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굶긴 남자가 나를 탐하기 시작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34 Chapters

제011화. 잠긴 찬장

태혁은 자신의 기준에 자세가 완벽히 들어맞을 때까지 잔혹할 정도로 같은 동작을 짓이기듯 반복시켰다. 도희를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은 처음 접하는 낯선 운동 종목이 아니라, 그의 입에서 언제 ‘끝’이라는 단어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지독한 불확실성이었다. 단 몇 분의 움직임에도 낯선 근육이 찢기듯 당겨왔고, 밤이 깊어질수록 머릿속은 온통 날이 밝으면 시작될 다음 고문으로 짓눌렸다.절제된 식단에 수면마저 흩어지자, 뼈마디를 파고드는 근육통은 형벌처럼 가중되었다. 쥐어짜듯 뒤틀리는 빈속을 억누르며 저릿하게 마비된 손끝을 천천히 오므렸다 폈다. 홑이불 밖으로 비져나온 발끝을 타고 살갗을 에는 듯한 오한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도희는 덜덜 떨리는 몸을 짐승처럼 둥글게 말아 쥐었다.“으…… 으으…….”새벽 2시. 펜트하우스 게스트룸의 거대한 침대 위에서, 도희는 자궁 속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젖은 식은땀을 비 오듯 쏟아내고 있었다.손끝과 발끝이 잘게 경련하며 감각이 하얗게 바래져 갔다.익숙하던 극렬한 자극이 한순간에 거세되자, 관자놀이를 부수는 듯한 편두통과 함께 전신을 뒤흔드는 소름이 몰아쳤다. 눈을 감아도, 부릅떠도 시야를 붉게 잠식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핏빛 고추기름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라면의 칼칼한 국물, 혀끝을 찔러오는 달콤 짭조름한 양념치킨의 파삭한 껍질, 그리고 점막을 사정없이 쥐어뜯듯 마비시키는 마라탕의 붉은 기름. 그 지독한 환영들이 망막 뒤편에서 잔인하게 점멸했다.입안 가득 주체할 수 없이 침이 고여 들었고, 도희는 마른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침을 연신 꼴깍 집어삼켰다.‘먹고 싶어…… 짠 거…… 입안이 타는 듯이 매운 거…… 제발 그 국물 한 모금만…….’코끝에 매캐한 라면 냄새가 스치는 듯해 허겁지겁 고개를 처들었지만, 서늘한 방 안을 메우는 것은 무미건조한 에어컨의 기계음과 냉기뿐이었다. 베개를 거칠게 뒤집어 얼굴을 파묻었다. 음식을 지우려 발버둥 칠수록, 뇌리에 각인된 붉은 기름기와 염분의 감각은 더욱 흉포하게 똬리를 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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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2화. 20층의 밀수

‘창문…… 그래, 베란다!’번뜩이는 시선이 거실 전면의 통유리창으로 꽂혔다.환기를 위해 안전 걸쇠로 고작 15센티미터 남짓 틈새만 벌어지도록 고정된 베란다 창.그 좁은 틈새를 보는 순간, 대식 먹방 크리에이터로 군림하던 시절 야외 생방송 때마다 돌발 상황을 해결해 주던 심부름 대행 라이더의 직통 번호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도희의 젖은 눈동자에 굶주림으로 벼려진 위험천만한 광기가 일렁였다.“라면…… 불닭볶음면…… 삼각김밥…….”도희는 이를 갈듯 중얼거리며 주문 목록과 주소를 시선으로 훑었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허기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나, 숫자 하나 잘못 기재했다가는 이 마지막 동아줄마저 끊어지고 만다. 촬영 소품을 위해 발을 구르던 과거의 생존 본능이 이 기괴한 감금지에서 발휘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단속적인 신호음이 이어지는 몇 초가 지옥의 형벌처럼 길게 늘어졌다.손바닥에 밴 끈적한 식은땀 탓에 매끄러운 액정이 미끄러져 내렸다.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받아…… 제발, 받아 줘……!’달칵.― 여보세요?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낯익고 투박한 음성에, 도희의 눈가에서 억눌렸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철민 씨! 저 도희예요, 윤도희!”― 어? 도희 님? 지금 방송도 접고 잠수 타셨다면서요? 무슨 일인데요?“돈은 얼마든지 줄게요. 지금 당장 한남동 펜트하우스 뒤편 소나무 화단으로 배달 좀 해줘요. 심부름값으로 15만원 바로 계좌이체 할게요!”― 15만원이요? 