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 Chapter 31 - Chapter 40

80 Chapters

31화. 도리의 시험

「창틈으로 등대의 흰 빛이 한 번 지나갔다.오두막 안에는 생강 끓는 냄새가 남아 있었다.」도리는 탁자 앞에 앉아 종이를 내려다봤다. 연필 끝이 종이에 닿았다 떨어졌다 했다.“아까부터 그 글자만 보고 있네.”내가 말하자 도리는 종이를 손바닥으로 덮었다.“누나, 보면 안 돼.”“네 시험 답안이야?”“아니. 시험에서 나온 글자를 기억해서 써 보는 거야.”“그럼 보여 줘도 되겠네.”도리는 잠깐 망설이다 손을 치웠다. 종이에는 ‘불’이라고 적혀 있었다. 획 하나가 비뚤어져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맞게 썼어.”“진짜?”“응. 불을 쓸 때 오른쪽 획이 조금 기울었어. 그래도 글자는 맞아.”도리는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줬다.“시험에서도 이 글자가 나왔어. 선생님이 읽어 보라고 했는데, 나 바로 읽었어.”“시험에서 그 글자가 나왔을 때는 어땠어?”“그냥 읽었지. 떨리긴 했는데, 누나가 일지에 쓴 걸 봤잖아. 그 글자를 몇 번이나 썼고.”“내가 쓴 걸 본 것과 네가 읽은 건 달라. 네가 읽은 거야.”도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풀었다.“맞아. 내가 읽었어.”그는 종이를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글자를 지우지는 않았다. 삐뚤어진 획을 손끝으로 눌러 펴려다 종이만 구겼다.“그만 만져. 더 구겨지겠다.”“종이 구겨지면 안 돼?”“시험지라면 안 되겠지. 이건 네가 기억해서 쓴 종이니까 괜찮아.”“시험지는 가져오면 안 된대. 그래서 기억해서 썼어.”도리는 종이 끝을 다시 평평하게 폈다. 나는 탁자에 놓인 연필을 그 옆으로 옮겼다.“다른 문제도 기억나?”“읽으라는 문장이 있었어.”“무슨 문장이었는데?”도리는 눈썹을 모았다. 입술만 움직이며 글자를 떠올렸다.“바다…… 아니, 잠깐. ‘바다에 불이 보인다’였나?”“확실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해도 돼.”“뒤에 글자는 기억나. 앞에가 바다였는지 물이었는지 모르겠어.”“그럼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는 것만 적자.”도리는 연필을 다시 들었다.“불은 확실해.”“그럼 불이라고 적으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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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입 다문 노인

「등대 불빛이 바위 위를 훑고 지나갔다.물소리는 낮았고, 마게의 장갑에서는 젖은 가죽 냄새가 났다.」마게는 바위 길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굽은 등이 바다 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었다. 나는 발밑의 물기를 살피며 다가갔다.“아가씨.”마게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오른손에는 손가락이 반쯤 드러난 장갑을 끼고 있었다. 드러난 가운데손가락을 장갑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듯 손끝을 만지작거렸다.“기다리셨습니까?”“기다린 건 아니오. 바람을 좀 쐬러 나왔소.”“바람이 셉니다.”“그래도 등대 안보다는 낫지.”그는 바다를 보고 말했지만, 발은 길 가운데에 멈춰 있었다. 더 걸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도 그 옆에서 멈췄다.파도가 바위에 부딪히고 물이 낮은 틈으로 빠져나갔다. 바닷물이 튄 자리는 어둡게 젖어 있었다. 나는 치맛자락이 바위에 쓸리지 않도록 한쪽 손으로 걷어 들었다.“마게 씨께 여쭤볼 일이 있습니다.”“또 그 밤 이야기요?”나는 대답 대신 마게를 바라봤다.“3년 전 9월 14일 밤, 프레야호가 좌초하기 전입니다. 회색곶 등대 불이 꺼졌던 30분에 대해 알고 계신 일을 듣고 싶습니다.”마게의 손가락이 장갑 끝에서 멈췄다. 그는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나는 아는 게 없소.”“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기억이야 나지. 하지만 말할 수 있는 건 없소.”“그날 등대를 맡고 계셨습니다.”“그래서 더 할 말이 없소.”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대답은 분명했다. 나는 그 말에 바로 말을 보태지 않았다. 마게가 손가락을 다시 장갑 안으로 밀었다가 빼는 동안, 바람이 옷깃 사이로 들어왔다.“일지에는 23시 10분부터 23시 40분까지 기록이 없습니다.”“그런 걸 봤소?”“네.”“그럼 일지에 적힌 것만 믿으시오.”“일지에 없는 시간이라서 여쭙는 겁니다.”“없는 걸 없는 채로 두시오.”나는 들고 온 일지를 펼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펼치면 마게에게 기록을 들이밀고 답을 재촉하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그가 말하지 않겠다고 했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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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이중 장부

