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 집에는 남편이 둘 있습니다: Chapter 51 - Chapter 60

80 Chapters

51화. 의원이 좀 무섭습니다

레티는 대공에게 짧게 고개만 숙이고 천막 문을 걷었다. 뒤에서 옷깃을 정리하는 소리가 났지만 돌아보지 않았다.밖에는 천막 줄을 거두는 기사들이 있었다. 델로가 타고 갈 호송 마차도 문을 닫았다. 마차 바퀴에 걸린 풀잎이 바람에 흔들렸다.“아가씨.”에런이 천막 옆에서 다가왔다. 레티는 손에 쥔 장갑을 펴지 못한 채 물었다.“잡힌 사람은 델로뿐인가요?”“자루를 날랐던 사병 하나가 빠져나갔습니다. 브람이 뒤를 확인하고 있습니다.”“대공은 그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네요.”“그래서 붙잡아 물어야 합니다.”에런의 목소리는 평소 그대로였다. 레티는 그 차분한 말끝을 붙들고 손가락을 폈다.유리엘이 천막에서 나왔다. 에런은 레티가 앉을 수 있도록 접이 의자를 당겼고, 유리엘은 의자에 앉은 먼지를 장갑 낀 손으로 털었다.“제가 털려던 참입니다.”“늦었군.”“다음 의자는 먼저 살피겠습니다.”“저는 하나에만 앉을 건데요.”두 사람이 동시에 레티를 보았다. 레티는 앉지 않고 의자 등받이에 장갑을 올렸다.‘의자는 준비됐고, 사람은 못 앉겠고.’바람이 차가웠다. 유리엘이 가져온 외투를 펼치자 에런이 천막 줄에 걸리지 않게 끝자락을 받아 들었다. 잠깐 전까지 의자를 두고 다투던 손들이 이번에는 한 외투를 잡았다.레티는 팔을 넣으며 물었다.“그 사람을 잡으면 대공에게 물을 수 있겠죠?”“물어야지.”유리엘이 외투의 단추를 잠그지 않고 레티 앞으로 모아 주었다.“대답하지 못할 때까지.”▽다음 날 아침, 에런은 식당에 들어왔지만 자리에 앉지 않았다.그레고리가 홀수 날에 맞춰 왼쪽에 놓아 둔 찻잔은 비어 있었다. 에런은 그 앞에 서서 공작에게 받은 허가서를 접었다.“북쪽으로 향한 흔적이 확인됐습니다. 말을 갈아탄 곳도 찾았습니다.”“얼마나 가실 건가요?”레티는 빵칼을 내려놓았다.“우선 다음 역참까지입니다. 더 따라가야 하면 소식을 보내겠습니다. 브람과 함께 움직이니 혼자 가는 건 아닙니다.”“싸우러 가는 게 아닙니다.”“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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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약속은 지켜요

