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남편의 기망 어린 죽음과 가문의 멸문이라는 비극을 겪은 여인. 회생 후 맞이한 두 번째 생에서, 다시 죽음을 가장한 남편의 모든 것을 처분하며 복수의 서막을 연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새로운 인연을 찾으려 할 때, 비열한 전남편의 애원과 그녀를 '왕비'라 칭하는 미스터리한 섭정왕의 등장은 그녀를 예측 불가한 운명의 중심으로 이끄는데, 배신과 복수, 그리고 새로운 사랑 속에서 그녀가 개척해 나갈 파란만장한 운명은 대체... 여하튼, 나의 두 번째 장례식은 없다!
View More복수당.임정현의 말을 들은 지 내관이 피식 웃더니 날카로운 냉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로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노부인이 채찍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영안 옹주를 때려 죽이겠노라 큰소릴 치셨다던데요. 허면 어찌 된 일입니까? 반나절도 안 지난 지금에 와선 그리 정정하시던 노부인께서 병이 나 몸져누우셨다니.”이 말이 떨어지자 노부인이 진짜로 아프든 아니든 아플 자격조차 없게 되어버렸다.그리 되면 곧 황제를 기만한 죄로 엮일 터였다.임정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으나 옆에 있던 하녀의 부축으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려 했으나 말문이 트이기도 전, 지 내관이 냉정히 일렀다.“노부인께서 몸이 불편해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없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너희 몇은 들어가 부인을 모셔오너라.”“지 내관님, 그리 하시면 아니 되옵니다!”임정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어머니는 비록 병석에 누운 몸이라 하나 그래도 조정의 작호를 지닌 이였다.그런 분을 하인이 들쳐 업거나 끌어낸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한다면 훗날 그녀와 임정훈이 어디 가서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미래가 캄캄해진 그 순간, 임정현은 기어이 이를 악물고 지 내관에게 애원하듯 말했다.“지 내관님, 부디 진노를 거두시옵소서. 제가 직접 들어가 모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그러나 지 내관은 입꼬리만 슬쩍 올리며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으로 응수했다.“이미 늦었습니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젊은 내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누군가 일부러 그랬는지 임정현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고 지나갔다.“꺄악!”임정현은 중심을 잃고 뒷걸음질하다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머리 위 비녀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정갈하던 쪽진 머리도 헝클어져 처참한 꼴이 되었다.저만치서 송연희가 보이자 그녀는 기어이 몸을 일으켜 네발로 기듯이 다가가며 다급히 외쳤다.“새언니! 제발 말려 줘요! 어머니께선 지금 병환 중이세요!”하지만 하녀 둘이 그녀 앞을 막아서며 냉
옆에 앉은 몇몇 부인들이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광경을 본 임씨 노부인은 아무리 눈치가 둔해도 이제야 자신이 놀아난 것을 알아차렸다. 입술이 부르르 떨리며 막 말문을 열려는 찰나 허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으로 들라. 물건 들 땐 조심히 해야 한다. 귀한 것들이니 다치지 않게 하거라.”그 말이 끝나자 문밖에서 하녀 몇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탁자 위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선물들이 순식간에 치워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임씨 노부인은 마치 가슴팍에 돌덩이를 얹은 듯 숨이 턱 막히며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임정현 또한 그 자리에 얼이 빠져 말문을 잃었다.비단 그들 모녀뿐이랴. 송연희와 그녀의 시녀들 역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이토록 통쾌한 ‘선물 회수’ 란 누구 머리에서 나왔단 말인가.“당신... 당신들...!”임씨 노부인은 분노에 손을 덜덜 떨며 제대로 된 한 마디도 잇지 못했다.이 무례한 부인네들, 감히 그녀를 이토록 업신여기다니.훗날 아들 내외가 공훈을 세우고 돌아오면 반드시 이 천박한 여인들을 무릎 꿇려 사죄케 하고 말리라.