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한 번째 보모가 되었더니 말 없는 대군의 딸이 나에게만 속삭인다: Chapter 31 - Chapter 40

80 Chapters

31화. 밤 손짓 공부의 값

나는 문턱에 둔 손을 거두지 못했다. 건우 나리는 찻잔을 내려놓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서재에는 먹 냄새와 차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방금 들은 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손등의 먹물 점만 문질렀다.“대군 나리께서 소리 곁에 계시면 됩니다.”“그대 곁에서도 기다릴 수 있소.”“저는 소리가 아닙니다.”“알고 있소.”건우 나리는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나는 찻잔을 받치던 손을 옆구리에 붙였다.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면 그에게 어떤 답을 더 해야 할 것 같았다.그는 책상 위 서란의 붓을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하영 씨.”“예, 대군 나리.”“손짓말을 배우고 싶소.”그 말은 앞서 나눈 이야기에서 이어졌지만,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소리가 허락하면 알려 주겠다고 했고, 건우 나리도 기다리겠다고 했다. 소리는 지금 잠들어 있었다. 내가 대신 허락할 일은 아니었다.“소리에게 물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그렇소. 그래서 지금 배우겠다고 청하는 것은 소리에게가 아니라 그대에게요.”“제가 가르쳐도 된다는 뜻입니까?”“그대가 괜찮다면 말이오.”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어머니와 내가 쓰는 손짓은 둘만 알아보는 것이 많았다. 소리에게도 몇 가지 알려 주었지만, 그 아이가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매번 달랐다. 건우 나리에게 먼저 가르쳐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가려야 했다.“소리에게 말을 시키는 손짓은 가르치지 않겠습니다.”“그럴 생각은 없소.”“대답을 재촉하는 손짓도요.”“알겠소.”“필요한 말만 하겠습니다. 기다려도 된다는 말, 그만해도 된다는 말, 그리고…….”나는 ‘고맙다’를 입 밖에 내지 않고 손가락으로 먼저 짚었다. 배우려는 사람에게 손짓을 보여 주기 전에, 무엇을 가르칠지 정해야 했다.“고맙다는 말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그 정도면 충분하오.”“손을 보고 따라 하셔야 합니다. 말로 외우시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그렇게 하겠소.”나는 문 쪽을 살폈다. 소리 방과 서재 사이가 멀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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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종학 통지의 값

“그건 고맙다는 손짓이 아닙니다. 다른 뜻입니다.”건우 나리는 손을 내린 채 나를 보았다. 국수 그릇에서는 아직 김이 났다. 나는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보고 천천히 손가락을 풀었다.“무슨 뜻이오?”“제가 가르쳐 드리지 않은 뜻입니다.”“그대가 보여 준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소.”“끝이 달랐습니다.”“어디가 달랐소?”나는 손짓을 다시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가르친 동작을 되풀이하면, 그 손짓이 무슨 뜻인지 건우 나리에게 알려 주는 셈이었다.“손끝을 앞으로 보내실 때 손가락을 펴셨습니다. 고맙다는 손짓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그럼 내가 다른 뜻을 만든 것이오?”“그렇습니다.”“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알고 있습니다.”건우 나리는 제 손을 한 번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천천히 오므렸다 폈다. 손등에 먹은 묻지 않았다. 서란의 붓이 놓인 책상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그대가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 뜻과 닮았소?”“그렇습니다.”“그대는 그 뜻을 가르칠 생각이 없소?”“오늘은 없습니다.”“오늘만이오?”나는 젓가락을 그릇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면발 하나가 젓가락에 걸렸다가 그릇 안으로 떨어졌다.“소리에게 필요한 손짓부터 가르치기로 했습니다.”“그 말은 들었소.”“그러면 더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알겠소.”건우 나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손을 무릎 옆으로 내린 뒤에야 나는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한 그릇을 나눠 먹기로 했는데, 국수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국수가 식겠습니다.”“그대가 먼저 드시오.”“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그대가 먼저 먹지 않았소.”“같이 먹었습니다.”“그대가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는 뜻이오.”“그럼 이번에는 나리께서 먼저 드십시오.”건우 나리는 젓가락을 들었다. 면을 조금 집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나는 그가 삼킨 뒤 그릇을 가운데로 당겼다.“간이 맞습니까?”“맞소.”“오 어멈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국물이 조금 싱거우면 소리는 잘 먹지 않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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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낱말 카드의 값

