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9화. 이제 돈이다
==================================================주말 정오.
나는 약속 장소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12시 03분.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미연이었다.“기리 씨!”
미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셨어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거짓말이다.
20분 전에 왔다.첫 번째 삶에서도 그랬다.
미연을 만나는 날이면 괜히 일찍 나왔다.“오늘 뭐 먹어요?”
“믿고 따라오세요.”
“뭔데요?”
“가보시면 압니다.”
그럴 수밖에.
이미 한 번 검증이 끝난 맛집이니까.***
식당에 들어선 미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멸치쌈밥?”
“네. 혹시 싫어하세요?”
“아뇨! 저 이거 진짜 좋아해요.”
알고 있다.
첫 번째 삶에서도 같이 왔었다.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미연은 쌈 하나를 싸서 먹더니 눈을 크게 떴다.“와. 진짜 맛있어요!”
“왜요?”
“기리 씨. 제가 이런 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움찔.
회귀자의 최대 난관.
미래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것.“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습니다.”
“거짓말. 무슨 얼굴만 보고 멸치쌈밥 좋아하는지 알아요?”
“한식 좋아하게 생기셨잖아요.”
“그게 어떻게 생긴 건데요?”
“음…… 참하게?”
“뭐예요!”
미연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미연이 물었다.
“이제 뭐 해요?”
“카페 가죠. 신상 카페 하나 찾아놨습니다.”
미연의 눈이 바로 반짝였다.
역시.
미연은 예쁜 카페를 좋아했다. 특히 새로 생긴 곳, 사진 찍기 좋은 곳, 창가 자리.“소금빵도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미연이 걸음을 멈췄다.
“저 소금빵 좋아하는데.”
안다.
아주 잘 안다.“그래요?”
나는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미연이 이상한 사람 보듯 바라봤다.
“기리 씨. 진짜 저 예전에 알았어요?”
“왜요?”
“이상해요. 한식 좋아하는 것도 맞히고, 멸치쌈밥도, 카페도, 소금빵까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는 조금 틀려줘야겠다. 전부 맞히면 운명이 아니라 스토커다.“그냥 미연 씨한테 관심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미연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그런 말을 또 자연스럽게 하시네요.”
“진심인데요.”
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으며 앞서 걸었다.***
카페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회사 이야기, 병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여행 가고 싶은 곳, 좋아하는 음식, 결혼에 대한 생각까지.13년 뒤의 나는 대부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듣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첫 번째 삶에서는 그냥 흘려들었던 말들이 이번에는 다르게 들렸다.
사람을 만난다는 건 상대방에 대해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는 것이었다.
카페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 산책길을 걸었다.
미연이 말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저도요.”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지금이다.’
첫 번째 삶에서는 늘 타이밍을 놓쳤다.
조금 더 친해지고, 조금 더 확신이 생기고, 조금 더 좋은 상황이 되면.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미연 씨.”
“네?”
“저 미연 씨 좋아합니다.”
미연의 눈이 커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고, 강릉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는 솔직히 더 좋았습니다.”
미연이 작게 웃었다.
“그때 다른 남자한테 번호 물어본다고 질투했죠?”
“……티 났습니까?”
“조금요.”
“네. 질투했습니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더 빨리 아무 사이가 아니게 만들려고요.”
미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저랑 만나보실래요?”
미연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리 씨.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이런 건 조금 생각을 해봐야 해서.”
예전의 나라면 불안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네. 천천히 생각하세요.”
미연도 미소를 지었다.
“제가 연락드릴게요.”
***
집으로 돌아왔다.
데이트가 끝나자 현실적인 문제가 머릿속을 채웠다.돈.
아무리 미래를 알아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나는 노트를 꺼냈다.
미·중 갈등.
세계적인 감염병 사태. 금리의 급격한 변화. 주식시장의 폭락과 반등. 부동산 급등기. 환율 급변. 정치적 충격. 사회적 갈등.13년 동안 시장에는 수없이 많은 공포가 찾아왔다.
