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

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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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oUpdated just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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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 선언이 사백 명 앞에서 울려 퍼진 밤, 약혼 계약서 제9조를 소리 내어 읽은 영애가 등대 임명서를 꺼냈다. «내일 해 지기 전에 그 등대에 불을 켜겠습니다.» 몰락한 영애 노엘라가 맡은 곳은 십수 년째 불이 꺼진 곶의 등대. 30일까지 빈 날 없는 일지를 채워야 직위를 지킨다. 막는 사람은 전 약혼자 쪽 사람들, 그리고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오는 말 적은 제독 유리안 하그. 분 단위로 말하는 그는 확인자에서 공동 관리인이 되어 간다. 일지·시험·증인으로 이기는 파혼 영애 직업물 로맨스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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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파혼 선언

「샹들리에 아래 잔마다 촛불이 하나씩 떠 있었다.

연주가 멎자 유리잔 부딪는 소리만 홀에 남았다.」

“노엘라 페른과의 약혼을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내겠습니다.”

클라우스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샴페인 잔을 막 쟁반에 내려놓던 참이었다.

현악기 소리가 한 줄씩 끊겼다. 마지막 첼로가 멈추자 홀이 조용해졌다.

비스 백작저의 가을 야회였다. 수도 카렌시아에서 이름 있는 집은 다 왔다. 사백 명의 눈이 홀 한가운데로 모였다. 거기 클라우스가 서 있었고, 그 앞에 내가 서 있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클라우스는 금발을 한 번 쓸어 넘겼다. 옷깃에 꽂은 꽃에서 향이 진하게 번졌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

“페른 가는 바다 냄새가 나. 우리 집과는 맞지 않아.”

누군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는 소리가 몇 군데서 새어 나왔다.

바다 냄새.

아버지는 1년 전 겨울에 돌아가셨다. 회색곶 등대의 마지막 일지를 쓰다가 쓰러지셨다. 후작이면서 등대를 직접 돌본 사람이었다. 수도 사람들은 그걸 우스갯거리로 삼았다. 나는 그 말을 오늘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약혼자의 입으로, 사백 명 앞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이 굳었다. 나는 손을 펴서 치맛자락 옆에 내려 두었다.

“알겠습니다.”

클라우스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울거나 매달릴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

나는 손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종이 두 장이 접혀 있었다. 오늘 밤 클라우스에게 보여 주려고 챙겨 온 것들이었다. 하나는 2년 전에 우리 두 집이 서명한 약혼 계약서였다.

“그럼 계약서대로 하겠습니다.”

“노엘라, 여기서 그런 걸 꺼낼 필요는…….”

“꺼낼 필요가 있습니다. 약혼은 계약이었으니까요.”

나는 계약서를 펼쳤다. 종이 접힌 자국이 촛불 아래서 하얗게 드러났다.

“제9조를 읽겠습니다.”

홀 안쪽에서 아이삭 비스 백작이 걸어 나왔다. 은발을 뒤로 넘긴 어깨 넓은 사내였다. 금 도장 반지를 낀 손이 아들의 팔꿈치를 잡았다.

“페른 영애. 여기는 야회장이오. 서류는 내일 집사들끼리 정리하면 될 일이오.”

“백작님. 파혼은 오늘 여기서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조항도 오늘 여기서 읽는 게 맞습니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9조. 어느 한쪽이 아래 정한 사유 없이 약혼을 깨면, 깬 쪽 가문은 상대 가문에 위약금으로 금화 300닢을 지급한다. 정한 사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 상대의 중죄. 둘, 상대 가문의 반역. 셋, 상대의 혼인 전 다른 혼약.”

나는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

“바다 냄새는 목록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웃음이 크게 터졌다. 아까와는 다른 쪽에서였다.

클라우스의 귀가 붉어졌다. 아이삭 백작의 반지 낀 손이 아들의 팔꿈치에서 떨어졌다.

“이 계약서는 우리 집 법률가가 쓴 것이오.”

“네. 그래서 더 정확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래에 양가 서명과 공증 도장이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나는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받지 않아도 그 서명이 자기 것이라는 건 알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내일 수도에는 페른 영애가 울면서 나갔다는 말만 남는다.’

나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아이삭 백작이 홀을 한 번 둘러봤다. 사백 명이 보고 있었다. 그중 절반은 비스 해운과 거래하는 집이었다. 그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집사. 어음 용지를 가져오게.”

집사가 은쟁반에 종이와 펜을 받쳐 왔다. 백작은 쟁반 위에서 금액을 썼다. 금화 300닢. 촛대에서 녹인 밀랍을 한 방울 떨어뜨리고, 금 도장 반지를 그 위에 눌렀다.

