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려는데 흉부외과 교수가 집착합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3 챕터

11화. 교수님이 이상해졌다

식당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한식당이었다. 채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펼쳤다.“저 갈비찜이요.”“먹고 싶은 거 먹어.”“그럼 갈비찜이랑 육회비빔밥이랑….”“다 먹을 수 있어?”“교수님이 사주시는 거잖아요.”“그래서?”“최대한 뽕을 뽑아야죠.”태혁이 메뉴판을 내려다봤다.“네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를 돈밖에 모르는 줄 알지.”채이가 환하게 웃었다.“아, 교수님. 저 돈밖에 모르는 거 맞는데요?”“…….”“제가 의사 하려는 이유도 솔직히 돈이 제일 컸어요. 성형외과 가서 개원하고 돈 많이 벌려고 했거든요.”“알아.”“그런데 교수님이 저를 꼬셨잖아요.”태혁의 시선이 올라왔다.“꼬셔?”“네. 인턴 때는 그렇게 다정하셨으면서.”“…….”“한채이 선생, 내가 제대로 가르쳐 주겠다고. 너라면 최고의 외과의가 될 수 있다고. 그 말에 제가 넘어갔잖아요.”채이는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지금 생각하면 완전 사기 계약이에요.”“네가 선택한 거야.”“교수님이 영업을 잘하신 거죠.”“그럼 네가 잘못 선택한 거네.”“아니, 여기서 제 잘못이라고요?”“네가 그렇게 똑똑하다며.”“교수님!”식당 직원이 반찬을 가져다주는 바람에 채이는 억울함을 잠시 접어 두었다. 음식이 나오자 그녀는 정말로 열심히 먹었다. 배가 고팠던 것도 있지만, 눈앞의 갈비찜이 무척 맛있었다.태혁은 맞은편에서 천천히 식사했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성형외과 교수님이랑 연락은 해?”채이의 젓가락이 멈췄다.“…서정민 교수님이요?”“그래.”“가끔 안부 정도요.”“뭐라고 하시던데.”“그냥 전문의 따고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고요.”“갈 거야?”채이는 그를 바라봤다. 태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심하고 담담했다. 마치 환자의 치료 계획을 묻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채이는 어쩐지 젓가락을 내려놓게 됐다.“아직 모르겠어요.”“왜?”“전문의 시험도 안 봤는데 벌써 그다음 일을 정할 필요는 없잖아요.”“그렇긴 하지.”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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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아주 작은 균열

병원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채이는 행사장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와….”병원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교수들과 의료진, 반짝이는 조명, 테이블 위에 놓인 꽃 장식. 채이는 자신이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게 얼마 만인지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어차피 기억도 안 났다.“한채이.”태혁이 걸음을 멈췄다.“너는 여기 있어. 인사할 사람 있으면 인사하고, 불편하면 먼저 들어가도 돼.”“교수님은요?”“나는 인사 좀 하고.”“아.”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태혁이 돌아서려는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강 교수님.”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채이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병원 기획조정실장이었다.“오랜만입니다. 이번에 흉부외과 쪽에서 좋은 성과가 많다고 들었습니다.”“아직 부족합니다.”“하하, 늘 겸손하시네요. 그런데….”그의 시선이 채이에게 향했다.“옆에 계신 분은?”태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채이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흉부외과 4년 차 전공의 한채이입니다.”“아, 한 선생.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강 교수님이 워낙 아끼시는 제자라고.”채이의 눈이 커졌다.‘뭐라고요? 아끼시는 제자?’채이는 반사적으로 태혁을 돌아봤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실력이 좋습니다.”딱 일곱 글자. 그런데 채이는 순간 가슴이 묘하게 간질거렸다.태혁은 평소에도 수술 실력에 대해서는 인정해 줬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직접 말하는 건 흔하지 않았다.기획조정실장이 웃으며 말했다.“강 교수님 밑에서 버티고 계시니 실력은 확실하겠네요.”“네?”채이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아, 제가 실례를 했나요?”“아니요. 그게….”채이는 잠깐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버티는 건 실력과 별개인 것 같습니다.”순간 정적. 기획조정실장이 크게 웃었다.“하하하! 한 선생, 재미있으시네요!”태혁은 이마를 짚었다.“죄송합니다.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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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정말이지 귀찮은 여자