「등잔불이 낡은 장부의 눌린 글씨를 비췄다.먼지가 종이 가장자리에 얇게 붙어 있었다.」나는 장부를 펼친 채 손을 멈췄다. 페이지마다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 잉크가 번진 곳도 있었고, 손가락으로 여러 번 짚어 색이 옅어진 줄도 있었다.수잔나는 내 맞은편에서 돋보기를 들고 있었다. 둥근 렌즈에 등잔불이 비쳤다.“이 장부는 언제부터 쓰신 겁니까?”“오래됐지. 가게 문을 연 뒤부터 모아 둔 거래를 옮겨 적은 거야.”“비스 해운의 납품도요?”“그렇지. 항구에 들어오는 물건은 종류가 많아. 날짜하고 값을 안 적으면 나중엔 나도 헷갈려.”수잔나는 장부의 먼지를 손등으로 털려다 멈췄다. 가루가 글씨 위에 더 퍼질까 봐 손바닥을 내려다봤다.“이건 털면 안 되겠네.”“제가 조금씩 치우겠습니다.”나는 마른 천으로 장부 가장자리를 눌렀다. 종이가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먼지가 걷힌 자리에 두 줄의 금액이 드러났다.비스 해운의 기름 납품 기록이었다.나는 두 줄을 번갈아 읽었다. 위쪽 줄에는 군 납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쪽 줄에는 등대 납품이라고 쓰여 있었다. 같은 날짜와 같은 기름인데, 값은 달랐다.“수잔나 씨, 이 줄을 봐 주세요.”수잔나가 돋보기를 내렸다.“군 납품은 한 통에 은화 4닢이네요.”“그래. 좋은 기름으로 납품한다고 적혀 있잖아.”“등대 납품은 은화 2닢입니다.”“그것도 비스 해운이 가져온 기름이지.”나는 손가락을 글씨에 대지 않은 채 두 줄 사이에 뒀다. 날짜와 물건 이름이 같았다. 거래처만 달랐다.“같은 기름을 한쪽에는 좋은 값으로 팔고, 등대에는 절반 값으로 납품했다는 뜻입니까?”“장부만 읽으면 그렇게 보여.”수잔나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돋보기를 다시 올리고 두 줄을 오래 들여다봤다.“값이 싸다고 기름이 꼭 나쁜 건 아니야. 물건을 많이 샀거나, 운임을 덜 받았을 수도 있어.”“맞습니다. 가격 차이만으로는 물을 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너는 다른 걸 찾았구나.”나는 장부 옆에 놓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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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클라우스의 흔들림

「등대의 긴 빛이 절벽길을 지나갔다.파도 소리가 바위 아래서 끊겼다가 다시 들렸다.」나는 절벽길 안쪽에 서 있었다. 바람이 치맛자락을 건드릴 때마다 손으로 눌렀다. 묶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에 붙었다.등대에서 내려온 빛이 바다를 훑었다. 나는 그 빛이 지나간 뒤에야 길 아래쪽을 살폈다.사람 하나가 바위 가까이에 서 있었다.클라우스였다.금발이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다. 반듯한 옷깃도 한쪽이 접혀 있었다. 손에 든 꽃다발에서는 향이 짙게 났다. 바닷바람에도 꽃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나는 길을 막지 않도록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클라우스 님.”“노엘라.”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다가오는지 지켜봤다.클라우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꽃다발을 쥔 손만 바꿔 잡았다.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혼자 오셨습니까?”“그래. 혼자 왔어.”“무슨 일로요?”클라우스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고 물러났다.“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생각하신 뒤에 말씀하셔도 됩니다.”“기다려 주겠다는 뜻이야?”“제가 먼저 재촉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클라우스는 꽃다발을 내려다봤다. 꽃잎 끝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꽃을 내게 건네지 않았다.나는 손에 쥔 연필을 가방 안에 넣었다. 일지는 가방 속에 그대로 두었다. 지금 이 말을 적을지 묻지 않았고, 그에게도 아직 말한 내용이 없었다.“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 그게 두려워.”클라우스가 말했다.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어떤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그건…… 지금 말하기가 어려워.”그는 말을 끊었다. 다시 파도를 바라봤다. 물이 바위 틈으로 밀려 들어갔다가 빠졌다. 클라우스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나는 더 묻지 않았다.“말씀하기 어려우신가요?”“말을 꺼내기가 어려워.”“말씀하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모르겠어. 아직 정리가 안 됐어.”나는 그가 쥔 꽃다발을 보았다. 포장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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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얀 두르