반지가 떨어진 자리에 비스 가의 문장이 찍혔다.

“받으시오. 이걸로 페른 가와 우리 집 사이에 남은 건 없소.”

“감사합니다.”

나는 어음을 접어 계약서 사이에 끼웠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종이가 떨리는 건 보이지 않게 가방 안에서 접었다.

*

“한 가지만 더 말해 두지.”

내가 돌아서기 전에 아이삭 백작이 말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영애가 집으로 돌아가면 알게 될 일이니 미리 알려 주는 거요. 회색곶 등대 말이오. 마게 노인이 이번 주로 그만둔다고 했소. 내일부터는 우리 해운 사람이 올라가 불을 켜기로 했지.”

홀이 다시 웅성거렸다.

“감독청에도 서류를 넣어 두었소. 이달 30일까지 페른 직계가 관리인으로 취임하지 않으면 관리권은 비스 해운이 맡는다. 등대국 규정 그대로요. 후작이 돌아가신 지 1년이나 비어 있었으니 누가 봐도 당연한 일이지.”

그는 나를 내려다봤다.

“수도의 영애가 곶 끝 돌탑에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살 수는 없지 않소. 이게 영애를 위한 일이기도 하오.”

나는 가방 안에서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왕립 등대국의 붉은 봉인이 찍힌 종이였다. 접힌 자리를 펴자 맨 위 글자가 보였다.

[회색곶 등대 관리 임명서. 페른 후작가 직계 노엘라 페른.]

“이것도 오늘 클라우스 님께 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결혼한 뒤에 등대를 어떻게 할지 함께 정하고 싶었거든요.”

클라우스가 그 종이를 보았다. 처음으로 내 얼굴을 똑바로 봤다.

“그게 왜 네 손에 있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겠다고 지난달에 신청했습니다. 등대국은 사흘 전에 내 주었습니다. 서명만 하면 됩니다.”

나는 집사의 쟁반에 놓인 펜을 집었다. 아이삭 백작이 어음을 쓰던 그 펜이었다. 임명서 아래 빈칸에 이름을 적었다. 노엘라 페른. 마지막 획을 길게 긋지 않았다.

“취임 마감은 이달 30일입니다. 오늘이 1일이니 넉넉합니다.”

“서명 한 줄로 등대지기가 되는 줄 아시오?”

아이삭 백작이 웃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부드럽지 않았다.

“회색곶은 불이 자주 늦는다는 민원이 해운에 쌓여 있소. 영애가 곶에 닿기도 전에 우리 사람이 불을 켜면, 감독청은 누가 등대를 지켰다고 적겠소?”

그 말에 홀이 조용해졌다.

나는 대답 대신 홀 구석을 봤다.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사람이 있었다.

창가 기둥 옆에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깎았고 키가 컸다. 모두가 샴페인 잔을 들고 있는데 그 사람만 빈손이었다. 아니, 손에 든 게 있었다. 황동 주머니 시계였다.

그는 뚜껑을 열었다. 안을 보았다. 닫았다. 잠시 뒤 다시 열었다.

이 소동을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시계 안을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내가 임명서를 펼쳤을 때, 그 손이 한 번 멈췄다. 뚜껑을 열어 둔 채로.

‘몇 시를 보는 걸까.’

나는 시선을 거두고 아이삭 백작을 다시 봤다.

“백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불을 먼저 켜는 사람이 등대를 지킨 사람입니다.”

“그럼 알아들었구려.”

“네. 그래서 지금 가겠습니다.”

나는 임명서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장갑을 벗어 쟁반 위에 올려 두었다. 춤출 일은 이제 없었다.

“노엘라.”

클라우스가 불렀다. 나는 돌아보았다.

“지금 곶으로 간다고? 이 밤에? 마차로 밤새 달려야 하는 길이야.”

“네. 그래서 지금 가야 합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렌즈는 그을음투성이고 노인 하나가 투덜거리는 돌탑이야. 너는 사흘도 못 버텨.”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마감은 30일이니까요.”

클라우스의 입이 다물어졌다.

아이삭 백작이 아들의 어깨를 짚었다. 반지가 촛불을 받아 번쩍였다.

“해운 사람에게는 내일 일몰에 맞춰 올라가라고 일러 두었소. 영애가 그보다 늦으면, 그 불은 우리 불이오.”

사백 명이 숨을 죽였다. 누군가의 잔에서 거품 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쥐고 돌아섰다.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창가 기둥 옆을 지날 때 군복 남자는 시계를 손바닥에 올려 둔 채 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백작저 앞 계단은 마차 등불로 환했다.