그리 이를 갈고 있던 찰나, 이미 발걸음을 돌렸던 송연희가 문득 고개를 돌려 노부인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은 마치 송장이 된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 싸늘하고 냉담하였다.뼛속 깊은 서늘함이 척추를 타고 퍼져나가더니 이내 사지 말초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그 표정을 똑똑히 본 송연희는 이윽고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부디 강녕하시옵소서.’소리 없는 그 한마디는 오히려 천둥보다 무서운 협박이었다.임씨 노부인은 그녀가 몸을 돌려 나간 뒤에야 정신을 수습했고 마침내 입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곁에 있던 약탕 그릇을 집어 들고 문밖으로 내던졌다.영서각.부인들은 송연희가 정성껏 달인 보양차를 마시며 연신 감탄을 터뜨렸다.송연희가 초희에게 명하여 귀가길에 들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케 하자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얼굴엔 흐뭇한 웃음이 가득하였다.물건의 귀함을 떠나 이 정성과
복수당에 도착한 송연희 일행을 맞은 임씨 노부인은 한창 여러 부인들에게 아첨을 듣고 있던 터라 기분이 한껏 올라 있었으나 그녀를 힐끗 흘겨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네가 여긴 어인 일로 왔느냐?”송연희는 입을 열지 않았고 대신 옆에 서 있던 초희가 나서서 말했다.“저희 아씨께서 대부인의 병환을 걱정하시어 친히 부엌에 들어가 보양에 좋은 혈연을 정성껏 고아 오셨사옵니다. 부디 기운을 북돋우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요.”“송씨가 내 병세를 걱정한다고?”임씨 노부인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하루하루 자신을 미워하고 장군부를 망치려 수작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오늘은 아예 이 집을 말아먹으러 작정한 건가. 그런 그녀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다니, 그야말로 기가 막혀 부처님께 절이라도 올려야 할 판이다.그 생각에 이르자 임씨 노부인의 눈빛은 더더욱 싸늘해졌고 얼굴에 드러난 혐오를 도무지 감출 수 없었다.그 광경을 눈치 챈 다른 부인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일그러지자 임정현이 마른기침을 하며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초희의 손에서 쟁반을 받으려 했다.헌데 쟁반 위 그 익숙한 빛깔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임씨 노부인은 목소리를 높여 날카롭게 소리쳤다.“멈춰라!”그녀는 쟁반 위의 도자기 그릇을 매섭게 노려보며 분노를 터뜨렸다.“송씨, 너 정말 미쳤구나! 어찌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죽 한 그릇 담는 데 쓰다니!”“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라고요?”방 안에 있던 여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임정현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어머니께서 착각하신 듯합니다. 이런 색감의 사기 그릇은 저희 집 하인들도 쓰지 않아요.”그 투박하고 무심한 말에 부인들의 눈썹이 하나둘씩 찌푸려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허 부인은 냉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물었다.“장군부의 하인들이 대체 어떤 금은보화를 쓰기에 이처럼 빼어난 청백자조차도 하찮다 하시나요?”한 마디 말이 모녀의 얼굴빛을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게 만들었다.“그럴 리가 없는데...”임씨 노부인은 중얼이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
길을 걷다 누군가 그녀를 ‘허 부인’이라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도 그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성씨라 여겼을 뿐,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스스로를 더 돋보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머니를 모시느라 최근 복수당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며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그래요? 아가씨가 참으로 효심이 지극하군요.”시랑 부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웃으며 말을 잇자 옆에 있던 부인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따라 웃었다.