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Chapter 1 - Chapter 10

80 Chapters

1화. 이번 생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차가 식기 전에 마셔야 했다.레티는 침대 옆 탁자에서 찻잔을 들었다. 손잡이에 손가락을 넣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잔을 받친 다른 손까지 가늘게 떨렸다.“오늘도 늦으시는구나.”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녀는 차를 놓고 물러났고, 문밖의 발소리도 끊긴 지 오래였다.황태자궁의 겨울밤은 조용했다. 창문 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지만 누군가를 불러 창을 살펴 달라고 할 기운도 없었다. 레티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 올렸다.은방울잎 차였다. 매일 밤 마시는 차라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끝에 남는 옅은 단맛. 식으면 조금 더 진해지는 풀 냄새.한 모금을 삼키자 목 안쪽이 따뜻해졌다.탁자 맞은편에는 쓰지 않은 찻잔이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두 잔을 준비해 달라고 했고, 나중에는 말하지 않아도 두 잔이 올라왔다. 그중 하나는 늘 깨끗한 채로 치워졌다.열아홉에 결혼해 아홉 해가 지났다.남편과 차 한 잔 마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레티는 빈 의자에서 눈을 거두었다. 오늘도 유리엘은 늦었다. 기다리지 말라는 말은 들었지만, 기다리지 않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했다.잔을 내려놓으려는데 손목이 꺾였다. 차가 조금 쏟아져 잠옷 소매를 적셨다.‘이것도 못 하네.’손등을 닦으려던 손이 이불 위로 떨어졌다. 며칠째 잠이 늘었다. 의원은 몸이 약해졌으니 쉬어야 한다고 했다. 충분히 쉬고 있는데도 자꾸 더 자고 싶었다.스물여덟인데.아버지께 답장을 써야 하는데.레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다. 촛불이 흐려지고 탁자 모서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추위는 더 느껴지지 않았다.그때 문이 열렸다.문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레티는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입술도 조금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이불 위에서 미끄러지는 자신의 손이었다.▽새가 울었다.레티는 눈을 떴다. 천장에 작은 꽃무늬가 있었다. 황태자궁 침실의 천장에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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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잉크가 덜 마른 동그라미 끝을 손끝으로 건드렸다.레티는 손가락에 묻은 검은 자국을 수건으로 닦았다. 달력은 그대로 두고, 찻잎을 적은 종이만 옆으로 조금 밀었다. 내일 아침에는 서재부터 가야 했다.침대에 누운 뒤에도 촛불을 끈 자리가 눈에 남았다. 눈을 감으면 겨울 침실이 보일까 봐, 한동안 천장의 작은 꽃무늬를 바라보았다.복도에서 노엘이 재채기했다. 곧이어 노라가 창문을 닫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레티는 이불을 어깨까지 당겼다.이번에는 빈 의자를 기다리지 않고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노라가 커튼을 걷기도 전에 레티는 옷장 앞에 서 있었다.“벌써 일어나셨어요?”“서재에 가려고.”“아침 식사는요?”“아버지께서 식사하시는 동안 책을 찾고 싶어.”노라는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를 살폈다. 레티는 장식이 적은 연한 초록색 옷을 골랐다. 소매가 좁아 책을 꺼내다가 걸릴 일이 없었다.“혼인에 관한 책이라 하셨죠?”“응.”“어떤 혼인이요?”“안 해도 되는 혼인.”노라가 뒤쪽 단추를 채우던 손을 멈췄다.“아가씨.”“아직 아무 일도 없어.”“그런 말을 하시면 곧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잖아요.”레티는 거울 속 노라와 눈이 마주쳤다.“책부터 읽고 생각하려고.”노라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앞치마 주머니에서 머리끈을 꺼내 밤색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주었다.“책 먼지가 많으면 재채기가 나실 거예요. 제가 같이 갈까요?”“혼자 찾을게. 아침에는 달걀 좀 남겨 줘.”“딸기는요?”“노엘이 먹기 전에 한 알만.”“어제 전부 주셔서 오늘도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친절에도 뒷일이 있네.’레티는 문을 열기 전에 책상으로 돌아갔다. 봄 둘째 달 20일로 바뀐 날짜 표시를 확인하고, 빈 종이와 연필을 주머니에 넣었다.▽아버지의 서재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레티는 문을 조금 열어 안을 살폈다. 안경집은 책상 위에 있었지만 안경도 아버지도 없었다. 식당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조용히 들어가 문을 닫았다.서재 한쪽에는 법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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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다음 달 10일은 비워 둬