당시의 나는 그때마다 휘둘렸다.이번에는 다르다.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지는 못해도 큰 흐름은 안다.노트 첫 줄에 크게 적었다.
시드 확보.
떠오르는 자산 몇 개를 적었다.
비트코인.
엔비디아.“일단 백만 원씩?”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나한테 백만 원은 큰돈이었다. 그래도 조금씩 사두면 된다.당장 결과를 볼 필요도 없다.
이번에는 시간이 내 편이니까.
나는 2018년 전후 부동산 시장이 크게 움직였던 것도 기억했다.
그 전에 최대한 종잣돈을 만든다. 기회가 오면 집 한 채를 잡는다.첫 번째 삶에서는 월급이 들어오면 썼다.
술, 여행, 친구, 옷, 차. 그렇게 시간과 돈이 같이 사라졌다.이번에는 월급이 들어오는 순간 미래의 나에게 먼저 돈을 보낸다.
나머지로 산다.“5년. 5년만 제대로 하면 된다.”
돈이 생기면 사람의 선택지가 달라진다.
회사가 싫으면 나올 수 있고, 집도 살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장성호 같은 사람 앞에서 굽실거려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나는 씩 웃었다.
“장성호. 기다려라.”
첫 번째 삶에서는 당신이 나보다 위였다.
하지만 두 번째 삶에서는 돈도, 직급도, 인생도 당신이 날 내려다볼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간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연이었다.
미연 : 기리 씨.
미연 : 저도 기리 씨 좋은 것 같아요ㅎㅎ 미연 : 우리 만나봐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오오오! 됐다!”
회사에서는 박팀장의 신뢰를 얻었고, 동팔이와 오해도 풀었고, 미연과 연애까지 시작한다.
“이거지. 이게 회귀지!”
첫 번째 인생에서 13년 동안 꼬였던 것들이 하나씩 풀려가고 있었다.
나는 정말로 생각했다.
이번 인생은 다르다고. 내가 알고 있는 미래를 이용하면 회사도, 돈도, 사랑도 모두 가질 수 있다고.그런데 내가 한 가지 착각한 게 있었다.
내가 과거와 다른 행동을 시작한 순간부터 미래 역시 내가 알고 있던 미래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며칠 뒤.
첫 번째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회귀했다고 해서 미래까지 내 것이 된 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된다.
### 9화 끝
2019년 2월 2일.토요일 오전 아홉 시 오십 분.온천천 공원.박정태는 먼저 와 있었다.등산복.운동화.종이컵 커피 두 개.회사 밖의 호랑이는 공원 벤치에 앉은 아저씨였다.머리가 많이 셌다.2014년 회사를 떠날 때보다 훨씬.그가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설탕 넣었다. 너 예전에 믹스 마셨잖아.”나는 받았다.지금은 믹스를 안 마신다.첫 번째 삶의 서른 중반부터 끊었다.두 번째 삶에서는 다시 마신 적이 없다.그런데 이 사람은.2013년의 신입이 믹스를 마시던 걸 기억했다.“감사합니다.”한 모금 마셨다.달았다.* * *“본사에서 전화 왔다.”박정태가 먼저 말했다.“장구미라는 사람이 작년에 진술서를 냈다더라. 본사가 그걸 보다가 네 신입 때 일까지 거슬러 올라갔대. 거기 내 이름이 나온다고. 당시 팀장으로.”“네.”“너 신입 때. 대표 보고자료 양식 바뀐 거 모르고 깨진 날 있었지.”“네.”“그다음 날 내가 널 깼지. 양식도 모르냐고.”박정태가 커피를 내려다봤다.“기억 안 났는데. 전화 받고 나서 기억났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감사 건.”박정태가 종이컵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본사에서 물어보더라. 2013년 긴급 변경. 당시 진술 기억하냐고. 정정할 의향 있냐고.”박정태가 나를 봤다.“네가 신청했냐?”“아닙니다. 