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Chapter 21 - Chapter 30

80 Chapters

21화. 정가로 받습니다

“그날부터였습니다. 저는요.”해담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놋쇠 열쇠가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서후는 그 열쇠를 가져가지도, 다시 말을 잇지도 않았다.문밖 미용실에는 봉 원장과 염 여사가 아직 서 있었다. 봉 원장은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유리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었다. 염 여사는 돋보기를 목에 건 채 약국 쪽을 돌아봤다.“아직 계시네요.”“네.”“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구경 끝났어요.”봉 원장이 문을 열고 얼굴만 들이밀었다.“우리는 구경한 적 없어.”“그럼 왜 유리문에 붙어 계세요?”“안에 사람이 있는지 보려고.”“안에 사람이 둘인데요.”염 여사가 봉 원장 옆으로 들어왔다.“사장님, 약사님 말씀이 끝나셨으면 이제 약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업 중이잖아요.”서후가 시계를 봤다.“8시 50분입니다.”“약국 문 닫을 때까지 10분 남았네요.” 염 여사가 말했다. “약사님, 가시죠.”서후는 작업대 위의 열쇠를 집었다. 계산대에 놓였던 지폐는 이미 지갑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해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사장님, 오늘 말씀드린 건 여기까지입니다.”해담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서후는 그대로 가게 문을 나섰다. 염 여사가 뒤따라가며 봉 원장에게 손짓했다.“원장님도 그만 들어가세요.”“내가 왜?”“미용실 문 열어 두고 여기 계시니까요.”“내 가게 문은 내가 열어 둬도 돼.”봉 원장이 입구에 한 발을 걸친 채 해담을 봤다.“해담아, 셔터 내릴 거야?”“네.”“그럼 나도 들어간다.”“들어가세요.”봉 원장은 천천히 미용실 쪽으로 돌아갔다. 해담은 작업대에 남은 열쇠를 바라봤다. 조금 전 서후가 가져간 열쇠의 모양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만든 열쇠. 약국 뒷문을 열어 준 열쇠. 서후가 7년 동안 쓴 열쇠.해담은 돋보기를 서랍에 넣고 작업대 위를 닦았다. 손바닥에 쇳가루가 묻었다. 앞치마에 털어도 손금에 조금 남았다.「일단 문 닫자.」셔터가 내려가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해담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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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주말 출장 됩니다

“출장으로 정식 의뢰하고 싶습니다.”해담은 창고 안쪽에 놓인 금고를 봤다. 허리 높이쯤 되는 오래된 금고였다. 문에는 손잡이와 둥근 다이얼이 달려 있었고, 바닥 가장자리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주변에는 약 상자와 빈 병이 놓여 있었다.“약국에서 열쇠 복사만 하시던 분이 출장도 맡기시네요.”“정식으로 부탁드리는 겁니다.”“무슨 출장인지 먼저 말씀하셔야죠.”“금고를 열어 주십시오.”해담은 금고 앞으로 다가갔다. 문짝의 모서리를 손으로 훑고 다이얼을 살폈다. 녹이 슨 자국은 없었다. 손잡이도 헐겁지 않았다.“안에 중요한 물건이 있어요?”“모릅니다.”“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열어 달라고요?”“전 주인이 두고 간 금고입니다. 약국을 인수한 뒤로 창고에 그대로 있었습니다.”“약국을 연 날부터요?”“네.”해담은 다이얼에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약국 창고에는 소독약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상자들이 높낮이를 달리해 쌓였고, 금고 앞은 사람 하나가 서면 꽉 찰 만큼 좁았다.“금고를 열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창고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금고를 옮기려면 안을 확인해야 합니다.”“그럼 자물쇠 수리점에 맡길 수도 있었겠네요.”“구씨열쇠에 부탁하고 싶었습니다.”해담은 서후를 바라봤다. 흰 가운 안에는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은 채 금고 옆에 서 있었다.“약국 사장님이 직접 오셨으니 정식 의뢰로 받겠습니다. 금고 안에 든 물건은 제가 가져가지 않아요. 열면 확인하고, 약사님이 보관하셔야 해요.”“알겠습니다.”“금고가 열리지 않거나 안에 물건이 있어도 제 책임은 자물쇠까지예요.”“그렇게 하겠습니다.”“부서진 물건이 나오면 그것도 제 책임 아니고요.”“네.”해담은 가방에서 작은 공구함을 꺼냈다. 금고 앞에 쪼그려 앉으려다 바닥에 놓인 빈 상자를 옆으로 밀었다. 상자 밑에 먼지가 길게 남았다.“이 금고, 창고에서 얼마나 있었어요?”“제가 약국을 인수했을 때부터입니다.”“오래됐겠네요.”“전 주인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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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출장비 정산