오전 5시 28분.한채이는 병원 복도를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태혁이 미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원래 미친 인간이었는데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어젯밤 분명히 오전 6시에 보자고 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서 갑자기 문자가 왔다.[내일 5시 30분.]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5시 30분까지 오라는 뜻이었다.한채이는 택시 안에서 사직서를 작성할 뻔했다. 손가락이 떨려 오타가 났고, 그 오타를 수정하다가 멀미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5시 28분에 교수실 앞에 도착했다.“…하아, 하아.”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채이는 벽에 손을 짚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전 5시 29분. 살았다. 오늘도 사직서는 보류였다.문을 열자 강태혁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채이를 보자마자 시계를 확인했다.“늦었네.”“…교수님.”“왜.”“지금 몇 시인지 아세요?”“5시 29분.”“그런데 제가 늦었다고요?”“내가 5시 30분이라고 했잖아.”“네. 그래서 5시 29분에 왔잖아요!”“30분까지 준비하라는 뜻이었어.”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하나. 둘. 셋. 후우.오늘은 참자. 어제 밥도 사주셨다. 정장도 멋있었다. 좋은 말씀도 하셨다.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은혜는 갚아야 했다.“…교수님.”“말해.”“제가 어제 교수님 정장 잘 어울린다고 말씀드렸죠?”“그래서?”“그 말 취소하겠습니다.”“마음대로 해.”“그리고 어제 사주신 밥도 환불하고 싶습니다.”“불가능해.”“이런 식으로 사람을 부려 먹으시면 소비자보호원에 신고할 겁니다.”태혁이 차트를 내려놓았다.“다 했어?”“네.”“그럼 앉아.”채이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혁은 차트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오늘 첫 수술 환자야. 검사 결과 확인하고 네가 먼저 계획 세워.”채이는 차트를 받아 들었다. 환자의 나이와 진단명, 영상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폐 상엽 쪽 병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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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가라고 했잖아요

오후 12시 20분.한채이는 교수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문을 열자 태혁이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채이는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부르셨습니까, 교수님.”“밥은 먹었어?”채이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교수님.”“왜.”“오늘 제 식사 횟수 확인하는 날이에요?”“대답이나 해.”“먹었습니다.”“뭘.”“김치찌개요.”“다 먹었어?”“네.”“좋아.”채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교수님, 혹시 저희 어머니세요?”태혁이 서류를 내려놓았다.“…뭐?”“밥 먹었냐고, 다 먹었냐고, 어디서 뭘 먹었냐고. 저희 엄마도 이렇게까지는 안 물어보시거든요.”“그럼 네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해. 내가 대신 신경 쓰고 있으니까.”채이는 입을 다물었다.‘아니.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했지? 대신 신경 쓰고 있다고?’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태혁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는지, 곧바로 차트를 집어 들었다.“됐고. 아까 연락 온 거.”채이는 눈을 크게 떴다.“네?”“누구냐고.”“...”“왜.”“아니요.”채이는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교수님.”“말해.”“저 진짜 교수님 좋아해도 돼요?”태혁의 손이 멈췄다. 채이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제가 자꾸 착각하게 만드시잖아요.”교수실 안이 조용해졌다. 태혁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멋대로 착각하지 마.”채이의 웃음이 아주 조금 멈췄다.“내가 네 교수라는 거 잊지 말고.”그 말은 맞았다. 그는 그녀의 지도교수였고, 상급자였고, 그녀의 전문의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 채이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태혁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받아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졸업하면 좋아해도 되냐’고 되물을 줄 알았다. 그런데 채이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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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저 인간 지금 뭐 하는 거야?

한채이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정확히는, 오랜만에 미래가 기대됐다.성형외과 서정민 교수와의 면담은 오후 세 시로 잡혔다. 전문의를 딴 이후의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는 연락이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한채이가 의대생 시절부터 꿈꿔 왔던 미래가 아주 오랜만에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기분이었으니까.‘좋아. 오늘은 절대 기분 상하지 말자.’채이는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오전에는 수술이 있고, 오후에는 회진이 있고, 틈틈이 밀린 기록도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오후 세 시에는 서정민 교수와의 면담. 완벽한 일정이었다.단 한 사람만 없으면.“한채이.”…아.“네.”“환자 기록은 확인했어?”“네.”“검사 결과는?”“확인했습니다.”“수술 동의서는?”“확인했습니다.”“그럼 이건 왜 안 했어?”태혁이 모니터를 돌려 보여 줬다. 채이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입을 벌렸다.“...교수님. 이거 어제 추가된 검사잖아요.”“그래.”“어제 밤에 추가됐잖아요.”“그래서?”“제가 어제 밤에 당직이었잖아요.”“알아.”채이는 천천히 웃었다.“교수님.”“말해.”“혹시 저를 싫어하세요?”“아니.”“그럼 왜 이렇게 괴롭히세요?”“네가 잘하니까.”“그건 칭찬이에요, 저주예요?”“둘 다.”채이는 이마를 짚었다. 이 인간은 정말 변하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오늘 아침에는 미래를 생각하며 기분이 좋았는데.강태혁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그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증발했다.“그리고.”태혁이 차트를 한 장 더 넘겼다.“오늘 오후 일정은 비워 둬.”채이의 손이 멈췄다.“…네?”“오후에 케이스 리뷰할 거야.”“몇 시에요?”“두 시.”“교수님.”“왜.”“저 오늘 세 시에 약속 있는데요.”태혁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약속?”채이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이 인간이. 어제 그렇게 진로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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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당신이 원하는 길이라면

