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한 번째 보모가 되었더니 말 없는 대군의 딸이 나에게만 속삭인다: Chapter 1 - Chapter 10

80 Chapters

1화. 첫 마디의 값

대문이 열리더니 보따리 하나가 먼저 굴러 나왔다.보따리를 쫓아 나온 여인이 문턱에 걸려 무릎을 찧었다. 줄에 선 사람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여인은 보따리를 끌어안고 일어나 대문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엿새요! 엿새 동안 그 애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목이 다 쉬었다고요!”대문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찬 사내가 문턱 안쪽에 서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열쇠가 한 번 짤랑 울렸다.“10번째 보모가 엿새를 버텼으면 오래 버틴 편이오. 다음.”여인은 골목으로 걸어가며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나는 품에 손을 넣어 접힌 종이를 눌렀다. 아버지 이름 아래 92냥이 적힌 빚 문서였다. 버들고개 우리 집이 그 종이에 담보로 잡혀 있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새벽에 집을 나설 때 어머니는 부엌 문턱에 서서 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입 앞에 대고 숨을 한 번 내쉬는 모양이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손짓이었다. 영아. 나는 같은 손짓으로 대답하고 나왔다. 아버지는 어두운 눈을 비비며 빚 문서를 내 품에 넣어 주었다. 동생 하람은 자고 있었다. 서당 삯이 밀려서 하람은 요즘 서당 대신 장터에서 짐을 날랐다.3월 3일 아침, 청죽당 대문 앞에는 열네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9번째였다.“열 명이 나갔대요. 평균 9일이래요.”뒤에 선 여인이 앞사람 귀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가 커서 줄 끝까지 들렸다.“아이가 3년째 말을 안 한대요. 대군 나리 딸인데, 이름이 소리래요. 이름은 소리인데 소리를 안 낸대.”“말 못 하는 거래요, 안 하는 거래요?”“그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열 명이 나갔지.”“삯은 월 4냥이래요. 석 달 시험을 보고, 그 안에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입을 열면 상금이 30냥.”“30냥이면 초가 한 채 값이네.”줄이 술렁였다. 나는 속으로 셈했다. 4냥씩 석 달이면 12냥, 상금까지 42냥. 92냥에서 42냥을 빼면 50냥이 남았다. 다 갚지는 못해도 집을 내줄 날은 미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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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열한 번째 보모의 값

문이 활짝 열렸다.“향이 다 탔소.”변 집사가 문턱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이 빈 침상 밑으로 갔다가 내 옆으로 옮겨 왔다. 아이는 내 소매를 쥐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호랑이 인형이 무릎 위에 있었고, 인형 앞발 사이에 내 주판알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허리에서 흔들리던 열쇠가 멈췄다.“아이가 소리를 냈소?”나는 소매를 쥔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약속을 깨고 싶지도 않았다. 둘 다 지킬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방울은 한 번도 울리지 않았습니다.”“그걸 물은 게 아니오.”“아가씨는 지금 제 옆에 앉아 있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그겁니다.”변 집사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소리가 없으면 실격이오. 그게 이 집 시험이오.”“실격은 내가 정하오.”마루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 변 집사가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대군이 문턱 밖에 서 있었다. 누각에서 보았던 사람이었다. 청죽당의 주인, 이건우 대군이었다. 소매에 꽂힌 붓도 그대로였다.아이의 손이 내 소매를 세게 당겼다. 아이는 인형을 가슴에 끌어안고 내 등 뒤로 반쯤 숨었다. 그래도 침상 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건우는 문턱을 넘지 않았다. 한 발도 안으로 들이지 않은 채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내 등 뒤에 있는 것을 보았고, 침상 밑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집사. 앞의 열 명 가운데 이 아이를 침상 밖에서 본 사람이 있었소?”“없었습니다.”“그럼 이 사람으로 하겠소.”건우는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마루를 울리는 발소리가 3번 나고 멀어졌다. 아이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빠졌다.변 집사는 문턱에 남아 있었다. 그는 아이를 보지 않고 나만 보았다.“운이 좋았소.”“예.”“운은 석 달을 못 가오. 서재로 오시오. 조건을 읽어 주겠소.”그가 돌아서자 열쇠가 다시 짤랑거렸다. 아이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내렸다. 나는 아이 손등을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렸다. 금방 온다는 뜻으로 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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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방울의 값