불판 위에 올린 고기가 익기 전에 반찬이 먼저 나왔다. 해담은 상 가장자리에 놓인 접시들을 안쪽으로 밀었다. 서후가 물컵을 옮기려다 손을 멈췄다.“제가 놓겠습니다.”“그냥 두세요. 뜨거운 것만 안 건드리면 돼요.”“네.”서후는 손을 거뒀다. 주문을 받은 주인이 불판을 살피고 숯을 밀어 넣었다. 갈빗집 안에는 고기 굽는 냄새와 숯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해담은 앞에 놓인 집게를 집어 고기를 뒤집었다.“출장비가 저녁이라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요.”“제가 정한 건 아니고 사장님이 정하셨습니다.”“그러니까 제가 정한 대로 따라오셨잖아요.”“정식 의뢰의 출장비로 받기로 했습니다.”“금고 열어 드린 값인데요.”“맞습니다.”서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담은 집게로 고기 한 점을 뒤집었다. 가장자리가 익자 집게를 내려놓고 가위를 들었다. 서후가 접시를 불판 가까이 밀었다.“여기에 덜어 주시면 되겠습니까?”“익으면요.”“알겠습니다.”주인이 물병을 상에 내려놓았다.“두 사람이 같이 온 건 처음 보네.”해담의 가위가 고기 위에서 멈췄다.“처음이에요.”“약사 양반은 혼자 가끔 왔고, 구 사장은 늘 혼자 왔지. 7년 만에 둘이 같이 왔네.”“사장님, 저희가 여기서 자주 봤어요?”“가게가 가까운데 안 볼 수가 있나. 둘 다 골목에서 장사하잖아.”“저는 여기 온 적 별로 없어요.”“그럼 약사 양반만 봤나 보지.”주인은 능숙하게 불판 가장자리를 정리하고 돌아섰다. 해담은 고기를 잘라 서후 접시에 한 점 놓았다. 자기 접시에도 한 점을 덜었다.“주인이 사람을 잘 기억하시네요.”“골목에서 오래 일하셨으니까요.”“약사님도 여기 오셨었어요?”“네.”“혼자요?”“네.”해담은 고기를 한 번 더 뒤집었다. 서후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고기 위에서 잠시 멈췄다.“왜 혼자 오셨어요?”“밥을 먹으려고 왔습니다.”“그건 알죠. 누구랑 먹을 수도 있잖아요.”“혼자 먹는 게 편했습니다.”해담은 서후를 바라봤다. 서후는 고기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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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벚꽃 시즌 한정