5월 25일, 소리 방에서 종이를 잘라 탁자 위에 놓았다. 카드로 쓰기 좋게 모서리를 맞추고, 한쪽에는 먹을 갈아 두었다.소리는 침상에 앉아 얼룩이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건우 나리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종학에서 소리를 보겠다는 통지문은 방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통지문을 보지 않는다고 날짜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소리 앞에서 그것을 다시 펼칠 까닭도 없었다.“오늘은 카드에 넣을 말을 고르자.”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탁자 한쪽에 빈 카드를 놓았다.“말하고 싶지 않으면 손으로 골라도 돼. 읽고 싶지 않으면 그림만 봐도 되고.”소리는 얼룩이의 귀를 만졌다. 인형의 귀 한쪽은 실밥이 조금 풀려 있었다. 나는 그쪽을 보다가 소리의 손이 멈추는 것을 보고 시선을 카드로 돌렸다.건우 나리가 종이를 한 장 집었다.“내가 써도 되겠소?”“소리가 괜찮다고 하면요.”그는 종이를 든 채 소리를 바라봤다. 소리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건우 나리는 손을 탁자에 내려놓고 기다렸다.잠시 뒤 소리가 종이를 바라봤다. 손을 뻗지는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허락으로 정하지 않았다.“소리야, 아버지가 종이를 써도 괜찮을까?”소리는 얼룩이의 귀를 놓고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리켰다.“좋다는 뜻일까?”소리는 이번에는 종이 옆에 손을 놓았다. 건우 나리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알겠소. 1장만 쓰겠소.”나는 카드 한쪽에 “물”이라고 적었다. 건우 나리는 그 글자를 보고 제 카드에 같은 글자를 썼다. 글씨가 내 것보다 조금 컸다.“읽을 수 있겠소?”그가 물었다.“글자는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림은 아직 모르겠습니다.”“그럼 내가 그려 보겠소.”“소리가 알아보는지 먼저 물어볼게요.”나는 소리에게 카드를 보여 주었다. 소리는 글자를 한동안 보았다. 그리고 카드의 빈 곳을 손끝으로 짚었다.“그림도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작은 물그릇을 그렸다. 모양은 둥글고, 안쪽에 짧은 선을 그어 물을 나타냈다. 소리는 그림과 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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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보름 수레의 값

나는 웃음을 삼키며 소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가 거뒀다. 손을 대도 되는지 묻지 않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그림을 좋아한다고 했지?”소리는 내 귀에만 닿게 속삭였다.“네. 아버지 그림은 이상해요.”“그 말은 아버지께 직접 해도 괜찮을까?”소리는 얼룩이를 안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소리가 고른 카드들을 모아 탁자 한쪽에 놓았다.◓5월 31일, 큰곳간 뒤에 서 있었다. 곳간 벽에는 볏짚 냄새가 배어 있었다. 문 아래로 쌀겨가 조금씩 밀려 나와 바닥에 흩어졌다. 나는 그 가루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마른 쌀겨가 손끝에 붙었다.건우 나리는 곳간 뒤편 담장 가까이에 섰다. 나는 그 옆에서 발자국이 나 있는 흙을 살폈다. 바퀴 자국은 곳간 뒤에서 시작해 담장을 따라 꺾였다. 수레가 다닌 자리는 바퀴가 흙을 눌러 좁은 홈을 만들었다. 그 옆에는 말굽 자국이 군데군데 찍혀 있었다.“여기서 수레가 나간 게 맞습니까?”건우 나리가 물었다.“자국만 보면 그렇습니다. 들어온 자국은 찾지 못했습니다.”나는 바퀴 홈의 너비를 손바닥으로 재고, 옆에 놓아 둔 종이에 모양을 그렸다. 수레가 돌 때 눌린 자리도 짧게 표시했다. 종이 끝에는 곳간 문을 그려 두고, 자국이 시작된 곳과 꺾인 곳을 연결했다.건우 나리는 종이를 내려다봤다.“이 자국만으로 변 집사가 쌀을 옮겼다고 할 수는 없겠소.”“그렇습니다. 수레가 지나갔다는 것과 쌀이 실렸다는 건 다른 일입니다.”“그럼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하오?”“실린 자국이 있는지, 수레가 나간 때가 언제인지, 어디로 갔는지입니다.”건우 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성직이 살피고 있소. 그가 가져온 것을 보고 판단하겠소.”나는 고개를 숙였다. 호위 무관 유성직은 변 집사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자국을 먼저 보고 결론을 정하면, 쌀이 사라진 까닭도 변 집사가 한 일도 셈이 아니라 추측이 됐다.“곳간 뒤를 제가 살펴도 되겠습니까?”“보모가 이곳에 올 이유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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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서랍 없는 서재의 값