“석 달 동안 아가씨께 거짓은 하나도 가르치지 않겠습니다.”건우는 문 쪽을 보던 눈을 내게로 돌렸다.“약속은?”“약속은 거짓이 아닙니다. 지키라고 하는 거니까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댓돌로 내려가 신을 신었다. 가죽을 덧댄 무거운 신이었다. 마당 쪽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연화채 담에 부딪혀 돌아왔다. 문 안에서 이불이 한 번 크게 스쳤다. 잠든 아이가 그 소리에 몸을 움츠린 것이었다.나는 보모방에 들어가 이불을 폈지만 눕지 않았다. 등잔을 끄고 어둠 속에서 손가락으로 셈을 했다.시험은 95일. 삯 4냥씩 석 달이면 12냥, 상금 30냥까지 받으면 42냥이었다. 92냥에서 42냥을 빼면 50냥. 그 50냥은 다음에 셈하면 됐다. 42냥은 이 집 안에서 나와야 했다.조건은 하나였다. 소리가 아버지 앞에서 입을 여는 것. 그런데 아이는 아버지 발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내 귀에는 속삭이면서, 아버지가 문 앞에 오면 숨을 죽였다.그리고 기둥에는 일과표가 붙어 있었다. 따르면 아이가 울고, 어기면 보모가 나가는 일과표. 그 종이를 쓴 사람은 열 명을 내보낸 사람이었다.‘내가 이겨야 할 상대는 아이가 아니다.’나는 머릿속에 옮겨 적은 일과표를 한 줄씩 다시 읽었다. 묘시 기상, 대군께 문안 인사. 진시 글 읽기, 소리 내어. 미시 인사 연습. 소리 내어라는 말은 진시 줄에만 있었다. 문안 인사에도, 인사 연습에도 그 말은 없었다. 그리고 진시 줄에도 누가 소리 내어 읽으라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일곱 줄을 3번 되짚었다. 덫에도 틈이 있었다. 글을 쓴 사람이 빠뜨린 틈인지 일부러 둔 틈인지는 몰랐다. 어느 쪽이든 그 틈으로 지나가 보기로 했다.벽 너머에서 아이가 돌아눕는 소리가 났다. 방울이 작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누웠다.◓3월 4일 묘시, 아이는 저고리를 3번 밀어냈다.오 어멈이 들고 온 문안 옷이었다. 연분홍 비단에 깃이 높고 빳빳했다. 내가 소매를 펼쳐 들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내밀자 얼룩이를 끌어안고 돌아앉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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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손짓의 값

“알려 주시면 적어 두겠습니다.”변 집사의 눈썹 한쪽이 올라갔다.“적어 둔다?”“저는 들은 말을 잊지 않으려고 적습니다. 오늘 집사님이 하신 말씀도 날짜와 같이 적어 두겠습니다. 3월 4일, 우물가 길목.”변 집사는 한참 나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열쇠 소리가 연화채 담을 따라 멀어졌다. 나는 그 소리가 다 사라진 뒤에야 주먹을 폈다. 손바닥에 주판알 자국이 셋, 동그랗게 찍혀 있었다.연화채로 돌아오니 소리가 방문 앞 마루에 앉아 있었다. 얼룩이를 무릎에 앉히고, 내가 간 쪽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자 아이는 얼룩이의 앞발을 들어 흔들었다. 얼룩이가 나를 맞은 것이었다.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얼룩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손짓을 했다. 오른손 손가락을 모아 입 앞으로 두 번 가져가는 모양이었다.소리가 고개를 기울였다.“이건 밥이라는 뜻이야. 우리 어머니랑 쓰는 말이야.”아이의 눈이 내 손에 붙었다.“우리 어머니는 귀가 거의 안 들려. 그래서 우리 집은 말을 손으로도 해. 밥, 물, 자자, 좋아, 싫어. 어머니는 내 입보다 내 손을 먼저 봐.”나는 하나씩 보여 주었다. 물은 손바닥을 오므려 입에 대는 모양. 자자는 손바닥을 모아 뺨에 대는 모양. 좋아는 엄지를 세우는 모양, 싫어는 손바닥을 펴서 좌우로 젓는 모양. 손짓을 하는 동안 내 손등의 먹물 점이 아이 눈앞에서 오르내렸다. 아이의 눈은 손짓보다 그 점을 더 오래 따라다녔다.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보여 주었다. 손바닥을 입 앞에 대고 숨을 한 번 내쉬는 모양이었다.“이건 우리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손짓이야.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내 울음소리를 못 들었대. 그래서 밤마다 손바닥을 내 입에 대고 숨이 닿는지 봤대. 숨이 닿으면 내가 거기 있는 거고. 그래서 지금도 나를 부를 때는 이렇게 해. 숨소리 모양.”소리는 따라 하지 않았다. 얼룩이의 귀만 만지며 보기만 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손을 내렸다. 저녁 바람에 처마 끝 풍경이 한 번 울렸다.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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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쌀 다섯 홉의 값