연필 끝이 이름의 마지막 글자에서 멈췄다.에런은 창가 탁자에 놓인 종이를 보지 않고 레티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레티는 종이를 접었다. 지운 이름들이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한 번 더 접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오랜만이에요, 에런 경.”“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네. 경은요?”“저도 잘 지냈습니다.”가까이서 들은 목소리는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레티는 종이를 쥔 손을 내려 드레스 주머니에 넣었다.“노엘을 봐 주셨다고 들었어요.”“도련님이 먼저 부탁하셨습니다.”“아마 다음에도 부탁할 거예요.”“넘어져도 검을 놓지 않으시더군요.”“잠들 때도 안 놓을까 봐 걱정이에요.”에런이 웃었다. 복도 끝에서 기사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레티는 한 발 물러섰다. 에런이 돌아서는 것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에런 경.”“네.”“수도에 계속 계세요?”“근위 당번이 있습니다. 한동안은 황궁과 기사단을 오갈 예정입니다.”“그렇군요.”“혹시 필요하신 일이 있으십니까?”주머니 속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이름을 적는 것과 입으로 부탁하는 것은 달랐다. 레티는 종이를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아직은요. 나중에 부탁드릴 일이 생길 수도 있어요.”“그때 말씀해 주십시오.”에런은 무슨 부탁인지 묻지 않았다. 레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인사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레티는 창가에 남았다. 펼쳐 보지 않아도 종이 맨 아래에 무엇을 썼는지 알았다.‘일단 이름은 안 지워도 되겠네.’▽봄 둘째 달 25일, 노라는 옷장 문을 열고 한참을 서 있었다.“초록색은 며칠 전에 입으셨고, 흰색은 너무 수수해요.”“수수한 게 좋아.”“황궁 다과회잖아요.”“차 마시러 가는 거잖아.”“아가씨만 그렇게 생각하실걸요.”노라가 연한 하늘색 드레스를 꺼냈다. 목둘레에 작은 주름이 있고 소매 끝에는 가느다란 끈이 달린 옷이었다. 레티는 허리의 매듭을 만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그걸로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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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늘은 제가 데려갑니다

찻숟가락이 접시 가장자리에서 한 번 더 흔들렸다.레티는 손끝으로 숟가락을 눌렀다. 유리엘은 걸음을 멈추고 그 손을 보았다.“무슨 일이 있나.”“아니에요. 손이 미끄러졌어요.”“그날 약속이 있나.”생일 새벽에 신전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직 상대에게 부탁조차 하지 못한 약속이지만, 적어도 황태자를 위해 비워 둔 날은 아니었다.“제 생일이라서요.”“알고 있다.”레티는 숟가락을 접시 안쪽으로 옮겼다.생일을 알고 있다는 대답이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전생에는 시종이 올린 선물을 받고서야 유리엘이 날짜를 기억했겠거니 했다.“집에서 가족들과 보내려고 해요.”“공작에게도 말해 두지.”“무엇을요?”유리엘이 입을 열기 전에 내관이 다가왔다. 황제가 찾는다는 말에 유리엘은 정원 안쪽을 돌아보았다.“나중에.”레티는 가방을 쥐고 일어섰다.나중에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인 칙서가 내려올 날짜를, 이번에는 미리 알려 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안 비워 두면 안 내려오나.’그럴 리 없었다. 레티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뒤로 빠진 의자 다리가 천 끝에 걸리지 않게 살피고 돌아서는데, 유리엘의 손이 먼저 등받이에 닿았다.“두고 가.”“저도 할 수 있어요.”“보인다.”유리엘은 의자를 탁자 아래로 넣었다. 레티는 짧게 인사한 뒤 정원 출구로 걸었다.등 뒤에서 누가 보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정원과 마차 뜰 사이의 회랑에는 마지막 차를 준비한 탁자가 있었다.돌아가는 손님들이 잠시 멈춰 잔을 받았다. 바깥에는 저녁 바람이 불었고, 시종들은 식은 주전자를 치우느라 바빴다.레티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기둥 옆에 섰다. 가방을 열어 손수건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그라시안 대공이 다가왔다.“벌써 돌아가나?”“아버지께서 나오시면요.”“황제가 공작을 놓아주질 않는군. 잠깐 앉아 기다리는 게 어떻겠나.”대공은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다. 레티가 사양하려 하자 시종이 새 주전자를 가져왔다.“마침 좋은 차가 왔어. 잠이 잘 오는 차라 저녁에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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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진심으로 하겠습니다