내가 타고 온 마차는 줄 맨 끝에 서 있었다. 마부가 나를 보더니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곤란했다.

“아가씨, 칼메 쪽으로는 못 갑니다.”

“삯은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삯 문제가 아닙니다. 방금 백작저 집사가 나와서 말을 돌렸습니다. 오늘 밤 칼메로 가는 마차는 비스 해운 일을 다시는 못 받는다고요.”

나는 계단 아래 마차 줄을 훑어보았다. 마부들이 하나같이 내 눈을 피했다. 수도의 마차 절반이 비스 해운 짐을 날랐다. 아이삭 백작은 홀을 나서기도 전에 이것까지 해 두었다.

뒤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클라우스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거봐. 오늘은 그냥 집에 가. 내일 아침에 사람을 보내 줄게. 우리 해운 사람이 불을 켜도 등대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없어지는 건 아니지요. 남의 것이 될 뿐이에요.”

나는 대답하고 길 건너를 봤다.

백작저 담장 끝, 가로등 아래에 짐수레 하나가 서 있었다. 비린내가 여기까지 났다. 칼메 항에서 새벽 생선을 싣고 올라와 빈 궤짝을 싣고 내려가는 수레였다. 마부는 궤짝에 기대 빵을 씹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길을 건넜다. 클라우스가 따라오다가 수레 앞에서 멈췄다. 비린내 때문이었다.

“칼메로 내려가십니까?”

수레 마부가 빵을 삼키고 나를 위아래로 봤다. 야회복에 진주 귀걸이를 한 여자가 생선 수레 앞에 서 있었다.

“내려가긴 하는데요. 아가씨가 탈 자리는 없습니다. 궤짝 위뿐이에요.”

“궤짝 위면 됩니다. 회색곶 갈림길까지만 태워 주세요. 해 뜨기 전에 닿아야 합니다.”

“삯은요?”

가방에는 은화 몇 닢이 전부였다. 어음은 은행이 열려야 돈이 된다. 나는 귀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가 남긴 진주 귀걸이였다. 열두 살 때부터 이 귀걸이만큼은 팔지 않았다.

나는 한 짝을 빼서 마부 손바닥에 놓았다.

“나머지 한 짝은 갈림길에 닿으면 드리겠습니다.”

마부가 진주를 가로등에 비춰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는 궤짝 하나를 끌어 내려 자리를 만들었다.

“노엘라. 너 정말 생선 수레를 타고 가겠다고?”

클라우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계단 위 손님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궤짝을 딛고 수레에 올랐다. 치맛자락에 젖은 소금기가 배어들었다. 차가웠다.

“네. 바다 냄새 나는 가문이라서요.”

클라우스의 얼굴이 굳었다. 계단 위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부채 몇 개가 한꺼번에 펼쳐졌다.

그때 계단 꼭대기에 군복 남자가 나와 섰다. 홀에서 본 그 사람이었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다. 손에 든 시계 뚜껑을 열어 두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수레의 등불이 그 시계 유리에 비쳤다.

클라우스가 수레 바퀴를 손으로 짚었다.

“후회할 거야. 회색곶은 네가 생각하는 곳이 아니야.”

“생각한 곳인지 아닌지는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마부가 고삐를 쥐었다. 말이 콧김을 뿜었다.

나는 궤짝 위에서 몸을 돌려 백작저를 보았다. 클라우스, 계단 위의 손님들, 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삭 백작의 넓은 어깨. 그리고 계단 꼭대기의 군복 남자.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내일 해 지기 전에, 그 등대에 불을 켜겠습니다.”