노엘은 나무 검을 문밖에 내려놓고 식탁으로 달려왔다. 레티가 편지를 돌려 주자 두 손으로 종이 끝을 붙들었다.“검을 돌려주지 않겠대요?”“무리해서 일어나면.”“그럼 안 일어나면 되는데.”“그 말을 꼭 적어 줘. 에런 형님이 잘 들으실 거야.”노엘은 빈 종이를 제 앞으로 당겼다. 펜을 잡고 잠깐 생각하더니 첫 줄을 쓰기도 전에 물었다.“의원한테도 써도 돼요?”“무슨 말을 하려고?”“검은 나중에 돌려주셔도 된다고요.”맞은편에서 유리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그건 내가 전하지.”레티는 답장 아래에 빈자리를 남겨 두었다. 노엘이 팔꿈치를 올리지 않도록 잉크병을 옮기고, 에런의 편지를 한 번 더 펴 보았다.이번에는 첫 줄에서 손이 멈추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16일 아침, 레티는 차통 두 개를 가방에 넣었다. 하나는 마실 차였고, 다른 하나는 잎을 살피는 데 쓸 차였다.노라가 가방 옆에 손수건을 놓았다.“감옥에 찻잔도 가져가실 건가요?”“깨지지 않는 걸로 하나만. 델로에게 줄 거야.”“드실까요?”“안 마셔도 괜찮아.”레티는 작은 금속 잔을 천으로 감쌌다. 노라가 그 위에 덮개를 얹었다. 찻잎보다 잔을 챙기는 손길이 더 조심스러웠다.식당에서는 유리엘이 면회 허가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짝수 날의 왼쪽 자리 앞에 식사가 놓였지만, 빵에는 손대지 않았다.“델로가 오늘도 입을 다물면 어쩌실 건가요?”레티가 물었다.“다른 길을 찾지.”“그럼 제가 먼저 이야기해 볼게요.”“그래.”허가서를 접는 손이 멈췄다.“혼자 들어가겠다는 뜻은 아니겠지.”“전하가 들으셔도 돼요. 대신 답은 제가 듣고 싶어요.”유리엘은 허가서를 가방 옆에 놓았다. 레티가 앉으려 하자 의자를 빼 주고, 접시를 가까이 밀었다.노엘이 에런의 편지를 가져와 레티 오른쪽 빈자리에 세웠다. 접힌 종이가 찻잔에 기대 섰다.“에런 형님이 아침 먹었는지 물으셨잖아요.”“먹을 거야.”“빵 하나만 먹으면 안 먹은 걸로 하겠대요.”레티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그런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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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사과는 전하가 깎으셨습니다

델로는 레티가 적은 종이를 제 쪽으로 당겼다. 펜을 받아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 옆에 작은 선을 하나 더 그었다.“수레가 다니는 길은 이쪽입니다. 아이가 있는 창고는 안쪽이고요.”레티는 종이 끝을 눌렀다.“창고가 여러 개인가요?”“둘입니다. 장부를 둔 곳과 붙어 있습니다.”유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의 웨스를 불렀다. 레티는 델로가 돌려준 펜을 닦아 가방에 넣었다.델로는 손수건을 쥔 채 의자에 남아 있었다. 레티가 가방을 들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아이가 낯선 사람을 무서워합니다.”“갑자기 잡아끌지 않을게요.”“배가 고파도 먼저 달라고 안 합니다.”레티는 가방의 작은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오늘은 빈 주머니였다.“먹을 것도 챙길게요.”델로의 손이 조금 펴졌다. 레티는 더 약속하지 않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가을 둘째 달 20일, 레티는 공작저 현관에서 마차 바퀴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들고 있던 찻잎 통을 노라에게 맡겼다. 치맛자락이 계단 모서리에 걸리지 않도록 한 손으로 걷어 들고 내려가는데, 노엘이 먼저 현관을 가로질렀다.“에런 형님!”문밖에서 대답이 돌아왔다.“검부터 내려놓으십시오. 안으려다가 찔리겠습니다.”노엘은 품에 끼고 있던 나무 검을 그레고리에게 맡겼다. 곧장 달려들려다 마차에서 내리는 에런의 팔을 보고 멈췄다.왼팔 소매가 팔꿈치 아래까지 걷혀 있었다. 흰 붕대 끝이 손목 위로 조금 드러났다.레티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혼자 걸어오셔도 되는 거예요?”“마차에서 여기까지는 허락받았습니다.”“누구한테요?”“의원에게요.”에런이 오른손으로 외투 앞섶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허락받은 내용도 적어 주셨습니다.”레티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상처가 벌어지면 다시 꿰맬 것. 왼팔로 짐을 들지 말 것. 통증이 없다고 검을 잡지 말 것.」그 아래에는 그 필체로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괜찮다는 말보다 붕대를 먼저 볼 것.」레티는 에런을 올려다보았다.“마지막 줄은 저한테 하시는 말 같네요.”“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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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가운데 자리는 아가씨 겁니다

