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응급구조사 한결은 죽음 직전 '영겁의 틈'을 겪고 돌아온다. 국가기관 '타나토스 관리국'은 그의 기억을 데이터화하려 하지만, 한결은 그곳이 인간의 행복을 수확하는 거대한 도살장임을 깨닫는다. 이제 시스템의 톱니바퀴였던 그가, 스스로 시스템의 바이러스가 되어 기억을 해방하기 위한 마지막 도박을 시작한다.
Ver mais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지는 좁은 골목은 이미 피비린내와 타는 고무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강한결은 구급차 뒷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는 아수라장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장갑을 고쳐 꼈다. 아스팔트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 사이로 반쯤 찌그러진 세단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그 안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누군가의 비명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들것을 꺼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짓이겨진 다리와 튀어 나온 장기를 마주하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죽음과 생의 경계, 그 무의미한 연장선 위에서 그는 이제 자신의 존재마저 희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피범벅이 된 환자의 가슴을 압박할 때마다 느껴지는 늑골의 으드득거리는 소리는 이제 환청이 되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옆에서 김 팀장이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한결의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환자의 텅 빈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한결! 정신 차려! 지금 이 사람 심박이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하지만 한결의 뇌리에 박힌 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이 처참한 광경을 시스템의 일부로 치부하며 수치화하는 관리국에 대한 혐오감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 또한 이 거대한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하게 느껴졌다. 죽음은 평온이 아니라, 타인의 데이터로 전락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구급차 안은 차가운 금속성 향과 소독약 냄새가 섞여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비프음은 이제 생명의 박동이 아니라 시간을 카운트다운하는 시계추처럼 느껴졌고, 한결은 환자의 창백한 손목을 쥐고 자신의 맥박과 비교해보았다. 환자는 죽어가고 있고, 자신은 그 죽음을 방관하며 억지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모순이 목을 죄어왔다. 구급대원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옮기는 운반책인가. 그는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낡은 칼날을 떠올렸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의 굴레를 끊어낼 유일한 열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뿐이라는 결론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끝내 숨을 거두고 병원 응급실에 인계된 후, 한결은 아무도 없는 구급차 뒤칸에 주저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비치는 네온사인은 빗물에 번져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냈고, 그는 자신의 목덜미 언저리에 자리 잡은 거친 흉터를 더듬었다. 남들에게는 끔찍한 자해의 흔적이라 여겨지는 이 흉터는, 사실 그가 이 세계의 부조리를 깨닫게 된 첫 번째 발자국이자 족쇄였다. 한결은 떨리는 손으로 칼날을 꺼내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그었다. 붉은 선이 배어 나오며 차가운 금속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자 오히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이제 모든 소음이 멈출 시간이었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세상의 색깔이 흑백으로 변해갈 때, 한결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관리국이 그토록 숨기려 했던 '영겁의 틈', 그곳은 시간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공허의 바다이자 모든 인간의 기억이 데이터로 분해되어 떠다니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지는 환영을 보았다. 죽음이 닥쳐오기 직전의 1분, 그 찰나의 시간이 마치 영겁처럼 길어지며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뇌세포 하나하나가 기계적인 데이터로 치환되는 듯한 끔찍한 감각만이 신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안식인가, 아니면 지옥의 시작인가.
시간은 더 이상 앞으로 흐르지 않았다. 한결은 자신이 거대한 톱니바퀴들 사이에 끼어 짓눌리는 듯한 환각을 보았고, 눈앞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기억을 잃어가는 장면이 슬라이드처럼 펼쳐졌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가장 소중했던 기억들이 조각나 관리국의 데이터 서버로 전송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왜 그들은 기억을 훔치는가. 왜 타인의 고통을 동기화하여 자신의 영생을 도모하는가. 의식은 틈의 심연으로 추락하며, 1분이라는 시간이 억겁의 세월로 변해가는 기묘한 중력의 왜곡을 겪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스템의 의지에 따라 강제로 조각나고 있었다.