수레가 덜컹 움직였다. 계단 꼭대기에서 짧은 쇳소리가 났다. 군복 남자가 시계 뚜껑을 닫았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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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파혼 선언
「샹들리에 아래 잔마다 촛불이 하나씩 떠 있었다.연주가 멎자 유리잔 부딪는 소리만 홀에 남았다.」“노엘라 페른과의 약혼을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내겠습니다.”클라우스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샴페인 잔을 막 쟁반에 내려놓던 참이었다.현악기 소리가 한 줄씩 끊겼다. 마지막 첼로가 멈추자 홀이 조용해졌다.비스 백작저의 가을 야회였다. 수도 카렌시아에서 이름 있는 집은 다 왔다. 사백 명의 눈이 홀 한가운데로 모였다. 거기 클라우스가 서 있었고, 그 앞에 내가 서 있었다.“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클라우스는 금발을 한 번 쓸어 넘겼다. 옷깃에 꽂은 꽃에서 향이 진하게 번졌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홀을 둘러보며 말했다.“페른 가는 바다 냄새가 나. 우리 집과는 맞지 않아.”누군가 부채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는 소리가 몇 군데서 새어 나왔다.바다 냄새.아버지는 1년 전 겨울에 돌아가셨다. 회색곶 등대의 마지막 일지를 쓰다가 쓰러지셨다. 후작이면서 등대를 직접 돌본 사람이었다. 수도 사람들은 그걸 우스갯거리로 삼았다. 나는 그 말을 오늘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다만 약혼자의 입으로, 사백 명 앞에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장갑 안에서 손가락이 굳었다. 나는 손을 펴서 치맛자락 옆에 내려 두었다.“알겠습니다.”클라우스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울거나 매달릴 줄 알았던 얼굴이었다.나는 손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종이 두 장이 접혀 있었다. 오늘 밤 클라우스에게 보여 주려고 챙겨 온 것들이었다. 하나는 2년 전에 우리 두 집이 서명한 약혼 계약서였다.“그럼 계약서대로 하겠습니다.”“노엘라, 여기서 그런 걸 꺼낼 필요는…….”“꺼낼 필요가 있습니다. 약혼은 계약이었으니까요.”나는 계약서를 펼쳤다. 종이 접힌 자국이 촛불 아래서 하얗게 드러났다.“제9조를 읽겠습니다.”홀 안쪽에서 아이삭 비스 백작이 걸어 나왔다. 은발을 뒤로 넘긴 어깨 넓은 사내였다. 금 도장 반지를 낀 손이 아들의 팔꿈치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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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해 지기 전
「새벽 바다는 회색이었다.곶 꼭대기의 꺼진 등대가 하늘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생선 수레는 회색곶 갈림길에서 나를 내려 주었다.밤새 궤짝 위에서 흔들린 탓에 다리가 제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남은 진주 한 짝을 마부에게 건넸다. 마부는 진주를 받고 모자를 살짝 들었다.“아가씨, 등대는 저 오르막 끝입니다. 노인네가 사나우니 조심하십쇼.”수레가 칼메 항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치마를 걷어 쥐고 오르막을 올랐다.곶 꼭대기에 흰 돌탑이 서 있었다. 회색곶 등대. 높이 31m.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다.탑 아래 관리실 문 앞에 노인 하나가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흰 수염에 등이 굽은 사람이었다. 오른손에 낀 가죽 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뎃손가락 자리가 반쪽에서 끊겨 있었다.마게 올든. 아버지 편지에 몇 번 나오던 이름이었다.“길 잃은 거면 내려가시오.”“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노엘라 페른입니다. 오늘부터 이 등대 관리인입니다.”나는 임명서를 펼쳐 보였다. 마게는 종이를 보지 않고 내 치맛자락을 봤다. 소금물에 젖어 허옇게 얼룩진 야회복이었다.“후작 나리 딸이구먼.”“네.”“그 옷으로 계단 142칸을 오르겠다고?”“옷은 갈아입겠습니다. 계단은 오르겠습니다.”마게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관리실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관리실에는 아버지의 작업복이 아직 걸려 있었다.책상 위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잉크병은 말라 바닥에 검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앉던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나무가 차가웠다.마게가 문간에 기대 서서 말했다.“한 가지만 묻겠소. 아가씨는 등대 불을 몇 번이나 켜 봤소?”“아버지 옆에서 여러 번 봤습니다.”“본 거 말고. 켜 본 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게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줄 알았소. 렌즈 한 번 안 닦아 본 손으로 오늘 저녁까지 불을 켜겠다니. 해운 사람이 오면 그냥 열쇠를 넘기시오. 그게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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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일지 한 줄
