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에서 버린 아들이 세계를 샀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5 챕터

1화

강도현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날은 결혼 5주년 기념일이었다.서울에는 사흘째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강남대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도현은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의 포장지를 다시 여몄다. 붉은 장미 사이에는 작은 보석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아내 한서연이 한참 들여다보던 목걸이였다.퇴근은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늦어졌다. 해외 투자계약의 자금 집행 문제로 긴급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를 마무리하느라 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서연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직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결혼한 지 다섯 해가 지났어도 서연은 기념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지난해에도 약속을 어겼다가 며칠 동안 냉랭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올해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아 미리 식당까지 예약했지만, 결국 회사 일 때문에 취소해야 했다.한성그룹 회장 강성호의 혼외자로 태어난 도현에게 회사는 언제나 전쟁터였다. 이복형 강태준이 실수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수습했지만, 도현이 작은 숫자 하나라도 잘못 적으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 되었다.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일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가정에 소홀해지는 날도 많았다.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서연이라고 믿었다.차량이 고급 주택가로 접어들 무렵, 한성그룹 재무관리팀 박성재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박 부장, 아직 퇴근 안 했습니까?"— 상무님, 혹시 오늘 오후 해외 법인 자금 집행 건을 직접 승인하셨습니까?도현은 조수석의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어떤 집행 건입니까? 오늘 제가 최종 승인한 해외 송금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승인 기록에 상무님 계정이 남아 있어서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내일 아침 원본 기록부터 확인합시다. 지금은 아무것도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보존하세요."성재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곧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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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서연은 진주색 실크 잠옷을 입고 태준의 무릎 가까이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어깨끈 하나가 흘러내려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고쳐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태준의 셔츠 깃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태준은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 놓은 채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한 손이 서연의 허리를 감싸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기울이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오빠, 오늘은 나한테 상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무슨 상?""다섯 해나 착한 아내 노릇했잖아요. 나 정도면 정말 잘한 거 아닌가? 그 답답한 남자 옆에서 웃어 주고, 밥 먹어 주고, 매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척까지 했는데."서연은 손가락으로 태준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태준이 그녀를 끌어당기자 그의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태준이 웃음을 터뜨리자 서연은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가렸다."쉿, 그렇게 크게 웃지 마요. 도현 씨가 들으면 어떡해.""그놈은 아직 회사에 있을걸.""알아요. 오늘도 늦게 들어오라고 했거든요."도현의 손이 굳어졌다.아침에 서연은 그에게 무리해서 일찍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 회사 일을 먼저 마무리하라며, 자신은 집에서 쉬고 있겠다고 했다. 도현은 그 말을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서연은 형의 품에 안겨 그 일을 자랑하고 있었다."그런데 오빠,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요?"서연이 태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그놈 결혼기념일?""맞아요. 벌써 다섯 해예요. 내가 그 사람한테 처음 접근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태준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처음에는 네가 일 년도 못 버틸 줄 알았지.""나도 그랬어요. 그런데 도현 씨가 생각보다 너무 순진하더라고요. 내가 조금만 웃어 주면 뭐든 믿었어요. 출장 가서도 매일 전화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면 꼭 미안하다고 하잖아요."서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태준의 넥타이를 손가락에 감았다."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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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날 오빠가 축사하면서 우리 행복하게 살라고 했잖아요."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태준의 어깨를 두드렸다."나 그때 진짜 웃을 뻔했어요. 오빠가 얼마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는지 몰라요."태준도 웃었다."네 남편은 감동해서 울 것 같던데.""그랬죠. 나한테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했으니까."서연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그런데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내가 결혼식 전날 밤에도 오빠랑 같이 있었다는 걸."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결혼식 전날, 서연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겠다며 늦게까지 외출했다. 