소리는 내 얼굴을 한참 보았다. 그러고는 엄지를 세웠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엄지는 끝까지 서 있었다.“좋아. 그럼 내일부터 해 보자.”그날 밤 나는 보모방에서 등잔을 켜 놓고 오래 앉아 있었다. 신발을 안 무서워하기로 하자고 말은 했다. 어떻게 할지는 정하지 않고 한 말이었다. 아이가 엄지를 세웠으니 이제 방법을 찾아야 했다.방법은 이튿날 아침 오 어멈이 들고 왔다.“대군 나리께서 변방 일로 사흘 비우신대. 떠나시기 전에 연화채에 들르신다고.”3월 6일 아침이었다. 나는 고름을 매 주던 손을 멈췄다.“언제쯤요?”“지금 사랑채에서 말에 짐 싣고 계셔. 곧 오시겠지.”나는 소리의 깃 안을 확인했다. 방울은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아이 손에 얼룩이를 쥐여 주고 마루에 앉혔다.“여기 있어. 내가 금방 올게.”나는 중문까지 나갔다. 연화채 마루에서 중문까지는 18걸음이었다. 중문 밖 돌길에서 무거운 신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디딤돌 앞에 서서 기다렸다. 대군에게 신을 벗으라고 청하는 보모가 몇이나 될까. 앞의 열 명 가운데에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주판알 세 개를 소매 안에서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건우가 중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길 떠날 차림이었다. 허리에 띠를 단단히 맸고, 소매에는 그 붓이 꽂혀 있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무슨 일이오?”“나리, 신을 벗고 들어와 주시겠습니까?”건우의 굵은 눈썹이 움직였다. 그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가죽을 덧댄 목이 긴 신이었다. 끈으로 발목을 감아 묶은 신이었다.“까닭을 묻겠소.”“아이가 무서워하는 건 나리가 아니라 그 신소리입니다. 어제 아이가 손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확인한 것도 그렇습니다. 나리께서 서 계실 때는 떨지 않고, 걸어가실 때만 떨었습니다. 한 걸음에 한 번씩요.”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소매의 붓을 한 번 만졌다. 그러고는 디딤돌에 걸터앉았다.그가 신 끈을 풀었다. 끈이 길었다. 발목에서 3번을 돌아 감겨 있었다. 건우는 서두르지 않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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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호랑이 인형의 값

오 어멈은 대답 대신 함지 속 쌀을 한 번 더 저었다. 쌀이 물속에서 하얗게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새는 쌀 얘기는 모레 해.”“모레요?”“내일은 마님 쌀만 생각하자. 이건 마님 상에 올릴 쌀이야.”오 어멈이 함지에 젖은 행주를 덮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주판알 세 개를 보았다.“보모님은 내일 하루, 아가씨 곁에서 한 발도 떨어지지 마. 그게 내 부탁이야.”“해마다 어떠셨는데요?”“해마다 아무 데도 안 가셨어. 방에서 안 나오시고, 아무것도 안 드시고. 보모가 있던 해에는 보모가 끌고 나가려다 울렸지.”나는 주판알을 소매에 넣었다. 오 어멈은 아궁이 불을 재로 덮었다. 부엌이 어두워졌다.◓3월 9일, 청죽당은 새벽부터 조용했다.나는 동이 트기 전에 물을 길으러 나갔다. 소리 방의 물그릇을 채워 두려고 했다. 우물가로 가는 길에 중문 앞을 지나는데 말 한 필이 대문 쪽에서 들어왔다. 말발굽에 감은 짚이 돌길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건우가 말에서 내렸다. 사흘 전과 같은 차림이었다. 옷자락에 먼지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혔다.“사흘 동안 아이는 어땠소?”인사보다 그 말이 먼저 나왔다. 나는 셈한 것 가운데 무엇을 말할지 골랐다. 쌀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 어멈은 모레 하자고 했고, 나도 아직 셈을 다 맞추지 못했다.“나리가 떠나신 날, 아이가 디딤돌에 남은 신 자국을 손으로 재 봤습니다. 제 손바닥을 대 보고, 얼룩이 발을 대 봤습니다. 둘 다 모자랐습니다.”건우는 디딤돌을 내려다보았다. 자국은 사흘 사이에 지워지고 없었다. 그는 한참 그 돌을 보다가 물었다.“그것뿐이오?”“밥은 하루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손짓은 10개를 압니다. 밤에는 열쇠 소리가 날 때 한 번 깹니다.”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입을 닫았다. 건우의 눈이 나에게 머물렀다. 그는 열쇠라는 말을 되묻지 않았다.“물은 내가 들겠소.”그가 물동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동이를 먼저 들어 올렸다.“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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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서당 삯의 값