레티는 아버지가 짚은 길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선이 좁아지는 곳마다 작은 표시가 있었다.“여기는 마을인가요?”“물을 갈아 줄 곳이다. 사람보다 말이 먼저 지친다.”공작은 책상 끝의 빈 종이를 당겨 마을 표시를 옮겨 적었다. 에런이 지도 모서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비켜 주었다.“이쪽 길에는 돌이 많습니다.”“그래서 낮에 지나야 해.”유리엘이 창가로 지도를 조금 밀었다. 레티가 몸을 숙이지 않아도 글씨를 읽을 수 있는 자리였다.공작은 펜 끝으로 마지막 갈림길을 눌렀다.“여기부터는 마차를 두고 가야 한다. 길이 좋다고 끝까지 믿지 말거라.”레티는 접힌 자국을 따라 지도를 폈다. 골짜기 입구 옆에 빈 자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곳에 작은 글씨로 돌아올 길을 적었다.▽가을 셋째 달 2일 아침, 공작저 앞에는 짐을 실은 마차가 서 있었다.노라가 레티의 가방을 열어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차통과 손수건, 종이와 펜 옆에 작은 쿠키 봉지가 들어 있었다. 레티는 봉지가 눌리지 않도록 천을 접어 끼웠다.현관에서는 노엘이 에런의 오른손을 붙들고 있었다.“돌아오시면 검을 봐 주세요. 매일 연습할 거예요.”“손바닥이 아프면 쉬십시오.”“형님도 팔 아프면 쉬셔야 해요.”“알겠습니다.”노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이번에는 유리엘을 올려다보았다.“전하 형님도요.”“나는 팔이 안 아프다.”“그래도요.”유리엘은 잠깐 노엘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레티가 마차 발판에 발을 올리자 에런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대편에서는 유리엘이 문틀 위에 손을 댔다.“고개.”레티는 에런의 손을 짚고 올라가며 고개를 숙였다. 모자 끝이 유리엘의 장갑에 살짝 닿았다.마차 안쪽 긴 의자에는 방석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 의자는 지도와 외투를 둔 상자가 절반을 차지했다. 노라는 바깥 짐마차에 타겠다고 이미 자리를 정해 두었다.레티는 창가에 앉으려다가 멈췄다.유리엘이 먼저 바람 들어오는 창 쪽으로 몸을 옮겼다.“여기는 추워.”“반대쪽은 바퀴 위라 많이 흔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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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아이부터 데려가

꽃밭 사이의 길에는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레티는 몸을 낮춰 흙 위에 손을 가까이 댔다. 마른 흙 아래로 축축한 자국이 이어졌다.“최근에 짐을 옮겼어요.”에런이 길 너머를 살폈다.“발자국도 있습니다. 안쪽에서 사람이 오갈 겁니다.”유리엘은 레티의 가방 끈을 가리켰다.“끈부터 넣어. 가지에 걸린다.”레티가 늘어진 끝을 묶자 에런은 외투 뒤쪽에 붙은 가시를 떼어 주었다. 유리엘의 손이 앞섶으로 향하다 멈췄다. 레티가 먼저 단추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다 잠갔어요.”“목은 비었다.”“제 목도 길은 안 잃어요.”에런이 입술을 눌렀다. 유리엘은 대답 없이 길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나무 너머에서 수레바퀴가 삐걱거렸다.레티는 곧장 몸을 숙였다. 유리엘이 뻗은 팔 아래로 에런이 낮은 가지를 붙들었다. 세 사람은 잎 사이로 지나가는 수레를 보았다.자루를 실은 수레가 비탈을 내려왔다. 뒤따르는 사내의 허리에는 칼이 있었고, 소매 끝에는 사냥터 천막에서 보았던 대공가 문장이 작게 붙어 있었다.레티는 수레가 사라진 쪽을 오래 보지 않았다. 대신 수레가 나온 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창고는 저쪽이겠네요.”▽다음 날 밤, 레티는 낮에 살펴 둔 바위 뒤에서 창고를 보았다.가을 셋째 달 6일의 달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창고 처마 아래에는 등불 하나가 걸렸고, 앞문을 지키는 사내가 가끔 발을 바꾸어 디뎠다.낮 동안 드나들던 수레는 모두 떠났다. 자루를 나르던 사람들 대신 칼을 찬 사내들이 남아 있었다.에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뒤쪽 문을 확인했습니다. 안에서 잠그지는 않았습니다.”“사람은요?”“둘이 번갈아 돕니다. 앞문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뒤쪽이 비었습니다.”웨스가 바위 아래로 올라와 유리엘에게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숲으로 돌아 나갈 길도 열려 있습니다. 제가 밖에서 보겠습니다.”레티는 가방에서 작은 등불을 꺼냈다. 빛을 가리는 덮개를 닫고 심지를 확인했다. 장부를 쌀 천은 가방 맨 위에 두었다.유리엘이 레티의 발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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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뒤는 제가 막겠습니다