도현은 그녀가 피곤할까 봐 다음 날 아침까지 연락하지 않았다. 그날도 형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신혼여행도 생각나네요."서연은 와인잔을 들었다."내가 몸이 안 좋다고 해서 일찍 돌아왔잖아요. 그 사람은 내가 아픈 줄 알고 예약까지 전부 취소했어요."태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네가 빨리 돌아오고 싶다고 난리였지.""오빠가 보고 싶었으니까요."서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도현은 자신이 신혼여행지에서 서연을 업고 호텔 로비를 지나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다며 제대로 걷지 못했고, 그는 아내가 걱정돼 예정된 여행을 취소했다. 그날 밤 서연은 미안하다며 울었고, 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고 괜찮다고 말했다.그 기억마저 거짓이었다."그런데 도현 씨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알아요?"서연은 태준의 손목시계를 풀어 자신의 손목에 대 보았다."내가 갖고 싶다고 하면 뭐든 사 줘요. 이번에도 목걸이 사 오겠죠.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일부러 오래 쳐다봤거든요."태준이 그녀의 손목에서 시계를 빼내며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계속 살아.""에이, 오빠."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돈 쓰는 건 마음에 들지만 남편으로는 정말 재미없어요. 매일 회사 얘기만 하고, 쉬는 날에도 서류를 들여다보잖아요.""그 서류 덕분에 우리가 편했는데.""그건 그렇죠."서연의 눈빛이 달라졌다."이번에 가져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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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태준이 웃었다.도현은 천천히 형에게 시선을 돌렸다."형은 내 결혼식에서 축사까지 했어.""그랬지.""내가 서연이랑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했을 때도 축하한다고 했잖아."태준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그래서?"그 한마디에 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태준은 동생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해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형이 내 아내를 이용해서 내 자료를 빼돌린 거야?""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네."태준은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네가 일을 워낙 잘하잖아. 아버지가 중요한 투자 검토는 죄다 네게 맡기고, 나는 결과만 보고받으라고 하니 방법이 없었지.""그래서 서연이를 이용했어?""이용이라니. 서연이도 자기가 원하는 게 있었어."태준이 서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맞아. 나도 오빠가 잘되는 게 좋았으니까."도현은 그제야 자신이 밤새워 작성했던 보고서들을 떠올렸다. 동남아 물류회사 인수, 해외 특수목적법인 투자, 건설 계열사 자금 지원까지. 자신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사업들이 이상하게도 이사회에서 승인됐고, 그 과정에서 원래 보고서와 다른 내용이 올라간 적도 있었다.당시에는 단순한 내부 의견 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누군가 자신의 자료를 빼돌리고 불리한 내용을 지우거나 바꾸어 형에게 유리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서재 열쇠도 네가 가져갔어?"서연은 화장대 서랍에서 작은 은색 열쇠를 꺼냈다."당신이 직접 알려 줬잖아. 중요한 자료는 여기 보관한다고.""내가 널 믿었으니까.""그러니까."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당신 문제야.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어."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널 사랑한 게 그렇게 우스웠어?"서연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미안함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도현이 아직도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이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당신은 왜 끝까지 그런 얘기만 해?""대답해.""그래, 우스웠어."그녀는 가운의 허리끈을 고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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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상무님이 직접 지시했다는 내부 제보까지 접수됐습니다."원본 승인 기록은요?"— 일부 접속 기록이 변경된 흔적이 있습니다. 제가 따로 확보한 자료는 있지만, 지금은 내부 감사팀이 관련 기록을 수거하고 있습니다.도현은 책상 아래 서랍을 열었다. 태준이 추진한 해외 투자 건의 위험성을 확인한 뒤, 도현은 원본 거래기록과 자금 흐름을 따로 출력해 보관해 두었다. 그것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룹 자금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추적할 수 있는 단서였다.그러나 서랍은 비어 있었다.도현은 다른 서랍과 책장까지 뒤졌다. 며칠 전 직접 넣어 두었던 회색 파일철이 보이지 않았다."박 부장, 잠시 후 다시 연락하겠습니다."그는 전화를 끊고 서재 문을 열었다.복도에는 이미 옷을 갈아입은 서연이 서 있었다. 검은 원피스에 카디건을 걸친 그녀는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도현은 가방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내 서류 어디 있어?"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서재에 있던 원본 거래기록. 네가 가져갔지?""아직도 그걸 찾고 있어?"그녀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당신은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아내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봤는데도 회사 서류부터 찾네.""그 자료 때문에 사람이 감옥에 갈 수도 있어.""그럼 잘 찾아봐."서연은 그의 옆을 지나가려 했다. 도현이 앞을 가로막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이거부터 보는 게 좋겠네."화면에는 한성그룹 내부 공지가 떠 있었다.**강도현 상무 직무 정지 및 특별감사 착수.**공지 시각은 오후 아홉 시 십이 분이었다. 도현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그는 화면을 확인한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미 다 준비해 놨구나. 내가 집에 오기 전부터."서연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오빠가 그러더라. 이제 당신은 필요 없다고."