서재 탁자 위에 종이 두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내가 그린 수레 자국이고, 다른 하나는 유성직 나리가 가져온 기록이었다. 건우 나리는 두 종이의 모서리를 맞추고 문진을 올렸다.“이 기록만으로는 곳간 장부에 적힌 수와 실제 입고량이 다르다는 것을 밝힐 수 없소.”건우 나리가 말했다.“수레가 쌀을 싣고 나간 사실은 보였습니다. 다만 올해 들어온 쌀 전체를 본 것은 아닙니다.”성직 나리가 답했다. 말끝이 짧았다. 성직은 장화 밑창에 묻은 흙을 털지 않은 채 문 옆에 서 있었다. 서재에 들어온 뒤에도 장화에서 쌀겨가 한 알 떨어졌다. 나는 그걸 집어 탁자 아래에 놓았다.“곳간 안에 있는 수량과 장부를 맞춰 봐야 합니다. 소작미로 들어온 쌀과 나간 쌀을 한 줄씩 대조하면 차이가 드러날 겁니다.”내가 말했다.건우 나리는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변 집사가 열쇠를 갖고 있소. 지금 곳간 장부를 내놓으라고 하면 기록을 감출 수도 있겠군.”“그럴 수 있습니다. 장부를 가져오게 할 명분도 아직 없습니다.”“수레 기록은 보관하되, 그걸로 변 집사를 먼저 몰아세우지는 않겠소.”“그러는 편이 낫습니다. 실제로 확인한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을 나눠 두어야 합니다.”나는 탁자 가장자리에 놓인 붓을 치우고 빈 종이를 앞으로 당겼다. 종이 위에 ‘확인한 일’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 수레가 곳간을 나간 일, 자루에 쌀이 담긴 일, 수레가 진평군 별채 뒷문으로 들어간 일을 따로 적었다. 글씨를 쓰는 동안 건우 나리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나는 다음 줄에 ‘확인하지 못한 일’이라고 썼다. 그 아래에는 수레에 실린 쌀의 양과 곳간 장부의 전체 수량을 적었다.성직 나리가 종이를 들여다봤다.“제가 본 섬 수는 적혀 있습니다.”“수레에 실린 양은 확인하셨지요. 하지만 올해 곳간에 들어온 양과 남은 양은 아직 모릅니다.”“그렇습니다.”“그 차이를 밝혀 줄 장부가 필요합니다.”건우 나리는 손가락으로 빈 종이의 아래쪽을 짚었다.“서란의 장부 말이오.”“예. 곳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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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종학 가는 길의 값

종학 문 안으로 들어서자 먹 냄새가 먼저 났다. 마루에 앉은 아이들이 종이를 펴고 있었고, 훈장은 책상 위에 얇은 종이 묶음을 놓고 이름을 확인했다.나는 소리의 손을 잡지 않았다. 소리는 얼룩이를 품에 안은 채 내 옆에 섰다. 목에 건 놋쇠 방울은 움직이지 않았다. 건우 나리는 우리보다 조금 뒤에 있었다. 옷깃을 여민 채 주변을 살폈지만, 소리를 재촉하지 않았다.“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훈장이 빈자리를 가리켰다.“보모님은 시험을 보는 아이와 떨어져 계셔야 합니다. 답을 알려 주면 공정하지 않으니까요.”“답을 알려 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내가 말했다.“소리가 말하지 않아도 시험을 볼 수 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훈장은 내 얼굴을 잠시 살폈다. 뒤쪽에 앉은 진평군도 나를 보고 있었다. 손에 든 부채가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부채는 펴지지 않았다.“그 점은 훈장이 판단하겠습니다.”“예. 다만 종학의 규정도 함께 살펴 주십시오.”훈장은 대답하지 않고 시험 자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소리에게 낮게 말했다.“말 안 해도 돼. 읽거나 손으로 가리켜도 돼.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소리는 내 입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룩이의 귀를 한 번 만진 뒤, 품에 다시 꼭 안았다.건우 나리가 내 옆에 섰다. 소리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자리였다.“소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지 않겠소.”“저도 그러겠습니다.”“다만 오늘은 규정에 따라 시험을 받으러 온 날이오. 소리가 할 수 있는 방법까지 막히지 않게 살펴 주시오.”“예, 대군 나리.”말을 마치고 나는 소리의 소매가 접힌 것을 봤다. 아이가 손가락을 넣어 접힌 끝을 당기려 했다. 나는 손을 내밀지 않고 내 소매를 한 번 펴 보였다. 소리는 내 동작을 보고 자기 소매를 바로잡았다. 얼룩이의 귀가 옷자락에 걸리지 않게 바깥으로 꺼냈다.훈장이 아이들을 자리에 앉혔다. 소리는 책상 앞에 앉았다. 얼룩이는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훈장은 인원수를 세고 자리를 살폈다.“시험하는 동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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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낱말 시험의 값