새벽 3시에 거길 왜…… 아니, 뭘 가져다 드리면 되는데요?“편의점 불닭볶음면 큰사발 두 개, 조리해서 밀봉해 주시고요. 참치마요 삼각김밥 세 개랑 숯불 핫바, 콜라도요. 창문 틈으로 줄을 내릴 테니까 거기에 가방만 묶어주시면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저 지금 죽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20분 안에 갈 테니까 20층 베란다 창문 쪽에서 신호 대기하세요.통화를 끊자마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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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3화. 꺼지지 않는 조명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시야를 찔러 눈물이 솟았다. 손바닥 굳은살 아래로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10미터, 20미터, 40미터…… 50미터.마침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패브릭 백이 20층 창틀 코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틈새로 훅 끼쳐오는 자극적인 매운내와 마요네즈의 기름진 온기.그것은 지난 사흘간 무미건조한 맹물과 비린 닭가슴살 셰이크로 혹사당했던 도희의 감각을 단숨에 유린하는 구원의 냄새였다. 온몸의 신경이 녹아내릴 만큼 황홀한 자극이었다.“잡았다…… 드디어 잡았어……!”울음 섞인 신음을 삼키며 가방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도희는 가방을 창틀 틈새에 단단히 밀착시킨 채 줄을 틀어쥐고, 그 좁은 틈으로 컵라면과 편의점 음식들을 하나씩 품 안으로 욱여넣었다. 마침내 홀쭉해진 가방까지 안으로 빼내어 온전한 음식들을 다시 끌어안자,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에 아랫입술이 덜덜 떨려왔다.당장 비닐을 갈기갈기 찢고, 저 붉은 양념을 마른 혀끝에 사정없이 문지르고 싶었다.뜨거운 면발을 허겁지겁 밀어 넣고, 소금기 어린 밥알을 짓씹어 삼키고 싶다는 원초적인 갈증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바닥에 주저앉은 도희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컵라면 뚜껑의 비닐 랩을 벗겨내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탁.싸늘한 마찰음과 함께, 거실 천장의 주백색 조명이 단숨에 터져 나왔다.폭력적인 빛에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는 순간, 맨발이 차가운 바닥재를 딛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뒤를 이었다. 도희의 전신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기이하게도, 품에 안긴 음식 냄새만이 코끝에서 더욱 짙고 잔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새벽 3시에 20층 창문 밖으로 낚시질이라니.”낮게 긁히는 음성이 바닥을 타고 묵직하게 스며들었다. 도희는 반쯤 벗겨낸 랩의 끝자락을 쥔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뼛속까지 박힌 서늘함이 말해주고 있었다.“꽤나 부지런하군, 윤도희.”도희의 굳어버린 손가락이 컵라면 용기 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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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4화. 지금 제 얼굴 좀 봐요

지퍼가 열리고, 가방 안에서 뭉클하게 김을 뿜어내는 불닭볶음면 큰사발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치마요 삼각김밥, 핫바, 콜라 캔까지.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싱크대 개수대 한가운데로 그 모든 것을 사정없이 쏟아부었다.순식간에 맵싸하고 자극적인 양념 향이 서늘한 주방 공기를 훅 찌르고 들어왔다.“하지 마요! 제발요! 그거 내가 어떻게 가져온 건데! 그거 먹으면 나 죽는 거 아니잖아요!”도희가 와락 달려들어 바위처럼 단단한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굵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러나 태혁의 메마른 눈동자에는 티끌만 한 동요조차 서려 있지 않았다. 그는 도희를 차갑게 내려다본 채, 싱크대 벽면에 달린 분쇄기 스위치를 올렸다.