“그럼 의뢰하겠습니다.”해담은 솔매천 산책길에서 서후를 돌아봤다. 약국 문은 이미 닫혔고, 길가 가로등 아래로 벚나무가 이어졌다. 나뭇가지 사이에 남은 꽃잎이 저녁 바람에 흔들렸다.“의뢰 내용이 뭔데요?”“같이 걸어 주십시오.”“그게 의뢰예요?”“네.”“출장도 아니고, 열쇠도 없는데요.”“출장비는 따로 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해담은 코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서후는 남색 니트 차림이었다. 흰 가운은 입지 않았다. 해담도 작업 앞치마를 벗어 팔에 걸쳐 들고 있었다. 손끝에는 쇳가루가 남아 있었다.“그럼 더 이상하잖아요. 부탁이면 부탁이지, 의뢰라고 할 건 뭐예요?”“사장님이 출장 의뢰를 받으실 때는 내용을 먼저 확인하십니다.”“지금은 제가 손님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닌데요.”“그럼 어떻게 부르면 됩니까?”“아직 정한 적 없어요.”“알겠습니다.”서후는 더 묻지 않았다. 해담은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서후가 옆에 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깨 하나쯤의 간격이 남았다.길은 개천을 따라 이어졌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해담은 작업 앞치마를 접어 팔에 걸고, 쇳가루가 묻은 엄지를 바지에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약국은 9시에 닫죠?”“네. 염 여사님께서 문을 닫으셨습니다.”“약국을 비우고 나와도 괜찮아요?”“문을 닫은 뒤입니다. 내일 아침까지 열지 않습니다.”“그래도 약사님은 약국에 계시는 게 익숙할 줄 알았어요.”“익숙합니다.”“그런데 오늘은 왜 나왔어요?”“같이 걷고 싶어서입니다.”서후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해담은 그 말을 들은 뒤 앞을 보았다. 길 가장자리에는 벤치가 놓여 있었고, 조금 더 가면 낮은 난간이 이어졌다.「대답이 빠르네.」해담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열었다.“그럼 걷는 동안은 시범이에요.”“무엇의 시범입니까?”“같이 걷는 시범이요.”“알겠습니다.”“약사님이랑 제가 사귀는 건 아니고요.”“네.”“데이트도 아니에요.”“네.”“그러니까 오늘 걷는 건 시범이에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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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무인 복사기 입고

월요일 오전, 골목 입구 편의점 앞에서 전동 드릴 소리가 났다.해담은 셔터를 반쯤 올리다 말고 소리가 난 쪽을 봤다. 편의점 유리창 옆에 회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상자에서 기계를 꺼내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다. 앞면에는 화면과 좁은 투입구가 달려 있었다.“저게 뭐예요?”해담이 묻자 봉 원장이 미용실 문을 열고 나왔다. 가위집을 허리에 찬 채 골목 입구를 살폈다.“열쇠 복사 기계래. 사람 안 있어도 된다네.”“열쇠를 기계가 깎는다고요?”“그렇다더라. 요즘은 기계가 안 하는 일이 없어.”봉 원장은 가위집을 한 번 두드리고 해담 쪽으로 다가왔다.“미용실 유리창이 괜히 큰 줄 아니? 아침부터 설치하는 거.”“아직 설치 중이잖아요.”“설치하는 것도 봤지.”기계 옆에 세워 둔 안내판에는 『키박스』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쪽에는 복사 가격과 이용 방법이 표시됐다. 해담은 팔을 내리고 작업자들이 기계를 고정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편의점 앞을 지나던 사람이 발을 늦췄다가 안내판을 읽고 걸음을 옮겼다.“복사 얼마래요?” 봉 원장이 물었다.“2,000원이요.”“여긴 3,000원 받잖아.”“네.”“천 원 차이네.”해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작업자가 기계 옆의 전선을 정리하고 안쪽을 확인했다. 화면에 안내 문구가 켜졌다 꺼졌다. 기계는 사람 키보다 조금 낮았고, 한쪽에는 열쇠를 넣는 투입구가 있었다.“손님들이 쓰겠네요.” 봉 원장이 말했다.“그렇겠죠.”“가게 문 닫은 뒤에도 된다잖아. 급한 사람한테는 편하겠어.”“그럴 수 있죠.”“너는 괜찮아?”“뭐가요?”“기분이.”해담은 셔터 손잡이를 놓았다. 가게 안쪽에서 쇳가루 냄새가 났다. 문을 열어 두었는데도 드릴 소리가 안까지 들어왔다.“기계가 들어오는 건데 제 기분이 왜 나빠요.”“내가 물어봤잖아.”“그럼 괜찮다고 대답할게요.”“대답은 잘하네.”봉 원장은 다시 편의점 쪽을 바라봤다. 작업자들이 바닥에 남은 포장재를 치웠다. 그중 한 사람이 화면을 확인하고 기계 앞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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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가격 인하 없음