「등대의 빛이 마당을 지나 문턱에 놓인 재를 비췄다.바람이 잦아들자 바깥에서 발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나는 문턱에 놓인 그릇을 치우고 재를 얇게 폈다. 문을 오가는 사람이 밟지 않도록 가장자리까지 살폈다.재는 문 바로 앞에서 끊겼다. 마당 쪽으로 흩어지지 않게 손끝으로 눌러 두었다.“너무 넓게 뿌리면 바람에 날립니다.”문 옆에서 유리안 하그 제독님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다.“발을 디디는 곳만 알면 됩니다.”“문이 열리면 재가 바닥에 묻을 수 있습니다.”“그건 괜찮습니다. 누가 들어왔는지 알 수 있으면 돼요.”제독님은 내 손을 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손가락에 재가 묻어 있었다. 나는 손바닥을 치마에 문지르지 않고 앞치마 끝으로 털었다.세바스가 문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섰다. 등대의 빛이 지나갈 때마다 붉은 머리와 주근깨가 잠깐 드러났다.“그가 다시 올 거라고 확신하십니까?”“확신은 아닙니다.”“그럼 기다릴 이유가 있습니까?”“문턱에 발자국이 남으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으면 재만 치우면 되고요.”“재를 뿌렸다는 걸 알면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그러면 문을 열지 못했다는 뜻이겠죠.”세바스는 잠시 문을 살폈다.“안쪽을 확인하려는 사람이면 흔적을 보고도 들어올 겁니다.”“그럴 수 있습니다.”“노엘라 씨.” 제독님이 나를 불렀다. “제가 문 옆을 맡겠습니다. 세바스는 마당 쪽을 봅니다.”“저는요?”“문에서 떨어져 계십시오.”“제가 확인해야 합니다.”“발자국을 먼저 보셔야 합니다. 가까이 서 있으면 흔적을 밟을 수 있습니다.”나는 대답하지 않고 문턱과 내 발 사이를 확인했다. 재에서 충분히 떨어져 있었다.“여기 있겠습니다.”제독님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주머니 시계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등대의 긴 빛이 마당을 지나갔다. 시계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는 작은 그릇을 문 안쪽에 두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발을 디딜 자리와 문턱을 함께 볼 수 있었다.“관리인님.”세바스가 낮게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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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첫서리

「밤새 켜 둔 불빛이 새벽빛에 옅어졌다.마당의 돌 틈마다 첫서리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나는 문턱에 남은 재를 살폈다. 밤사이 발자국은 더 생기지 않았다. 얀 두르가 들어온 자국도 바람에 흐려지지 않도록 문 가까이는 그대로 두었다.손끝이 차가웠다. 재를 만지지 않으려고 손을 비볐지만, 손등의 작은 흉터가 당겼다.“손이 얼겠습니다.”등 뒤에서 유리안 님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는 돌아보았다. 제독님은 겨울 외투를 걸친 채 마당에 서 있었다. 옷깃에는 서리가 조금 묻어 있었다.“괜찮습니다. 확인할 것이 남았습니다.”“문턱은 제가 보겠습니다.”“제가 남긴 흔적입니다. 제가 확인해야 합니다.”“그렇다면 가까이서 보지 마십시오. 재가 다시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나는 문턱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유리안 님은 내 자리를 대신 차지하지 않았다. 대신 재가 남은 곳을 살피고, 밟힌 자국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시선을 옮겼다.“바람이 불었는데도 모양이 남아 있군요.”“재를 얇게 펴 두었습니다. 발이 지나가면 밀린 자국이 보입니다.”“밑창 자국도 확인하셨습니까?”“네. 오른발이 끌린 방향과 맞았습니다.”유리안 님은 잠시 문턱을 바라봤다. 그의 왼쪽 어깨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외투 안쪽에서 움직임이 불편한 듯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손을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아닙니다.”“재를 만지셨습니까?”“그릇을 옮길 때 조금 묻었습니다. 털어 냈습니다.”“손등은요?”나는 오른손을 뒤로 감췄다.“괜찮습니다.”“괜찮다는 말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제독님께서도 확인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십니까?”“있습니다.”유리안 님은 바로 대답했다. 더 보태지는 않았다.나는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화상 흉터 위에 재가 묻어 있지는 않았다. 손가락 끝은 붉게 얼어 있었다.“상처는 없군요.”“말씀드렸잖습니까.”“손이 차갑습니다.”“새벽에는 늘 그렇습니다.”“오늘은 첫서리가 내렸습니다.”그는 짧게 말하고 외투를 벗었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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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불인가 사람인가

