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9화

작가: 적매화
이 시점에서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보아 무슨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김단은 임씨 부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마님, 오셨습니까.”

아직도 자신을 마님으로 칭하는 그녀 때문에 임씨 부인은 속상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손길로 김단의 손을 맞잡으며 자리에 앉았다.

“혼자 울적하게 있을까 봐 이리 와 보았다.”

김단은 말없이 자기 손을 빼냈다.

임씨 부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큰 마님께서 널 얼마나 아끼셨니, 네가 이 집안 핏줄이 아닌 것을 안 뒤에도 널 가장 어여뻐 하셨다.”

김단도 인정한다.

누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누가 진심으로 대하는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편찮으신 몸으로 중전마마께 간청하여 자기를 빼내온 것만으로 봐도 그녀의 진심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고개를 떨군 김단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임씨 부인은 그녀의 진심을 모르는 듯했다.

임씨 부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감이 계셔 말을 아꼈다. 네 조모님께 남은 시일이 얼마 없다.”

임씨 부인의 말에 김단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그대로 흘러내렸다.

‘조모님 곁을 지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임씨 부인은 안쓰러운 심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큰 마님을 향한 네 마음도 잘 알고 있다. 하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큰 마님의 근심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느리라.”

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답했다.

“직언하시지요, 마님.”

둘 사이에 묘한 괴리감이 들었다. 김단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들었던 임씨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뒀다.

긴 한숨을 내쉰 부인이 다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어미가 미울지도 모르겠구나. 허나 큰 마님께서도 나와 생각이 같을 것 같구나.”

임씨 부인은 물끄러미 김단을 쳐다보았다.

“네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니고 이젠 혼처를 찾을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들으니 헛웃음이 났다.

조모님은 일어나시지도 못했는데, 임씨 부인은 그녀를 찾아와 혼사에 대해 논하고 있는 모습이 실로 우스웠다.

물론 조모님께서 그녀의 혼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다.

그러나 하필 이런 시기에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임씨 부인을 보고 있자니 부인의 제안이 그녀를 위한 제안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임원 때문에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소한의 말처럼 첫째가 먼저 시집갔으면 하는 것이다.

김단은 코를 훌쩍이며 답했다.

“이미 정해둔 분이 계신가 보옵니다.”

사실 임씨 부인은 소한의 말을 들은 뒤로 김단의 정혼자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정해둔 정혼자도 있었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했던 것이다.

“걱정 말거라. 서운하게 할 일은 없다. 너도 만족하고 네 조모님도 만족하는 사람일 것이다.”

큰 마님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선 반드시 큰 마님께서 만족할 만한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숨을 깊게 들이쉰 김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오면 이 일은 마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김단이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자 임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희미하게 웃었다.

“참으로 속이 깊구나. 걱정 말거라. 이 어미가 반드시 네 마음에 드는 사내로 골라줄 것이다.”

두 번이나 강조하는 거로 보아 확신보다는 불안감에 하는 소리 같았다.

김단은 임씨 부인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한 말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다만 조모님의 근심을 덜어줄 생각만 했다.

오후가 되자 큰 마님께서 깨어났다는 소식이 돌았고 김단은 곧장 안채로 향했으나 큰 마님은 깊이 잠들어있었다.

옆을 지키고 있던 몸종이 따듯한 차를 내오며 말했다.

“큰 마님께서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드셨습니다. 의원께서 숙면을 취하는 게 건강 회복에 좋다고 했사옵니다.”

김단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임씨 부인의 말이 떠오른 그녀는 가슴 한구석이 씁쓸했다.

김단은 평온하게 잠든 조모님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젯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조모님 덕분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할 처지다.

진산군댁 사람들이 그녀를 내쫓지 않더라도 소한의 말처럼 그녀는 이 집안의 혼인 문제에 걸림돌이 된 사실은 변함없었다.

임씨 부인이 서둘러 그녀를 시집보내려는 것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고립된 처지인 것을 알고 있다. 따로 갈 곳도 없었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임씨 부인의 제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살길을 터준 것과 다름없었다.

큰 마님의 걱정을 덜어주면서 이곳을 나갈 방법은 혼인뿐이었다.

그녀는 검은 머리가 파 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할 운명적인 사랑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살아온 세상에서 사랑은 보이지 않는 허상이었다.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자신에게 사랑은 과분했다.

그저 조모님의 마음에 드는 사내와 혼인해 조모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근심 걱정 없이 지내길 바랄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가 조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조모님께서 세상을 뜨시거든 운이 좋으면 자신의 낭군님과 계속 살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헤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진산군댁 사람들과 더는 엮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혼인이야말로 그녀의 유일한 살길이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뜨거운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조모님의 얼굴을 살피며 낮게 읊조렸다.

“조모님, 꼭 쾌차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소녀가 시집가는 것도 구경하지요.’

임씨 부인의 행동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김단이 승낙을 하자마자 그녀를 데리고 궐에 들어 정혼자와 만남을 추진하려 했다.

궁궐에 적대심을 가진 그녀는 덕빈의 초대에 어쩔 수 없이 궐에 들었다.