그 웃음이 왜인지 모르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칭찬을 듣고도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불길한 기운이 등에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러나 마음에 둔 그 집 아들의 어머니 앞에서 기가 죽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임정현은 꿋꿋이 입을 열었다.“번거로우시겠지만 잠시 이 문 앞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어머니께 먼저 여쭙고 오겠습니다.”그녀가 물러난 뒤, 시랑 부인의 웃음기가 사라지며 차갑게 말문을 열었다.“장군댁은 참, 공을 탐하는 버릇이 대대로 내려오는 모양이네요.”“부인, 무슨 말씀이세요?”서 부인은 냉소를 흘리며 친정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과거 임 노장군이 전장에서 공을 가로챘던 일, 병든 시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날마다 시달리는 주씨 댁이 시어머니의 강요로 시집살이에 쓸 자기 혼수까지 끌어다 써야 했던 이야기를 말이다.다른 부인들도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으나 이처럼 상세히 들은 것은 처음인지라 얼굴빛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전부터 그 집 노부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겠다 싶었는데, 설마 이렇게도 속없고 무도한 짓을 할 줄이야. 그러니 그 날, 임 장군이 돌아왔을 때 옹주께서 그 자리에서 이혼 이야기를 꺼내신 거겠죠.”허 부인은 나직하게 말을 보탰다.“말로야 쉽지요. 허나 혼인을 끊는 일이 말처럼 쉬웠다면 이 세상에 원통하게 죽어가는 여인들이 어찌 있겠어요.”여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오히려 깊이 와 닿는 법.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순간 이미 마음속으로 누구의 편에 설지 정한 이들이 있었
“허 부인 아니십니까? 실로 오랜만에 뵙네요.”부인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얼굴에 번지던 웃음이 순식간에 한결 진심어린 빛으로 바뀌었다.허 부인은 허원정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인연으로, 두 사람은 수십 년을 의지하며 살아왔고 슬하엔 자녀 둘뿐이었다.허 부인이 몸이 약하여 딸을 낳은 뒤 줄곧 병석에 누워 있었음에도 허원정은 첩 하나 두지 않았고 통방도 들이지 않았다.도성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허 부인의 복 많은 삶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으며 간혹 마주칠 때 보여주던 그녀의 시원스런 성품 덕분에 평판도 매우 좋았다.허 부인은 미소 띤 얼굴로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어서 가시지요. 날이 이리도 뜨거우니 어여쁜 피부가 다 상하겠습니다.”그 말에 부인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만지며 서둘러 뒤따랐다.장군부는 지난 수년간 날로 쇠퇴하여 겉만 번지르르할 뿐 속은 비어 있었고 하필 임씨 노부인은 성품이 오만하여 체면을 버리고 지체 낮은 관가의 부인들과 교류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문벌 높은 가문과는 인연을 맺지 못하였으니 도성의 귀부인들은 그런 그녀를 곱게 보지 않았다.만일 두 해 전 송연희가 장군부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들과는 아예 발길을 끊었을 터였다.임정한 또한 그 모친을 닮아 눈만 높고 손은 짧아 비록 조정에 벼슬은 있었으나 스스로를 청류라 자처하며 누구와도 ‘동류로 섞이길’ 꺼려하였고 자만심 가득한 태도에 사람들의 미움을 사 늘 동료조차 드물었다.장군부는 오랜 세월 인적 드물던 탓에 문 앞을 지키던 문지기도 이 같은 광경을 처음 보는 듯 허둥지둥했으나 부인들은 이미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소리 속에 저만치 대문을 지나고 있었다.부인들은 허 부인의 안색이 붉고 혈색 좋아 마치 꽃다운 이팔청춘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허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다 엄 대감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덕분이지요. 대감께서 신의곡에서 온 귀한 단약 한 병을 주셨는데 아니었으면 저도 아직 병상에 누워 있었을 겁니다.”“혹시 그 신의곡이라 함은 산
