씀하시면 제가 그때도 알았던 일이 되나요?”유리엘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책상 위 물잔은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유리엘은 잔을 들지 않고 목 아래를 한 번 눌렀다.“레티시아.”“네.”“그때는…….”말끝이 나오지 않았다.레티는 기다렸다. 창밖에서 정원사
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