「렌즈를 돈 빛이 바다에 닿을 때마다 흰 선이 길게 열렸다.유리실 안에는 불빛이 돌고, 발밑에서는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나는 일지를 무릎 위에 펼쳐 두었다. 연필 끝이 종이에 닿아 있었지만, 아직 글을 쓰지는 않았다.제독님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등대 꼭대기까지 올라온 뒤에도 늘 그랬듯, 먼저 렌즈를 바라봤다. 불빛이 한 바퀴 돌아 바다 쪽으로 향할 때마다 그의 눈이 움직였다.시계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오늘도 확인하러 오셨습니까?”“예.”“불이 켜졌는지요?”“그렇습니다.”“매일 밤 확인하십니다.”“그렇습니다.”그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렌즈를 바라봤다. 나는 그가 더 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다. 불이 켜졌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말을 나눈 뒤, 계단을 내려갔다.그런데 오늘은 질문이 입안에 남았다.나는 일지를 덮지 않았다. 펼쳐 둔 페이지에 손바닥을 얹었다. 연필은 그 아래로 굴러가지 않았다.“제독님.”“말씀하십시오.”나는 말을 고르는 동안 렌즈를 바라봤다. 불빛이 유리실을 지나갔다. 바다에 닿은 빛이 가늘게 번졌다가 사라졌다.“제독님은 불이 켜지는 걸 보러 오시는 겁니까?”제독님은 나를 보지 않았다.“예.”짧은 대답이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묻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아니면 저를 보러 오시는 겁니까?”그의 손이 주머니 시계 위에서 멈췄다.나는 연필 끝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나무가 손톱 아래를 스쳤다. 대답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지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까?”“그렇습니다.”제독님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가요?”“예.”“그럼 기다리겠습니다.”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렌즈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다. 나는 연필을 들어 일지 여백에 짧은 표시를 했다. 방금 질문을 적지는 않았다.‘내 질문까지 기록하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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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도리의 뗏목

「안개가 렌즈 앞을 덮었다.곶 아래에서 들린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끊겼다.」“관리인님! 도리가 바다에 나갔습니다!”나는 일지에서 고개를 들었다. 제독님도 렌즈를 보던 시선을 거뒀다.“어디로 갔습니까?”등대 아래에서 올라온 어부가 젖은 모자를 쥐고 있었다. 숨이 차서 말이 끊겼다.“아버지를 도우러 갔습니다. 밧줄을 묶다가 뗏목이 풀렸습니다. 안개가 너무 짙어서 어디로 밀려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나는 일지 덮개를 닫았다.“마지막으로 본 곳은요?”“곶 앞입니다. 해안에서 멀리 나가진 않았습니다.”“언제 보셨습니까?”“얼마 안 됐습니다. 제가 밧줄을 가져오러 간 사이에…….”어부가 말을 삼켰다. 손에 쥔 모자가 구겨졌다.나는 등대 창으로 바다를 살폈다. 안개가 가까운 물결부터 덮고 있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등대 불빛만 안개 안에서 짧게 흐려졌다가 나타났다.“도리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아래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그분은 괜찮습니까?”“예. 도리를 찾으려 했는데, 지금은 눈앞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제독님이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소형선을 띄우겠습니다.”“제독님, 안개가 짙습니다.”“압니다.”“불빛을 따라가실 수 있습니까?”“가능한 만큼 가까이 가겠습니다.”제독님은 창밖을 한 번 더 살폈다. 나는 그가 곧바로 아래로 내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내게 돌아왔다.“도리가 마지막으로 향한 쪽을 아십니까?”“저도 모릅니다. 밧줄을 묶던 곳이 곶 앞이라는 말뿐입니다.”“알겠습니다.”그는 더 묻지 않았다. 나는 열린 일지를 들고 렌즈실 출입문을 지나갔다.“관리인님, 어디로 가십니까?”“렌즈를 조절하겠습니다. 배를 찾을 신호가 필요합니다.”제독님이 내 뒤를 따라왔다. 어부도 잠시 망설이다가 계단을 내려갔다.나는 렌즈 조작대 옆의 차광판을 잡았다. 손바닥에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불빛은 정해진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안개가 짙으면 긴 빛이 멀리 닿지 않을 수 있었다.“위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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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구조 뒤