송연희는 무언가 말하고자 하다 멈칫하는 주씨 댁의 눈빛을 보고는 문득 미소 지었다.“염려 마세요. 그자는 천명에 따라 자식을 하나밖에 두지 못할 팔자예요. 거기다 음욕이 지나쳐 몸을 상하였으니 이대로라면 삼십도 채 넘기지 못할 겁니다.”주씨 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창백한 얼굴 위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고마워요, 동서... 아니, 낭자.”그 말에 송연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날, 그때 다시 감사를 전하셔도 늦지 않아요.”“옹주마마의 대의 앞에 전 감탄을 금할 길이 없나이다!”덕해가 어명을 읽은 후, 서둘러 앞으로 나와 송연희를 직접 부축하였다. 그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송연희는 몸을 낮추며 겸손히 답했다.“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온데 폐하께서 과분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사실 그녀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황제가 기뻐한 김에 내린 하사가 실로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황금 백 냥에 금은보화, 자사화와 서책, 심지어는 이번 진상 중 선별된 비단 몇 필과 남주까지 하사받았으니, 고금에 유례없는 일이었다.덕해는 한껏 흥에 겨워 덧붙였다.“겸손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폐하 곁을 오래 모셨지만 이토록 기뻐하신 적은 처음 봅니다. 조례를 마친 뒤엔 경천군 대감 앞에서도 연신 옹주마마를 칭송하셨지요!”송연희는 마음속의 경악을 누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폐하의 두터운 은혜, 감당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그 겸허한 태도는 덕해를 더욱 만족케 하였다. 특히 임씨 노부인이 아까 벌인 소동과 대비되며 그의 마음속 허영심까지 말끔히 채워주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덕해는 궁으로 돌아가 연회에 참석할 생각도 접고 초희가 내온 대나무로 방금 길어온 이슬차를 두 잔이나 비우며 한껏 기분을 즐겼다.떠날 무렵에도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이를 본 송연희는 초희를 시켜 방 안에서 올해 새로 들인 귀한 차를 몇 가지 챙기게 하였다.고가의 명차뿐 아니라 그녀가 손수 덖은 국화차도 곁들여 정성과 마음을
임씨 노부인은 무언가 해명하려 입을 열었으나 역한 구역질이 채 가시지 않아 또다시 속을 게워냈다.입안에 넣었던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으나 발치엔 구토물만 널려 있을 뿐, 다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혹여 덕해의 미움을 살까 염려된 노부인은 돌연 돌아서더니 그 자리에서 두 내관의 몸을 거칠게 뒤지기 시작했다. 그 오물덩이는 분명 이들의 몸 어디엔가 있을 터였다!“그만두십시오.”덕해가 냉랭히 나직하게 일렀다.허나 임씨 노부인은 듣지 않고 오히려 소내관이 몸을 피하자 그 중 하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이에 덕해의 눈빛이 순식간에 매서워졌다.“노부인, 제정신을 잃고도 모자라 감히 어전의 내관에게 분풀이를 하려 드십니까? 아직도 끌어내지 않고 무얼 하느냐!”영안 옹주를 해하려 든 죄도 중하거늘, 이제는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를 폭행하려 드니 미쳤다고 해도 감히 감쌀 자 하나 없을 일.노부인은 미처 눈을 깜박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두 내관에게 제압당해 땅바닥에 엎드려졌다.그간 쌓인 원한이 터졌는지 두 사람은 사정 없이 노부인의 입에 흙을 처넣었다.얼굴이 땅에 짓눌린 채 노부인은 무언가 말하려 애썼으나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다시 입에 누군가의 손수건이 쑥 밀려 들어갔다.그 익숙한 악취가 코끝을 찔렀고 곧 이어 구토물의 냄새가 섞여 들자 노부인은 끝내 숨이 막힌 듯 기절하고 말았다.“굳이 이리 하실 것까진 없었어요.”송연희는 거의 뼈가 드러날 만큼 깊게 패인 채찍 자국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약을 덜어내어 다정히 말했다.주씨 댁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단호하였다.“동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밖에 없어요. 은혜는 갚아야 하잖아요.”연희가 약을 상처 위에 고르게 뿌리는 동안, 주씨 댁은 고통을 참으며 낮게 신음을 삼켰다. 그 소리에 송연희가 문득 물었다.“제가 신의를 저버릴 수도 있다 생각지는 않으셨는지요?”주씨는 잠시 머뭇이다 이내 담담히 말했다.“믿어요.”단 세 자였으나 송연희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생각하
