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Chapter 21 - Chapter 30

80 Chapters

21화. 그 차는 누구에게도 주지 마

대공의 손에 들린 주전자가 잔 위에서 멈췄다.레티는 내려놓은 찻잔에서 손을 뗐다. 받침에 묻은 찻물 한 방울이 식탁보로 번졌다. 웃음을 거둔 대공이 주전자를 시녀에게 넘겼다.“이번에는 취향에 맞지 않는 모양이군요.”“밤에 마시는 차는 제가 직접 골라 보려고요.”“몸에 좋은 것을 권한 것뿐입니다.”“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레티가 접시 옆에 놓인 냅킨을 폈다. 손끝이 조금 차가웠지만 접힌 모서리는 반듯하게 펴졌다.왼쪽에서 유리엘이 물잔을 옮겨 주었다. 에런은 시녀가 다시 찻잔을 들려는 것을 보고 빈 접시를 내밀었다.“이쪽부터 부탁드립니다.”시녀의 손이 접시 쪽으로 향했다. 레티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대공은 이미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황궁 정원에 새로 들인 나무 이야기였다. 레티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지만, 찻잔을 다시 잡지는 않았다.▽버터 접시가 레티 앞에 놓이는 순간, 왼쪽에서 찻주전자가 기울었다.“뜨겁다.”유리엘이 찻잔을 반쯤 채우고 주전자를 내려놓았다. 오른쪽의 에런은 빵을 접시에 옮긴 뒤 버터를 얇게 발랐다.“가장자리는 조금 남겼습니다. 손에 묻지 않게요.”“제가 할 수 있는데요.”“그럼 다음 것은 아가씨께서 하십시오.”에런은 버터를 바른 빵을 먼저 내밀었다.레티가 빵을 받기도 전에 유리엘이 작은 집게를 들었다. 잼 그릇 옆의 설탕을 지나 찻잔에 넣을 꿀 쪽으로 향하던 손이 멈췄다.“꿀은.”“안 넣을게요.”“그래.”그레고리가 빈 접시를 치우며 말했다.“오늘은 짝수 날이므로 오른쪽 자리는 에런 경입니다. 꿀 그릇은 가운데 두겠습니다.”“자리 이야기는 안 했다.”“예, 전하. 꿀 그릇 이야기였습니다.”집사는 식탁 한가운데에 그릇을 놓고 물러났다. 노엘이 입에 넣으려던 빵을 내렸다.“그럼 가운데 있는 건 먼저 잡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이기는 사람은 없어.”레티가 잘라 말했다.에런이 노엘 앞의 접시를 당겨 주었다.“식기 전에 드시는 분이 이깁니다.”“그건 내가 잘하는데.”노엘이 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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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그건 보내지 못한 편지다

레티는 빼낸 열쇠를 손바닥 안에 쥐었다.“안 마실게요. 다른 사람에게 주지도 않고요.”유리엘은 잠긴 서랍을 한 번 더 보았다.“확인하려고 열 때도 혼자 하지 마.”“냄새만 맡고 닫았어요.”“다음에는 불러.”레티는 열쇠를 목걸이 줄에 꿰었다. 작은 쇠붙이가 옷깃 아래로 들어가자 유리엘의 시선도 비로소 서랍에서 떨어졌다.“전하를요?”“그래.”“에런 경이 먼저 오시면요?”잠시 말이 끊겼다. 유리엘은 문 쪽을 보았다가 대답했다.“누구든 곁에 있어야 한다.”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까지 듣고 나니 손에 남아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장미 정원으로 가시겠습니까?”여름 첫째 달 8일 아침, 에런이 현관 계단 아래에서 손을 내밀었다. 레티는 치맛자락을 조금 들고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아직 꽃이 남아 있어요?”“그늘 쪽에는 남아 있습니다. 햇볕도 덜 들고요.”“연못 길이 낫다.”현관 기둥 옆에 서 있던 유리엘이 말했다. 웨스에게 쪽지를 건네고 돌아선 참이었다.에런이 장미 정원 쪽을 가리켰다.“아침에는 이쪽 바람이 시원합니다.”“연못도 시원해.”“장미 길은 돌이 고릅니다.”“연못 길도 고쳤다.”레티는 두 사람이 가리키는 길을 번갈아 보았다. 오른쪽으로 가면 장미 정원이었고, 왼쪽으로 가면 연못이었다. 어느 쪽이든 공작저 안이었다.‘산책인데 길부터 심판해야 하나.’“둘 다 걸을게요.”에런의 내밀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유리엘도 입을 다물었다.레티가 먼저 오른쪽으로 발을 옮겼다.“장미 정원을 지나 연못으로 가면 되잖아요.”“길이 길어진다.”“제가 걷고 싶어서 나온 건데요.”유리엘이 곧 따라왔다. 에런은 레티의 반대편에 섰다.현관 안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누나! 나도!”노엘이 빵을 입에 문 채 뛰어나왔다. 한 손에는 작은 책을 쥐고 있었다. 그레고리가 뒤따라 나오며 냅킨을 내밀었다.“도련님, 빵부터 다 드시고 말씀하십시오.”노엘은 입에 든 빵을 삼키고 냅킨을 받았다.“나도 산책할래.”“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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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어서 오세요, 봄날의 찻잔입니다