에런은 아이의 손을 레티에게 옮겨 주었다.“아가씨, 잠깐만 맡아 주십시오.”작은 손이 레티의 손가락을 꽉 쥐었다. 에런은 창문 아래의 상자를 끌어당겼다.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쪽을 들고 옮겼다.유리엘이 문고리 옆에 서서 밖의 소리를 들었다.“뒤에 셋.”“창문 아래에는 하나입니다.”에런이 상자에 올라 창문 틀을 밀었다.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밖에서 횃불 빛이 흔들렸다가 낮아졌다.레티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상자 옆으로 갔다.“먼저 나갈 수 있겠니?”아이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안으로 말렸다.“떨어지면요?”“밖에서 받아 줄 사람이 있어.”창문 아래로 웨스의 손이 올라왔다. 손바닥을 두 번 펴 보인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뒤편은 비었습니다. 오래 비지는 않을 겁니다.”멀리서 누군가 웨스를 찾는 듯 소리쳤다. 웨스의 손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유리엘이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쿠키는 주머니에 넣어.”아이는 구겨진 봉지를 외투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레티가 봉지 끝까지 안으로 접어 주자 아이는 유리엘의 어깨를 붙들었다.유리엘이 아이를 들어 창문으로 보냈다. 웨스가 받아 내리는 동안 에런은 창문 틀의 튀어나온 못을 장갑으로 눌렀다.“아가씨, 이쪽은 밟지 마십시오.”레티는 가방을 먼저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유리엘이 가방 끈을 손목에서 풀어 주었다.“내려가서 받아. 장부부터 던지지 말고.”“던질 생각 없었어요.”“그럼 됐다.”문밖에서 쇠붙이가 부딪쳤다. 누군가 뒤쪽 문을 밀었다.레티는 상자에 올라 창문 턱을 짚었다. 몸을 밖으로 돌리자 웨스가 가방을 받아 들고 옆으로 비켰다. 창문 바로 아래에는 낮은 담이 있었다.담에 발을 디딘 레티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웨스가 팔꿈치를 받쳐 주었다. 아이는 담 아래에서 쿠키 주머니를 누르고 있었다.곧 유리엘이 내려왔다. 에런이 마지막으로 창문을 넘을 때 창고 안쪽에서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여기다!”에런은 담에 착지하자마자 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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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폐하가 부르십니다

“그럼 아침밥도 드실 수 있겠네요.”레티가 말하자 에런이 물컵을 내렸다.“그건 자신 있습니다.”“붕대부터요.”시엔이 의원 가방을 의자 옆에 놓았다. 에런은 막 일어서려던 무릎을 다시 굽혔다. 노라는 따뜻한 수프가 담긴 그릇을 가져오다가 멈췄다.유리엘이 빈 의자를 레티 뒤로 당겼다.“너도 앉아.”“아가씨 담요가 내려갔습니다.”에런이 오른손을 뻗자 유리엘이 먼저 담요 끝을 레티의 어깨 위에 올렸다.“봤다.”“그럼 수프는 제가 드리겠습니다.”“경은 팔부터 보여.”레티는 두 사람 사이에서 그릇을 직접 받았다.“입은 제가 움직일게요.”시엔이 에런의 소매를 걷으며 짧게 웃었다. 레티는 그릇 아래에 손을 받쳤다.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에 닿았다.가방은 유리엘의 발 옆에 놓여 있었다. 젖은 천으로 감싼 장부가 안에 있었다. 아이는 담요를 덮은 채 졸고 있었고, 에런은 돌아왔다.레티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삼켰다. 루세아까지 가려면 먼저 먹어야 했다.▽가을 셋째 달 12일 아침, 황궁 문 앞에서 마차가 멈췄다.레티는 외투 소매를 당겨 손목을 덮었다. 북쪽 길의 진흙을 털어 낸 구두가 황궁의 매끈한 바닥에 닿았다. 뒤이어 내린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았다.“아빠도 여기 있어요?”“조금 있다 만나러 갈 거야.”“높은 사람이 먼저요?”“응. 네가 안전하게 지낼 곳을 정해 주실 분이야.”아이는 황궁 문을 올려다보았다. 문짝에 박힌 둥근 장식을 보느라 고개가 한참 뒤로 젖혀졌다.레티가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싫으면 문은 보지 말고 내 손을 봐.”아이가 레티의 손가락을 잡았다. 다른 손에는 쿠키 봉지가 있었다. 노라가 아침에 새로 담아 준 쿠키였다.에런이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계단에서는 제가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레티시아는 내가.”유리엘이 손을 내밀었다. 레티는 아이를 잡지 않은 손으로 외투 자락부터 들어 올렸다.“계단이 넓네요.”“그래서.”“셋이 나란히 올라가도 되겠어요.”에런이 아이의 반대편 손을 잡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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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아들이 처음 부탁한 일이었다