에런의 손이 무릎 위에서 떨어졌다.마차가 멈추며 차체가 조금 기울었다. 에런은 좌석 옆을 짚었지만, 문이 열린 뒤에도 바로 내리지 않았다.“방금…….”“결혼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쭤봤어요.”“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네. 잘못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문밖에서 하인이 발판을 내렸다. 에런은 레티를 보다가 열린 문을 보았다.“우선 내리시죠. 자세한 말씀은…….”먼저 마차에서 내려 손을 내밀려던 에런의 발이 계단 끝을 빗나갔다. 구두 밑창이 발판 모서리를 스쳤다. 에런은 문틀을 붙들고 몸을 바로 세웠다.레티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괜찮으세요?”“괜찮습니다.”“발을 접질리신 건 아니죠?”“네. 멀쩡합니다.”에런은 바닥에 두 발을 놓은 뒤에야 레티를 올려다보았다. 오른쪽 눈썹 위로 앞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내려오십시오. 이번에는 제대로 서 있습니다.”레티는 문 옆 손잡이를 잡고 내려왔다. 에런이 드레스 자락이 발판에 걸리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 주었다.현관에서 노라가 달려 나왔다.“아가씨, 저녁은 드셨어요? 공작님께서 늦으신다고 전갈을 보내셨어요.”“다과를 먹었어. 물만 가져다줘.”“외투는요?”레티가 외투 단추를 풀자 노라가 받아 들었다. 에런은 그동안 발판을 접는 하인을 도왔다. 평소라면 그대로 인사하고 돌아갔을 사람이 현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레티는 노라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오늘 바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아가씨.”“사정이 있어요. 그것부터 말씀드려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었네요.”에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현관 불빛 아래에서 제복 소매를 한 번 펴고 나서 물었다.“내일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오전에 정원에 있을게요.”“알겠습니다.”레티는 계단을 한 칸 올랐다가 돌아보았다.“돌아가실 때 계단 조심하세요.”에런이 문틀에서 손을 떼었다.“그건 잊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결혼보다 계단이 더 급한가 봐.’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고 현관으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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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해 뜰 때 오세요

“아버지께서 에런 경에게 부탁하셨어요.”레티는 현관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유리엘의 오른손 장갑은 손목까지 올라가 있었다.“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왔어요.”“지금은.”“괜찮아요.”유리엘은 바로 마차로 내려가지 않았다. 레티의 얼굴을 보다가 열린 현관 안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뒤뜰에서 노엘이 에런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다음에는 내 마차를 써.”“전하께서 쓰셔야 하잖아요.”“한 대만 있는 게 아니다.”“저희 집에도 마차는 있어요.”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 레티는 소매 끝을 펴며 덧붙였다.“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유리엘은 잠깐 말이 없었다. 웨스가 마차 문을 열어 놓고 기다렸다.“무리하지 마.”“네. 전하도 조심히 돌아가세요.”유리엘이 계단을 내려갔다. 마차 문이 닫힌 뒤에야 레티는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마차까지 늘리면 둘 곳도 없겠네.’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노라가 빈 쟁반을 들고 나왔다.“아가씨, 에런 경께서 신전에 언제 가실지 여쭤보셨어요.”레티는 계단 첫 칸에서 발을 멈췄다.“근무가 없는 날을 알려 달라고 해 줘.”이번에는 날짜만 정하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 법전에서 읽은 문장만 믿고 생일 새벽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봄 셋째 달 1일 아침, 레티의 방에는 젖은 천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노라가 작은 다리미를 내려놓고 옷을 들어 보았다. 옅은 갈색 치마의 주름이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이 정도면 신전에 입고 가도 괜찮겠죠?”“오늘 입을 거야?”“아뇨. 증인 설 때요. 미리 해 놓으려고요.”“아직 날짜도 안 잡았는데.”“날짜가 잡히면 아가씨 옷부터 봐야 하니까요.”레티는 거울 앞에서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노라가 제 옷을 다리는 모습은 드물었다. 늘 레티의 소매나 노엘의 흙 묻은 바짓단이 먼저였다.“다른 옷을 맞춰도 돼. 비용은 내가 낼게.”“이 옷이 좋아요. 제가 처음 받은 월급으로 산 거예요.”노라는 치마를 접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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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해 뜰 때 서약했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와 있으면 되겠지요?”레티가 물었다. 오르반은 덮은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문은 열어 두겠습니다. 서약에 늦지 않게만 오세요.”노라가 수첩에 밑줄을 그었다. 브람은 제 이름을 적은 종이를 접으려다 에런을 보았다.“이건 당일까지 가지고 있어도 되지?”“네 이름이 적힌 종이를 누가 가져가겠어.”“혹시 몰라서.”레티는 웃으며 서약문을 챙겼다. 종이 끝을 가지런히 맞춰 접자 날짜를 적은 노라의 수첩이 바로 옆에서 닫혔다.▽노라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레티는 눈을 떴다.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침대 곁에 놓인 촛불이 짧게 흔들렸다. 레티는 이불을 걷고 앉아 왼손을 펴 보았다.아무것도 없는 약지였다.“아가씨, 깨어 계세요?”“응. 들어와.”노라는 다려 둔 옅은 갈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앞치마 대신 작은 주머니를 허리에 매고, 그 안에 수첩과 손수건을 넣었다.“마차는 뒤쪽 문에 있어요. 에런 경도 오셨고요.”“아버지는?”“아직 주무세요. 그레고리 님께는 아가씨께서 신전에 다녀오신다고 말씀드렸어요.”거짓말은 아니었다. 무엇을 하러 가는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레티는 침대 아래 내려놓은 신발을 신었다. 발끝이 차가워 잠깐 움츠러들었다. 노라가 미리 준비한 흰 옷을 들어 올렸다.“이걸로 입으실 거죠?”“응.”노라가 등 뒤의 단추를 채웠다. 새로 맞춘 혼인 예복은 아니었다. 봄 다과회에 입으려고 꺼내 놓았던 옷 중 장식이 가장 적은 옷이었다.거울 앞에 선 레티는 소매를 한 번 당겼다. 왼쪽 손목의 작은 흉이 천 아래로 들어갔다.노라가 작은 머리핀을 꽂고 손을 뗐다.“생일 축하드려요, 아가씨.”레티는 거울에서 노라의 얼굴을 보았다.“고마워.”“제가 첫 번째죠?”“응. 네가 첫 번째야.”노라가 만족한 얼굴로 주머니를 눌렀다. 레티는 탁자에서 서약문과 신분을 확인할 서류를 집어 들었다.오늘 정오가 되기 전에 끝내면 됐다.그 뒤에는 아버지께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놀라실 것은 알았다. 그래도 황실의 혼담을 거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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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한 지붕 법이라고요?