저는 작년 5월에 팀장님께 문자 드린 게 전부입니다. 본사에는 장 과장님 진술과 섞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팀장님이 직접 하셔야 하는 거라고.”박정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본사가 나한테 직접 물은 거구나.”* * *한참 말이 없었다.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갔다.유모차.개를 데리고 걷는 노부부.박정태가 말했다.“그때.”그리고 멈췄다.“긴급 변경 건을 구두로 진행하라고 했지.”“네.”“고객사가 급하다고 해서. 서류는 나중에 하라고.”“네.”“그런데 감사에서는 네가 절차를 충분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바람이 불었다.“왜 그러셨습니까
장구미의 마지막 출근일.오후 다섯 시.장구미가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나갔다.몇 명이 고개만 까딱했다.장성호는 자리에 없었다.본부장 보고라고 했다.나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갔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장구미가 말했다.“기리야.”“네.”“우리 이제 괜찮은 거지?”나는 장구미를 봤다.“뭐가요.”“나 진술서도 썼고. 정정 신청도 했고. 사과도 했고.”장구미가 박스를 고쳐 들었다.“창원 가면 주말에 낚시 다닐 거야. 거기 저수지 좋대. 너도 한번 와. 밥 한번 먹자. 편하게.”편하게.엘리베이터 숫자가 내려오고 있었다.7.6.5.나는 생각했다.장구미는 오늘 많은 걸 했다.3년 전의 장구미라면 절대 못 했을 것들.진술서.본인이 한 일부터.정정 신청.자기 이름으로.단서.확인 안 된 건 확인 안 됐다고.그리고 사과.이유를 붙여서.그런데.그걸로 우리가 괜찮아지는 건가.* *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13년 동안 미워했다.정확히는.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장구미를 5년 동안 기록했다.날짜.시각.무엇을 뺐는지.그 기록이.오늘 장구미의 진술서로 돌아왔다.그리고 장구미는.이제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4.3.“선배님.”“응.”“진술서 쓰신 거. 정정 신청하신 거. 그건 제가 고맙다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그랬지.”“그건 원래 하셨어야 하는 거라서요.”“…….”“그런데 낚시는요.”장구미가 나를 봤다.“낚시는 아직입니다.”* * *2.1.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장구미가 타지 않았다.“아직?”“네. 아직.”장구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기리야. 나 할 만큼 했잖아.”“네. 하셨습니다.”“그럼.”“선배님이 할 만큼 하신 거랑. 제가 괜찮은 거랑은 다른 것 같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했다.장구미가 버튼을 눌렀다.다시 열렸다.“5년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사부터.”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두 번째 입사.그 말이 이상
