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김기리.”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장성호 과장이 서 있었다.젊다.
당연하지만 젊었다. 13년 뒤의 장성호와 비교하면 얼굴에 살도 덜 붙었고 머리도 훨씬 풍성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팀장이 아니다.“요즘 우리 신입사원 잘나가던데?”
“제가요?”
“박팀장님이 칭찬을 다 하시더라고. 박팀장님 입에서 ‘괜찮다’는 말 나오는 거 쉽지 않은데.”
나는 웃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 회사에서 운도 실력이야.”
그 말.
기억난다.장성호는 툭툭 농담을 던지고 적당히 칭찬하고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장난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참 좋은 선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나는 이 인간의 성격을 너무 잘 안다.
장성호는 권위적이다.
상대가 자기 말에 토를 다는 걸 싫어한다. 자기 논리가 틀렸다고 지적하는 건 더 싫어한다. 말투, 인사, 보고 자세, 술자리에서 잔을 받는 방식까지 사소한 걸 다 본다.한번 마음속에 사람을 분류하면 오래 간다.
‘쟤는 예의가 없다.’
‘쟤는 나를 무시한다.’그 순간부터 끝이다.
문제는 부하직원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윗사람과도 싸운다. 자기보다 직급이 높다고 무조건 숙이는 사람도 아니다.‘레벨이 높아.’
박팀장은 공략법이 단순했다.
성실, 책임감, 깔끔한 보고.장성호는 다르다.
13년을 같이 일한 나조차 끝까지 비위 맞추기 어려웠던 사람이다.하지만 지금 나는 신입이다.
아직 경쟁자가 아니다.나는 살짝 웃었다.
“과장님한테 많이 배우겠습니다.”
장성호가 나를 바라봤다.
“나한테?”
“네. 선배님들이 과장님 일 잘하신다고 많이 이야기하시던데요.”
사실이다.
싫어하는 사람들도 장성호의 능력 자체를 무시하지는 못했다.장성호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가 그래?”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과장님은 외모도 좋으셔서.”
장성호가 빵 터졌다.
“야, 야. 신입이 사회생활을 어디서 배웠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진짜입니다.”
“됐어, 인마.”
장성호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 어깨를 쳤다.
‘여기까지.’
더 하면 과하다.
이 사람은 아부를 좋아하지만 대놓고 아부하는 사람은 또 싫어한다. 자신이 존경받는 건 좋아하지만 상대가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오히려 경계한다.참 피곤한 인간이다.
나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과장님, 제가 업무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여쭤봐도 되죠?”
“당연하지.”
장성호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회사생활은 말이야. 신입 때 기본을 잘 배워야 돼.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 관계도 잘해야 되고.”
아.
시작한다.나는 열심히 듣는 얼굴을 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렇군요.”
“맞는 말씀 같습니다.” “그 부분은 저도 조심하겠습니다.”장성호의 얼굴이 점점 만족스러워졌다.
장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잘해봐. 신입치고 센스 있네.”
“감사합니다.”
장성호가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장성호.’
지금은 웃어준다.
존경한다고도 해준다. 적당히 비위도 맞춰준다.이유는 하나다.
아직은 널 적으로 만들 때가 아니니까.
***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모른다.
박팀장도, 전진주도, 장구미도 아무도 모른다.13년 뒤의 내가 우연히 알게 된 일.
장성호가 술을 마시고 큰 사고를 친 사건.그 일은 결국 회사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저 사람도 참 운 좋네’ 하고 끝냈다.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그 사건이 언제쯤 일어나는지 안다.
구체적인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시기는 알고 있다.그 일이 벌어지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면 확보한다. 그리고 정식 절차를 통해 알린다. 익명 제보가 가능하다면 익명으로.내가 직접 칼을 휘두를 필요는 없다.
본인이 만든 사고. 본인이 책임지게 하면 된다.물론 위험하다.
내가 제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장성호가 살아남으면 내 회사생활은 다시 지옥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은 그런 걸 절대 잊지 않는다.그래서 더 철저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덤비면 안 된다.‘이번에는 내가 먼저 준비한다.’
13년 동안 나는 당했다.
이번에는 기다린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움직인다.***
“김사원.”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지연 사원이었다.“네?”
“아까 부탁한 자료 정리했어요.”
“아, 감사합니다.”
고지연.
일을 잘했고 성격도 괜찮았다. 첫 번째 삶에서 가끔 생각했다.‘혹시 얘가 나 좋아했던 거 아니었나?’
확실한 건 아니다.
그냥 유독 말을 자주 걸고, 커피 마실 때 같이 가자고 하고, 회식 끝나면 잘 들어갔냐고 먼저 연락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몇 년 뒤 고지연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잘 살았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그걸로 된 거다.
“고지연 씨, 감사합니다. 제가 커피 한잔 살게요.”
고지연이 웃었다.
“진짜요?”
“자료까지 해주셨는데 당연하죠.”
“그럼 비싼 거 먹어야지.”
나는 장난스럽게 지갑을 움켜쥐었다.
“사회초년생 월급입니다. 살려주십시오.”
고지연이 웃었다.
관계는 좋게.
하지만 선은 넘지 않는다.이번 삶에서 내가 집중할 사람은 이미 정했다.
미연.***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오늘 하루를 되짚었다.
박팀장.
첫 신뢰 확보.장구미, 전진주.
관계 양호.고지연.
관계 양호.그리고 장성호.
아직은 양호.회사생활이 게임이라면 첫 번째 삶의 나는 공략집 없이 시작했다.
뭘 선택하면 호감도가 떨어지는지도 몰랐다.하지만 지금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누가 살아남는지, 누가 회사를 떠나는지, 누가 뒤통수를 치는지 대략 알고 있다.‘그렇다고 너무 믿으면 안 되겠지만.’
내가 행동을 바꾸면 미래도 바뀐다.
그 말은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어느 순간부터 틀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나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미연 : 내일 몇 시에 만날까요?ㅎㅎ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김기리 : 12시 어떠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ㅎㅎ
미연 : 좋아요 :)
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사에서는 장성호와의 첫 번째 심리전.
그리고 내일은 미연과의 첫 정식 데이트.첫 번째 인생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
회사에서도, 사랑에서도, 돈에서도.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인다.
나는 사무실 문을 나서다 잠깐 뒤를 돌아봤다.
장성호 과장이 자기 자리에서 누군가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나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장성호.’
당분간은 잘 지내보자.
당신이 사고를 치는 그날까지.
### 8화 끝
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