해담은 서후가 내민 놋쇠 열쇠를 받지 않고 기계 쪽을 봤다.“안 쓰는 이유가 있어요?”“없습니다.”“그럼 편의점 앞에서 한참 들여다본 건요?”“사용 방법을 확인했습니다.”“확인했으면 써도 되잖아요.”“저는 해담 씨에게 복사하러 왔습니다.”서후는 새 지폐 세 장을 계산대 위에 놓았다. 해담은 지폐를 보다가 열쇠를 받아 들었다. 손잡이에는 오래된 흠집이 있었고, 열쇠 끝은 반질반질했다. 가게 안에는 아침부터 남아 있던 쇳가루 냄새가 났다.“매일 이걸 복사하네요.”“네.”“같은 열쇠를 또 복사해서 어디에 써요?”“보관합니다.”해담은 서후를 바라봤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으니 먼저 말하지 않는다는 듯 열쇠를 기다렸다.“그럼 기다리세요.”“네.”해담은 열쇠를 작업대에 고정했다. 복사 기계가 위잉 소리를 냈다. 서후는 계산대 앞에 서서 작업을 지켜봤다. 해담은 기계가 멈추자 복사한 열쇠를 꺼내 원본과 나란히 놓았다. 홈을 확인하고 가장자리를 줄로 다듬었다.“됐어요.”서후가 열쇠를 받았다. 해담은 손을 거둔 뒤 계산대 위 지폐를 집었다.“오늘도 정가로 내네요.”“네.”“기계는 2,000원이라면서요.”“알고 있습니다.”“그래도 여기서 해요?”“네.”해담은 지폐를 서랍에 넣었다. 서후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지 않고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놋쇠빛이 가게 안 조명에 비쳤다.“기계가 더 싸고, 손님도 거기로 가면 여기 손님은 줄겠죠.”“그럴 수 있습니다.”“그런데 약사님은 계속 여기 와요.”“네.”“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제가 말씀드릴까요?”“지금은 됐어요.”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국 쪽으로 돌아서기 전에 시간을 확인했다.“8시 24분입니다.”“약국 문 열 시간은 남았네요.”“네. 염 여사님께 부탁드렸습니다.”“그럼 가 보세요.”“다음에도 오겠습니다.”“내일도 이 열쇠를 복사해요?”“네.”서후가 문을 나갔다. 해담은 열린 문 앞에서 약국 유리문을 바라봤다. 서후는 길을 건너기 전 돌아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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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상인 회의 중

해담은 식혜 그릇을 받아 들고 빈자리를 찾았다. 동명탕 휴게실 안에는 낮은 탁자와 접이식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한쪽에는 회의 자료가 쌓였고, 맞은편에는 상인들이 둘러앉아 있었다.채순임이 식혜 통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그릇은 앞에 놓을게. 회의 시작하기 전에 한 모금씩 마셔.”“엄마, 나도 회의 자료 봐야 해.”“그럼 손에 들고 마셔. 식혜가 네 자료보다 무겁니?”해담은 그릇을 한 손에 들고 의자를 당겼다. 남색 앞치마는 벗어 두었지만, 손끝에는 쇳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문지르자 검은 자국이 식혜 그릇 바깥쪽에 묻었다.“그릇에 묻었네.”순임이 그릇을 받아 들고 행주로 닦았다.“손은 씻었어?”“씻었지.”“그런데 왜 이렇게 묻어?”“열쇠집 손이라 그래.”“열쇠집 손도 회의 전에 씻어야지.”순임은 그릇을 다시 건넸다. 해담은 이번에는 그릇 가장자리만 잡았다.봉숙자가 탁자 위 서류를 한데 모았다. 보라색 브릿지가 휴게실 불빛 아래서 눈에 띄었다. 봉숙자는 가위집을 허리에서 빼 의자 옆에 놓고 앉았다.“자, 다들 앉았죠? 오늘은 키박스랑 번개열쇠 얘기부터 할게요.”“그 얘기만 하다 밤 되겠네.”탁종팔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흰 앞치마는 벗어 두었지만, 손등에는 정육점에서 일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밤 되기 전에 끝내려고 회의를 여는 거예요.” 봉숙자가 말했다.“끝내려면 말하는 사람부터 줄여.”“그럼 탁 사장님부터 줄여 볼까요?”“난 아직 말 안 했어.”“방금 했잖아요.”탁 사장은 대꾸하지 않고 식혜를 한 모금 마셨다. 해담은 종이 몇 장을 집어 들었다. 윗장에는 상인 모임이라고 적혀 있었고, 아래에는 오늘 다룰 내용이 짧게 정리돼 있었다. 키박스 이용 가격, 번개열쇠 출장 안내, 골목 상점 공동 홍보.서후는 맞은편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흰 가운은 입지 않았고 남색 니트를 입었다. 소매는 단정하게 접혀 있었다. 서후 앞의 회의 자료도 모서리가 가지런히 맞아 있었다.해담이 눈을 들자 서후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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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정기 휴무 없음