환상 속에서 그는 다시 사고 현장에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의 눈 속에서 보았던 공포가 그대로 한결의 가슴을 찔렀다. 이번에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는 환자가 느꼈던 극심한 고통과 생에 대한 마지막 집착을 고스란히 자신의 뇌에 전송받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관리국이 말하는 '동기화 고통'이었다. 타인의 죽음을 대리 체험하며 그들의 기억을 데이터화하는 과정. 한결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뇌의 깊은 곳에서부터 타인의 인생이 영상처럼 쏟아져 들어왔고,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공포에 휩싸여 몸부림쳤다.
1분. 이 짧은 시간이 10년, 20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한결은 틈 속에서 늙어갔고, 다시 젊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희생자의 잔상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이 비어 있었고, 입은 관리국의 로고가 새겨진 투명한 마스크로 막혀 있었다. 그들은 손을 뻗어 한결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단순히 자살 시도의 부작용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철저한 연극이라는 사실을. 틈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자신은 그 주인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발을 들인 것이었다.
그는 틈 속을 헤엄치며 관리국장의 차가운 미소를 보았다. 최진혁, 그는 인간의 영혼을 데이터로 환산하여 영원한 통제를 꿈꾸는 괴물이었다. 한결은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틈의 벽면은 유리처럼 매끄러웠고, 그 안에는 자신이 겪었던 모든 사건이 데이터 로그로 기록되어 있었다. 흉터, 사고 현장의 피, 그리고 잊고 싶었던 기억들까지. 모든 것이 시스템의 계획 하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옥죄어왔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발밑에서는 늪처럼 끈적이는 기억의 파편들이 그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것은 서지우가 보낸 신호였다. 데이터의 파동을 타고 넘어온 희미한 해킹 코드. 그녀는 한결에게 지금 당장 이 틈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당신의 기억마저 완전히 소멸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결은 이를 악물고 빛을 향해 달려갔다. 기억의 파편들이 칼날이 되어 그의 살을 베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은 관리국이 원하는 엔딩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다시는 누구에게도 이 1분의 지옥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틈의 경계선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시금 고통이 뇌를 강타했다. 현실의 육체로 돌아오려는 반동이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리는 듯했다. 구급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김 팀장의 당황스러운 외침이 점점 선명해졌다. 한결은 눈을 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이전의 세상과는 달랐다. 차가운 구급차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것은 김 팀장의 걱정 어린 눈빛이 아니라, 관리국 요원들의 감시하는 눈길이었다. 그들은 한결이 틈에서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또 다른 틈의 시작이었다. 몸은 현실에 있었지만, 여전히 뇌는 시스템과 동기화되어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에 감겨진 붕대 아래, 칩이 삽입된 흉터가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틈에서 본 정보를 바탕으로 이 거대한 감옥을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를 다시 살려냈지만, 그것은 그가 겪어야 할 지옥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숨소리가 마치 시스템의 작동음처럼 들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응급구조사가 아니었다.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스스로 걸어 들어간, 가장 위험한 실험체였다.
구급차 내부의 공기는 얼어붙은 듯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가슴 위로 쏟아지는 인공적인 형광등 빛을 응시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박 측정기의 규칙적인 비프음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어딘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생체 리듬이 아닌, 누군가 정교하게 설계한 메트로놈의 박자처럼 들렸다. 한결은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현실의 것이었으나, 뇌 저편에서는 여전히 틈 속의 고통이 잔상처럼 번져 나갔다. 마치 방금 전까지 타인의 기억 속을 난도질하며 겪었던 공포가 아직도 뇌수를 갉아먹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김 팀장은 한결의 곁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강한결! 정신 차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구급차 안에서 자살 시도라니, 자네 미쳤나?" 김 팀장의 손이 한결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한결은 그 손길을 뿌리치며 상체를 일으켰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피 냄새를 억지로 삼키며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급차의 뒷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 틈새로 관리국 요원들의 검은 구두가 보였다. 그들은 한결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급차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평범한 응급구조사라면 절대로 겪지 않을 대우였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에 감겨진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붕대 아래, 흉터가 기괴하게 욱신거리며 맥박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라, 외부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안테나였다. 그는 틈 속에서 보았던, 관리국이 사람들의 행복을 데이터로 변환하던 그 끔찍한 광경을 떠올렸다.