「렌즈가 돌 때마다 흰 빛이 계단 벽을 한 칸씩 쓸고 내려갔다.12초가 지나면 그 자리가 다시 밝아졌다.」군복 남자가 렌즈실 문턱에 올라섰다.키가 컸다. 문틀에 닿지 않으려고 고개를 조금 숙였다. 검은 머리는 짧았고, 눈은 짙은 청색이었다. 계단 142칸을 올라왔는데 숨소리가 고르지 않은 데가 없었다.나는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어젯밤 비스 백작저 창가 기둥 옆. 샴페인 대신 시계를 들고 있던 사람이었다.“왕립 해군 제2함대 제독 유리안 하그입니다.”그는 모자를 벗어 옆구리에 끼웠다.“회색곶은 함대 항로의 첫 등대입니다. 오늘 점등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일지를 보여 주십시오.”‘제독이 직접 등대 계단을 오른다고?’도리가 내 소매를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아이는 제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렌즈 뒤로 반쯤 숨었다.제독의 시선이 렌즈로 갔다. 닦인 유리 면과, 받침대 아래 쌓인 검은 천 더미를 차례로 보았다. 그러고는 렌즈 뒤를 보았다.“거기 있는 사람은.”도리가 렌즈 뒤에서 굳었다. 나는 아이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대신 대답했다.“도리입니다. 오늘 이 아이가 렌즈 절반을 닦았습니다.”“도리.”제독이 아이 이름을 한 번 불렀다. 그게 다였다. 도리는 렌즈 뒤에서 나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앞머리가 눈을 덮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을음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는 게 보였다.“일지는 아래 관리실에 있습니다. 내려가시지요, 하그 제독님.”“예.”그는 길을 비켜섰다. 내가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군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따라왔다. 중간쯤에서 벽에 붙어 서 있던 마게가 고개를 숙였다. 제독은 마게 앞에서 걸음을 한 번 늦췄다. 마게는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관리실 램프에 불을 붙였다.나는 책상 서랍에 열쇠를 꽂았다. 다섯 번째 열쇠였다. 서랍 안에 두꺼운 가죽 표지 일지가 누워 있었다. 표지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쓰던 일지였다.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기록을 찾으려고 뒤에서부터 넘겼다. 빈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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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묽은 기름
「렌즈를 지난 빛이 바다로 나가다 중간에서 흐려졌다.흰빛이어야 할 끝자락이 누렇게 풀려 있었다.」“관리인님, 불이 노래요.”도리가 렌즈실 창에 코를 붙이고 말했다.9월 4일 저녁이었다. 나는 일몰 시각에 맞춰 불을 켰다. 어제도 그랬다. 이틀 연속 일지에 늦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렌즈는 아침마다 닦았다. 그런데 오늘은 빛이 달랐다.나는 창으로 다가갔다. 렌즈가 한 바퀴 돌며 긴 빛을 바다로 보냈다. 빛줄기가 곶 앞 암초 쪽으로 뻗다가 중간에서 힘이 빠졌다. 암초 위에 떠 있는 부표가 보이지 않았다. 사흘 전, 처음 불을 켠 밤에는 그 부표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심지를 봐 줄래?”도리가 렌즈 받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금방 고개를 내밀었다.“심지는 멀쩡해요. 끝도 어제 잘랐고요. 그런데 불꽃이 얇아요. 자꾸 파르르 떨어요.”나는 렌즈 유리에 손등을 댔다. 그을음은 없었다. 아침에 닦은 그대로였다.렌즈가 깨끗하고 심지가 멀쩡한데 불이 약했다. 남은 건 하나였다.“기름이야.”*기름 창고는 관리실 바닥 아래에 있었다. 나무 뚜껑을 들어 올리면 돌계단이 지하로 이어졌다. 저장 탱크 하나와 기름통 여러 개가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이틀 전 비스 해운 사내가 굴려 넣은 통들이었다. 통마다 검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나는 등잔을 선반에 올리고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관리인님, 뭐 찾아요?”“아버지가 쓰시던 시험 병.”아버지는 새 기름이 오면 늘 시험을 하셨다. 