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빚 92냥을 안고 열한 번째 보모 면접 줄에 선 하영. 앞선 열 명은 평균 9일 만에 쫓겨났다. 그런데 3년째 말이 없다는 대군의 딸 소리가 침상 밑에서 하영의 귀에 속삭인다. «나 말할 줄 알아요. 비밀이에요.» 소리가 입을 열면 상금 30냥. 하영은 아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장부에 적기 시작한다. 말 적은 직진 대군 이건우는 처음부터 하영 편이다. 셈하고 기록하고 기다려서 이기는 동양풍 육아 로맨스. (1~10화 무료, 전 80화 완결)
View More대문이 열리더니 보따리 하나가 먼저 굴러 나왔다.
보따리를 쫓아 나온 여인이 문턱에 걸려 무릎을 찧었다. 줄에 선 사람들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여인은 보따리를 끌어안고 일어나 대문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엿새요! 엿새 동안 그 애 앞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목이 다 쉬었다고요!”
대문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찬 사내가 문턱 안쪽에 서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열쇠가 한 번 짤랑 울렸다.
“10번째 보모가 엿새를 버텼으면 오래 버틴 편이오. 다음.”
여인은 골목으로 걸어가며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나는 품에 손을 넣어 접힌 종이를 눌렀다. 아버지 이름 아래 92냥이 적힌 빚 문서였다. 버들고개 우리 집이 그 종이에 담보로 잡혀 있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새벽에 집을 나설 때 어머니는 부엌 문턱에 서서 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입 앞에 대고 숨을 한 번 내쉬는 모양이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손짓이었다. 영아. 나는 같은 손짓으로 대답하고 나왔다. 아버지는 어두운 눈을 비비며 빚 문서를 내 품에 넣어 주었다. 동생 하람은 자고 있었다. 서당 삯이 밀려서 하람은 요즘 서당 대신 장터에서 짐을 날랐다.
3월 3일 아침, 청죽당 대문 앞에는 열네 명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9번째였다.
“열 명이 나갔대요. 평균 9일이래요.”
뒤에 선 여인이 앞사람 귀에 대고 말했다. 목소리가 커서 줄 끝까지 들렸다.
“아이가 3년째 말을 안 한대요. 대군 나리 딸인데, 이름이 소리래요. 이름은 소리인데 소리를 안 낸대.”
“말 못 하는 거래요, 안 하는 거래요?”
“그걸 아는 사람이 없으니 열 명이 나갔지.”
“삯은 월 4냥이래요. 석 달 시험을 보고, 그 안에 아이가 아버지 앞에서 입을 열면 상금이 30냥.”
“30냥이면 초가 한 채 값이네.”
줄이 술렁였다. 나는 속으로 셈했다. 4냥씩 석 달이면 12냥, 상금까지 42냥. 92냥에서 42냥을 빼면 50냥이 남았다. 다 갚지는 못해도 집을 내줄 날은 미룰 수 있었다.
나는 소매 안에서 주판알 세 개를 굴렸다. 열 명이 9일씩이면 90일이었다. 이 집은 석 달 내내 보모를 갈아 치운 셈이었다. 아이는 석 달 동안 열 사람의 얼굴을 보고 열 사람의 등을 본 셈이기도 했다.
“좀 비켜 봐요.”
비단 신을 신은 여인이 내 어깨를 밀고 앞으로 들어왔다. 여인의 눈이 내 발에 머물렀다. 내 신은 앞코가 해져 엄지발가락 자리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그 신발로 대군부 마루를 밟겠다고? 아이가 놀라겠네.”
“마루에는 신을 벗고 올라갑니다. 버선은 기워 신었어요.”
줄 앞쪽에서 누가 웃음을 삼켰다.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인은 비켜서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먼저 들어가야겠어요.”
“제 자리입니다.”
“자리에 이름이라도 써 놨어요?”
나는 대답 대신 순서 쪽지를 내밀었다. 대문지기가 새벽에 나눠 준 종이였다. 『아홉』이라는 글자 옆에 내 이름 한하영이 적혀 있었다. 여인의 손에 든 쪽지에는 『열셋』이 적혀 있었다.
대문지기가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쪽지를 접어 쥐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줄 뒤에서 누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쪽지를 품에 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대문 안쪽 누각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키가 컸고 눈썹이 굵었다. 검은 옷소매에 붓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사내는 난간에 손을 얹고 줄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다투는 동안에도, 다툼이 끝난 뒤에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대군 나리야.”