11월 마지막 주.장구미의 마지막 주였다.송별회는 없었다.사무실에서 아무도 제안하지 않았다.장성호는 당연히.다른 사람들은 장성호 눈치를 봤다.장 과장이 팀장 찌르고 나간다.그게 공식적인 이야기가 됐다.* * *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는 네 명이 왔다.장구미의 송별회는.열리지 않았다.나는 그게 옳은지 모르겠었다.장구미는 철호 형과 달랐다.철호 형은 회사가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장구미는 다른 사람을 투명하게 만든 사람이었다.나를.민수를.정비 기사 한 명을.그런데 마지막에.자기 이름으로 그걸 고쳤다.그 사람의 마지막 주에.아무도 밥을 먹자고 하지 않았다.* * *수요일.전진주가 내 자리로 왔다.“기리야.”“네.”“장 과장 금요일 마지막이지.”“네.”전진주가 목소리를 낮췄다.“점심 한번 하자. 셋이.”나는 전진주를 봤다.2016년 철호 형의 송별회에 온 사람.팀장 안 오는 자리에 왜 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사람.“선배님이 먼저 말씀하시는 거 처음입니다.”“나도 처음이다.”전진주가 입가를 만졌다.“장 과장 진술서. 3-2번에 팀장 지시 메일 첨부했잖아. 2017년 해외설비 확정 기재 건.”“네.”“그 메일 참조에 나도 있었어. 나도 알았어. 그때.”전진주가 웃었다.“근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 *금요일 점심.공장 밖 국밥집.2016년 민수와 앉았던 그 집.장구미.전진주.나.그리고 민수가 뒤늦게 왔다.“저도 가도 됩니까.”장구미가 민수를 봤다.“너는 왜.”“선배님 진술서 2-2번에 제 이름도 있었습니다. 2017년 발표에서 추적 검사 주관자를 빼셨다고.”민수가 자리에 앉았다.“그거 쓰신 거 감사해서요.”장구미가 멈췄다.“감사할 일이 아니야.”“네. 기리 선배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는 안 하고. 밥만 먹으려고 왔습니다.”전진주가 웃었다.장구미도 웃었다.* * *국밥이 나왔다.넷이 먹었다.별 얘기는 없었
장구미의 진술서는 화요일에 제출됐다.인사팀.감사팀.그리고 본인이 요청해서 참조로 강태원 본부장.사무실에 소문이 퍼지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장 과장이 팀장 찔렀대.”“나가면서 판 엎고 가는 거지.”“본사 오 대리까지 들어갔다며.”사람들은 3번만 이야기했다.2번은.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 *장성호는 그날 오후 회의실에 틀어박혔다.본부장실에 두 번 불려갔다.돌아와서 나를 봤다.그 눈을 나는 알았다.첫 번째 삶에서.2020년 어느 날.회식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망신 준 날.그 전에 저 눈을 봤다.“김 주임.”“네.”“잠깐.”회의실.장성호가 문을 닫았다.“너지.”“뭐가요.”“장구미 그거. 네가 시킨 거지.”나는 장성호를 봤다.“아닙니다.”“장구미가 혼자 그런 걸 쓸 애야? 2번, 3번, 4번. 그거 네 방식이잖아. 네가 쓰는 메일이랑 똑같아.”맞았다.형식은 내 방식이었다.그런데.“검토는 했습니다. 장 과장님이 요청하셔서. 내용은 장 과장님이 쓰셨습니다. 본인이 한 일부터요.”“그게 네가 시킨 거지.”“팀장님.”나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장 과장님 진술서 2번에 제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피해자로요. 제가 시켰으면 왜 거기에 제 이름을 넣었겠습니까. 3번만 쓰게 했겠죠.”장성호가 멈췄다.* * *“김 주임.”장성호가 의자에 앉았다.처음으로.나보다 낮은 눈높이.“너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압니다.”“나 징계 들어갈 수도 있어.”“압니다.”“2월 회의록 수정. 그거 나 혼자 한 거 아니야.”나는 장성호를 봤다.“본사에서 톤 맞추라고 했어. 영찬이가. 3월 설명회 있다고. 나는 전달한 거야.”“장 과장님 진술서 4번에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오 대리의 메신저가 직접 지시인지는 확인 못 했다고.”“그러니까.”“팀장님이 확인하시면 됩니다. 오 대리가 뭐라고 했는지. 팀장님 이름으로요.”장성호가 웃었다.“너 진짜 무섭다.”“팀장님.”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구미는 일주일 동안 나와 말하지 않았다.업무 메일만 오갔다.품질기획 취합 자료.회의록.그리고 월요일 아침.사내 메일 하나.수신 : 김기리.제목 : 검토 요청.