그녀는 임씨 부인에게 이런 면모가 있는 줄 몰랐다.

임씨 부인이 그녀에게 정해준 정혼자는 다름 아닌 덕빈의 아들, 명정대군이었다.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댓글 (1)
goodnovel comment avatar
SOL LIM
다른 댓글 못보나요?
댓글 모두 보기

최신 챕터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076화

    손수건은 이미 누렇게 바랬고, 매화 꽃잎도 색이 바래 있었다.이는 손수건의 주인이 그것을 자주 꺼내어 들여다보고 만져봤다는 것을 뜻하지 않겠나?김단은 손수건을 건네받으며 접혀진 손수건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에 손수건을 펼쳐보니, 보석이 달린 귀걸이 한 쌍이 보였다.그것은 그녀가 명정 대군의 손에 이끌려 한양 서쪽으로 갔을 때 잃어버렸던 귀걸이였다.그녀는 그것을 굳이 찾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 귀걸이는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를 소한이 찾아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녀는 과거 그녀가 소한에게 손수건을 선물하고, 소한이 그녀에게 이 귀걸이를 선물해 주었을 때 뛸 듯이 기뻐하던 자신을 떠올렸다.하지만 지금은…김단은 사실 소한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5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가 일방적인 짝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다만 그녀가 그를 사랑했을 때, 그는 그녀를 그만큼 사랑해 주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의 사랑은 격한 파도처럼 넘쳐흐르기 시작했다.어떠한 이유도 없었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렇기에 지금의 김단은 그 손수건과 귀걸이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만약 그녀가 그를 아주 많이 사랑하였을 시기에 그가 그녀를 조금만 더 사랑해 주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그들은 매우 행복해져 있을 것이다. “하…”김단의 입에서 옅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 세상에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그가 그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지난 일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두 종사관은 흠칫 놀랐다. 그는 김단의 반응이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원래대로라면, 그녀는 지금 눈물을 보여야 했다. 마치 과거 막사에서처럼 말이다.그런데 어째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일까?고개를 들어 김단의 눈을 마주하자, 두 종사관은 또다시 깜짝 놀랐다.김단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고, 심지어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종사관님, 정말 감사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075화

    그 말에 김단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계속 제가 보도록 하죠.”그녀는 망설임 없이 은침 세 개를 연달아 도 종사관의 복부에 꽂았다. 모두 인체에서 가장 극심한 작열감을 불러오는 급소였다.“아악!”그의 비명이 막사 안을 가득 메웠다. 도 종사관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그의 이마에는 굵은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마저 맺히는 고통이었지만 김단을 의심하지는 않았다.잠시 뒤, 김단은 통증을 풀어주는 정공법으로 다시 침을 놓았다. 통증이 조금씩 가시자 그제야 도 종사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김단은 침을 정리하며 은근하게 물었다.“무엇을 드신 겁니까? 통증이 꽤 심하셨던 걸 보면 그냥 체한 게 아닌 것 같던데요. 제가 놓는 침은 원래 그리 아프지 않습니다.”그녀는 첫 세 침의 통증을 교묘히 그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러자 도 종사관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마… 전날 남은 전병을 먹은 탓이겠지요.”겨울에 하루 지난 전병을 먹었다고 해서 쉽게 탈이 날 리 없다. 김단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절약하셨네요. 병영에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그러자 도 종사관이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게 다 소 장군의 가르침 덕입니다. 장군께선 늘 말씀하셨죠. 언제나 후일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그 순간이었다. 김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지금 김단 앞에서 소한의 이름을 입에 올린 것이었다.그 반응을 본 도 종사관은 은근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걸 확인한 도 종사관은 일부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 정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실 줄이야… 알았다면 그날 저와 여만서가 그 편지를 써서 궁으로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전하께서도 대군자가를 보내지 않으셨겠지요. 그 분만 아니었다면 소 장군께서 병영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그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074화

    한 자루 향이 다 타고 나서야 김단은 최지습의 군막에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문을 막 나서자마자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그림자가 하나가 들어왔다.여만서였다.잔뜩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그는 김단을 발견하자마자 무겁고도 날 선 걸음으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도 종사관이 말하길… 소 장군께서…”김단은 그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선의 말미는 여만서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둠 속에 반쯤 숨어 있는 도 종사관이 있었다. 김단은 그가 여만서를 지켜보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엿보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그래요.”여만서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어떻게 그런 일이… 그날, 장군께서 떠나실 때는 분명…”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소한을 병영에서 떠나보낸 건 바로 여만서 자신이었다. 그러기에 그날 소한의 상태가 멀쩡했다는 말조차 입 밖에 낼 수 없었다.그토록 굳건하고 자존심 강한 소 장군이 전장에서 산화한 것도 아니고 부상을 입고 병영을 나간 뒤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다니. 이건 너무도 참담하고 굴욕적인 죽음이었다.“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대군자가께서는 굳이 소 장군을 병영에서 내쫓으신 겁니까?”소 장군이 병영을 떠나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단은 여만서가 최지습을 원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여만서를 비롯한 이들 중 다수는 최지습보다 소한과 더 오래 인연을 이어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소한이 죽었으니 그에 대한 애통과 분노는 자연스레 최지습에게 향할 것이고 도 종사관은 그 틈을 노려 군 내부의 불만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오래가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해가 저물 무렵, 도 종사관이 김단의 막사 앞에 나타났다.“김 의녀, 계십니까?”김단은 천천히 막사의 발을 들추었다. 밖에는 도 종사관이 배를 감싸 쥐고는 고통에 찬 얼굴로 서 있었다.“무슨 일입니까?”“배가… 너무 아픕니다. 살려주십시오…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073화