누가 숨을 죽이고 말했다.
“부인 가시고 3년 동안 웃는 걸 본 사람이 없대요.”
“소매에 꽂은 붓이 돌아가신 부인 거래.”
사내의 눈이 줄 끝에서 앞으로 천천히 옮겨 왔다. 내 신발에서 한 번 멈췄고, 내 손에 든 쪽지에서 한 번 더 멈췄다. 나는 쪽지를 내리지 않았다. 사내는 아무 말 없이 누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줄이 다시 수군거렸다.
◓
면접은 짧았다.
줄에 선 사람들은 셋씩 안으로 불려 들어갔다. 대문에서 큰마당까지 40걸음, 큰마당에서 안채 쪽으로 또 한참을 걸었다. 오는 길에 큰곳간 앞을 지났다. 문에 달린 자물쇠가 내 주먹만 했다. 문틈으로 묵은 쌀 냄새가 났다.
“청죽당 집사 변도식이오.”
열쇠 꾸러미의 사내가 마루 끝에 서서 말했다. 쉰은 넘어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안채를 가리켰다.
“연화채요. 아가씨 방에 향을 한 대 피우겠소. 향이 다 탈 때까지 아가씨 입에서 소리 하나라도 나오게 하시오. 웃음이든 울음이든.”
“울음도 됩니까?”
내가 물었다. 집사가 나를 흘깃 보았다.
“소리는 소리요.”
내 앞의 7번째 여인은 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마당까지 들렸다. 노래가 3번 되풀이되는 동안 방 안에서는 다른 소리가 나지 않았다. 8번째 여인은 엿 한 봉지를 들고 들어갔다가 봉지째 들고 나왔다. 여인은 마루에 서서 말했다.
“얼굴도 못 봤어요. 침상 밑에서 안 나와요.”
“끌어내지 않은 건 잘했소.”
집사가 엿 봉지를 받아 들며 말했다.
“끌어냈으면 대군 나리께서 그 자리에서 내보내셨을 거요. 앞의 사람 하나가 그렇게 나갔소.”
“한하영.”
나는 집사를 따라 연화채 마루를 걸었다. 마루는 오래 닦아 반들거렸다. 집사가 걸으며 물었다.
“보모 자리에 왜 왔소?”
“빚이 92냥입니다.”
집사가 그제야 나를 똑바로 보았다.
“앞의 열 명은 다 아이가 가여워서 왔다고 했소.”
“가여운지는 아직 모릅니다. 아이를 못 봤으니까요.”
집사가 코로 짧게 웃었다. 허리의 열쇠가 따라 흔들렸다. 그는 방에 들어가 책상 위 향에 불을 붙이고 나왔다. 나를 안으로 들인 뒤 문을 반쯤 닫았다. 닫히는 문틈으로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엿도 노래도 없이 들어가는 사람은 처음이오.”
“모르는 아이한테 줄 것을 미리 고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마루에 있겠소.”
열쇠 소리가 마루 끝으로 멀어졌다.
방은 작았다. 침상 하나, 작은 책상 하나, 그리고 나무로 깎은 호랑이 집 하나가 있었다. 호랑이 얼굴이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빈 종이 한 장과 벼루가 놓여 있었다. 벼루 바닥에 먹이 말라 갈라져 있었다. 침상 밑에서 작은 발 하나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는 아이를 부르지 않았다. 침상에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얼굴을 마주하면 아이가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았다. 바닥이 찼다.
향 냄새가 방에 퍼졌다. 침상 밑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빨랐다. 나는 그 숨을 셌다. 처음에는 셀 수가 없었다. 조금 지나자 손가락 하나를 접는 동안 4번이 됐고, 또 조금 지나자 3번이 됐다.
나는 소매에서 주판알 세 개를 꺼내 바닥에 놓았다.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 침상 쪽으로 굴렸다. 주판알은 침상 다리에 부딪혀 멈췄다.
한참 뒤 작은 손이 나와 주판알을 집어 들어갔다.
나는 알 하나를 더 굴렸다. 이번에는 손이 빨리 나왔다. 그리고 첫 번째 알이 내 쪽으로 굴러왔다. 아이가 돌려준 것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 그 알을 다시 굴렸다. 알 두 개가 침상과 내 무릎 사이를 오갔다.
