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당한 영애가 등대지기가 되었더니 제독이 밤마다 불을 확인하러 온다의 모든 챕터: 챕터 61 - 챕터 70

80 챕터

61화. 무너진 비스

「비스 해운 본사 앞에 붙은 압류 표지가 등불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닫힌 창 안쪽에 남은 불빛이 유리 위로 길게 번졌다.」12월 22일, 나는 비스 해운 본사 앞에 섰다.문에는 압류를 알리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붉은 봉인이 종이 아래를 막았다. 문 안쪽에서는 서류를 옮기는 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사람들이 오가며 종이를 읽었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봉인된 문과 창을 차례로 보았다.비스 해운의 이름이 적힌 간판은 아직 걸려 있었다. 글자 아래로 금속 고리가 보였다. 간판을 떼어 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관리인님.”도리가 내 옆에서 작은 소리로 불렀다. 손에는 등대에서 가져온 책이 들려 있었다.“왜?”“저 안에 들어가야 해요?”“아니. 오늘은 문 앞만 확인하면 돼.”도리는 책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책등에 난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압류된다고 다 없어지는 건 아니죠?”“무엇이 압류되는지 확인해야 알 수 있어.”“그럼 저 글씨도 없어져요?”도리가 간판을 올려다봤다.“그건 아직 모르겠어.”나는 간판에서 눈을 떼고 압류 표지를 다시 보았다. 종이는 바람에 조금 들렸지만 봉인은 그대로였다.문이 열렸다. 서류 뭉치를 든 사람들이 안에서 나왔다. 그 뒤로 클라우스가 걸어 나왔다.금발은 흐트러져 있었고, 옷깃은 한쪽이 접혀 있었다. 강한 꽃향기는 맡을 수 없었다. 클라우스는 내 앞에서 멈췄다.“노엘라.”“클라우스.”그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가 붉었다. 손에는 말라 부서지기 직전인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나는 꽃을 보았다.“그 꽃은 뭡니까?”“전에 네게 주려던 것과 같은 꽃이야. 새 꽃을 가져올 생각을 했는데……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더군.”“그렇다면 왜 가져오셨습니까?”클라우스의 손가락이 꽃줄기를 눌렀다. 꽃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었어.”“무슨 말인지 들을게요.”클라우스는 나와 도리를 번갈아 보았다. 도리는 책을 가슴에 붙이고 물러서지 않았다.클라우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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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제안서 답

「관리실 창에 등대의 불빛이 한 번 스쳤다.책상 위 봉투의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밝아졌다.」나는 서랍을 열었다. 손잡이가 짧게 삐걱였다.안쪽에는 제안서가 그대로 있었다. 봉투를 꺼내 책상에 놓자 종이 가장자리에 묻은 먼지가 손끝에 붙었다. 나는 먼지를 털지 않고 봉투를 열었다.수도에서 온 글씨는 반듯했다. 종이를 펼치자 왕립 등대국의 인장이 먼저 보였다.[노엘라 페른 관리인에게.회색곶에서 정리한 안개 간격표와 신호 체계를 왕국의 등대에 적용하고자 합니다.수도에서 전국 등대의 운영을 맡을 감독관직을 제안합니다.]나는 마지막 줄까지 읽었다. 이미 한 번 본 문장이었는데도 종이를 접지 못했다.전국의 등대에 내가 만든 간격표를 쓰게 된다면, 안개가 짙은 밤에도 등대지기들이 같은 신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위험을 알리는 3번의 짧은 빛과 안부를 전하는 긴 빛 한 번, 짧은 빛 두 번도 널리 쓰일 터였다.수도에 가면 내가 익힌 일을 더 많은 곳에 전할 수 있었다.그런데 회색곶을 떠나야 했다.나는 제안서를 책상 가운데 놓고 다시 읽었다. 손가락으로 ‘감독관직’이라는 글씨를 따라갔다. 잉크가 번진 곳은 없었다.“아직 답을 쓰지 않으셨습니까?”문가에 선 유리안 님이 물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몰랐다. 나는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네. 오늘은 읽으려고 꺼냈습니다.”“읽으셨습니까?”“읽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고 있습니다.”유리안 님은 책상 건너편에 서 있었다. 내 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가 대답을 재촉하지 않자, 나는 제안서 모서리를 맞춰 책상에 내려놓았다.“받으면 수도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제안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까?”“전국 등대 운영을 맡으라고 했습니다. 수도에서 일하는 자리로 보입니다.”“그렇군요.”유리안 님은 짧게 답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유리안 님은 제가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제가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생각은 있으실 것 아닙니까?”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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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남쪽 발령