도현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넌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왜 상관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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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목걸이까지 준비했더라. 역시 당신은 끝까지 나한테 잘해 주네."서연은 태준의 팔에 매달리며 덧붙였다."그런데 이제 그런 건 필요 없어. 오빠가 더 좋은 거 사 줄 거거든."태준은 서연의 허리를 끌어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도현은 두 사람을 붙잡지 않았고,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 잠시 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빗속으로 멀어졌다.도현은 서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컴퓨터에는 여전히 계정 제한 안내가 떠 있었고, 서랍에는 원본 거래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회사는 이미 자신을 직무에서 배제했고, 거액의 자금 유출에 대한 책임도 그에게 돌아오고 있었다.그러나 도현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서류가 사라졌다고 해서 거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남긴 보고 기록과 이메일, 회의 참석자들의 증언을 확보한다면 자금 흐름을 다시 추적할 수 있을 것이었다.그는 개인 휴대전화에 남은 업무 메시지를 확인하고 박성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고, 잠시 후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상무님, 회사에서 제 휴대전화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통화하기 어렵습니다.*도현은 문자를 읽은 뒤 창밖을 바라보았다. 장맛비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책상 한쪽에는 어머니 이정숙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작은 국밥집 앞에서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젊은 도현은 그런 어머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어머니는 그가 한성그룹에 들어갈 때부터 걱정했다.*도현아, 거기서 너무 애쓰지 마라. 네가 아무리 잘해도 네 마음처럼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야.*그때 도현은 반드시 성공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십 년 넘게 버틴 끝에 돌아온 것은 횡령 의혹과 직무 정지, 그리고 아내와 형의 배신이었다.도현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인터폰 화면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신분증을 들어 보이며 강도현을 찾았다."회사 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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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이정숙은 평생 남에게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었다.남편 없이 아들을 키운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을 때도, 국밥집 월세가 밀려 건물주에게 쫓겨날 뻔했을 때도 끝내 두 발로 버텼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사골을 끓이고, 손님들이 먹다 남긴 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아들 앞에서는 한 번도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그런 정숙이 쉰여덟 살이 된 그날 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아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국밥집 앞에는 사흘째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정숙은 셔터를 내리다가 휴대전화에 남은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모두 도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조금 전 통화에서 아들은 회장 저택에 절대 가지 말라고 했지만, 정숙은 그 말을 따를 수 없었다.뉴스에서는 도현이 회사 돈 팔백사십억 원을 빼돌렸다고 했다. 정숙은 그 액수가 얼마나 큰돈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도 없었다. 평생 국밥 한 그릇 값을 오백 원 올리는 일에도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며칠씩 망설이던 사람이었다.하지만 아들이 그런 돈을 훔칠 리 없다는 것만은 알았다.도현은 초등학교 때 길에서 주운 천 원짜리 지폐도 파출소에 가져가던 아이였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가게 계산대에 손님이 두고 간 지갑을 찾아주려고 비 오는 밤거리를 뛰어다녔다. 그 아이가 자라 회사 임원이 되었다고 해서 남의 돈에 손을 댈 리 없었다.정숙은 셔터를 완전히 내린 뒤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싱크대 위에는 도현에게 보내려고 담아 둔 깍두기 통이 놓여 있었다. 며칠 전 아들이 국밥을 먹으러 왔을 때 깍두기가 맛있다고 두 번이나 더 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나, 오늘 아침부터 무를 썰어 담가 놓은 것이었다.정숙은 통을 한 번 쓰다듬고 돌아섰다.서랍에서 통장 하나를 꺼냈다. 표지가 닳고 모서리가 접힌 오래된 통장이었다. 도현이 처음 회사에 취직했을 때부터 조금씩 모은 돈이 들어 있었다.아들이 주는 용돈은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 언젠가 도현에게 아이가 생기면 손주에게 주려고 했던 돈이었다.정숙은 통장을 비닐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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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명희는 정숙을 보자마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시선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낡은 카디건, 흙물이 묻은 단화까지 천천히 내려갔다."이 밤중에 무슨 일이에요?"정숙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죄송합니다. 회장님을 잠깐만 뵙게 해 주세요.""우리 남편을 왜요?""도현이 일 때문입니다."명희의 눈썹이 올라갔다."강도현이 회사 돈을 빼돌렸다는 그 일?""우리 아들은 그런 짓 안 했습니다."정숙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회장님께서 도현이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 애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지 회장님도 아시잖아요."명희는 정숙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예. 부탁드립니다.""참 대단하네요. 남의 집 아들을 낳아 놓고, 그 아들이 사고를 치니까 이제는 아버지더러 책임지라고 찾아왔어요?"정숙의 얼굴이 굳었다.명희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그렇게 아들이 귀하면 처음부터 분수에 맞게 키웠어야죠.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뭘 얻겠다고 욕심을 부리게 만들었어요?""