“잠깐만요.”레티는 확인서를 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사자의 시선이 종이 아래에서 왼손 약지로 옮겨 갔다.“저는 오늘 해 뜰 때 신전에서 혼인 서약을 맺었어요.”응접실 안이 조용해졌다.공작이 확인서를 받아 들었다. 안경을 고쳐 쓰고 이름을 읽다가 에런을 보았다.“브리그 경과?”“네.”“대사제 앞에서?”“증인도 둘이 있었습니다.”에런이 대답했다.사자는 펼친 칙서를 그대로 들고 있었다. 레티는 아버지 손에 든 확인서의 아래쪽을 짚었다.“여기 시각까지 적혀 있어요. 칙서보다 먼저예요.”공작은 종이를 가까이 당겼다. 오르반의 서명과 신전의 인장을 확인한 뒤, 옆에 놓인 의자를 더듬었다.에런이 의자 등을 잡아 주었다.공작은 앉는 대신 거의 주저앉았다. 안경이 코끝으로 내려왔다.“레티.”“네, 아버지.”“나는 네가 생일에 책이나 장신구를 고를 줄 알았다.”레티는 입을 다물었다.‘남편은 목록에 없었겠지.’공작은 확인서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사이 사자가 칙서를 말아도 되는지 묻는 눈으로 바라보았다.레티가 먼저 말했다.“먼저 맺은 신전 서약이 있으면 황실 혼담을 무르는 것이 관례잖아요. 법전에서 봤어요.”“어느 법전이니?”“아버지 서재의 혼인 법전이요. 갈색 표지에 모서리가 닳은 책.”공작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레고리.”“듣고 있습니다, 공작님.”“법률가를 모셔 오게. 그 책도 가져오고.”그레고리가 고개를 숙였다. 사자는 칙서를 조심스럽게 말았다.“폐하께 보고할 내용이 있다면 함께 전하겠습니다.”공작이 입을 열려 하자 레티가 한 걸음 나섰다.“제가 오늘 신전에서 서약했다는 사실부터 전해 주세요. 확인서 사본도 드릴게요.”목소리가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왔다. 사자는 레티의 손을 다시 보고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레티는 확인서를 놓지 않았다. 황궁의 봉인이 찍힌 두루마리가 탁자에 놓였다.두 종이의 끝이 나란히 맞닿았다.▽법률가는 점심상도 치우기 전에 도착했다.노라는 차를 내오다가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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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네가 고르게 하겠다