「사령부 창에 등대 불빛이 한 번 스쳤다.복도 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나는 복도 벽에 붙은 항로도를 보고 있었다. 칼메 항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선이 여러 갈래로 그어져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고, 지도 아래에는 항로 확인관의 문서가 놓여 있었다.문 안쪽에서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나는 손에 든 일지를 고쳐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두꺼운 표지를 눌렀다. 관리실에서 가져온 연필도 일지 사이에 끼워 두었다.문이 열렸다.유리안 님이 나왔다. 군복의 깃은 반듯했고,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유리안 님은 문을 닫은 뒤 내 쪽으로 걸어왔다.“발령이 났습니까?”“예.”그는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겉면에는 남부 해역 순찰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봉투를 받아 글씨를 확인했다.“제가 읽어도 되겠습니까?”“예.”안에서 문서가 한 장 나왔다. 나는 종이를 펴고 첫 줄부터 읽었다.[남부 해역 순찰 발령.기간 4개월.출항일 1월 13일.]끝에는 왕립 해군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종이 한쪽에 손가락을 대고 조금 더 읽었다. 발령을 바꾸거나 미룰 수 있다는 문장은 없었다.“함대 재편에 따른 발령입니까?”“그렇습니다.”“프레야호 일의 책임을 벗은 뒤에도 제독님은 계속 항해하시는군요.”“제 임무는 남아 있습니다.”유리안 님은 종이에 시선을 두었다. 나는 문서를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4개월이면 긴 시간입니다.”“그렇습니다.”“저는 제독님을 보내 드려야겠군요.”“그렇게 해야 합니다.”대답은 짧았다. 유리안 님은 봉투를 받아 들지 않았다. 내 손에 들린 문서를 재촉하지도 않았다.나는 일지를 옆구리에 끼웠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쳤다.짝, 짝.복도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나는 3번 더 손뼉을 쳤다. 유리안 님이 나를 바라봤다.“축하드립니다, 제독님.”“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발령을 받으셨고, 임무를 맡으셨습니다. 잘해 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고맙습니다.”“저는 기뻐해야 하는데, 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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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연말의 등불