레티는 유리엘이 쥔 봉투 묶음에서 눈을 거두었다.“그럼 제가 읽으면 안 되는 편지네요.”유리엘의 손가락이 끈 위에서 멈췄다.“왜.”“받는 분께 먼저 가야 하니까요.”잠시 뒤 유리엘이 묶음을 서랍에 넣었다. 종이 끝이 걸리지 않도록 안쪽까지 밀고 나서야 손을 뺐다.레티는 탁자 위 목록을 가리켰다.“그건 보내 드린 서류니까 읽으셔도 돼요.”“알겠다.”“그리고 모레는 늦으시면 안 돼요.”“가게.”“네. 첫 손님보다 먼저 오셔야 해요.”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레티는 문을 나서며 한 번 돌아보았다. 유리엘은 벌써 목록 첫 장을 펼치고 있었다. 닫힌 서랍 위에 얇은 끈 한 가닥이 남아 있었다.이번에는 그쪽을 더 보지 않았다.▽여름 첫째 달 10일 아침, 레티는 가게 문 앞에서 열쇠를 두 번 헛돌렸다.어제까지 잘 맞던 열쇠였다. 문을 붙잡고 다시 돌리자 잠금쇠가 짧은 소리를 냈다.“손이 차십니다.”에런이 레티의 손에서 문고리만 받아 잡았다. 열쇠는 가져가지 않았다.“아침이라 그래요.”“안에서 물을 데우겠습니다.”“물은 내가 올려 뒀다.”가게 안에서 유리엘이 말했다.레티는 열린 문 너머를 보았다. 창 덧문이 모두 열려 있었고, 계산대 위에는 동전을 담을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유리엘이 물주전자 옆에 서 있었다.허리에 두른 앞치마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벌써 오셨어요?”“첫 손님보다 먼저 오라고 했잖아.”“문은 어떻게 여셨어요?”“노라가 열었다.”안쪽에서 찻잔을 닦던 노라가 손을 들었다.“아가씨께서 맡겨 두신 열쇠로 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덧문을 여셨어요.”유리엘이 계산대 앞으로 나왔다. 앞치마 끈이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레티가 그 매듭을 가리키자 유리엘이 내려다보았다.“잘못 묶었나.”“풀리지는 않겠어요.”“그럼 됐다.”에런은 문을 활짝 열고 작은 받침목을 끼웠다. 이어 벽에 세워 둔 쟁반을 집어 들었다.“저는 어디부터 하면 됩니까?”“찻잔을 자리마다 놓아 주세요. 전하께서는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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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낙서는 제가 지웁니다

