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화예리는 혹시 속마음이 들린 건 아닌지, 괜한 걱정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은호는 여유롭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계속 다른 생각만 하시는 것 같더니, 갑자기 머리까지 내려치시고… 혹시 두통이 심해서 그런 겁니다?”그 다정한 추궁에 예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머리 위에 얹고 있던 손이 민망해진 예리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아휴, 왜 이렇게 가렵지? 오늘 아침에 머리를 잘못 감았나….”어설픈 연기 위로 회의실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무겁게 따라왔다. 팀원들은 하나같이 황당함돠 당황함이 적절하게 섞인 눈빛을 담아내고 있었다.이대로 미친 사람으로 확정될 것 같은 처지에 예리는 일부러 더 활짝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머리가 가려워서 그랬어요, 가려워서. 여러분은 머리 감고 꼭 바짝 말리세요. 오늘 아침에 너무 바빠서 대충 말리고 왔더니 이 모양이네요….”영혼까지 끌어모은 변명으로 상황을 무마하고 나서야, 멀리에서 닿던 은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조금은 옅어졌다.예리가 들키지 않게 한숨을 삼키던 찰나, 은호의 눈동자가 이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나 팀장님. 그래서 이제 박민수랑 오지연, 그 두 사람의 이름이 날카롭게 꽂히는 순간, 예리의 눈빛에서 사람의 이름이 예리의 귀로 꽂히는 순간, 조금 전까지 감돌던 민망함이 싹 가시며 눈빛에 서늘한 냉기가 서렸다.회의실 안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도 다시금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예리는 그 시선 하나하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나쁜 마법을 쓰기 직전의 마녀 같은 그 웃음에 승호의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다년간의 경험으로 저 웃음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승호는 테이블 밑으로 제 팔을 슬그머니 문지르며 예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팀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요
Terakhir Diperbarui: 2026-05-30
Chapter: 53화은호가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설마 모든 스케줄을 다 따라올까 싶었다.그런데 지난주 월요일, 출근 준비로 바쁜 예리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수신 화면에 뜬 이름은 유은호.받기가 무섭게 ‘지금 데리러 가고 있다’는 제 할 말만 툭 내뱉은 그는, 예리가 되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날을 시작으로 그는 출퇴근 시간에 정확히 맞춰 매일 예리의 집 앞과 사무실을 제집 마당 드나들듯 찾았다.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은호는 아예 예리의 옆 책상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곤 아무렇지 않게 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예상과 달리 업무 시간에 그는 예리에게 딱히 말을 걸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예리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정작 그는 평온해 보이는데 자신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아 은근히 짜증이 치밀었다.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예리와 함께 출근한 그가 회의실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완벽하게 몸에 딱 맞는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고 찻잔을 입술로 기울이는 은호는, 심란한 자신과 달리 여유롭게 꼰 다리까지 까딱이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예리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역시나, 가람이 자신과 은호를 번갈아 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중이었다.함께 출퇴근하는 것도 모자라 예리의 사무실에서 업무까지 같이 보겠다는 은호의 파격적인 행보에 인연 VIP 전담팀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곧 예리가 ‘신변 보호’ 때문이라고 적당히 둘러댄 탓에 다들 납득하는 눈치였다.단 한 사람, 가람만 빼고.지난주 내내 회의할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은호와 자신이 함께 있는 모습만 포착하면 사설탐정처럼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녀였다.그리고 지난 금요일, 마침내 가람의 집요한 수사망이 예리를 덮쳤다.점심을 먹고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예리에게, 먼저 나온 제 디카페인 아아를 쭉쭉 빨던 가람이 슬며시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인 것이다.“팀장
Terakhir Diperbarui: 2026-05-29
Chapter: 52화사고 당일 밤, 은호가 입원한 응급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차 안.예리의 휴대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보세요? 나예리 팀장님?속삭이듯 작게 들려오는 해진의 목소리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소진이 옆을 힐끔거렸다.“네, 해진 씨 저예요. 몸은 괜찮으세요?”-네, 검사 마치고 지금 막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연락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가 좀 늦었어요. 지금은 민수 씨가 씻는 중이라 그 사이에 조용히 건 거예요.“잘하셨어요.”예리의 짧은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해진의 음성은 사시나무 떨리듯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나 팀장님, 이제 말씀해 주세요. 아까 분명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그러셨잖아요….외면하고 싶었던 잔혹한 실체를 기어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처럼, 해진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기묘하게 뒤엉켜 있었다.“…….”잠시 숨을 고르던 예리가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오늘 내내, 해진 씨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차가운 차창 밖으로 도로의 불빛들이 빠르게 예리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 범인이에요.”-…설마 지연 씨요?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해진이 되물었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맞아요. 그리고… 민수 씨도요. 오늘 일, 두 사람이 철저하게 계획하고 벌인 살인미수극이에요.”예리의 입에서 나온 잔혹한 진실에 해진의 목소리가 마구 젖어 들었다.-아, 아니에요, 팀장님. 민수 씨랑 지연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두 사람…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수 씨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팀장님이 뭔가 잘못 아신 게 분명해요. 저 오늘 통화, 못 들은 걸로 할게요.현실을 부정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해진의 태도에, 예리가 차분하지만, 송곳처럼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못 믿으시겠다면,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녹음본을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예리는 어두운 숲속에서 숨을 죽인 채 켰던 휴대
Terakhir Diperbarui: 2026-05-28