위이이이잉—! 콰드득, 콰득!공업용에 가까운 고출력 분쇄기가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을 토해냈다.뜨거운 라면 면발과 시뻘건 소스, 기름진 참치마요 밥알들이 무자비한 쇠칼날에 갈가리 찢기며 암흑 같은 배수구 속으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번들거리는 붉은 찌꺼기가 스테인리스 벽면에 사납게 튀어 오르며 분쇄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순간, 도희의 이성 속에서 팽팽하던 끈 하나가 툭, 끊어졌다.“안 돼애애애-!”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도희는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단 한 젓가락.오직 그 자극적인 한 입을 탐하고자 손바닥 가죽이 벗겨지도록 밧줄을 당겼건만, 모든 것이 눈앞에서 오물 찌꺼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도희는 차가운 바닥을 주먹으로 짓이기며 악에 받쳐 울부짖었다.“당신이 뭔데 날 이렇게 괴롭혀! 내가 왜 풀만 씹고 닭 쓰레기나 갈아 마셔야 해! 나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데려와서 사람을 피 말려 죽여!”날카롭게 긁혀 나오는 악담에도 태혁의 눈썹 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스위치를 내려 분쇄기를 멈춘 그는 냉정하게 수전을 틀었다. 강한 수압의 물줄기가 붉게 번진 양념 흔적까지 남김없이 씻어 내렸다. 도희는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밭은숨을 몰아쉬며, 물을 끄고 뒤돌아서는 그의 오만한 형상을 증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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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5화. 벌이 아닌 진료

말을 맺으려 간신히 고개를 쳐드는 순간, 시야의 가장자리가 새까맣게 오그라들었다. 태혁이 붙들었던 손을 떼려던 찰나, 그녀의 상체가 맥없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태혁이 무릎을 꿇으며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거칠게 낚아채 품 안으로 받쳐 들었다. 낮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귓전을 맴돌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걸쇠에 걸려 있는 차가운 쇠 봉을 응시하자, 저 잔인한 남자가 남은 숫자를 기어이 채우라며 옥죌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도희는 파리하게 질린 채 고개부터 내저었다.“내일로 넘기지도 마요. 이걸 못 했다고…….”태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도희를 차가운 바닥에 방치하지 않으려는 듯, 재빨리 타월을 겹쳐 접어 그녀의 허리 뒤를 단단히 받쳤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119 응급상황실에 현 위치를 또박또박 전달하는 그의 서늘한 음성이 정적을 갈랐다. 태혁은 처음엔 단순 과로라 말하려다,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퇴원한 환자에게 무리하게 운동을 시켰다고 사실을 고쳐 말했다.도희는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발음이 뭉개지거나 편측 마비 증상이 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흘러나오자,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직접 달싹여 답했다. 자신이 있는 장소, 오늘 섭취한 음식, 그리고 처방 약을 복용한 정확한 시간까지 빠짐없이 말했다. 태혁이 대신 설명하려 들자, 도희는 그의 단단한 팔뚝을 가볍게 눌렀다.“제가 기억해요.”태혁은 전화기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입구를 열라는 연락이 경호팀에 전달됐다. 늘 닫혀 있던 문을 누가 열러 온다는 말에 도희는 그쪽을 봤다.그가 잘못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릴 힘은 없었다. 다만 병원에 가서 오늘 일을 설명할 때, 스스로 무리한 운동을 한 것으로 남기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봉을 다시 들지 않겠다는 말부터 꺼낸 사람도 자신이었다.짐 바깥에서 발소리가 났다. 태혁이 일어서려 하자 도희는 그의 팔을 놓았다. 도와줄 사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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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6화. 내 기록은 내가