「등대 불빛이 젖은 창에 번졌다.관리실에는 따뜻한 수프 냄새와 젖은 옷 냄새가 남았다.」문이 닫히자 파도 소리가 작아졌다.도리는 의자에 앉아 젖은 일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제독님은 그 앞에 따뜻한 수프 그릇을 놓았다. 젖은 앞머리가 도리의 눈을 덮었지만, 도리는 일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나는 문 옆에 서 있었다.“도리, 먼저 수프를 마셔.”“일지가 젖었어요.”“지금은 수프부터야.”“글씨가 번지면 어떡해요?”도리는 손가락으로 일지의 표지를 눌렀다. 손등이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겁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표지는 젖었지만, 안쪽은 아직 볼 수 있어.”제독님이 그릇을 도리 쪽으로 조금 밀었다.“따뜻할 때 드십시오.”도리는 그릇을 바라봤다.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일지를 먼저 말려야 해요.”“그건 내가 볼게.”“누나가요?”“응. 네가 들고 있던 기록이니까 내가 확인할게.”도리는 잠시 나를 보았다. 그제야 일지를 무릎에서 들어 탁자 위에 놓았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내게 건넸다.나는 일지를 받았다. 표지 가장자리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종이 끝은 조금 들떠 있었지만 찢어지지는 않았다. 안쪽 페이지를 급히 넘기지 않고, 젖은 곳을 피해 한 장씩 살폈다.“글씨는 읽을 수 있어.”“정말요?”“응. 네가 쓴 시각도 보여.”도리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그럼 됐어요.”그는 숟가락을 들었다. 젖은 손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숟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가벼운 소리가 났다.제독님이 그릇을 잡아 주었다.“천천히 드십시오.”“제가 할 수 있어요.”“알고 있습니다.”제독님은 손을 거뒀다. 도리는 숟가락을 다시 잡고 수프를 조금 떠먹었다. 뜨거웠는지 입술을 오므렸다가, 천천히 삼켰다.“생선 수프예요?”“그렇습니다.”“비린내가 안 나요.”“따뜻하게 데웠습니다.”“제독님이요?”“아닙니다. 가져온 것을 데웠습니다.”제독님은 그릇 옆에 놓인 수건을 도리 쪽으로 밀었다. 도리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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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불이 아니라

「부두 끝 탑에서 보니 회색곶의 긴 빛이 12초마다 만을 건너왔다.새 종줄이 바람을 받아 낮게 한 번 울었다.」11월 10일, 나는 일몰 시각에 불을 켜고 곧바로 계단을 내려왔다.관리실 탁자 위에 새 밧줄이 둥글게 감겨 있었다. 아침에 수잔나가 칼메 밧줄 가게에서 받아 올려 보낸 줄이었다. 9월에 쪽지에 적어 둔 값 그대로였다. 굵고 단단했다. 손바닥으로 쓸면 아직 삼 냄새가 났다.마게가 렌즈실 계단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오늘 밤 안개가 온다 했소?”“기상 기록으로는 자정 전에 옵니다. 그 전에 종에 줄을 달아야 합니다.”“불은 내가 보오. 심지는 자정에 손톱만큼. 안개가 오면 아가씨 문짝 표대로 가리겠소.”“부탁드립니다.”노인은 장갑 낀 손을 한 번 들었다 내렸다. 사흘 전 도리를 건진 밤에도 노인은 이렇게 손을 들었다. 그 밤 이후로 마게는 렌즈실 계단에 자주 앉았다.도리는 아직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이불을 둘둘 감고 관리실 난롯가에서 내 일지를 베끼고 있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누나, 그 줄 오늘 다는 거예요?”“응.”“제독님이랑요?”“달 때 알려 달라고 하셨으니까.”도리가 이불 속에서 입을 막았다. 눈만 웃고 있었다.“도리.”“아무 말도 안 했어요.”“눈이 했어.”도리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났다. 사흘 전 밤바다에서 건져 올린 아이였다. 그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마게가 새 줄 한쪽 끝을 들어 장갑 낀 손으로 비틀어 보았다.“새 줄은 처음 몇 번 당기면 늘어나오. 늘어난 만큼 다시 조이시오. 안 그러면 한 달 안에 추가 바닥에 닿소.”“기억하겠습니다.”“기억 말고 적으시오.”나는 일지 귀퉁이에 적었다. 새 줄, 처음 몇 번 당긴 뒤 다시 조일 것. 마게가 그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마당에서 마차 바퀴 소리가 났다.마차 안에서 제독은 새 줄 꾸러미를 무릎에 올려 두었다. 40분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줄 꼬임을 하나씩 짚고 있었다. 나도 말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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