“차를 가져가도 될까요?”레티는 외투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웨스를 보았다. 웨스가 문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의원이 먼저 살펴볼 겁니다.”“그럼 찻잎만 가져갈게요. 물은 궁에서 받고요.”레티는 서재 탁자에 놓인 작은 통을 집었다. 북쪽에서 돌아온 뒤 노라와 함께 섞어 둔 차였다. 센 향은 빼고 볶은 보리와 말린 배를 조금 넣었다.에런이 탁자 끝의 장갑을 건넸다.“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황궁까지 가실 얼굴인데요.”“들켰습니다.”공작이 안경을 다시 썼다.“폐하께서 혼자 부르셨다고 했지.”“침소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그럼 가거라. 레티, 끝나면 바로 돌아오고.”레티는 찻잎 통을 가방에 넣었다. 노라가 계단 아래에서 외투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앞치마 대신 두꺼운 숄을 두른 모습이었다.“마차에 작은 방석도 넣었습니다.”“내가 어디 가다 자꾸 주저앉는 사람 같네.”“오늘은 걸상에서도 안 앉으려고 하셨잖아요.”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티는 노라가 벌린 가방 안에 찻잎 통을 옮겨 넣었다.마차에 오르자 에런이 문을 닫았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노라는 가방 끈을 무릎 위에서 꼭 쥐었다. 바퀴가 움직일 때마다 통 뚜껑이 작게 달그락거렸다.레티는 그 소리를 세다가 그만두었다.황제가 깨어났다고 했다. 지금은 그 말부터 믿어도 됐다.▽황궁의 큰 시계가 자정을 알린 뒤에도 침소 문은 열리지 않았다.의원은 황제가 다시 잠들었다고 했다. 깨우지 말라는 말에 레티는 복도 의자에 앉았다. 노라가 챙긴 방석은 결국 여기서 쓰였다.유리엘은 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외투를 벗지 못한 채였고, 소매 끝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돌아가도 된다.”“깨어나시면 저를 찾으실 텐데요.”“사람을 보내면 돼.”“왔다 갔다 하는 동안 더 피곤해지겠어요.”유리엘이 입을 다물었다. 레티는 곁의 빈 의자를 손으로 짚었다.“전하도 앉으세요.”“괜찮다.”“저는 안 괜찮아요. 계속 올려다봐야 해서 목이 아파요.”그제야 유리엘이 앉았다. 에런은 반대편 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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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다시 지으면 돼요