레티는 등불 아래에서 유리엘의 얼굴을 살폈다.“황실에서 무르라고 하셔도요?”“내가 무르라고 하지 않으면 된다.”“그러실 수는 있다는 말씀이네요.”“그래.”등불 손잡이를 쥔 장갑이 조금 움직였다. 레티는 어깨에 걸친 에런의 외투를 여몄다.“왜 안 하시는데요?”유리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문이 열리고 공작이 나왔다. 한 손에는 법전이, 다른 손에는 접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전하.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레티가 앞서 걸으려 하자 에런이 외투 끝을 받아 들었다.“안은 따뜻합니다.”“고마워요.”외투를 벗자 유리엘이 든 등불의 빛이 복도 앞으로 옮겨 갔다. 에런은 외투를 접어 팔에 걸치고 레티 곁을 따라왔다.‘등불 하나에 외투 하나.’레티는 응접실 문을 직접 열었다. 그 정도는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탁자에는 여전히 칙서와 신전 확인서가 놓여 있었다.유리엘은 등불을 내려놓고 서류를 보았다. 레티는 확인서를 펼쳐 신전 인장이 보이게 했다.“제가 먼저 부탁드렸어요.”“들었다.”“에런 경이 저를 설득한 게 아니에요.”“그것도 들었다.”공작이 법전을 탁자에 놓았다.“전하께서 이 법을 알고 오셨습니까?”“확인하고 왔습니다.”“황궁에도 그 조문이 남아 있군요.”“예.”공작은 펼치려던 법전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종일 붙잡고 있던 책을 놓자 손가락에 묻은 잉크가 보였다.유리엘이 레티를 보았다.“앉지.”에런이 가장 가까운 의자를 당겼다. 유리엘은 그 의자 앞에 서 있다가 옆으로 비켰다.레티는 앉지 않고 의자 등을 잡았다.“먼저 답을 듣고 싶어요.”“무엇을.”“서약을 깨지 않겠다고 하신 이유요.”공작이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레티는 의자 등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유리엘이 말했다.“네 뜻으로 맺었다고 했지.”“네.”“그것을 내가 없애면 네가 고른 것은 무엇이 되나.”레티의 손끝이 멎었다.전생에도 제 뜻을 말할 기회는 있었다.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혼자 참석하는 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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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오른쪽 자리는 홀수 날입니다

동쪽 별채의 불이 먼저 꺼졌다.레티는 서쪽 창문까지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커튼을 닫았다. 노라는 화장대에 놓인 설탕 꽃에 작은 덮개를 씌웠다.“개미가 올라올까 봐요.”“노엘이 보면 좋아하겠다.”“도련님께서는 개미한테도 한 조각 주실 것 같은데요.”레티는 웃으며 침대로 갔다. 노라의 수첩이 앞치마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방을 나가는 발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한동안 눈이 감기지 않았다.아침에는 인사를 몇 번 해야 할지 생각하다가, 이불을 턱까지 당겼다.▽다음 날 아침, 노라는 평소보다 일찍 커튼을 걷었다.창문을 여니 따뜻한 빵 냄새가 들어왔다. 정원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었다. 레티가 몸을 일으키자 노라가 침대 곁에 실내화를 놓았다.“부엌에서 빵을 굽니?”“에런 경께서요. 해 뜨기 전부터 계셨대요.”레티는 실내화에 발을 넣다가 멈췄다.“근무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야?”“아침 식사 뒤에 나가신답니다. 주방장님께 먼저 허락도 받으셨고요.”그때 창밖에서 바퀴 소리가 났다. 황궁 문장이 찍힌 작은 마차가 본관 옆문에 멈췄다. 시종이 뚜껑 달린 바구니를 받아 내렸다.노라가 창틀에 손을 짚었다.“저쪽도 빵인가 봐요.”“저쪽?”“동쪽이요.”레티는 창문에서 물러났다.‘아침부터 방향으로 구별하는구나.’노라는 연한 푸른색 옷을 꺼냈다. 레티가 소매에 팔을 넣는 동안, 아래층에서는 바구니를 나르는 발소리가 이어졌다.“노라.”“네, 아가씨.”“빵은 보통 몇 개나 먹지?”노라가 허리 끈을 매다 말고 거울 속 레티를 보았다.“오늘은 세어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식당 문을 열자 에런이 먼저 일어났다.소매는 단정히 내려와 있었지만 손목 가까이에 밀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유리엘은 맞은편에서 냅킨을 내려놓았다. 의자 옆에는 웨스가 서 있었다.“잘 주무셨어요?”“그래.”“아가씨도 편히 주무셨습니까?”“네.”레티가 제 자리로 걸어갔다. 오른쪽에 서 있던 에런이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거의 동시에 유리엘의 장갑 낀 손도 그 등받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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