「부두의 종이 등이 물 위에서 흔들렸다.회색곶의 불빛이 축제 소리 사이로 한 번 지나갔다.」“무슨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유리안 님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오늘 밤, 부두 끝까지 같이 걷고 싶습니다.”“그게 하고 싶은 일이세요?”“예.”“그럼 가요.”나는 일지를 품에 끼웠다. 유리안 님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도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부두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선장들은 종이 등을 들고 물가에 줄을 섰고, 그 곁에서 등 안에 초를 넣는 사람들이 움직였다. 젖은 밧줄 냄새와 기름 냄새가 섞여 났다. 바람이 불 때마다 종이 등이 작게 흔들렸다.물가 가까이에서는 아이들이 등을 놓을 차례를 기다렸다. 선장 몇 명은 물이 빠지는 방향을 살폈다. 등을 띄우기 전에 부두에서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코브 선장이 아이들에게 말했다.“바람이 저쪽으로 불고 있잖소. 등을 한꺼번에 놓지 마. 서로 걸리면 불이 꺼질 수 있어.”“조금씩 놓으면 괜찮아요?”“간격을 두면 되지. 물살도 봐야 하고.”코브는 낡은 해도를 펴서 부두 기둥 위에 올렸다. 축제에 나온 사람들 몇이 둘러섰다. 그는 종이 등을 놓을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여기서부터 띄우면 부두 옆으로 흐르겠소. 저쪽은 배가 묶여 있으니 비워 두고.”“선장님, 등 하나가 벌써 젖었어요.”도리가 부두 안쪽에서 달려왔다. 마른 앞머리가 눈을 덮고 있었다. 뒤에는 학교 친구들이 따라왔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뛰려다 부두 가장자리에서 걸음을 늦췄다.“뛰지 마라. 바닥이 젖었어.”도리가 먼저 친구들에게 말했다.“너도 뛰어왔잖아.”“나는 괜찮아.”“네 장화는 구멍 났잖아.”“구멍이 있어도 뛰는 것하고는 상관없어.”도리는 말끝을 다듬듯 목을 가다듬었다. 그중 한 아이가 웃었고, 도리는 눈을 흘겼다.“웃지 마. 등부터 봐야 해.”나는 도리의 장화를 내려다봤다. 한쪽 발등에 물이 묻어 있었다. 도리는 그걸 숨기려는 듯 발을 뒤로 뺐다.“신발 안으로 물이 들어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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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감독관의 조건

「회색곶의 불빛이 관리실 벽을 한 번 훑었다.유리창에 남은 노란 빛이 서류 모서리에 걸렸다.」나는 조건서의 첫 줄을 지우지 않았다.연필 끝이 그 아래 빈칸에서 멈췄다. 종이에는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쓰고 지웠기 때문이었다.“관리인님, 그 줄은 그대로 두실 건가요?”도리가 책상 옆에서 물었다.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라 등대 일을 거들고 있었다. 도리는 내 손에 든 연필과 종이를 번갈아 봤다.“그대로 둘 거야.”“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잖아요.”“그래도 내가 원하는 건 정해졌어.”도리는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소라 껍데기를 손가락으로 굴렸다. 껍데기가 나무에 닿아 작게 소리를 냈다.“감독관이 되면 다른 등대도 다녀야 한다고 하셨죠?”“응.”“그러면 회색곶을 비우는 날도 생기겠네요.”“그렇겠지.”“그런데 본부를 여기로 두면 괜찮아요?”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조건서 옆에는 등대국에서 보낸 제안서가 펼쳐져 있었다. 감독관직을 맡아 달라는 내용은 이미 읽었다. 곶을 떠나야 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수도를 중심으로 일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괜찮게 만들 생각이야.”“어떻게요?”“회색곶을 본부로 두고, 전국 등대 순회는 분기별로 하겠다고 쓸 거야.”“그럼 다른 등대는 그때만 가요?”“점검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그 일정과 따로 협의해야겠지. 하지만 내가 제안서에 답할 조건은 그거야.”도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소라 껍데기는 더는 굴리지 않았다.“등대국에서 안 된다고 하면요?”“그때는 다시 생각해야지.”“떠나야 한다고 하면요?”“그것도 다시 생각할 거야.”도리는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연필을 쥐고 조건서의 빈칸에 글자를 적었다.[본부는 회색곶으로 한다.]도리가 종이를 들여다봤다.“글씨가 조금 기울었어요.”“알아.”“다시 쓰실 거예요?”“아니. 내용은 똑바로 썼어.”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 위에 놓인 제안서를 한 장 넘겼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종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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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연습하는 신호