“재개업은 무슨 재개업이에요.”해담이 먼저 입을 열자 봉숙자가 종이를 탁자 위에 놓았다.“그럼 뭐야. 시범 영업?”“회의 내용이나 마저 정리하세요.”“회의는 끝났어.”“아직 상인 모임 카드가 남았잖아요.”해담은 종이를 당겨 기준을 다시 확인했다. 도장은 돈을 내고 물건을 사거나 일을 맡긴 뒤에 찍는다. 무료 점검은 제외한다. 혜택은 참여 가게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정한다. 카드에 적을 내용은 읽을 수 있는 크기로 쓴다.“이대로 정리하면 돼요. 참여 가게는 봉 원장님이 확인하시고요.”“알았어. 그런데 둘이 언제 재개업하느냐는 아직 답 안 했는데.”“그건 회의 안건 아니잖아요.”“골목 단골 도장 카드보다 중요한데?”“아니요.”“해담아, 네가 제일 먼저 카드 기준을 정했잖아. 그러니까 네가 대답해.”“카드 기준은 제가 정했고, 제 사생활은 제가 정해요.”봉숙자는 웃으며 종이를 가지런히 모았다. 서후는 의자를 밀어 넣고 회의 자료를 정리했다. 다른 상인들도 그릇을 한쪽으로 모으고 휴게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탁 사장은 빈 식혜 그릇을 순임에게 내밀었다.“회의 끝났으면 이제 고기 사러 가도 되나?”“정육점 사장님이 정육점에 고기를 사러 가요?” 해담이 물었다.“집에서 먹을 건 따로 사야지.”“그럼 카드 도장도 찍어 드릴까요?”“내 가게에서 내가 찍나?”“돈 내고 사면 찍어야죠.”탁 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릇을 내려놨다.“그건 그렇네.”“오늘부터는 안 돼요. 카드가 아직 없잖아요.”“그럼 다음부터 찍어.”“네.”탁 사장은 의자를 밀어 넣었다. 봉숙자는 상인들에게 카드에 들어갈 가게 이름을 따로 보내 달라고 했다. 해담은 식혜 그릇을 씻으려 순임에게 건넸다.“그건 내가 할게. 너는 종이 챙겨.”“엄마가 회의 준비했잖아. 그릇은 내가 씻을게.”“손에 쇳가루 묻어 있잖아.”해담은 손바닥을 폈다. 손끝에 검은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손을 씻었다고 생각했는데 작업대에서 종이를 만지는 동안 다시 묻은 모양이었다.“그릇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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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도어록 설치합니다