레티는 문고리를 잡고 몸을 당겼다.문이 반쯤 열리자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훑었다. 가게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문 위의 차양 끝에서 불붙은 천이 떨어졌다.“나오지 마세요! 위에!”레티는 손을 놓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붉게 타던 천이 문턱에 내려앉았다. 곧이어 차양을 받치던 나무가 떨어졌다. 열린 문 앞에서 불꽃이 튀었다.‘다른 문.’레티는 앞치마로 입을 가리고 조리대 쪽으로 돌아섰다. 뒤쪽에는 작은 뜰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물을 들이고 빈 상자를 내보내던 문이었다.탁자 모서리에 허벅지가 부딪쳤다. 레티는 의자를 밀어 내고 조리대 끝을 짚었다. 조금 전까지 환했던 안쪽이 연기로 가려지고 있었다.계단 위에서 다시 나무가 꺾였다.레티는 몸을 낮췄다. 씻어 놓은 행주를 물통에 담가 입에 댔다. 젖은 천 너머로도 매운 냄새가 들어왔다.뒤쪽 문을 밀었지만 열리지 않았다.빗장은 이미 내려가 있었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문틈 너머에서 긁히는 소리가 나다가 멎었다.레티는 문 옆의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뜰에 쌓아 두었던 빈 상자가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위층에서 떨어진 덧문이 그 위를 누르고 있었다.“여기요!”목소리가 기침에 끊겼다.레티는 물통의 바가지를 집어 창틀을 두드렸다.“뒤쪽 문 좀 열어 주세요!”밖에서 발소리가 났다.“안에 사람이 있어요!”누군가 외쳤다. 레티는 다시 문을 밀었다. 바깥에서도 상자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문은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만 벌어졌다.천장에서 가루가 떨어졌다.레티는 행주를 얼굴에 더 바짝 댔다. 장부가 있는 탁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조리대 아래쪽의 바닥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문에서 떨어져!”앞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레티는 고개를 돌렸다.“전하!”대답하려다 기침이 먼저 나왔다. 레티는 조리대 아래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젖은 행주를 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문턱을 가로막던 나무가 옆으로 밀렸다.검은 외투를 머리와 어깨에 걸친 유리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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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봄까지 같이 가요

레티는 새 조리대의 폭을 재던 손을 외투 안으로 넣었다.“그리고 문은 안으로 열리게 할래요.”에런이 뒤쪽 골목을 돌아봤다.“밖에 물건이 쓰러져도 여실 수 있도록요.”“네. 창도 조금 크게 하고요.”유리엘이 레티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외투를 올렸다.“나머지는 밝을 때 봐.”레티는 젖은 문턱에서 발을 뗐다. 구두 밑에 붙었던 재가 돌길에 남았다.노라가 먼저 마차 쪽으로 갔다. 에런은 길에 놓인 빈 양동이를 치웠고, 유리엘은 레티가 걷는 쪽의 깨진 나무를 발끝으로 밀었다.레티는 가게를 한 번 더 돌아봤다.비스듬한 간판 아래에 마른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건져 낸 찻잎 봉지들이었다.“내일 저것부터 가져다드려야겠어요.”“제가 맡겨 놓겠습니다.”에런이 바구니를 들었다.유리엘은 마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너는 집으로.”레티는 그 손을 잡았다. 불 속에서 나올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제 발로 발판을 올랐다.▽가을 셋째 달 15일 오후, 레티는 공작의 서재에서 새 가게 도면을 펼쳐 놓고 있었다.낮은 선반 옆에 문을 하나 더 그렸을 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문을 두드린 에런이 브람과 함께 들어왔다.브람의 장화에 마른 흙이 붙어 있었다. 에런은 외투를 벗지 않은 채 레티 앞에서 멈췄다.“불을 지른 자를 잡았습니다.”레티는 펜을 내려놓았다.공작이 안경을 고쳐 썼다. 창가에 서 있던 유리엘도 탁자 쪽으로 왔다.“대공의 사병입니다. 지금 근위대에 넘겼습니다.”브람이 천으로 싼 물건을 탁자 위에 놓았다. 작은 기름통과 반쯤 타 버린 심지였다.레티는 기름통을 보았다. 손잡이 아래에 흙이 굳어 있었다.“어떻게 찾으셨어요?”“시장 뒤 골목에서 불이 나기 전에 이 통을 들고 간 사람을 봤답니다.”브람이 대답했다.“짐수레를 끌던 분이 길을 비켜 주면서 얼굴을 기억했습니다. 에런이 직접 돌아다니며 물었고요.”“그 사람에게도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예. 잡힌 자는 시장에 물건을 팔러 왔다고 했는데, 어느 가게에 무엇을 팔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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