“이불만 한 채 더 내주십시오.”건우가 나를 보았다. 무슨 대답을 기다렸는지는 몰라도 그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눈썹 한쪽이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쑥이에게 일러 두겠소.”그는 그 말만 하고 마루를 내려갔다. 중문 밖에서 신 끈을 감는 소리가 3번 돌고 멈췄다.그날 밤 나는 소리 침상 아래 바닥에 이불을 폈다. 쑥이가 가져다준 이불은 두껍고 햇볕 냄새가 났다. 등잔을 끄자 침상 위에서 작은 손이 내려왔다. 손은 한동안 허공을 더듬다가 내 저고리 소매를 찾아 쥐었다. 나는 소매를 빼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도 소매는 그 손에 쥐여 있었다.◓3월 10일, 해가 대문 위로 올라올 즈음이었다.“한석구 딸 나오라고 해!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어!”대문 쪽에서 고함이 들렸다. 연화채 담을 넘어올 만큼 큰 소리였다. 고름을 매 주던 내 손 아래에서 소리의 몸이 굳었다. 아이가 얼룩이를 끌어안고 두 주먹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무서워.나는 아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목소리를 알았다. 버들고개 우리 집 문을 한 달에 두 번씩 두드리던 목소리였다.“소리야. 저 사람은 나를 부르는 거야. 너를 부르는 게 아니야.”아이의 주먹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오 어멈을 불러 아이를 맡겼다. 그리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손짓을 했다.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짚고, 다시 이 방 바닥을 짚었다. 나, 여기. 어머니에게 금방 돌아온다고 할 때 쓰던 손짓이었다.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대문에서 큰마당까지 40걸음이었다. 나는 그 40걸음을 반쯤은 뛰었다. 대문 앞에는 하인들이 몰려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소 대방이 서 있었다.마흔다섯, 버들고개에서 소칠수라는 이름보다 소 대방으로 더 불리는 사람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말이 거칠었다. 그 대신 셈은 한 푼도 틀린 적이 없었다. 남의 빚을 사들여 먹고사는 사람인데, 짚신 앞코는 내 신만큼 해져 있었다. 아버지가 배를 잃은 뒤 우리 집 문서를 쥔 사람이 그였다.“아, 아가씨. 대군부 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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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연못의 값

건우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적어 두었으면 됐소.”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장부를 품에 넣고 인사했다. 문턱을 넘으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아이는 오늘 어땠소?”“먹을 갈았습니다. 20번 문질렀습니다.”건우가 붓을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붓대가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그 벼루는 3년 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소.”그 벼루를 마지막으로 쓴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서재 등잔이 그의 굵은 눈썹 아래에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문을 닫고 86걸음을 걸어 연화채로 돌아왔다.중문을 들어서는데 연화채 마루 끝에서 그림자 하나가 몸을 돌렸다. 열쇠 소리가 났다. 변 집사였다. 소리 방 문 앞이었다.“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문단속이오. 보모가 방을 비웠으니 내가 볼 수밖에.”그는 내 품의 장부 쪽으로 눈을 한 번 주고는 마루를 내려갔다. 나는 소리 방 문을 열었다.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얼룩이도 베개 옆에 그대로 있었다. 다만 책상 위 벼루 뚜껑이 비뚤게 덮여 있었다. 저녁에 내가 덮어 둔 모양이 아니었다.나는 뚜껑을 바로 덮었다. 그리고 그날 밤도 소리 침상 아래에 이불을 폈다.◓3월 13일 아침, 쑥이가 물동이를 이고 연화채로 들어오며 말했다.“연못 잉어들 오늘 밥 주는 날이에요. 하인 아재가 보리 한 바가지 들고 갔어요.”고름을 매 주던 내 손 아래에서 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이 연화채 뒷담 쪽으로 갔다. 연못이 있는 쪽이었다. 아이는 그쪽을 한참 보다가 나를 보았다.“잉어 보러 갈래?”소리가 얼룩이를 꼭 안았다. 그리고 엄지를 세웠다.나는 고름을 마저 맸다. 아이의 깃 안에서 방울이 손등에 닿았다. 그러고는 셈을 했다. 오 어멈에게 들은 말로는, 아이는 3년 동안 연화채 담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나흘 전 사당에 다녀온 것이 처음이었다. 일과표에는 신시 산책이 연화채 마당 안으로 적혀 있었다. 연못은 담 밖이었다.아이가 먼저 바라본 쪽이었다. 나는 가기로 했다.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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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종친 어른의 값