에런이 마지막 동전까지 담긴 상자를 닫았다.“내일은 차에 곁들일 것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레티는 장부에서 고개를 들었다.“곁들일 거요?”“쿠키를 구워 보겠습니다. 많이 달지 않게요.”유리엘이 접어 둔 주문 종이를 앞치마 주머니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꿀도 필요하겠군.”“설탕을 넣지 않는 차도 있는데요.”“넣고 싶은 사람에게 주면 돼.”에런은 나무 상자를 계산대 안쪽에 놓았다.“그럼 쿠키에도 꿀을 조금 쓰겠습니다.”“브리그 경에게 가져온다는 말은 안 했다.”“아가씨께 여쭌 겁니다.”레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장부를 덮었다.“일단 조금씩만 가져오세요. 가게보다 먹을 게 먼저 커지겠어요.”노라가 닦아 놓은 찻잔들을 선반에 올렸다. 가장 높은 칸에 마지막 잔을 놓고 돌아서며 입가를 꾹 눌렀다.레티는 열쇠를 꺼냈다.‘내일부터 차보다 접시가 더 바쁘겠네.’▽여름 첫째 달 15일 아침, 레티는 가게 앞에서 발을 멈췄다.문에 검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남편 둘 영애」문손잡이보다 조금 높은 곳이었다. 마지막 글자의 획이 아래로 길게 흘렀고, 그 밑에는 검은 가루가 떨어져 있었다.노라가 레티보다 먼저 문 앞으로 갔다.“어제 닫을 때는 없었습니다.”“응.”“제가 안쪽에서 걸레를 가져오겠습니다.”레티는 글씨 끝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손끝에 검은 가루가 묻었다. 숯이었다.문이 열리면 안쪽으로 들어갈 부분이었다. 닫히면 길에서 누구나 볼 수 있었다.“먼저 문부터 열자.”노라가 급히 열쇠를 받았다. 빗장이 풀리는 동안 레티는 손끝의 가루를 손수건에 닦았다.건너편 빵집 앞에서 누군가 이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레티는 그쪽을 오래 보지 않았다.문을 활짝 열자 글씨가 가게 안쪽으로 숨었다.“아가씨, 이건 그냥 두시면 안 됩니다.”“안 둘 거야. 그런데 지금은 물부터 올려야 해.”첫 손님에게 숯 냄새가 나는 손으로 차를 내줄 수는 없었다.레티는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둘렀다. 찻잎 통을 꺼내는 동안에도 문이 자꾸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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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손끝이 초록색이네요

마지막 글자의 검은 가루가 젖은 천에 묻어났다.레티가 천을 접자 에런이 마른 면을 위로 돌려 주었다. 유리엘은 문 아래에 흘러내린 물을 닦았다.“이제 안 보여요.”노라가 길 쪽으로 나가 문을 살폈다. 왼쪽으로 한 걸음, 오른쪽으로 한 걸음 움직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깨끗합니다. 다만 문이 처음보다 밝아졌습니다.”레티는 양옆을 보았다. 닦지 않은 부분이 조금 어두웠다.에런이 솔을 다시 들었다.“나머지도 닦겠습니다.”유리엘은 양동이를 문 오른쪽으로 옮겼다.“이쪽은 내가 하지.”“오늘 문을 열어야 하는데요.”두 사람이 레티를 보았다.레티는 열쇠를 꺼내 잠금쇠에 넣었다.“손님 오시면 문까지 같이 닦아 드리겠어요. 여기까지 해요.”노라가 양동이 사이로 손을 뻗어 문을 잡았다. 레티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깥에서 두 개의 양동이가 거의 동시에 들렸다.‘다음에는 처음부터 문을 통째로 맡겨야겠네.’▽여름 첫째 달 18일, 가게 문은 물기 없이 말라 있었다.노라는 문손잡이 옆을 손수건으로 한 번 닦았다. 이제 아침마다 확인하는 자리였다.레티는 계산대 안쪽에서 찻잎 통의 뚜껑을 열었다. 어제까지 덜어 쓴 양을 살피고, 바닥이 가까워진 통은 따로 놓았다. 은방울잎 통은 선반 가장자리 그대로였다.손님에게 권한 적도, 물을 부은 적도 없었다. 뚜껑의 이름표를 볼 때마다 공작저 서랍의 열쇠를 확인하게 됐다.“아가씨, 이것도 채워 둘까요?”노라가 빈 주문 종이를 든 채 물었다.레티는 은방울잎 통에서 손을 뗐다.“아니. 먼저 쓰던 것부터 채우자.”문방울이 울렸다. 에런이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뒤이어 유리엘이 문을 잡았다.에런은 계산대에 바구니를 놓자마자 레티 앞의 낮은 의자를 꺼냈다.“통을 살피실 때 앉아서 하셔도 됩니다.”유리엘은 자기 쪽에 있던 작은 통을 들어 레티 앞에 놓았다.“앉을 필요 없어. 내가 내려 주면 돼.”“낮은 곳도 오래 보시면 허리가 아픕니다.”“그럼 내가 보지.”레티는 두 사람 사이에 열린 장부를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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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우산은 하나면 됩니다