펜트하우스 지하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서자마자, 허벅지 안쪽 근육이 비명을 지르듯 뻣뻣하게 당겨왔다. 태혁이 차 문을 열고 그녀를 안아 올리려 손을 뻗었다.“팔만 빌려줘요. 천천히 걸어볼게요.”태혁은 대꾸 없이 단단한 팔을 내주었다. 간신히 차에서 내려 두어 걸음을 뗐을 뿐인데 무릎 아래로 힘이 훅 빠져나갔다. 결국 무너지듯 그의 몸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도희는 이를 악물었다. 아프다고 애원할 때조차 냉정하게 몰아붙였던 장본인에게, 집 문턱을 넘는 일마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굴욕적이었다. 탄탄한 그의 팔에 체중을 싣자 뜨겁고 묵직한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엘리베이터 안에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거울에 비친 태혁의 얼굴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도희는 그 표정의 의미를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무릎이 다시 꺾이지 않게 서 있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좁은 밀실 안에서 그의 규칙적인 숨결이 살갗에 닿을 듯 가까웠다.욕실 앞에 당도하자 태혁은 마른 수건을 챙겨왔다. 거울 속에는 식은땀에 젖어 뺨에 엉겨 붙은 머리칼과 창백한 몰골이 비쳤다. 도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간신히 돌아왔다는 안도감보다, 땀에 찌든 제 모습이 한없이 비참했다.“씻는 건 잠깐 쉬었다가 할래요.”“젖은 옷부터 갈아입어.”“알아요. 먼저 앉을게요.”파우더룸 벤치에 주저앉자 무릎 위로 수건이 툭 얹혔다. 태혁은 여전히 벽처럼 우뚝 선 채 위에서 서늘하게 도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령 한 번이면 몸이 그 순서대로 척척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오만함. 도희는 수건을 펼쳐 땀으로 끈적한 손바닥부터 짓눌러 닦았다. 그녀의 떨리는 어깨선 위로 그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축축하게 들러붙은 상의를 벗어내려 팔을 들어 올렸으나, 근육이 찢길 듯 팽팽하게 죄어왔다. 답답함에 억지로 옷자락을 비틀어 당기자 태혁이 성큼 다가왔다.“잠깐. 여기만요.”도희는 안쪽에서 꼬여버린 소매 끝을 가리켰다. 태혁이 몸을 낮춰 엉킨 매듭을 풀어주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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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7화. 50억의 족쇄

오후 여섯 시를 넘긴 시각. 펜트하우스 거실의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서류 뭉치와 함께 처참하게 박살 난 기계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잠시 숨을 골랐음에도, 경련하듯 떨리는 허벅지의 둔통은 가시지 않았다. 약봉투가 든 비닐을 쥔 채 차가운 벽면을 지탱하며 걸음을 옮기던 도희는,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잔해를 발견하는 순간 얼어붙듯 멈춰 섰다.산산조각 난 채 검은 속살을 드러낸 액정, 매듭째 거칠게 잘려 나간 나일론 빨랫줄, 그리고 오늘 새벽 창문 너머로 야식을 끌어올렸던 초라한 장바구니까지.배달 주문에 썼던 업무용 보조 휴대전화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그 파편 옆에는 그녀가 원래 쓰던 개인 스마트폰과는 확연히 다른 케이스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도희는 주머니 속 제 휴대전화를 쥐어짜듯 눌렀다. 온몸의 핏기가 가라앉는 서늘한 전율과 함께, 메마른 입술 틈으로 희미한 탄식이 비어져 나왔다.“……아.”테이블 건너편, 깊은 어둠이 내린 1인용 가죽 소파에 몸을 묻고 다리를 꼰 강태혁이 그녀를 서늘하게 옭아매고 있었다. 칠흑 같은 시선이었다. 그의 무릎 위에 놓인 태블릿 PC 화면에는 핏빛처럼 붉은 글씨들이 빼곡했다. 