임씨 노부인의 낯빛은 점점 더 흉해졌고 그 몸도 금세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다. 머릿속엔 끊임없이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하늘이 무너진다.’덕해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돌려 송연희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그 순간, 임씨 노부인이 먼저 나섰다.“오해입니다! 모두 다 오해예요!”그녀는 송연희를 향해 미친 듯 눈짓을 보내며 눈동자엔 애걸의 기색마저 서려 있었다. 방금 전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덕해는 냉랭하게 받아쳤다.“영안 옹주께 묻고 있는데 노부인께서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요?”‘영안 옹주’라는 네 글자가 떨어지자 임씨 노부인의 다리가 다시금 풀렸다.방금 전 그녀가 손을 댈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 시어머니이고 송연희는 며느리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허물을 하나 잡기만 하면 설령 손을 댔다 해도 누가 뭐라 하랴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궁중의 내관이 직접 눈앞에 있는 이 자리에서 송연희가 입 한 번 열기만 해도 자신은 멀쩡한 황족에게 손을 댄 무도한 악질 시어머니가 되어버릴 판이었다.임씨 노부인은 분명 모든 상황을 따져 본 듯했지만 정작 말할 기회조차 자신에게 없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때, 부엌에서 뛰쳐나온 초희가 덕해 앞으로 달려가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부디 덕 내관님께서 저희 아씨의 결백을 밝혀 주시옵소서!”덕해는 이 작은 시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양자로 들인 아들놈도 그녀를 한 차례 칭찬한 적이 있었기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일단 일어나 말해 보거라. 천천히, 들은 그대로 말하거라.”“그깟 천한 계집종이...!”임씨 노부인이 입을 떼자마자 옆에 있던 내시 하나가 번개처럼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고 임씨 노부인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쓰러질 뻔했다.눈시울을 붉힌 초희는 또렷한 발음으로, 울음을 머금은 채 방금 전에 뜰에서 벌어진 일을 한 치의 누락 없이 쏟아놓았다.영서각의 문이
채찍이 내려오는 찰나, 가냘픈 한 여인의 몸이 번개처럼 솟아올라 송연희 앞을 막아섰다.주씨의 동작은 너무나도 빨라 사람들은 그녀가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보지 못했고 그 옆에 있던 임정현조차도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갈고리가 달린 채찍이 등을 갈기자 살이 터지며 피가 번졌다.“아!”주씨는 비명을 지르며 핏기 없는 얼굴로 송연희의 품 안에 그대로 쓰러졌다.그 얼굴을 확인한 임씨 노부인은 말끝마다 거역 당했다는 분노로 이그러진 얼굴에 냉소를 띠우며 연거푸 외쳤다.“좋다, 좋다, 아주 좋구나!”“그리도 착한 척을 하고 싶다면 내 기꺼이 도와주마!”그 말과 함께 다시 채찍을 높이 들고는 주씨 댁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주씨 댁은 겁에 질린 채 두 눈을 꼭 감았고 두 손은 송연희의 옷깃을 부여잡은 채 몸을 떨었다.그 순간,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대로 죽겠구나...’그러나 기다리던 통증은 끝내 닿지 않았다.귀 뒤에서 불쑥 들려온 건 그녀의 시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외마디였다.“요술이다... 저 계집이 요망한 술수를 쓴 게 분명해!”임씨 노부인은 어느새 손에 힘이 풀려 채찍조차 제대로 쥐지 못했고 그 초췌한 낯빛 위로는 두려움이 역력했다.그녀는 뒷걸음질치다 뒤엉켜 도망가려는 하인 무리와 서로 부딪혔고 이내 우르르 넘어지며 한 무더기로 나뒹굴었다.“바늘이다! 독침을 썼어!”멀찍이 있던 임정현이 마침내 상황을 파악하곤 외쳤다.사람들의 시선이 송연희에게로 쏠리자 그녀의 오른손 손끝에서 희미한 냉기를 품은 은침이 번득였다.혹여 그 침에 독이 묻었을까 두려워진 임씨 노부인은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흐느적이며 입술을 떨었다.“독... 독부...!”그녀는 사람 무더기 위에 짓눌린 채 꼼짝 못했고 밑에 깔린 자들 또한 감히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멀찍이서 보기엔 마치 정체 모를 괴상한 놀이를 벌이는 듯한 모습이었다.그때, 대문 밖에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덕해 일행이었다.들어오자마자 이 어이없는 광경을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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