나는 어릴 때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숫자를 함께 셌다. 병을 기울이고, 기름이 병 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세는 시험이었다. 좋은 기름은 진해서 천천히 흘렀다. 물이 섞이면 빨리 흘렀다.선반 맨 아래 칸에 작은 유리병 두 개가 엎어져 있었다. 그 옆에 마개를 밀랍으로 봉한 병이 하나 있었다. 병에 붙은 종이에 아버지 글씨가 적혀 있었다.[기준 기름. 은화 4닢짜리. 열지 말 것. 시험용.]손가락으로 그 글씨를 한 번 쓸었다. 종이가 바래 있었다. 밀랍은 그대로였다.“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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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물전 수잔나
「한낮의 칼메 항은 비늘과 소금으로 반짝였다.갈매기 우는 소리 사이로 흥정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기름은 안 팔아요. 미안해요, 아가씨.”세 번째 가게였다.앞의 두 집도 똑같이 말했다. 하나는 내가 회색곶 등대 관리인이라고 하자마자 문을 닫았다. 다른 하나는 값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둘 다 한쪽을 힐끔 보았다. 부두 끝, 비스 해운 창고가 있는 쪽이었다.9월 5일 아침이었다. 나는 동이 트자마자 도리와 함께 곶을 내려왔다. 마차를 부를 돈이 없었다. 손수레를 밀고 6km를 걸었다. 도리는 오르막에서 수레를 끌고 나는 내리막에서 붙잡았다.탱크 위쪽 기름은 오늘 밤까지였다. 내일 밤에는 바닥의 탁한 기름까지 써야 했다. 그러면 불은 반쪽도 안 된다.“관리인님, 저기요. 저 집은 뭐든 팔아요.”도리가 시장 끝 모퉁이를 가리켰다. 간판에 생선 그림과 소금 자루 그림이 나란히 그려진 가게였다. 문 앞 좌판에 절인 생선이 줄지어 누워 있었고, 그 뒤 선반에 등잔 기름통이 쌓여 있었다.가게 안쪽에서 둥근 체격의 여자가 장부를 펴 놓고 있었다. 팔뚝이 굵었다. 한 손에 돋보기를 들고 숫자를 짚어 내려가다가 우리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생선이요, 소금이요?”“기름입니다. 등잔 기름 2통이 필요합니다. 회색곶 등대에 쓸 겁니다.”여자의 돋보기가 멈췄다.“회색곶. 그 후작 나리 딸이 왔다는 등대?”“네. 노엘라 페른입니다.”“수잔나예요. 이 가게 주인.”수잔나는 장부를 덮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한참 보았다. 동정하는 눈도, 비웃는 눈도 아니었다. 생선 물이 좋은지 보는 눈이었다.“딱하게 됐네. 근데 아가씨, 등대 기름은 비스 해운 몫이에요. 이 항구에서 그건 다 알아.”“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쭙니다. 비스 해운이 아닌 곳에서 사야 하니까요.”“왜?”나는 가방에서 쪽지를 꺼냈다. 30, 12, 13, 12. 어젯밤 숫자였다.“병을 기울여 흐르는 시간을 셌습니다. 제값 기름은 30셈입니다. 비스 해운이 넣은 기름은 12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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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안개종
「안개가 부두를 삼키자 불빛은 젖은 솜 속으로 가라앉았다.쇠를 두드리는 소리만 물 위로 멀리 퍼져 나갔다.」안개는 해가 진 뒤에 왔다.9월 8일 저녁, 나는 일몰 시각에 맞춰 불을 켰다. 수잔나 가게 기름이었다. 어제 시험에서 30셈이 나온 기름이었다. 빛은 곶 앞 암초 부표를 지나 먼바다까지 곧게 뻗었다. 나는 일지에 정시라고 적고 펜을 놓았다.그때 창밖 바다가 지워지기 시작했다.수평선부터였다. 회색 벽이 물 위를 미끄러져 왔다. 부표가 먼저 사라지고, 암초가 사라지고, 곶 아래 마을 지붕들이 사라졌다. 렌즈의 긴 빛이 안개에 부딪혀 하얗게 번졌다. 멀리 나가지 못하고 곶 바로 앞에서 흩어졌다.마게가 계단을 올라와 창가에 섰다. 이번에는 숨을 고르지도 않고 말했다.“오늘 아침에 고깃배 열두 척이 나갔소. 아직 하나도 안 들어왔소.”“이 안개에서 칼메 부두 입구를 찾을 수 있습니까?”“등대 불로는 곶이 어디 있는지만 알지, 부두 입구는 못 찾소. 그래서 부두 끝에 안개종이 있는 거요. 종소리 듣고 들어오라고.”“그럼 누가 그 종을 칩니까?”마게의 장갑 낀 손이 창틀을 짚었다.“종지기는 작년 봄에 그만뒀소. 그 뒤로는 비 오는 날 부두 사람들이 돌아가며 쳤지. 근데 그 종줄이 낡았소. 추도 녹슬고. 한 번 세게 당기면 끊어질 거요.”나는 창밖을 봤다. 안개는 이제 곶 마당까지 올라와 있었다. 렌즈의 빛이 안개 속에서 둥근 덩어리로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되풀이했다.“부두까지 얼마나 걸립니까?”“마차로 40분. 걸어서는 안 되오. 이 안개에 곶 비탈길을 걸으면 바다로 떨어지오.”마차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때 마당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안개 속에서 등불 두 개가 흔들리며 다가왔다. 마차였다. 해군 마차.*마차 문이 열리고 하그 제독이 내렸다. 마부석에는 붉은 머리의 군인이 앉아 있었다.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관리실 문 앞에서 제독과 마주쳤다.“하그 제독님, 저녁 점등은 확인하고 가셨지요.”“예. 칼메로 내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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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투덜대는 선장들