도현이는 욕심부린 적 없습니다.""그럼 왜 회사에 들어왔어요? 왜 회장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임원 자리까지 올라갔죠?"정숙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애가 밤낮으로 일해서 올라간 자리입니다.""누가 보면 혼자 회사를 세운 줄 알겠네요."명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용인에게 말했다."바닥부터 닦아요. 물이 계속 떨어지잖아요."사용인이 마른 수건을 들고 다가왔다. 정숙은 자신에게 건네는 줄 알고 손을 뻗었지만, 사용인은 그녀의 발밑에 쪼그려 앉아 구두에서 떨어진 물만 닦았다.정숙은 황급히 발을 뒤로 옮겼다."죄송합니다. 제가 닦겠습니다."그녀가 허리를 굽히자 명희가 말했다."그냥 가만히 있어요. 손님도 아닌 사람이 이 집 물건까지 만지면 곤란하니까."정숙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아들의 이름이 걸린 일이었다."사모님,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저한테 하세요. 도현이는 아무 잘못 없습니다."명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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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정숙은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 말을 이었다."제 아들은 제가 키웠습니다. 밥 굶기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일했고, 학교 보내려고 밤늦게까지 국밥을 팔았습니다. 그 애가 잘 자란 건 회장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착하게 살아 줬기 때문입니다."명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게 당당한 사람이 왜 남의 집에 와서 무릎을 꿇어요?"정숙은 입술을 떨었다."아들을 살려야 하니까요."그 한마디를 끝으로 정숙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자존심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도현이 무사히 돌아와 국밥집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 한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몇 번이고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어머, 어머니."응접실 입구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정숙이 고개를 들자 한서연이 서 있었다.검은 원피스에 얇은 코트를 걸친 서연은 화장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 도현의 아내였던 여자는 시어머니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데도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명희에게 먼저 인사했다."사모님, 저 왔어요.""잘 왔어요. 마침 골치 아픈 손님이 와서."서연은 정숙을 내려다보았다."어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정숙은 반가운 마음에 손을 뻗었다."서연아. 잘 왔다. 네가 도현이 좀 도와다오."서연은 그 손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옷이 많이 젖으셨네요."정숙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미안하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그러게 이런 날은 집에 계시지 그러셨어요."서연은 소파에 앉으며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정숙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서연아, 도현이가 회사 돈을 훔쳤다고 하는데 그럴 리 없잖니. 네가 아내니까 제일 잘 알 거 아니냐."서연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어머니,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정숙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처음에는?""도현 씨가 저한테도 숨긴 게 많더라고요.""그 애가 무슨…….""집에 이상한 서류도 있었고, 밤마다 회사 일 때문에 누군가랑 통화했어요. 저한테는 설명도 안 해 줬고요."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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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서연아…….""매일 회사에만 매달리고, 집에 오면 피곤하다고 하고. 선물만 사 주면 좋은 남편인 줄 알았나 봐요."정숙은 며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서연은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어머니도 아시잖아요. 도현 씨가 이 집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정숙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너…… 우리 도현이한테 무슨 짓을 했니?"서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도현 씨한테 물어보세요."그녀는 정숙의 낡은 카디건을 내려다보았다."그런데 어머니, 바닥에 물이 계속 떨어져요."정숙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모았다.서연은 명희에게 말했다."사모님, 이 대리석 비싼 거죠? 물 얼룩 남으면 어떡해요?"명희가 사용인을 불렀다."수건 가져와요."정숙은 수건을 받아 자신의 옷을 닦으려 했다.그러나 사용인은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지 않았다.정숙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리 주변의 바닥부터 닦기 시작했다.정숙은 그제야 자신이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였다."서연아, 내가 잘못했다."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또 뭐가요?""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서연의 표정이 굳었다.정숙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너를 우리 도현이한테 보내면 그 애가 행복할 줄 알았어. 그래서 네가 웃어 주는 게 그렇게 고마웠는데……."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서연은 입술을 비틀었다."그럼 이제 아셨네요."정숙의 어깨가 무너졌다.그러나 아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은 사라지지 않았다.***강태준은 정숙이 무릎을 꿇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곧바로 내려오지 않았다.그는 위층 서재에서 잠시 서류를 확인한 뒤 응접실로 향했다. 명희와 서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정숙이 왜 찾아왔는지도 이미 들은 상태였다.태준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숙을 내려다보았다."아직도 안 가셨습니까?"정숙은 소파를 붙잡고 일어나려 했다.오래 꿇고 있던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이 휘청거렸지만, 태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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