소리는 종이 위의 글자를 내려다봤다. 훈장의 손가락이 짚은 글자 아래로 얼룩이의 앞발이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소리는 인형을 책상 한쪽으로 옮겼다. 방울이 옷깃에 닿아 작게 울렸다.훈장이 다시 말했다.“이 글자를 읽어 보시오.”소리는 종이와 훈장을 번갈아 봤다. 붓은 손에 들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훈장은 잠시 기다렸다.“소리 아가씨, 말로 답하기 어렵다면 글이나 손짓으로 답해도 됩니다. 아까 보모가 말한 대로 하겠소.”나는 문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소리에게 눈짓하지 않았다. 건우 나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훈장은 소리 앞의 종이를 손끝으로 눌러 반듯하게 놓았다.소리는 종이에서 눈을 떼고 훈장의 손을 살폈다. 훈장이 손을 거두자 아이는 시험지 위의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소리가 낮게 말했다.“산.”훈장이 종이를 확인했다.“맞소.”그는 다른 글자를 짚었다.소리는 잠시 글자를 살핀 뒤 손가락을 옮겼다.“물.”목소리는 작았지만 책상 앞에 선 사람들에게 들렸다. 나는 손등의 먹물 점을 엄지로 문질렀다. 주판알 세 개가 소매 속에서 서로 닿지 않도록 손가락을 오므렸다.훈장은 소리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음 글자를 짚고, 아이가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달.”소리는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훈장은 글자 옆에 작은 표시를 했다.진평군이 부채를 접었다.“한 글자씩 읽게 하는 것이 시험이라고 할 수 있소?”훈장이 고개를 들었다.“아이에게 읽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시험입니다. 글자마다 답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소리를 듣지 못하면 글을 아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 않소?”“지금은 들었습니다.”진평군은 더 말하지 않았다. 부채를 손바닥에 대고 천천히 밀었다. 훈장은 시험지의 다음 글자를 짚었다.소리는 얼룩이의 꼬리를 책상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인형이 종이에 걸리지 않게 한 뒤, 글자를 다시 바라봤다.“쌀.”훈장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소.”“그럼 다음 낱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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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마음의 값

가마가 움직일 때마다 창틀이 가볍게 울렸다. 나는 소리의 어깨 밑에 접어 둔 겉옷을 밀어 넣었다. 아이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품에 안은 얼룩이의 귀가 소리의 턱 아래에 눌려 있었다.가마 안에는 종학에서 묻은 먹 냄새가 남아 있었다. 내 소매에는 낱말 카드의 종이 가루가 붙어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것을 털었다. 바깥에서 가마꾼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소리의 방울이 옷깃에 닿았다. 방울은 울리지 않았다.건우 나리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종학에서 진평군이 한 말을 듣고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훈장이 시험 결과를 적을 때까지 기다렸고, 소리가 종이를 손끝으로 만질 때도 나서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건우 나리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에 먹이 조금 묻어 있었다.“방금 한 말은 사실이오.”나는 소리의 머리맡에서 손을 거뒀다.“규정을 찾으실 때 함께 보셨다는 뜻이라면 알고 있습니다.”“그것만 말한 게 아니오.”건우 나리는 말을 이었다가 멈췄다. 소리가 잠든 것을 확인하려는 듯 아이 쪽을 보았다. 소리의 입술은 다물려 있었고 숨은 고르게 이어졌다. 건우 나리는 목소리를 낮췄다.“밤새 함께 찾았다는 말도, 그대에게 고마운 마음도 사실이오.”“고마워하실 일은 아닙니다. 저도 필요한 규정을 찾은 것뿐입니다.”“그대는 늘 그렇게 말하오.”“제가 한 일을 크게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요.”가마가 돌길을 지날 때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소리의 등 뒤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아이는 얼룩이를 더 꼭 안고 몸을 바로 했다.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겉옷 끝이 아이의 발을 덮고 있는지 살폈다.건우 나리가 내 손을 보고 있었다.“그대는 오늘도 소리에게 답을 대신하지 않았소.”“시험은 소리 아가씨가 치렀습니다.”“그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시험을 받을 수 있다고 먼저 말한 건 그대였소.”“규정에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소리 아가씨가 답할 방법을 고를 수 있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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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미룬 대답의 값