「해 질 녘 렌즈가 첫 바퀴를 돌자 마당의 종이가 한 번 하얗게 빛났다.문짝에 박힌 못 머리가 그 빛을 받아 반짝였다.」“여자가 불을 지키는 등대는 불길하다고, 우리 할아비 때부터 그랬소.”아침이었다. 관리실 앞마당에 선장 다섯이 서 있었다. 어젯밤 안개 속에서 돌아온 배의 선장들이었다. 맨 앞에 수염 난 사내가 낡은 해도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어젯밤 뱃전에서 나를 가리켜 소리치던 그 사람이었다.방금 그 말을 한 건 그 사내가 아니었다. 뒤쪽의 마른 선장이었다.나는 관리실 문 앞에 섰다. 손에는 밤새 쓴 종이가 들려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젯밤 칼메 부두에서 돌아온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그 뒤로 등잔 아래서 아버지 일지를 넘겼다. 렌즈 불을 끄고 나서야 종이를 접었다.“고맙다는 말을 하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마른 선장이 침을 뱉었다.“지난주에 회색곶 불이 반쪽이었소. 후작 딸이 왔다는 그 주에. 우리 배 하나는 그날 밤 암초 쪽으로 붙을 뻔했소. 그러고 어젯밤엔 안개. 등대 주인이 바뀌자마자 바다가 사나워졌단 말이오.”선장 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염 난 사내는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해도만 고쳐 꼈다.“불이 반쪽이었던 날은 9월 4일 하루입니다.”나는 또박또박 말했다.“비스 해운이 넣은 기름에 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시험해서 숫자로 적어 두었습니다. 다음 날부터는 칼메에서 제 돈으로 기름을 사서 씁니다. 일지에 다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글은 못 읽소.”“그럼 읽어 드리겠습니다.”마른 선장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수염 난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마당 끝 우물까지 울렸다.“일지 얘기는 됐고. 어젯밤 그 불 깜박이던 거. 그거나 물읍시다. 내가 뱃전에서 물었는데 대답을 안 했잖소.”“숨이 차서 못 했습니다. 지금 드리겠습니다.”*나는 종이를 펼쳤다.밤새 아버지 일지를 뒤졌다. 안개가 낀 날의 기록을 전부 찾았다. 아버지는 안개 낀 밤마다 불을 어떻게 가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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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도리의 아버지
「저물녘 곶 아래 오두막 창마다 등잔이 하나씩 켜졌다.그 위로 등대의 긴 빛이 12초마다 지붕을 덮고 지나갔다.」도리가 오지 않았다.9월 11일, 해가 중천에 올라도 마당에 구멍 난 장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곶에 온 뒤로 아이는 하루도 늦은 적이 없었다. 아침마다 렌즈를 닦는 시각이면 계단 아래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렌즈를 혼자 닦았다. 아래쪽 면에 손이 닿지 않아 받침대에 무릎을 꿇었다. 도리가 늘 닦던 자리였다.마게가 우물가에서 말했다.“아비가 또 아픈가 보오.”“도리 아버님이 편찮으십니까?”“다리를 다쳤소. 몇 해 됐지. 비 오기 전날이면 못 일어나오.”하늘은 맑았다. 비 올 날씨가 아니었다.나는 렌즈 천을 내려놓고 작업복 소매를 내렸다.“마게 씨. 오늘 저녁 점등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지기 전에 못 올라올지도 모릅니다.”마게가 두레박을 멈췄다. 나를 돌아보았다. 곶에 온 뒤로 내가 이 노인에게 불을 맡긴 건 안개 낀 밤 한 번이 전부였다. 그때는 급해서였다. 오늘은 아니었다.“일몰 시각은 일지에 적혀 있소?”“관리실 책상 위에 펴 두었습니다.”노인은 대답 대신 장갑 낀 손을 한 번 들었다 내렸다.*도리네 오두막은 곶 아래 바위틈에 붙어 있었다. 지붕에 그물이 널려 있고 문 옆에 깨진 노가 세워져 있었다.내가 비탈을 다 내려갔을 때, 오두막 문 앞에서 사내 하나가 돌아서고 있었다. 소매에 비스 해운의 검은 띠를 두른 사내였다. 손에 장부를 들고 있었다. 사내는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하더니 해안 길로 걸어갔다. 휘파람을 불었다.문짝에 종이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못이 비뚤게 박혀 있었다.[미납 독촉. 비스 해운. 이달 말일까지.]그 아래 금액 칸이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읽기 전에 시선을 돌렸다. 남의 집 문짝이었다.문이 열렸다. 도리가 서 있었다. 내 얼굴을 보자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을 뻗어 문짝의 종이를 뜯어냈다. 구겨서 등 뒤로 감췄다.“관리인님이 왜 여기…….”“오늘 렌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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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삼십 분