첨부 : 진술서_장구미_초안.docx* * *열었다.제목.부산공장 품질·미국법인 일정 관련 사실 진술서.진술인 : 장구미.진술 목적.본인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부산공장에서 수행한 보고 업무와 관련하여,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보유한 사실을 진술함. 본인의 퇴사와 무관하게 사실관계를 남기기 위함.본인이 한 일.나는 멈췄다.2번 항목이 ‘본인이 한 일’이었다.2-1. 2016년 3월, 2호라인 양산 개시 보고서 작성 시 검증 담당자(김기리)의 조건(초도 출하 잠정 승인, 추적 검사)을 삭제하고 작성자 칸에서 검증 담당자 이름을 제외함. 삭제는 팀장 지시였으나, 작성자 칸 제외는 본인 판단임.2-2. 2017년 3월, 2호라인 개선 성과 발표 시 원인분석·고객 대응 주관자(김기리)를 ‘실무 지원’으로 기재함. 본인 판단임.2-3. 2018년 2월, 설비 제작사 주간 회의록 리스크 2항(승인 일정 영향)을 삭제한 수정본을 작성함.본인이 지시받은 일.3-1. 2018년 2월 회의록 수정은 장성호 팀장의 구두 지시(2월 22일 오후 회의실)와 메신저 확인(첨부 1)에 따름. 동일 주, 본사 전략기획 오영찬 대리로부터 ‘공장 리스크 보고는 본사와 사전 조율’하라는 메신저(첨부 2)를 받음.3-2. 2017년 3월 해외설비 승인 일정 ‘확정’ 기재는 장성호 팀장 지시(메일, 첨부 3).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것.4-1. 오영찬 대리의 메신저가 회의록 수정을 직접 지시한 것인지, 일반적인 협의 요청인지는 본인이 판단할 수 없음. 첨부 원문 그대로 제출함.4-2. 장성호 팀장의 지시가 상부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알지 못함.* * *나는 문서를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2번이 3번보다 앞에 있었다.본인이 한 일.본인이 지
10월.장구미에게 인사 조치가 내려왔다.미국법인 기술지원 담당에서 해제.부산공장 품질기획 지원으로 전보.과장 직급은 유지.사실상 좌천이었다.사무실에서는 말이 많았다.“과장 달자마자.”“이사회 보고에 이름 올라갔다며.”“본인이 수정했다고 인정했대.”인정했대.사람들은 그 부분만 기억했다.* * *장구미의 새 자리는 우리 파트 옆이었다.품질기획 지원.엑셀 취합.회의록 정리.과장이 할 일이 아니었다.장구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했다.그리고 점심을 혼자 먹었다.2013년.내가 신입일 때.장구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밥을 먹었다.일 잘하는 선배.정치 잘하는 선배.지금은 식당 구석에서 혼자.서연이 배식대에서 나에게 작게 말했다.“저분. 요즘 매일 혼자 드셔.”“알아.”“반 남기셔.”나는 장구미 쪽을 봤다.반 남긴 식판.치사한 짓 한 날은 반 남기고.진 날은 다 먹는 거야.장구미는 둘 중 뭘까.* * *10월 셋째 주 금요일.퇴근 시간.장구미가 내 자리로 왔다.손에 작은 봉투.“기리야. 이거.”나는 봉투를 봤다.USB 하나.“뭡니까.”“네가 쓸 데 있을 거야.”장구미가 봉투를 책상 위에 놓았다.“2016년부터 올해까지. 팀장이 나한테 보낸 메일. 메신저 캡처. 2월 회의록 원본이랑 수정 지시 받은 메신저. 영찬이랑 주고받은 거.”나는 USB를 봤다.2월 수정 지시.누가 수정하라고 했는지.경위서에 쓰지 않은 이름.그게 이 안에 있었다.“선배님.”“응.”“이걸 왜 저한테 주십니까.”“나 다음 달에 나가.”장구미가 웃었다.“이직 확정됐어. 중견 부품사. 과장으로. 이사회 보고 건은 거기서 아직 몰라.”아직.“그래서 이건 너한테 주고 가려고. 너는 이 회사 오래 있을 거잖아. 쓸 데가 있을 거야.”* * *나는 USB를 들지 않았다.“선배님은요?”“나?”“이걸 제가 쓰면. 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장구미가 멈췄다.“나는 없지. 나갔으니까.”“그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