한 번은 알이 손이 아니라 누런 천 뭉치에 밀려 나왔다. 줄무늬가 있는 짐승의 앞발이었다. 앞발은 금방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혼자 숨어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알이 올 때마다 무릎을 한 번씩 두드려 받았다고 알렸다. 그렇게 7번을 주고받았다.
그때 마루에서 발소리가 났다. 집사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열쇠 소리가 없었다. 무거운 신이 마루를 3번 울리고 방문 앞에서 멈췄다.
침상 밑에서 주판알이 굴러오지 않았다. 숨소리가 다시 빨라졌다. 아이가 몸을 웅크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침상을 향해 낮게 말했다. 어머니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가 내 말을 놓치고 미안한 얼굴을 할 때마다 했던 말.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문 앞의 발소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까보다 천천히 멀어졌다. 문틈으로 키 큰 그림자가 지나갔다.
‘지금 문밖에 선 사람이 아이 아버지라면, 아이는 아버지 발소리에 숨는 거다.’
향은 절반이 타 있었다. 지금 침상 밑으로 손을 넣으면 아이는 울 것이다. 울음도 소리라고 집사는 말했다. 92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움직이지 않았다. 울려서 얻은 자리라면 나도 9일 안에 대문 밖으로 보따리를 던지게 될 것이었다.
나는 남은 주판알 하나를 손바닥에 올렸다.
◓
향이 3분의 1쯤 남았을 때 침상 밑에서 아이가 나왔다. 머리가 먼저였다.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아이는 호랑이 인형 하나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누런 바탕에 검은 줄무늬를 수놓은 인형이었다. 오래 안아서 귀 한쪽이 납작했다.
아이 목에는 놋쇠 방울이 걸려 있었다. 아이는 기어 나오는 내내 왼손으로 방울을 꼭 쥐고 있었다. 방울이 울리지 않게.
나는 그 손을 보았다. 소리 하나라도 나오게 하라는 시험이었다. 방울이 한 번만 울려도 집사에게 할 말이 생겼다. 아이는 그걸 아는 것처럼 방울을 쥐고 있었다.
아이는 여섯 살이라고 들었는데 그보다 작아 보였다. 소매 끝이 손등을 덮었다. 아이가 무릎걸음으로 내 옆까지 왔다. 주판알 두 개를 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오른손 손등을 보았다. 거기에는 어릴 때부터 지워지지 않은 먹물 점이 하나 있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그 점을 눌렀다. 문질러 보기도 했다. 점은 그대로였다. 아이는 자기 손가락 끝을 들여다보고, 먹이 묻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손을 거뒀다. 남은 알 하나는 내 손바닥에 있었다. 아이가 그 알을 보았다.
“이건 가져도 돼요.”
나는 손바닥을 아이 쪽으로 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알을 집어 인형의 앞발 사이에 끼웠다. 인형이 주판알을 안은 모양이 됐다.
향 끝에서 재가 길게 휘었다. 마루 끝에서 열쇠 소리가 한 번 났다. 집사가 몸을 고쳐 앉는 소리였다.
아이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의 숨이 귀에 닿았다. 누룽지 냄새가 조금 났다.
“아줌마, 나 말할 줄 알아요.”
목소리는 내 귀에만 닿을 만큼 작았다. 쉬어 있지도, 서툴지도 않았다. 오래 쓰지 않은 목소리가 아니라, 오래 숨겨 둔 목소리였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루 끝의 집사에게는 닿지 않았을 소리였다. 나는 무릎 위에서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아이가 방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내 귀에 입을 댔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손가락 하나를 더 접었다. 아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기다렸다. 내가 끄덕이자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보탰다.
“비밀이에요.”
향 끝의 재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나는 손가락 하나를 마저 접었다.