델로가 장갑 끝을 당겨 손목까지 덮었다.“다음에는 잎을 가져오겠습니다.”레티는 문을 잡은 채 고개만 숙였다. 델로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간 뒤에야 에런이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유리엘은 따로 놓아 둔 찻잔을 봤다.“씻지 마.”“저도 당분간 그대로 두려고 했어요.”레티가 쟁반 위에 깨끗한 천을 덮었다. 손끝에 무엇이 묻었는지, 잔에 남은 것으로 알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래도 다른 잔과 섞을 생각은 없었다.노라가 문밖에 내놓은 차림판을 들여왔다.“비가 오려나 봅니다. 바람이 축축해졌어요.”레티는 열린 문틈으로 하늘을 봤다. 골목 위로 보이던 밝은 부분이 구름에 가려지고 있었다.▽여름 첫째 달 22일에는 문밖에 차림판을 내놓지 못했다.아침부터 빗물이 문턱까지 튀었다. 노라는 마른 걸레를 깔았다가 젖으면 걷어 냈고, 레티는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바닥을 조심하라고 말했다.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에런이 문 앞의 걸레를 짰다.“내일도 비가 오면 문턱 안쪽에 나무판을 놓겠습니다.”유리엘은 의자를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미끄러지지 않게 고정해야 해.”“밑에 천을 대고 양옆을 받치겠습니다.”“내가 구해 놓지.”“크기는 제가 재겠습니다.”레티는 장부를 덮었다.“문턱 하나를 두 분이 맡으시면 저는 뭘 하면 되나요?”“안쪽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젖은 데 밟지 마.”두 대답이 겹쳤다.‘가게 주인은 문턱에서도 밀려나네.’레티는 남은 찻잎 통의 뚜껑을 확인하고 앞치마를 벗었다. 노라가 받아 접는 동안 유리엘은 문 옆에 세워 둔 큰 검은 우산을 들었다.에런은 외투 위로 기사 망토를 둘렀다. 빗물을 막도록 겉면에 기름을 먹인 두꺼운 망토였다.“마차는 어디 있나요?”“큰길에 있습니다. 앞 골목에 짐수레가 멈춰서 들어오지 못합니다.”노라가 창문으로 밖을 살피며 대답했다.“저는 뒷문으로 나가서 마부께 짐부터 맡기겠습니다. 아가씨는 앞쪽으로 오세요. 뒷문 계단에 물이 고였어요.”에런이 노라의 바구니를 받아 안쪽 덮개를 단단히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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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지키는 중이다

레티는 창문 잠금쇠에 손을 댔다가 멈췄다.열면 유리엘이 고개를 들 테고, 그러면 빗물부터 얼굴에 맞을 터였다.“노라, 현관에 있는 우산을 가져다줘.”“제가 전하를 모셔 올까요?”“같이 내려가자.”노라가 의자에 걸린 숄을 가져왔다. 레티는 잠옷 위에 숄을 두르고 방을 나섰다. 복도 끝 시계는 자정을 지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빗소리는 줄지 않았다.현관에는 저녁에 쓴 우산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라가 가장 큰 검은 우산을 집었다.“이걸 드리면 되겠네요.”“내가 들게.”“아가씨까지 젖으십니다.”“그럼 처마 밑으로 부를게.”노라가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발목에 닿았다. 레티는 문턱 안에 서서 장미 정원 쪽을 봤다. 어둠 속에서 유리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전하.”검은 형체가 바로 움직였다.유리엘은 정원길을 돌아 현관으로 왔다. 젖은 구두가 돌바닥을 밟을 때마다 작은 물소리가 났다. 처마 아래에 들어온 유리엘이 먼저 본 것은 레티의 발이었다.“신발은.”“실내화를 신었어요.”“밖으로 나오지 마.”“전하를 안으로 모시려고 나온 거예요.”유리엘의 머리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외투 어깨는 빗물을 더 받아들일 곳도 없어 보였다. 레티는 노라가 가져온 수건을 내밀었다.유리엘은 수건보다 레티를 먼저 봤다.“왜 안 잤어.”“창밖에 사람이 서 있는데 잠이 오겠어요?”“창문은 닫혀 있었나.”“잠금쇠까지 확인했어요.”그제야 유리엘이 수건을 받았다. 장갑도 젖어 있었다. 레티는 수건을 쥔 손에서 눈을 떼고 유리엘의 얼굴을 봤다.“왜 밤마다 창 밑에 서 있어요?”낮에 창가에 놓인 화분을 옮기면서 본 발자국이 떠올랐다. 비가 오기 전에도 그 자리의 흙이 눌려 있었다. 그때는 정원을 손질한 흔적인 줄 알았다.유리엘이 머리의 물기를 눌러 닦았다.“지키는 중이다.”“무엇을요?”“네가 자는 동안 그쪽을 보고 있다.”“그건 어디를 보고 계시는지잖아요.”수건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유리엘은 대답 대신 현관 안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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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보랏빛이면 독입니다