Chapter: 51화예리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은호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은호는 쿵, 쿵 두근대는 심장을 깊이 눌러 삼키며 조심스레 예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네.”“저도 어릴 때 무척 아팠던 적이 있었거든요.”리클라이너 등받이 깊숙이 묻었던 등을 곱게 세워 앉은 예리가, 은호와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그 순간, 은은한 주홍빛 불빛이 예리의 얼굴 반쪽을 집어삼키듯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그 기묘한 명암 탓일까. 늘 씩씩하기만 하던 그녀의 실루엣에, 숨겨진 낯선 그리움이 옅게 번졌다.“그럴 때마다… 엄마가,”순간, 예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아주 찰나의 정적이었다.하지만 평소 늘 단단하고 흐트러짐 없던 예리의 눈동자가 조용한 어둠 속에서 잘게 흔들리는 것을 은호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동시에 어제 행사에서 광수와 대화 후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예리의 뒷모습이 떠올라, 은호의 가슴 한구석이 아리게 내려앉았다.도대체 예리와 임 대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복잡하게 얽히는 의문 속에서도 은호의 시선은 줄곧 미세하게 흔들리는 예리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밀려드는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잠깐 숨을 고른 예리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부드럽게 말을 이어 붙였다.“…아니, 아빠가 항상 제가 잠들 때까지 조곤조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해주셨어요.”예리는 추억을 더듬듯, 리클라이너 팔걸이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덕분에 그녀의 몸이 은호 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좁혀진 거리만큼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눈에 담겼다.하지만 은호의 시선은 예리의 말을 내뱉은 다정한 입술이 아닌, 닿을 수 없는 오랜 추억에 가닿아 있는 듯한 그녀의 아련한 눈망울에 그대로 묶여 버렸다.예리가 그 아련함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눈을 천천히 감았다.“그렇게 눈을 감고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까맣던 눈앞에 이야기의 내용이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하거든요.”예리의 입가에 처음 보는, 아련하면서도 가벼운 장난기가 섞인 미소가 부드럽게
Terakhir Diperbarui: 2026-05-27
Chapter: 50화"전 비서님 접니다. 당장 경찰 쪽 인맥 전부 연락 넣….”탁.예리가 다급히 손을 뻗어 은호의 휴대폰을 낚아챘다.통화 종료 버튼을 거칠게 연타하는 예리를 보며 은호가 붉어진 눈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 사람들 때문에 팀장님, 죽을 뻔했습니다. 두 사람, 하루라도 빨리 처벌받게 해야 합니다.""아니요, 지금은 안 돼요.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 오히려 무혐의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아요."은호가 억지로 이성을 붙잡으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한참을 그 자세로 서서 생각에 잠겼던 그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그래도 당분간은 안 됩니다. 사람을 붙여드리겠습니다.""이사님.""그 사람들 계획, 나 팀장님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이성을 잃고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지만, 예리를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완강했다.지독할 정도로 단단한 시선에 예리는 무거운 공기를 환기하려 슬며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이 일 하면서 협박 한두 번 당해본 줄 아세요? 예전엔 저 죽여버리겠다고 칼 들고 찾아온 고객도 있었어요."“…네?!”은호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날카로운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경악이 서렸다."그런데 제가 발차기 한 방에 날려버렸거든요. 저 보기보다 제법 강해요."허공에 펀치를 날려 보이는 예리를 보며 은호는 황당함에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진심인지, 아니면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농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하지만 곧, 은호의 미간이 더 단단히 좁혀졌다."그래도 안 됩니다. 경호가 정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직접 곁에 있겠습니다. 당분간 나 팀장님 모든 스케줄은 저랑 동행하시죠."“네?!”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었다.이 말은 그러니까… 온종일 눈앞의 남자와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예리의 입꼬리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그녀는 다급하게 손사래
Terakhir Diperbarui: 2026-05-26
Chapter: 49화"원래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 누구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약한 부분 하나쯤은 품고 살거든요."주방의 가라앉은 공기를 타고 예리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울렸다."그런데 그게 아주 작아서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다가도, 가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나를 집어삼키려 들 때가 있어요."창밖으로 아득하게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예리는 제 앞의 빈 컵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그 커다란 게 나를 삼키겠다는데 뭐 별수 있나요? 그냥 집어삼켜지지 않게, 나도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수밖에요."은호는 컵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을 멈췄다. 예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제 자신의 무력감을 진심으로 안아주고 있었다."그래서 저는 이사님 원망 안 해요. 그날 이사님이 멈췄던 건 무능해서가 아니라, 타이밍 나쁘게 그 순간 조각이 커져 버린 것뿐이니까."“…….”"그러니까 이사님,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은호는 찰나의 숨을 삼키며 예리와 조심스레 시선을 맞췄다."그리고 그거 아세요? 그렇게 도망치고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조각이랑 내 덩치가 비슷해지는 날이 온다는 거."먼 과거를 회상하듯 예리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 아득해졌다.“저도 그랬거든요.”‘저도… 그랬거든요?’은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완벽하고 당차기만 해 보였던 그녀의 이면에 자신과 똑같은 종류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장을 쿵 내려앉게 했다."그러니까 자책하는 대신, '나'라는 사람의 크기를 키우는 데만 집중해 보세요. 그 조각이랑 크기가 비슷해지기만 해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지 않겠어요?"예리가 아이처럼 산뜻하게 웃어 보였다.싱그럽게 피어난 그 미소가 그림자 졌던 주방을, 그리고 평생 겨울일 것만 같았던 은호의 얼어붙은 세계를 서서히 녹여 내렸다.은호의 가슴속이 속절없이 울렁거렸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기분 좋은 일렁임이었다.'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팀장님처럼 단단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도
Terakhir Diperbarui: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