성형외과 교수실. 서정민은 채이를 보자 반갑게 웃었다.“한 선생, 오랜만이네.”“안녕하세요, 교수님.”“앉아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네. 교수님도 잘 지내셨어요?”“그럼요. 그런데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이네. 흉부외과가 여전히 바쁜가 봐요.”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웃었다.“네. 조금요.”“강 교수님 밑에서 배우는 게 쉽지는 않죠.”“…그건 많이요.”서정민이 웃음을 터뜨렸다.“솔직하네.”채이도 따라 웃었다.분위기는 편안했다. 서정민은 채이의 의대 시절 성적과 실습 기록을 언급하며 그녀가 가진 강점을 짚어 줬다. 특히 손이 빠르고 섬세하며, 수술 중 상황이 달라져도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한 선생은 성형외과 쪽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채이는 자세를 바로 했다.“감사합니다.”“물론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에요. 전문의 과정도 남아 있고, 흉부외과에서 배운 것도 많을 테니까.”“네.”“다만 전문의 취득 후에 우리 과에서 함께 일할 생각이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기회가 되면 수술 참관이나 학술 활동도 함께할 수 있고요.”채이의 눈이 반짝였다.“정말요?”“그럼요. 한 선생처럼 기본기가 좋은 사람은 어디서든 환영받아요.”그녀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꿈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다.서정민이 웃으며 덧붙였다.“그리고 강 교수님이 한 선생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시더군요.”“…네?”채이의 표정이 멈췄다.“강태혁 교수님이요?”“그래요. 내가 한 선생에게 관심 있다고 했더니, 실력이 좋은 친구니까 어디서든 잘할 거라고 하셨어요.”채이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강태혁이. 서정민 교수에게.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고?’서정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물론 자기 제자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강 교수님은 실력 없는 사람을 그렇게 평가하는 분이 아니잖아요.”채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죠.”“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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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그렇게 웃지 말든가

태혁은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대신 여기 있는 동안은 제대로 해. 환자한테 책임 다하고, 네가 배울 수 있는 건 전부 배우고.”“…네.”“그게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거야.”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문득 장난기가 고개를 들었다.“그런데요, 교수님.”“또 뭐.”“제가 성형외과 가면 교수님 보고 싶어서 울지도 몰라요.”태혁의 눈썹이 꿈틀했다.“…네가?”“네.”“왜?”“교수님이 너무 그리울 것 같아서요.”태혁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헛소리하지 마.”“아니, 정말인데요. 매일 새벽 다섯 시 반에 깨워 주시고, 밥 먹었는지 확인해 주시고, 제 인생에 이렇게 깊게 개입해 주시는 분이 또 어디 있겠어요.”“...”“교수님 같은 분은 평생 한 분밖에 없을 것 같아요.”태혁은 한동안 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그건 나도 동의해.”채이가 눈을 깜빡였다.“…네?”“너 같은 전공의도 평생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아, 진짜!”채이는 서류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제가 괜히 감동했잖아요!”태혁이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웃었다. 채이는 그 얼굴을 보고 잠깐 말을 잊었다. 그러다 서류로 얼굴을 가렸다.“…교수님.”“왜.”“웃지 마세요.”“왜?”“사람 헷갈리게 하니까요.”말이 끝나자마자 채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거지?태혁도 웃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채이는 천천히 서류를 내렸다.“…저, 그게.”“한채이.”“네.”“너 오늘 이상하다.”“교수님 때문이거든요.”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채이는 입을 틀어막았다. 태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나가 봐.”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한채이.”채이는 반사적으로 돌아봤다.“네?”“학회 준비는 내가 도와줄게.”채이는 그를 바라봤다. 태혁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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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수고했어