레티는 마지막 그릇을 창가로 밀었다. 보랏빛은 밝은 곳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다른 두 그릇은 그대로예요.”에런이 맑은 물과 따로 산 은방울잎 차를 차례로 살폈다. 유리엘은 열린 창문을 조금 닫았다. 바람에 작업대 위 종이가 들리고 있었다.문밖에서 할머니의 발소리가 났다.레티가 문을 열자 할머니는 그릇 셋부터 봤다. 마지막 그릇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건드리지 않았지?”“새벽이슬풀 달인 물만 넣었어요. 같은 양으로요.”“숟가락은?”“따로 썼어요.”할머니는 빈 접시에 놓인 숟가락을 확인했다. 그릇을 들어 기울이지도, 코앞에 가져가지도 않았다.“오늘은 이대로 덮어 둬. 아침에 한 번 더 해 보자.”“무엇이 섞였는지 아세요?”할머니가 상자 뚜껑을 닫았다.“짐작은 한다. 잘못 짚으면 안 되는 거니까 다시 보자는 거야.”유리엘이 작업대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럼 이건 여기 두지.”“상자는 제가 가져갈게요.”레티가 말했다. 유리엘의 시선이 상자에 머물렀다.“안전한 곳에 둬야 해.”“제 서랍은 잠글 수 있어요. 다른 차와도 섞이지 않고요.”에런이 깨끗한 천을 펼쳤다.“봉지를 먼저 싸겠습니다. 상자 밖으로 잎이 떨어지지 않게요.”유리엘은 바구니를 가까이 가져왔다.“뚜껑도 묶어.”“네. 끈을 주십시오.”레티는 두 사람이 상자를 싸는 동안 마지막 그릇을 봤다. 조금 전까지 매일 마실 수 있을 만큼 평범한 색이었다.이제는 잔에 담고 싶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뒷방에 얇은 책을 펴 놓았다.레티가 다시 우린 차에 새벽이슬풀 달인 물을 넣자 어제 본 그 색이 번졌다. 할머니는 책장을 넘겨 말린 뿌리가 그려진 자리를 짚었다.“겨울잠꽃이야.”레티의 손에 빈 숟가락이 남아 있었다.“꽃이 아니라 뿌리를 쓰나요?”“말려서 가루를 내지. 냄새도 거의 없고, 조금 넣으면 맛도 잘 안 나.”할머니가 따로 산 은방울잎 차를 앞으로 당겼다.“이 잎은 끝에 쓴맛이 남잖아. 그래서 가루를 섞어도 모르기 쉬워.”레티는 어제 앉았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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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먼저 찾은 쪽이 이깁니다