가마에서 내린 뒤, 나는 버들고개 집 마루에 앉아 소매에 붙은 종이 가루를 털었다. 어머니는 내 앞에 물그릇을 놓았다. 물 위에 손등의 먹물 점이 비쳤다.“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어머니가 한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을 보고 뜻을 알아들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가마에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그대를 보모로만 두고 싶지 않소.건우 나리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답도 아직 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이틀이면 길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앉아 있으니 금세 지나갈 것 같았다.어머니가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물그릇을 두 손으로 감쌌다.“아버지는요?”어머니는 방 쪽을 가리켰다. 마루 아래에서 나무문이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며 문턱을 짚었다. 눈이 어두워 문턱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지 발을 천천히 옮겼다.“영아 왔느냐?”“예, 아버지.”아버지는 내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찾으려다 마루 기둥을 짚었다. 나는 먼저 아버지 손에 내 팔을 대 주었다.“집에 오니 좋구나.”아버지가 내 팔을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려 눈을 가늘게 떴다.“대군부 일은 어떠냐?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고?”“말은 조금씩 하고 있어요.”어머니가 손을 멈췄다. 나는 어머니 쪽을 보았다. 소리가 나에게만 속삭인다는 약속은 지켜야 했다. 소리의 이야기를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그 아이가 말을 안 해도 괜찮아요. 글자 카드로 답할 때도 있고, 손짓으로 말할 때도 있어요.”“그렇다면 다행이다.”아버지는 내 팔을 놓고 벽을 더듬었다. 방 안쪽에 놓인 낮은 의자를 찾아 앉았다. 의자 다리가 마루를 긁었다.“네가 잘하고 있나 보구나.”나는 대답 대신 물그릇을 아버지 앞에 밀었다. 물을 찾던 손이 그릇 가장자리에 닿았다.“아버지는 오늘 어디 다녀오셨어요?”“장부를 보러 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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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대답의 값

청죽당 대문을 들어섰을 때는 6월 6일 아침이었다. 석 달 시험이 끝나는 날이었다.소리는 연화채 마루에 앉아 얼룩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방울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소리는 나를 보자 인형의 앞발을 잡고 내 쪽으로 내밀었다.“잘 다녀왔니?”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형의 발을 한 번 접었다 펴고, 내 소매를 가리켰다. 나는 소매에 붙은 먼지를 털어 냈다. 손등의 먹물 점 옆에 종이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집에 다녀오는 길에 묻었나 봐.”소리는 손가락을 들어 내 손등을 가리켰다. 닦아 주겠다는 뜻인지 물어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손등을 닦았다. 소리는 손수건이 접히는 모양을 바라봤다.방 안에는 누룽지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오 어멈이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며 그릇을 마루에 놓았다.“보모님, 따뜻할 때 드세요. 소리 아가씨도 아침을 조금 드셨어요.”“고맙습니다.”오 어멈은 소리 앞에 작은 그릇을 놓고 숟가락을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오게 돌려 놓았다. 소리는 숟가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얼룩이를 무릎에서 내리지 않았다.“오늘은 여기서 기다리면 돼. 서재에 다녀오는 동안 얼룩이랑 있어.”소리는 인형을 꼭 안았다. 목의 방울이 짧게 울렸다. 나는 아이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마루 끝에 앉았다. 밥을 한 숟갈 먹었다. 따뜻한 누룽지가 목으로 넘어갔다.대문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잠시 뒤 건우 나리가 연화채 앞에 섰다. 서란의 붓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있었다.“하영 씨. 서재에서 집사와 약조문을 확인하겠소.”“예, 나리.”“함께 가겠소?”나는 숟가락을 그릇에 놓았다. 소리는 얼룩이의 귀를 접었다.“가겠습니다. 약조가 적힌 문서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그렇게 하시오.”건우 나리는 소리 쪽을 보았다. 아이는 아버지의 시선을 느낀 듯 얼룩이를 무릎 위에 바로 앉혔다. 건우 나리는 손가락을 천천히 펴고,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먼저 배운 손짓이었다. 같이 가도 되겠느냐는 뜻이었다.소리는 고개를 저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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