「렌즈의 빛이 남쪽 가림판에 닿았다.꼭대기 창 밖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나는 가림판 아래쪽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나사가 움직이지 않는지 확인하고, 손잡이를 조금 당겼다.빛이 판에 가려졌다가 다시 창으로 나왔다.“그 정도면 되겠어요?”유리안 님이 렌즈 쪽을 살폈다.“빛이 끊기는 건 보입니다. 다만 남쪽에서 확인할 수 있는지는 시험해야 합니다.”“오늘은 등대 꼭대기에서 가능한 데까지만 보겠습니다.”“네. 바다 쪽으로 신호를 보내는 시험은 하지 않겠습니다.”“안부 신호인데도요?”“안부를 기다리는 배가 없을 때 잘못 보내면 안 됩니다.”그는 짧게 답하고 황동 주머니 시계를 꺼냈다. 렌즈를 지나는 빛이 창을 훑자 시계 뚜껑을 닫았다.나는 가림판의 걸쇠를 만졌다. 새로 단 판은 아직 손에 익지 않았다. 손잡이를 밀면 빛을 막고, 당기면 다시 열렸다. 너무 세게 움직이면 걸쇠가 덜컥거렸다.“손잡이를 조금만 당기면 빛이 비치는 틈이 생깁니다.”“그 틈으로 짧은 빛을 만들겠다는 뜻입니까?”“네. 렌즈가 돌아오는 순간에 맞춰 열면 돼요.”“정확한 때를 기다려야겠군요.”“빛이 1바퀴 도는 데 12초가 걸려요. 오래 열어 두면 긴 빛이 되고, 잠깐 열면 짧은 빛으로 보일 겁니다.”“한 번 먼저 확인하겠습니다.”나는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유리안 님은 렌즈에서 창까지의 방향을 보았다. 도리는 그 옆에서 내 손을 지켜봤다. 마게는 한 걸음 뒤에 서서 가림판의 아랫부분을 살폈다.“열겠습니다.”렌즈가 돌아왔다. 나는 손잡이를 당겼다.빛이 창을 지나 바다 쪽으로 뻗었다. 곧 가림판을 닫았다. 다음 빛이 오기 전에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이번에는 짧게 열겠습니다.”렌즈의 빛이 다가오자 손잡이를 조금 당겼다. 빛은 창에 닿았다가 곧 끊겼다.도리가 입을 열었다.“짧은 빛 한 번.”“아직 세지 마.”내가 말하자 도리는 입을 다물었다.“왜요? 방금 빛이 한 번 왔잖아요.”“이번에는 가림판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확인한 거야. 신호를 보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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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도리의 합격

「학교 창에 저녁 등불이 켜졌다.복도 끝에서 종이 울리고 아이들 발소리가 문 앞에 모였다.」나는 교실 문 옆에서 도리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책과 종이를 들고 복도로 나왔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종이 모서리가 들썩였다.“누나, 아직 안 나왔어요?”도리가 문 안쪽에서 물었다.“아직이야.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눠 주신다고 했잖아.”“저도 알아요. 그런데 다른 애들은 다 들고 나왔어요.”“마지막에 받는 사람도 있겠지.”도리는 문턱을 넘었다가 다시 안으로 물러섰다. 손에 든 책을 가슴에 꼭 붙였다.“이제 나와도 되지 않아요?”“선생님이 부르실 때 나오면 돼.”“아까부터 부르신 것 같은데요.”“네 이름을 부르셨니?”도리는 고개를 저었다. 복도 저편에서 책상 끄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종이 한 장이 넘겨졌다.“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도리는 문 옆으로 붙어 섰다. 구멍 난 장화 앞코에 묻은 흙을 발로 문질렀다. 흙은 떨어지지 않았다.“신발은 학교에서 바꿔 주지 않겠죠?”“학교가 신발을 나눠 준다는 말은 못 들었어.”“그렇죠.”“그래도 장화는 고칠 수 있어. 마게 어르신께 물어보자.”“어르신은 손녀랑 오셨어요?”“응. 담장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셔.”도리가 문밖을 내다봤다. 학교 담장 옆에 마게가 서 있었다. 손녀는 마게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마게의 반쪽 손가락이 드러난 장갑 손이 손녀의 어깨 가까이 놓여 있었다.도리는 다시 교실 안을 살폈다.“아버지도 오셨죠?”“응. 여기 계셔.”도리의 아버지는 복도 창가에서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다 멈췄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선을 문으로 돌렸다.“아버지가 왜 손을 계속 닦아요?”“긴장하셨나 봐.”“저보다 더요?”“그럴 수도 있지.”도리는 책을 가슴에 붙인 채 아버지를 살폈다. 아버지는 도리와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도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문 안을 들여다봤다.“저는 글씨도 셈도 열심히 했어요.”“알아.”“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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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출항