레티는 상자에서 손을 떼고 편지를 다시 집었다. 장갑 끝이 종이 모서리에 걸려 에런이 편지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무거우면 내용물이 더 많다는 뜻일까요?”“열어 봐야 알아.”유리엘이 상자 끈을 살폈다.“지금은 말고.”“네. 처음 상자와 나란히 놓고 확인해요. 포장도 남기고요.”그레고리가 빈 쟁반을 가져왔다. 에런은 상자를 들기 전에 바닥을 확인하고 쟁반 위에 올렸다. 유리엘은 풀린 끈 끝을 안으로 모았다.상자는 손바닥만큼도 벌어지지 않은 채 다시 탁자를 떠났다.레티는 빵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받았다는 답장은 보내야겠어요.”에런이 고개를 들었다.“차에 관한 말씀도 쓰시겠습니까?”“아니요. 편지와 선물이 잘 도착했다고만 쓸 거예요.”“마셨다는 말은 빼.”“그건 쓰고 싶어도 못 쓰죠.”레티가 장갑 낀 손을 펼쳤다. 장갑 끝이 손가락보다 길게 남아 펜을 잡을 수 없었다.유리엘이 물그릇을 가까이 당겼다. 에런은 마른 수건을 폈다. 레티는 두 사람을 보고 장갑부터 벗었다.‘손 하나 씻는데 사람이 셋.’하지만 이번에는 그릇도 수건도 물리기 싫었다.손을 씻고 돌아와 짧은 답장을 썼다. 감사 인사 아래에는 찻집 일을 배우느라 답이 늦었다고 덧붙였다. 모두 사실이었다.유리엘이 마른 잉크를 확인했다.“이대로 보내.”“당분간은 저쪽에서 제가 의심한다는 걸 모르는 게 좋겠어요.”레티는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오는 것은 받고, 어디서 왔는지 찾아요.”에런이 그레고리에게 맡길 종이를 접었다.“받을 때 시각과 배달한 사람을 적어 두겠습니다. 아가씨께는 봉한 채로 보여 드리고요.”유리엘은 대공의 편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첫 상자부터.”레티는 펜을 다시 들었다. 생일에 받은 상자의 모양과 리본 색부터 적었다. 에런이 기억하는 배달 시각을 보탰고, 유리엘은 상자에 붙은 문양의 위치를 짚었다.빵은 식었지만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여름 둘째 달 1일, 가게를 열기 전이었다.레티가 찻잔을 선반에 올리려는데 양옆에서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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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오전은 제 차례입니다

“그 손님 맞습니다.”에런이 종이 가장자리를 눌렀다. 레티는 빈 잔을 두 사람 앞으로 밀고 주전자를 들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이름을 찾았으니, 다음에는 그 이름으로 무엇을 내보냈는지 확인해야겠네요.”“기록은 따로 보관하지.”유리엘이 서명을 가리지 않도록 종이를 접었다.에런은 레티가 차를 따르는 동안 탁자 위에 남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두 사람 앞에 같은 높이로 찻물이 찼다.“먼저 마시는 것도 겨루실 거예요?”에런의 손이 잔 앞에서 멈췄다.“그건 천천히 하겠습니다.”“뜨거워.”유리엘도 잔을 들지 않았다.레티는 자기 몫까지 따르고 앉았다. 종이는 그레고리에게 맡겼다. 잔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아무도 델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여름 둘째 달 15일 아침, 식탁 위에 접힌 축제 안내장이 놓였다.레티가 펼치기도 전에 노엘이 강변 그림을 짚었다.“여기서 배를 빌려 준대. 그리고 여기에는 사격장이 있고.”“너는 아버지와 간다고 했잖아.”“그래서 길을 알려 주는 거야.”노엘은 빵에 꿀을 바르면서도 안내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강변에서 시장을 지나 호수까지 작은 깃발 그림이 이어졌다.오른쪽에 앉은 유리엘이 안내장 모서리를 눌러 주었다. 왼쪽의 에런은 레티 앞에 빈 접시를 놓았다.“강변은 일찍 가는 편이 좋습니다. 배가 많아지면 기다리셔야 합니다.”“그럼 아침 먹고 바로 갈까요?”“내가 데려가지.”유리엘이 말하자 에런이 접시 옆에 빵을 내려놓았다.“오전은 제 차례입니다.”“마차까지.”“마차 문도 제가 열겠습니다.”레티는 안내장에 대고 있던 손을 거뒀다.“어제 나눈 건 하루였는데, 오늘은 마차 문까지 나누네요.”노엘이 재빨리 말했다.“그럼 나는 간식 시간.”“너는 아버지 옆자리.”레티가 답하자 노엘은 빵을 크게 베어 물었다.어젯밤, 레티는 축제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양쪽에서 날아온 질문을 받아야 했다. 어디부터 볼지, 무엇을 먹을지, 언제 돌아올지. 결국 오전은 에런, 오후는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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