오후 8시 17분. 한국대학교병원 흉부외과 교수실.“다시.”“…교수님.”“다시 하라고.”한채이는 마이크도 없는 손에 쥐어진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다봤다.“저 방금 세 번째 했거든요?”“그래서?”“사람이 세 번이나 발표했으면 칭찬 한 번쯤 해 주실 수 있잖아요.”강태혁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았다.“세 번 다 별로였어.”“와.”채이는 허탈하게 웃었다.“교수님, 혹시 제가 발표를 잘하면 칭찬해 주실 생각은 있으세요?”“있어.”“언제요?”“잘하면.”저 인간은 정말 말로 사람을 죽이는 데 재능이 있었다.국제학회 발표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은 지 나흘째. 채이는 진료와 수술, 회진을 소화하면서 발표 자료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태혁은 퇴근 직전 그녀를 교수실로 불러 발표 연습을 시켰다.처음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태혁이 짚어 주는 부분은 대부분 정확했고, 자신이 놓친 논리적 허점도 분명히 있었다. 문제는 이 남자가 피드백을 하는 방식이었다.“첫 슬라이드부터 다시 봐. 네가 왜 이 환자를 선택했는지 설명이 부족해.”“선정 이유는 뒤쪽에 있습니다.”“청중이 뒤까지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첫 30초 안에 관심을 끌어야지. 네가 지금 발표하는 건 환자 기록 낭독회가 아니야.”채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게 더 열받았다. 틀린 말이면 반박이라도 하지.“그리고 이 부분.”태혁이 화면을 가리켰다.“네 판단의 근거가 뭐야?”“수술 전 영상과 수술 중 확인한 소견을 종합했을 때….”“그건 결과고. 당시 네가 어떤 근거로 판단했는지 설명하라고.”채이는 잠시 생각했다.“위험 요소를 먼저 배제했고, 그다음에 가능한 접근법을 비교했습니다.”“그걸 청중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네.”“다시.”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이 인간이 오늘만큼은 인간적으로 굴기를.“교수님.”“말해.”“저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거 아시죠?”“알아.”“내일도 수술이 있는 거 아시죠?”“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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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이번엔 진짜 질투 맞죠?

다음 날 오후. 국제학회 발표 준비는 예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채이는 수술이 끝난 뒤 의국에서 자료를 수정하고 있었다. 태혁은 외래와 회진을 마치고 나서야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오후 네 시쯤, 의국 문이 열렸다.“한 선생님?”채이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아.”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윤 선생님.”윤도윤. 심장혈관흉부외과에서 전임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의사로,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한국대학교병원으로 옮겨 왔다. 채이보다 몇 살 위였고, 인상이 부드러워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오랜만이네요. 요즘 바쁘시죠?”“네. 윤 선생님도요.”도윤은 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바라봤다.“학회 준비하세요?”“네. 다음 달에 국제학회 발표가 있어서요.”“아, 그 증례요? 강 교수님이 한 선생님 발표시킨다고 말씀하셨는데.”채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요.”“그래도 강 교수님이 맡기셨다는 건 기대하신다는 뜻이겠죠.”“…그런가요?”“그럼요. 강 교수님이 아무한테나 중요한 발표를 맡기시는 분은 아니잖아요.”채이는 피식 웃었다.“그건 맞아요. 대신 아무한테나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시기도 하죠.”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한 선생님은 강 교수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세요?”“그럼요.”“대단하시네. 저는 아직도 교수님 앞에만 가면 긴장하는데.”“저도 긴장은 해요.”채이는 진지하게 말했다.“다만 긴장한다고 입이 다물어지진 않더라고요.”도윤은 크게 웃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도윤이 말했다.“그런데 혹시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채이는 고개를 들었다.“네?”“제가 새로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병원 근처를 잘 모르거든요. 전에 한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식당이 괜찮았던 것 같아서요.”“아, 네. 거기 맛있어요.”“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제가 살게요.”채이는 잠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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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그러니까 네 마음대로 해

채이는 병원 정문 앞에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병원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떨어진 식당이었다. 도윤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고, 채이는 휴대폰을 확인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한채이.”채이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니길.“…네, 교수님.”돌아보니 강태혁이 서 있었다. 그는 퇴근하려는 듯 정장 재킷을 걸친 채였다.“여기서 뭐 해?”“약속 기다리고 있는데요.”“알아.”“…아세요?”“아까 들었잖아.”아. 그랬지.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 선생님 기다리고 있습니다.”태혁의 입매가 굳었다.“아직 안 왔어?”“네. 조금 늦으신대요.”“그래.”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태혁은 가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정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채이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교수님.”“왜.”“퇴근 안 하세요?”“할 거야.”“그런데 왜 안 가세요?”“차가 안 와서.”채이는 병원 주차장을 바라봤다. 태혁의 차는 주차장에 있었다.“교수님 차 저기 있잖아요.”“알아.”“그런데 왜 차가 안 왔다고 하세요?”“한채이.”“네.”“너 오늘 정말 한가하구나.”채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아, 진짜! 교수님!”태혁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웃어?”“아니, 너무 티 나시잖아요!”“뭐가.”“질투하는 거요!”“…….”“교수님,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채이는 한 걸음 다가갔다.“저 성형외과로 가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랑 밥 먹는 것도 싫으세요?”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채이는 그 침묵을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이미 한 소리 들었을 것이다. 미쳤냐, 헛소리하지 마라, 네가 지금 할 일이 뭐냐.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태혁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이상할 만큼 진지했다. 채이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거뒀다.“…교수님?”그 순간 태혁이 입을 열었다.“네가 누구를 만나든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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