「군항에 남은 밤빛이 물결에 길게 흔들렸다.밧줄 고리가 부딪쳐 짧은 소리를 냈다.」나는 일지를 팔에 끼고 부두에 서 있었다. 군항의 바닥은 밤새 내린 습기로 젖어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함선의 밧줄과 짐을 확인했다.유리안 님은 갑판으로 오르는 발판 앞에 서 있었다. 제복의 단추는 모두 잠겨 있었고, 어깨에는 짐이 없었다. 남쪽 순찰에 필요한 물건은 이미 함선에 실려 있었다.“다 가져가셨습니까?”“필요한 물건은 실었습니다.”“잊은 것은요?”유리안 님은 내 얼굴을 봤다. 대답이 잠시 늦었다.“시계는 가지고 있습니다.”“그건 늘 가지고 계시잖아요.”“그렇습니다.”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이 황동 시계의 뚜껑에 닿았다가 멈췄다.“확인해 보세요.”나는 일지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유리안 님이 시계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안쪽에 작은 쇠 열쇠가 끼워져 있었다. 내가 넣어 준 열쇠였다.“빠지지 않았습니다.”“안쪽 흠집에 걸려 있는 것 같아요.”“맞습니다.”유리안 님은 시계 안을 잠시 들여다봤다. 열쇠가 흔들리지 않도록 엄지로 가장자리를 가볍게 눌렀다.“그대로 두셔도 괜찮겠습니까?”“괜찮습니다.”“불편하지는 않으세요?”“불편하지 않습니다.”그는 시계를 닫았다. 뚜껑이 맞물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확인했습니다.”“열쇠도요?”“열쇠도 확인했습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가 그의 손바닥에서 주머니로 들어갔다. 뚜껑을 닫는 버릇은 그대로였다.“시계가 멈추면 고쳐야 해요.”“멈추지 않도록 살피겠습니다.”“물에 젖으면 닦으셔야 하고요.”“그렇게 하겠습니다.”“열쇠가 빠지면 바로 알려 주세요.”“돌아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그의 말끝이 잠깐 낮아졌다. 나는 일지를 더 세게 안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을 알아차리고, 팔을 조금 풀었다.“돌아오신 뒤에요.”“네.”“그럼 그때까지 제가 기록을 맡겠습니다.”“부탁드립니다.”바람이 불었다. 함선에 걸린 깃발이 한쪽으로 펴졌다가 내려왔다. 밧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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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먼 불빛

