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연회장 앞에서 태준이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발걸음이 멈췄다. 내가 내려다보자 그가 낮게 말했다.“사람들 앞에서는 부탁할게.”무엇을 부탁하는지 묻지 않았다.웃으라는 뜻이었다. 그가 가까이 와도 피하지 말고, 누가 부부 사이를 물으면 잘 지낸다고 대답해 달라는 뜻.아내로 살 때는 받지 못했던 다정함을, 이혼을 앞두고 남들에게 보여 줘야 했다.“할아버지 앞에서 싸울 생각 없어.”태준의 표정이 풀렸다.그는 내가 얼마나 참겠다는 말인지보다, 오늘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반가운 것 같았다.문이 열렸다.밝은 조명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태경과 오래 거래해 온 사람들, 집안 어른들, 몇 번 얼굴을 본 부부들이 우리를 돌아봤다.회사에서는 숨겨야 했던 결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 문제 없는 부부여야 했다.“두 분이 같이 들어오니 보기 좋네요.”태준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내 허리에 얹힌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는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누가 말을 걸면 자연스럽게 나를 대화에 끼워 줬고, 직원이 지나가자 내 잔부터 받아 건넸다.이런 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내가 뭘 마실지 살피고, 혼자 서 있지 않게 챙기고, 남들 앞에서 내 말을 기다려 주는 일.할 줄 몰라서 안 했던 게 아니었다.잔을 받은 손끝이 굳었다. 태준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나는 그 틈에 할아버지께 다가갔다.“우리 서윤이 왔구나.”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셨다.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억지로 올리고 있던 입꼬리에 힘이 풀렸다. 정말 반가워서 웃는 얼굴이 나왔다.“생신 축하드려요, 할아버지.”나는 두 손으로 선물 상자를 건넸다.“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네가 왔으면 됐지. 뭘 또 준비했어.”할아버지는 웃으며 뚜껑을 여셨다.그리고 손을 멈추셨다.오래된 황동 나침반이었다. 할아버지가 안경을 고쳐 쓰고 상자를 가까이 당기셨다. 뚜껑의 무늬를 확인하더니 조심스럽게 집어 드셨다
최신 업데이트 : 2026-11-03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