『장부: 오늘 소리의 말 3마디 · 아직 장부가 없어 손가락 셋을 접었다』
(1화 끝)
12월 5일 아침, 청죽당 큰마당에 혼례상이 놓였다.첫눈이 왔던 날의 눈은 담 밑 그늘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마당 흙은 쓸어서 고왔다. 오 어멈이 상 위에 대추와 밤을 올리고, 붉은 천 모서리마다 작은 돌을 얹었다. 바람에 천이 들리지 않게 하려는 일이었다.나는 연화채 마루에서 혼례옷 고름을 다시 맸다. 소매 안쪽에는 주판알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오늘도 빼 두지 않았다. 손등의 먹물 점은 분을 발라도 가려지지 않았다. 가리지 않기로 했다.3월 3일 아침, 나는 저 대문 밖 줄에 9번째로 서 있었다. 품에는 92냥이 적힌 빚 문서가 있었다. 오늘까지 278일이었다. 빚 문서는 지난달 아버지 손으로 돌려받았다. 품이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천으로 싼 장부가 들어 있었다.소리가 방에서 나왔다. 새 옷을 입고 얼룩이를 안고 있었다. 놋쇠 방울이 옷깃 밖으로 나와 있었다. 3월에는 늘 옷 안에 넣어 두던 방울이었다.“엄마.”나는 대답을 늦추지 않았다.“응, 소리야.”“오늘은 방울 꺼내도 돼요?”“그럼. 오늘은 숨길 날이 아니야.”나는 아이 고름을 다시 매 주었다. 3월부터 매일 아침 해 온 일이었다. 예전에는 고름을 매고 나서 방울이 깃 안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했다. 오늘은 깃 밖에 나온 방울 끈을 가지런히 펴 주었다.소리가 방울을 손바닥에 올려 흔들었다. 방울이 마루 끝까지 울렸다. 부엌에서 오 어멈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웃으며 들어갔다.“얼룩이 자리는 내가 정할 거예요.”“어디로?”“그건 맨 마지막에요.”아이는 얼룩이의 귀를 엄지로 문질렀다. 귀 한쪽은 여전히 납작했다. 지난여름 내가 다시 꿰맨 배는 실이 아직 하얬다.오 어멈이 부엌에서 나와 내 옷깃을 손끝으로 폈다.“서리님, 옷이 불편하진 않으셔요?”“괜찮아요. 어멈이 잘 여며 주셨잖아요.”“매듭이 흔들릴까 봐 3번이나 다시 맸어요. 오늘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른 날이니까 그 말은 안 할게요.”오 어멈은 그렇게 말하고 혼자 웃었다. 쑥이가 찻잔을 나르다 내 쪽을 돌아보았다.
첫눈이 마당에 내렸다. 소리는 손바닥을 위로 펴고 눈송이를 기다렸다. 눈은 손에 닿자마자 물이 되어 작은 자국을 남겼다.“차갑지?”내가 묻자 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뒤집어 물기를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소매 끝으로 손을 닦았다. 얼룩이는 다른 팔에 끼워져 있었다. 소리는 인형의 귀가 젖지 않도록 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얼룩이는 눈을 처음 보지?”소리는 인형을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인형의 귀를 손가락으로 두 번 쓸었다. 놋쇠 방울은 옷깃 안에 들어가 있었다. 소리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이 작게 닿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마당 끝에는 건우가 서 있었다. 눈을 맞으며 우리 쪽을 보고 있었다. 처마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리에게 먼저 다가오지도 않았다. 손에는 서란의 붓이 들려 있었다. 붓끝을 종이에 댈 생각은 없는 듯했다.나는 손등을 올려 눈송이를 받았다. 먹물 점 옆에 물기가 맺혔다. 소리가 내 손등을 가리켰다.“내 손에도 내려앉았네.”소리는 손끝으로 제 손바닥을 가리키고, 내 손등을 짚었다. 두 곳을 번갈아 본 뒤 고개를 기울였다.“손바닥은 따뜻해서 바로 녹고, 손등은 조금 남았어.”소리는 내 손등을 다시 살폈다. 물방울이 손가락 쪽으로 흘러내리자 소리는 자기 소매로 닦아 주려다 멈췄다. 소매가 젖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괜찮아. 내가 닦을게.”내가 손수건을 꺼내자 소리는 손을 거두었다. 손수건에 물기가 옮겨졌다. 나는 접어서 소매 안에 넣었다.“눈이 더 많이 오면 마당에 쌓이겠지.”소리는 마당 바닥을 살폈다. 흙 위에 눈이 드문드문 내려앉아 있었다. 소리는 한쪽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발자국을 남기면 자국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한 듯했다.“밟아 봐도 돼.”소리는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흙이 드러난 곳을 골라 발을 옮겼다. 신발 끝이 눈을 눌렀다. 자국은 작았고 가장자리에 흙이 비쳤다. 소리는 발을 들고 그 모양을 오래 보았다.“한 번 더 밟으면 옆에 자국이 생기겠다.”소리는 이번