「렌즈실 창으로 들어온 아침 해가 관리실 계단까지 길게 내려왔다.마당에서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두 번 났다.」마게의 보따리는 관리실 문 앞에 있었다.9월 13일 아침이었다. 나는 렌즈를 닦고 내려오다가 그 보따리를 보았다. 낡은 담요로 싼 짐 하나, 끈으로 묶은 냄비 하나. 그 옆에 마게가 서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곶에 온 뒤로 노인이 모자를 쓴 건 처음 보았다.마당 입구에 짐수레가 서 있었다. 칼메로 생선 상자를 나르는 수레였다. 마부가 고삐를 손에 감고 하품을 했다.“가시는 겁니까?”“이번 주로 그만둔다고 했소. 비스 백작한테도, 등대국에도.”“오늘이 토요일입니다. 이번 주 마지막 날이요.”“그러니 가는 거요.”마게는 내게 열쇠 하나를 내밀었다. 굵고 녹슨 열쇠였다. 기름 창고 뚜껑 열쇠였다. 내 꾸러미에도 그 열쇠가 있었다. 노인의 열쇠는 노인이 1년 동안 손에 쥐고 다닌 열쇠였다.“이건 등대 거니 두고 가오.”나는 열쇠를 받지 않았다.마부가 소리쳤다.“영감님, 30분 뒤에 떠납니다! 칼메 장 서기 전에 닿아야 해서요!”마게가 손을 들어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열쇠를 내 손에 억지로 쥐여 주려 했다. 나는 손을 펴지 않았다.‘30분.’나는 관리실 벽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마게를 보았다.“30분만 주십시오.”“뭘 하겠다고.”“일지 쓰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마차 떠나기 전까지만.”*마게는 코웃음을 쳤다.“후작 나리 딸이 일지 쓰는 법을 몰라?”“아버지 일지는 읽을 줄 압니다. 쓰는 법도 흉내는 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게 있습니다.”나는 관리실 책상에 일지를 펼쳤다. 내가 열하루 동안 쓴 줄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반에서 마게의 얇은 일지를 꺼내 그 옆에 놓았다. 지난 1년 동안 노인이 쓴 기록이었다.“마게 씨 일지에는 제 일지에 없는 칸이 있습니다. 심지 자른 시각. 하룻밤에 3번씩, 꼬박꼬박. 아버지 일지에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칸을 비워 두고 있습니다. 언제 잘라야 하는지 몰라서요. 불꽃이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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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프레야호
「자정 무렵 곶 아래 비탈에 등불 하나가 멈춰 섰다.렌즈의 빛이 지나갈 때마다 그 등불은 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9월 14일 밤, 하그 제독은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곶에 온 뒤로 처음이었다. 그는 매일 저녁 일몰 무렵 왔다. 불이 켜지는 걸 보고, 시계 뚜껑을 닫고, 내려갔다. 열이틀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그날은 해가 지고 불이 켜져도 마당에 군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렌즈실 창으로 비탈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23시가 조금 넘었을 때 비탈 중간에 등불 하나가 나타났다. 등불은 올라오지 않았다. 바위 옆에 멈춰 섰다.나는 내려가 볼까 생각했다. 렌즈실에서 비탈까지는 계단 142칸에 마당을 지나 한참이었다. 그동안 심지를 볼 사람이 없었다. 마게는 작은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바람이 비탈을 쓸고 올라왔다. 등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꺼지지는 않았다. 잠시 뒤 다시 곧게 섰다.나는 1시간에 한 줄씩 일지를 썼다. 마게가 가르쳐 준 대로였다. 이상 없음. 자정에 심지를 잘랐다. 손톱만큼. 그때도 등불은 그 자리에 있었다. 새벽 2시에 두 번째로 잘랐다. 등불은 그대로였다.해가 뜨기 직전, 렌즈 불을 끄러 일어섰을 때 비탈을 다시 보았다.등불이 꺼져 있었다. 바위 옆에 아무도 없었다.[9월 14일. 23시경부터 일출까지 곶 아래 비탈에 등불 하나. 올라오지 않음.]나는 그 줄을 쓰고 한참 펜을 들고 있었다.아침에 마게가 일지를 넘겨보았다. 노인은 이제 아침마다 내 줄을 읽고 틀린 데를 짚었다. 그날은 짚지 않았다. 마지막 줄에서 눈이 멎었다. 등불 하나. 올라오지 않음.마게의 장갑 낀 손이 일지 모서리를 눌렀다. 한참 그대로 있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지를 덮고 우물가로 나갔다. 두레박 줄을 감는 소리가 평소보다 오래 이어졌다.*아침에 비스 해운 소매 띠를 두른 소년이 편지를 들고 올라왔다.봉투에 비스 가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마당에서 봉투를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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