「렌즈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긴 빛이 바다를 훑었다.멀리서 돌아오는 불은 아직 없었다.」함선이 항구를 떠난 첫 밤이었다.나는 등대 꼭대기에서 렌즈를 살폈다. 불꽃은 흔들리지 않았다. 유리 표면에 묻은 먼지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향해 긴 빛이 뻗었다가 돌아왔다.해가 지자 평소처럼 불을 켰다. 오늘은 불을 켜는 손이 조금 늦어지지 않도록 미리 심지를 확인했다. 기름도 살폈다. 다 끝난 뒤에야 일지를 꺼냈다.도리는 내 옆에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구멍 난 장화의 끝을 바닥에 붙이고, 양손으로 난간을 잡았다.“누나, 오늘도 여기서 기다릴 거예요?”“응. 네가 원하면 같이 있어도 돼.”“저는 괜찮아요.”“졸리면 내려가도 돼.”“안 졸려요.”도리는 그렇게 말하고 하품을 했다. 손등으로 입을 가렸지만, 눈이 잠깐 감겼다.“조금 졸린 것 같은데.”“바람 때문에 눈이 감긴 거예요.”“바람이 없는데?”도리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잡았다.“그럼 눈을 오래 뜨고 있어서 그래요.”“오래 뜨고 있으면 눈이 아프지.”“아프지는 않아요.”“그럼 눈을 깜빡여.”“깜빡이고 있어요.”도리는 일부러 눈을 몇 번 크게 깜빡였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일지를 펼쳤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에 닿았다.[1월 15일, 목요일. 밤. 등대 점등 확인.]연필을 내려놓자 렌즈가 돌아왔다. 긴 빛이 바다 위를 지나갔다. 나는 그 빛이 끝나는 곳을 바라봤다.“이제 신호를 기다리면 되나요?”“기다리는 동안은 평소처럼 불을 보면 돼.”“불이 잘 켜져 있는지요?”“그래. 멀리서 보이는지, 렌즈가 고르게 도는지.”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렌즈실 안을 한 번 더 둘러봤다. 불꽃이 유리 안쪽에서 고르게 타고 있었다.“누나.”“응?”“유리안은 등대 불을 보셨겠죠?”“바다에서 볼 수 있는 거리라면 보셨을 거야.”“그럼 우리가 기다리는 것도 아시겠네요.”“내가 기다린다는 말은 들으셨지.”“제가 기다린다는 말은 안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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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첫 편지

「렌즈의 긴 빛이 관리실 벽을 지나갔다.바람에 창틀이 흔들릴 때마다 문고리가 작게 울렸다.」나는 일지에 마지막 줄을 적고 연필을 내려놓았다.[1월 18일, 일요일. 점등 확인. 렌즈 회전 이상 없음.]창밖은 어두웠다. 관리실 안에는 책상 위 등잔불만 남아 있었다. 불빛이 일지의 종이에 닿았다. 창문으로 등대 불빛이 들어올 때마다 종이 위의 등잔불이 흐려졌다.도리는 맞은편 의자에서 학교 공책을 펴고 있었다. 글씨를 쓰다 멈추고, 연필 끝으로 종이 귀퉁이를 눌렀다.“도리, 손에 힘을 너무 주면 종이가 찢어져.”“안 찢어져요.”“아까도 그랬어.”도리는 종이를 들어 빛에 비춰 봤다. 눌린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이건 글씨가 잘 보이게 하려고 그런 거예요.”“다음 장까지 자국이 났어.”“그럼 다음 장에도 글씨가 잘 보이겠네요.”“그건 아니지.”도리는 입을 다물고 연필을 고쳐 쥐었다. 나는 일지를 덮어 책상 한쪽에 놓았다. 손끝에 연필심 가루가 묻어 있었다. 손바닥으로 털자 책상 위로 검은 점이 몇 개 떨어졌다.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도리는 연필을 멈췄다.“누나, 누가 왔어요.”“들었어.”발소리는 문 앞에서 멈췄다. 이어서 문고리가 한 번 움직였다.“계세요?”익숙한 목소리였다.나는 문을 열었다. 수잔나가 두꺼운 겉옷을 여미고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작은 봉투와 종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장갑을 쥐고 있었다.“수잔나 씨,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셨어요?”“우체국에서 온 걸 받았는데, 이건 내가 직접 전해야겠다 싶어서 올라왔지.”수잔나는 봉투를 내게 건넸다. 봉투 앞면에는 내 이름과 회색곶 등대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글씨는 곧고 군더더기가 없었다.나는 봉투를 받았다.“남쪽에서 온 편지예요.”수잔나가 내 손을 잠시 살폈다.“받는 사람 이름이 분명하더라. 보내는 곳도 남쪽이라고 적혀 있었고.”도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제독님 편지예요?”“아직 열어 보지 않았잖아.”“누나가 봉투를 보고 웃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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