청죽당 대문 앞에서 어머니가 내 손목을 잡았다. 손끝으로 내 소매를 2번 두드린 뒤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어머니는 안에 사람이 많으냐고 손짓했다.나는 아버지와 하람이 있고 대군 나리도 계신다고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답했다.어머니는 손끝을 오므렸다 폈다. 긴장할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아버지는 문턱 앞에서 지팡이 끝을 바닥에 대고 방향을 살폈다. 하람이 아버지의 팔꿈치를 받쳤다.“문턱이 바로 앞이에요. 1걸음만 더요.”“그래. 청죽당 문은 우리 집 문보다 넓구나.”아버지가 문틀을 손으로 짚었다. 어머니는 내 옆에서 그 말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아버지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내가 손짓으로 옮겨 주자 어머니가 작게 웃었다.대문 안쪽에서 건우가 걸어 나왔다. 바깥에 나갈 때 입는 옷차림이었고, 허리에는 띠가 단정히 매여 있었다. 건우는 아버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한 어르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대군 나리께서 직접 맞아 주시니 송구합니다.”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건우는 손을 뻗지 않았다. 아버지가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의 손을 두 손으로 받았다.그는 어머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 평소보다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먼저 자기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그다음 어머니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손끝으로 부탁하는 모양을 만들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잘 부탁드립니다.”건우가 입으로도 말했다. 이어 손짓을 한 번 더 했다.어머니는 건우의 손을 살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어머니는 내 손바닥에 손가락을 올리고 천천히 움직였다. 대군 나리가 우리 말을 배웠다는 뜻이었다.나는 건우에게 어머니의 말을 옮겼다.“어머니께서 손짓말을 배우셨느냐고 물으셨습니다.”“하영 씨가 쓰는 것을 보았소. 인사부터 배우고 싶었소.”건우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건우의 입술을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손바닥을 가슴에 대고 건우에게 내밀었다.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감찰원 대청의 문이 닫히자 바깥 소리가 얕아졌다.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자리를 고쳤다. 나는 손에 든 자료를 무릎 위에 놓았다. 종이 가장자리가 손등의 먹물 점에 닿았다.감찰관은 탁자 앞에 앉아 오늘 다룰 안건을 읽었다. 혼인한 여성 서리가 직을 계속 맡을 수 있는지, 관행을 유지할 것인지 살필 것이라고 했다. 말을 마친 감찰관은 양쪽에 발언 순서를 알렸다.내 뒤에는 구 서리가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 자료 한쪽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한 서리, 순서가 되면 1장부터 내시오.”“네. 준비했습니다.”구 서리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종이 뭉치를 무릎 위에서 반듯하게 맞췄다.대청 끝 방청석에는 건우와 소리가 앉아 있었다. 건우는 소리를 무릎에 앉히고 손으로 아이의 허리를 받쳤다. 소리는 얼룩이를 안고 있었다. 놋쇠 방울은 옷깃 아래에 가려져 작은 소리도 내지 않았다.나는 소리에게 손가락을 하나 펴 보였다. 기다려 달라는 손짓이었다. 소리는 눈을 마주친 뒤 얼룩이의 귀를 만졌다. 건우는 내 쪽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감찰관이 내게 발언하라고 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 뭉치를 탁자 위에 올리고 첫 장을 펼쳤다. 대청 안의 시선이 내 손으로 모였다. 종이 위에는 여성 셈꾼 7명의 사례가 적혀 있었다. 이름은 적지 않았다. 맡았던 일과 혼인 뒤의 처분, 확인한 기록의 출처만 남겼다.“저는 혼인한 여성 셈꾼 7명의 사례를 확인했습니다. 그중 4명은 혼인 뒤 직을 그만두었습니다. 나머지 3명은 계속 일했습니다.”방청석 한쪽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반대편에 앉은 노신료가 손을 들었다.“7명의 사례로 관행을 바꿀 수 있겠소?”“7명만으로 모든 경우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례마다 처분 기록과 근무 기록을 따로 확인했습니다.”나는 첫 장을 들었다. 기록을 찾은 순서대로 표에 표시한 칸을 짚었다.“4명 가운데 2명은 혼인한 날을 기준으로 직을 그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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