“엄마!”순임은 수건을 개다 말고 해담을 봤다.“왜 소리를 질러. 약사님은 벌써 갔어.”“그런 말을 꼭 그렇게 크게 해야 해요?”“너도 크게 대답했잖아.”“그건 엄마가 먼저 크게 말했으니까요.”“내가 작게 말했으면 네가 못 들었을 거야.”“들었거든요.”해담은 서류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목욕탕 문을 나섰다. 뒤에서 순임이 수건을 털어 접는 소리가 났다. 봉투 모서리가 팔에 닿았다. 해담은 그걸 한 번 고쳐 끼웠다.「사위는 무슨.」다음 날 아침, 해담은 가게 문 옆에 새 안내문을 붙였다. 『도어록 설치 출장합니다』. 아래에는 설치 상담과 무료 점검을 적었다. 글씨가 한쪽으로 기울어 종이를 떼어 다시 붙이려는데, 옆 가게에서 봉숙자가 다가왔다.“뭘 그렇게 들여다봐?”“글씨가 기울었나 봐서요.”“조금 기울었네.”“떼서 다시 붙일까요?”“손님은 글씨 기울어진 걸 보러 오는 게 아니야. 도어록 설치하는지 보러 오지.”“그래도 안내문인데요.”“그럼 멀리서 봐. 내가 읽어 볼게.”봉숙자는 몇 걸음 물러나 종이를 읽었다.“도어록 설치 출장합니다. 잘 보이네.”“기울었잖아요.”“그 정도면 사람이 쓴 글씨 같고 좋지.”“기계가 붙인 안내문은 반듯하겠네요.”“그럼 더 눈에 띄게 붙이면 돼.”해담은 종이 가장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봉숙자는 안내문을 한 번 더 보고 미용실 쪽으로 돌아갔다.“출장 많이 다니면 가게 문은 누가 지켜?”“오늘은 제가 지켜요.”“내일부터는?”“예약 잡히면 그때 생각하죠.”“생각할 게 많네.”“열쇠집 사장이니까요.”봉숙자가 웃으며 들어가자 해담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작업대 위에는 전날 정리한 공구가 놓여 있었다. 해담은 설치용 공구를 따로 가방에 담고, 필요한 부품을 확인했다. 손잡이를 당겨 잠금 상태를 확인하는 작은 공구부터 나사와 드라이버까지 하나씩 넣었다.점심 무렵, 전화가 왔다. 은결의 어머니였다. 은결이 열쇠를 잃어버린 일이 또 있었다며 도어록 설치를 부탁했다. 해담은 문 규격과 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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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어린이 손님 우대

구해담은 자물쇠 놀이판의 받침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탁자가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하고, 자물쇠와 열쇠를 종류별로 나눠 놓았다. 자물쇠는 열쇠구멍이 보이도록 세웠다. 아이들이 손을 뻗어도 탁자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끈으로 묶어 두었다.“사장님, 이건 뭐예요?”은결이 책가방을 멘 채 놀이판 옆으로 다가왔다. 가방 옆 주머니에는 딱지가 삐죽 나와 있었다.“자물쇠 풀기 놀이.”“진짜 자물쇠예요?”“진짜지. 대신 가게에서 쓰는 것보다 간단한 걸로 가져왔어.”해담은 작은 자물쇠를 들어 열쇠구멍을 보여 줬다. 은결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열쇠는요?”“여기. 맞는 열쇠를 골라서 열면 돼.”“틀리면요?”“안 열려.”은결은 자물쇠보다 해담을 먼저 쳐다봤다.“그게 다예요?”“그게 다야. 억지로 돌리면 열쇠가 휠 수 있어. 힘으로 이기는 놀이 아니야.”“그럼 잘 살펴봐야겠네요.”“맞아. 열쇠 모양도 보고, 구멍 안쪽도 봐.”해담은 탁자 앞에 『자물쇠 풀기 놀이』라고 쓴 종이를 세웠다. 아래에는 『맞는 열쇠를 찾아 천천히 돌려 보세요』라고 적었다. 종이 모서리가 바람에 들리자 해담은 테이프를 더 붙였다.골목 양쪽 가게 앞에는 어린이날 행사용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동명탕 앞에서는 순임이 접시를 나르고, 봉미용실 앞에서는 봉숙자가 행사 순서를 적은 종이를 들고 상인들에게 말을 건넸다. 약국 앞에는 서후가 낮은 판을 세워 두고 있었다. 판에는 『약 먹는 법 퀴즈』라고 적혀 있었다.“약사님, 퀴즈는 어떻게 하는 거예요?”아이 하나가 서후의 판을 가리켰다.“제가 질문을 읽어 드리면, 맞는 답을 골라 주시면 됩니다.”“틀리면 혼나요?”“아니요. 답을 알려 드립니다.”“그럼 해 볼래요.”서후는 아이 눈높이에 맞춰 판을 낮췄다. 판 위에는 쉬운 질문과 보기들이 적혀 있었다. 해담은 그쪽을 한 번 보고 자물쇠를 다시 정리했다.「줄이 생기겠네.」“사장님, 여기서 뭘 하는지 알려 주세요.”골목 안쪽에서 아이들이 몇 명 더 다가왔다. 해담은 자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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