도희의 개인 계좌 잔고와 눈덩이처럼 불어난 채무 명세, 그리고 채널을 둘러싼 법적 분쟁 서류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눈빛이 도희의 창백한 얼굴에 내리꽂혔다.“앉아라.”낮게 내리깔린 음성에 거역할 틈 따윈 없었다. 도희는 저려오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맞은편 소파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엉덩이를 걸쳤다.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지 안쪽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불쾌한 긴장감을 밀어 올렸다.태혁의 단단한 손가락이 태블릿 표면을 무미건조하게 두드리더니, 화면을 그녀 앞으로 스르륵 밀어냈다.[발신: 엄마][도희야, 너 지금 어디서 숨어 지내는 거야?! 식품 대기업 법무팀에서 전속 모델 계약 위반이라고 3억짜리 손해배상 소송장이 날아왔어! 당장 오늘 중으로 3억 안 메꾸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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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8화. 고기 한 점의 조건

태혁의 기다란 손가락이 묵직한 인주함의 뚜껑을 젖혔다. 피처럼 붉은 인주가 번들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도희는 목구멍 뒤편으로 넘어가지 않는 침을 억지로 삼켰다. 끝 모를 가족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 하지만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제 눈앞에 웅크린 이 잔혹한 포식자에게 온몸을 저당 잡혀야만 했다. 가슴뼈 안쪽이 비틀리듯 조여왔다.서류의 여백을 짓누르고 있던 도희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미끄러졌다. 인쇄된 활자를 곱씹고 또 곱씹어도 종이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문밖에서 닥쳐올 가족들의 악에 받친 비명과, 눈앞을 가로막은 남자의 절대적인 명령이 귓가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날 지켜준다는 핑계로, 내 목숨줄을 쥔 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살 수는 없어.’20층 허공으로 밧줄을 늘어뜨리던 손바닥의 생채기가 아직도 화끈거렸다. 탈출구를 찾겠다며 발버둥 친 대가가 이 50억짜리 족쇄라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분했다. 그러나 그 파렴치한 가족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또다시 카메라 앞에 앉아 피를 말리는 노예가 되는 것만은 죽기보다 싫었다. 도희는 서류 속 ‘법적 방어권’ 조항을 파들거리는 손톱 끝으로 힘주어 짚었다.“대신 무슨 답을 보냈는지는 저한테도 알려줘요. 제 이름으로 온 서류잖아요.”태혁은 즉각 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종이를 붙든 도희의 손가락이 미동조차 없이 버티고 서자, 서류 모서리를 그녀의 가슴팍 쪽으로 한 치 더 깊숙이 밀어 넣을 뿐이었다.“읽어. 모르는 건 묻고.”도희는 떨림을 억누르며 오른손을 뻗어, 붉디붉은 인주 표면에 검지 마디를 짓눌렀다. 축축하고 차가운 인주가 지문 틈새로 파고들었다. 부속 합의서 말미, 활자로 박힌 ‘피트니스 대상자 윤도희’라는 서명란 옆에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내리눌렀다.순백의 종이 위에 선명한 선홍빛 지장이 찍혀 나갔다. 그 붉은 낙인을 내려다보던 태혁의 입매가 비틀리며 가학적인 호선을 그렸다.“현명한 선택이다.”태혁의 손이 움직인 것은 서류를 거두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의 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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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9화. 그가 탐하는 것