“보고하실 때 걸음 수도 같이 말씀해 주십시오.”유성직이 나를 보았다.“물에서 3걸음. 정자에서 보신 일각. 그리고 아가씨가 보리를 던지고 한 발 물러섰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온 것까지요. 빼지도 더하지도 말고 본 대로만요.”“본 대로 하겠습니다.”그는 짧게 대답하고 정자 쪽으로 돌아갔다. 칼집이 옷자락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그가 멀어진 뒤에야 내 치마를 놓았다.돌아오는 길에 소리는 걸음을 세지 않았다. 얼룩이를 안고 내 손가락 하나를 쥔 채 땅만 보고 걸었다. 후원의 하인들은 이번에는 수군거리지 않았다. 유성직이 정자에 있었다는 걸 그들도 본 모양이었다.나는 걸으며 유성직의 말을 되짚었다. 물에 빠지면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아이가 말할 줄 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 집에 나 하나였다. 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아이가 물속에서 입을 열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셈을 빼먹었다. 다음에 연못에 갈 때는 내가 물가 쪽 손으로 아이 손을 잡기로 했다. 아이가 싫다고 하면 소매 끝이라도.그날 건우는 밤늦게 돌아왔다. 유성직의 보고는 다음 날로 미뤄졌다고 쑥이가 전했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보고는 올라가지 못했다.◓3월 14일 아침, 대문 밖에서 말 여러 필이 멈추는 소리가 났다.소리가 고름을 매던 내 손을 잡았다. 말발굽 소리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사람 목소리도 여럿이었다. 아이가 내 소매를 당겼다. 나는 몸을 숙였다.“누가 와요?”나는 손가락 하나를 접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는 얼룩이를 침상 밑으로 밀어 넣으려다 그만두었다. 첫날 숨어 있던 자리였다. 아이는 침상 밑을 한참 보다가 얼룩이를 도로 품에 안았다.쑥이가 숨을 몰아쉬며 연화채로 뛰어 들어왔다.“종친 어른 오셨어요! 진평군 대감요. 손녀 아가씨도 같이 오셨어요!”“진평군 대감이 누구신데?”“대군 나리 큰아버지뻘 되시는 분이요. 종정부 우두머리세요.”종정부는 종친들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라고 했다. 왕실 친척들의 혼인이며 후사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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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호위의 값

진평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상에 닿는 소리가 대청에 또렷하게 났다.“고집이 있군.”그는 나를 더 보지 않았다. 건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건우. 석 달 시험이라 했지?”“예.”“석 달 뒤에 다시 오겠네. 그때도 아이가 저러면, 그때는 내가 정하겠네.”건우가 무릎 위의 손을 쥐었다.“석 달 뒤에도 정하는 사람은 저입니다, 큰아버님.”진평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찻잔을 다시 들어 남은 차를 마셨다. 은재가 진평군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숙인 얼굴 아래에서 은재의 손가락이 무릎 위의 치마를 꼭 쥐고 있었다.나는 소리를 데리고 대청을 내려왔다. 아이는 내 손가락을 쥐고 86걸음을 걸었다.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연화채에 돌아오자 아이는 곧장 물그릇 앞으로 갔다. 사탕을 뱉었던 손바닥을 물에 담갔다. 손바닥을 문지르고, 꺼내 보고, 다시 담갔다. 3번을 그렇게 했다. 나는 마른 수건을 펴서 아이 앞에 내밀었다. 아이는 손을 닦고 나서도 그 손바닥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끈적한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이는 그래도 그 손으로는 얼룩이를 안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만 안았다.진평군 일행은 이튿날 새벽에 떠났다. 변 집사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가 허리를 깊이 굽혔다. 진평군이 가마에 오르기 전에 변 집사에게 무어라 짧게 말했다. 연화채 마당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변 집사가 한 번 더 허리를 굽혔다. 말발굽 소리가 대문 밖으로 멀어질 때 나는 연화채 마당에 서 있었다. 대문이 닫히기 전, 가마 옆에서 옅은 청색 치마를 입고 걷던 은재가 연화채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는 몰랐다.◓3월 16일, 유성직이 연화채로 나를 데리러 왔다.“대군께서 서재로 부르십니다. 연못 일입니다.”나는 소리를 오 어멈에게 맡겼다. 소리는 어제 대청에서 내려온 뒤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손짓도 하지 않았다. 밤에 내 소매를 쥐는 손만 그대로였다. 아침에는 얼룩이를 방문 앞에 앉혀 두고 그 옆에 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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