    도 종사관은 걸음을 옮겨 장막을 젖히다 말고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 너머로는 김단이 조용히 최지습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단을 달래주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자 도 종사관은 진짜 소한이 죽었다고 속으로 단정 지었다. 그는 조용히 눈썹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장막을 내렸다.한편 최지습은 김단을 다독이고 있었지만 시선은 줄곧 도 종사관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자리를 뜬 것을 확인하자 비로소 조용히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거짓말이야.”김단은 눈을 크게 뜨며 최지습의 품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뭐라고요?”“아까 한 말... 경 씨가 일부러 도 종사관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순간, 김단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두 손을 꼭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정말입니까…?”최지습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경 씨를 다시 불러서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자. 그러니 이제 울지 말거라.”그는 거칠지만 따뜻한 손으로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훑었다.그렇다면 방금 전 그 말은 모두 도 종사관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진심으로 속아 넘어간 사람은 김단 자신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떨구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하고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인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소한의 소식을 들은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그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텅 빈 공허 속에 빠진 듯했다.그러나 최지습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건, 네가 사람이기 때문이야.”사람이기에 감정이 있는 것이고 감정이 있기에 그 모든 관계는 단순히 ‘사랑’ 혹은 ‘증오’로 나뉠 수 없는 것이다.그는 알고 있었다. 그 지난 15년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소한과 임학이었다는 것을. 그녀를 배신하고 짓밟았던 이들이었지만 김단은 절대 그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072화

    도 종사관이 조심스럽게 경 씨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그의 표정 속 어딘가에 감춰진 실마리를 찾아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젯밤, 그는 분명 소한에게 상처를 입히긴 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죽었다고?그러나 지금 경 씨의 얼굴에는 눈곱만큼의 파문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결국 도 종사관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전사하셨다고요? 소 장군의 몸은 분명 회복 중이었는데요? 이틀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날 정도로 병세가 좋아지지 않았습니까?”경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말했다.“대군자가와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 몸속의 오래된 상처들이 다 찢어졌습니다. 그 후 자객의 습격까지 겹쳐 상처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지요. 옷이 피로 흠뻑 적을 정도였으니까요.”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섞여 있었고 눈은 땅바닥으로 향해 있었다.“제가 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어요.”하지만 최지습은 알고 있었다. 지금 경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본능적으로 김단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단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최지습은 눈치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단단히 쥐며 물었다.“시신은?”거짓말을 시작한 거라면 마무리도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 그가 묻지 않더라고 도 종사관은 분명 이 질문을 할 것이었다. 경 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목 가의 도련님께서 측은지심을 품고 시신을 마차에 실어 한양으로 보냈습니다.”그 뒤로도 경 씨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김단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손에 들린 병서 위에 머물렀지만 그 속의 글자들은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다.소한은 자신이 인생의 절반을 함께

  • 대군, 사랑에 살다: 무수리의 반격   제1071화

    만약 그들이 아직 곁에 있었다면 지금 상황에서 경 씨처럼 끝까지 자신을 말렸을 것이다. 자기 형제와 다름 없었던 그들을 생각하자 소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쓴 물이 배인 듯 씁쓸했다.“네가 나와 함께 한다면 그들의 의심을 살 것 아니냐.”그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고립된 상태 여야만이 목가의 경계를 풀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장군…”경 씨가 끝까지 붙잡으려 했으나 소한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이미 정했다.”그 말은 되돌릴 수 없는 결심이었다.다음 날 새벽, 소한은 목 가에서 준비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경 씨는 객잔 앞에 서서 떠나는 마차를 묵묵히 지켜보았다.소한은 그 안에 앉아 말없이 마차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고 경 씨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눈에 담더니 끝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마차 안, 목설원은 접부채로 차창의 발을 살짝 들추더니 서 있는 경 씨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의중을 떠보듯 조심스럽게 물었다.“소 장군, 그 사람… 정말 아무 말도 안 할까요?”소한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담담히 대답했다.“내 사람입니다. 믿을 수 있어요.”그의 눈 속에 담긴 빛은 깊고 서늘했다. 그 대답에 목설원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믿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소 장군의 사람은 곧 우리의 사람이니까요.”그 말은 경 씨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조용한 경고였다. 소한도 미소로 화답했다.“형님께서 저를 식구로 여겨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목설원은 소리 내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이렇게 격식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그 말에 소한은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진심 어린 웃음처럼 보였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차오르던 씁쓸함은 그 웃음을 천천히 삼켜가고 있었다.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경 씨는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