태혁은 서늘한 눈빛으로 도희의 손에서 포크를 비틀어 빼앗더니, 싱크대 스테인리스 상판 위로 팽개쳤다. 쇳소리가 날카롭게 주방을 울렸다.“아…… 왜요! 먹으라고 준 거잖아요! 저 지금 배고파서 눈이 돌아갈 것 같다고요!”도희가 핏발 선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악을 썼다. 허기에 짓밟혀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가소로운 반항에, 태혁의 입매가 비틀리며 메마른 냉소가 스쳤다.“음식을 입안에 쑤셔 넣는 돼지 같은 습관부터 뜯어고쳐야 하니까. 고칼로리 자극에 절여진 네 혓바닥은 씹는 과정 없이 삼키는 데만 길들여져 있어. 오늘부터 모든 음식물은 내 통제하에 저작한다.”태혁은 의자를 끌어 도희의 옆자리로 거리를 좁혀 앉았다. 둘 사이의 간격이 무의미해질 만큼 가깝고 서늘한 압박감이 밀려왔다.그가 맨손으로 단면이 드러난 우둔살 한 점을 집어 들었다. 단단한 살갗과 굳은살이 박인 굵은 손가락 사이로 미열을 머금은 붉은 육즙이 배어 나왔다.“입 벌려.”명령조의 짧은 음절에 도희는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손끝에 들린 고기를 응시했다. 수치스러워 뺨이 달아올랐지만, 혀밑에서 터져 나오는 타액을 막을 길이 없었다. 자존심과 본능의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도희의 시선이 바닥으로 꺾이며 조심스럽게 입술이 벌어졌다.태혁의 두툼한 손가락이 미온의 고기 조각과 함께 축축하고 여린 입안 깊숙이 비집고 들어왔다.“읏……!”거친 살갗과 뜨거운 육편이 여린 혓바닥에 닿는 순간, 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번쩍 뜨였다.소금기가 없는 밋밋함이 혀를 먼저 스쳤으나, 이내 이 사이로 짓이겨지는 단단한 육질에서 은근한 단맛이 배어 나왔다. 뒤이어 거칠게 부서진 통후추의 알싸한 자극이 비강을 날카롭게 찔렀다. 조미료의 자극에 가려지지 않은 순수한 고기의 맛을 탐닉하느라, 도희는 자신이 어떤 처지로 통제당하고 있는지조차 잠시 잊어버렸다.도희는 본능적으로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넘기려 턱을 당겼다.그러나 꿀꺽 넘어가려던 찰나, 태혁의 커다란 손바닥이 도희의 턱관절과 뺨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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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0화. 150포인트

감금 6일째, 토요일 밤 여덟 시.펜트하우스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원형 플랫폼 위로, 차갑게 날이 선 푸른빛이 내려앉았다. 3D 전신 스캐너와 체성분 분석 장비가 뿜어내는 기계적인 빛줄기가 도희의 얇은 옷자락 위로 서늘한 궤적을 그리며 번졌다.은빛 발판에 맨발을 올리자 바닥에서부터 싸늘한 한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랐다. 머릿속에는 원판을 빼고도 버티지 못해 안전 걸쇠에 걸어야 했던 바벨의 쇳내와, 병원의 메마른 흰 천장이 번갈아 아른거렸다. 훈련을 중단한 채 쉬는 중이었음에도 약속된 계측일은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닥쳐왔다. 재진 당시 의사는 통증이 멎은 범위 안에서만 가볍게 움직이고, 중량을 치는 건 엄격히 미루라고 경고했었다. 도희는 은빛 눈금에 맞춰 발을 디딘 뒤 차가운 전극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이 수치 하나로 내일 약속된 식사마저 백지화되는 건 아닐까,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벽면의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삐비비빅―!신경을 긁는 전자음과 함께,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모니터 위로 도희의 신체 데이터가 적나라한 3차원 입체 그래픽으로 떠올랐다.[신장: 164.2cm][체중: 74.3kg → 70.8kg (▼ 3.5kg 감량)][골격근량 추정: 측정 조건 차이로 초기 수치와 직접 비교 보류][체지방량 추정: 초기 수분 상태 차이로 감량량 판정 보류][체성분 변화: 동일 조건의 재측정과 경과 확인 필요][복부지방 지표: 0.94 → 0.88][세포외수분비: 0.412 → 0.385 (추적 비교값)]“어……? 어머…… 세상에!”참지 못한 탄성이 밭은 숨과 함께 도희의 붉어진 입술 틈새로 새어 나왔다.체중계의 숫자는 분명 3.5kg이나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체성분 비교 칸에는 구체적인 수치 대신 '보류'라는 글자만이 무정하게 깜빡였다. 첫 측정 당시와 지금의 체내 수분 균형이 어긋난 탓이었다. 도희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모니터 속 빈칸을 더듬었다. 깎여 나간 무게만큼 온전히 체지방이 덜어져 나갔는지는, 이 차가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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