"팀장님, 물러나세요. 이건... 당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확신이 서려 있었다. 김 팀장은 한결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한결의 눈동자 속에 비친 것은 구급차의 내벽이 아니라, 그 너머의 심연이었기 때문이었다. 요원 중 한 명이 구급차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차가운 밤공기가 구급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관리국 특유의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요원은 한결의 상태를 확인하는 대신, 손에 든 소형 단말기로 그의 뇌파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동기화하고 있었다. "대상자 강한결, 틈에서 무사 귀환 완료. 동기화 수치 안정적. 기억 소거 절차 즉시 착수함." 그들은 한결의 의사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한결은 요원을 노려보았다. 요원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인간적인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철저하게 프로그래밍된 기계의 눈이었다. 한결은 틈의 경계에서 배웠던 기억의 파편들을 뇌 속에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관리국이 데이터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그와 동기화된 시스템의 통로를 열어야만 했다. 바로 지금이 기회였다. 한결은 자신의 흉터에 손을 얹고, 뇌의 회로를 강제로 역류시켰다. 틈에서 보았던, 시스템의 핵심을 타격하는 정보가 뇌리에 박혔다. 그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 모든 고통을 쾌락처럼 받아들였다. 시스템이 그를 고문하기 위해 가했던 동기화 고통을 오히려 자신의 무기로 전환하려는 시도였다. 뇌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한결의 의식을 갉아먹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틈의 어둠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너희들이 원하는 게 이거지? 기억을 훔치고, 삶을 데이터로 만드는 것." 한결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주변의 요원들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여전히 단말기를 조작하며 한결의 뇌를 해킹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시야가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틈의 잔상이 현실과 겹쳐지며, 눈앞에 있는 요원들의 영혼이 데이터 조각으로 분해되는 환영이 보였다. 이것은 동기화의 부작용이자, 그가 틈에서 가져온 유일한 권능이었다. 한결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요원의 가슴팍을 쥐었다. 요원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한결의 손은 이미 요원의 뇌파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결의 손끝에서 푸른색 스파크가 튀며, 요원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풀려버렸다.
요원이 쓰러지자, 나머지 요원들이 일제히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한결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이미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나들며 시스템의 구조를 파악했다. 그들은 한결을 단순히 실험체로 생각하지만, 그는 시스템 자체를 집어삼키는 바이러스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결은 닫힌 구급차 문을 발로 차서 완전히 개방했다. 밖에는 관리국 소속의 검은 차량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었다. 마치 그가 탈출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완벽하게 통제된 지옥이었다. "나를 죽여서 데이터를 얻으려나 본데, 미안하지만 나는 죽는 법을 잊어버렸어." 한결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지만, 그것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닌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그는 관리국의 본부 방향을 응시했다. 최진혁 국장이 앉아 있을 그 차가운 집무실이 뇌리에 그려졌다. 모든 기억이 데이터로 박제되는 그곳, 영생이라는 명목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시스템의 심장부였다. 한결은 빗물에 섞인 피를 닦아내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무너진 요원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관리국은 한결의 머릿속에 수많은 틈을 심어놓았지만, 한결은 그 틈을 거꾸로 타고 들어가 시스템의 관리자에게 직접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의 기억을 동정하는 구조사가 아니었다. 기억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려는 복수자, 그 이상이었다. 비가 그치고 차가운 달빛이 한결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직도 내가 깨어났다고 생각하나?" 한결은 혼잣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손목에 난 흉터를 매만졌다. 흉터 속의 칩이 붉게 점멸하며, 그의 뇌파를 끊임없이 송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억누르는 시스템의 압박을 강제로 해체했다. 이제 그의 뇌는 타인의 기억을 공유하는 통로가 아니라, 시스템의 코드를 재작성하는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관리국은 그를 제어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에게 시스템의 열쇠를 쥐여준 꼴이었다. 한결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금속 칩을 꺼냈다. 지우가 틈의 가장자리에서 몰래 건네주었던, 시스템의 보안을 무력화할 수 있는 마스터 키였다. 이 작은 조각이 앞으로 그가 겪을 지옥의 유일한 출구가 될 것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칩을 흉터 부위에 밀착시켰다.
"이 1분의 지옥이, 너희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될 거야." 한결의 말과 함께 흉터 주변으로 푸른 빛이 퍼져나갔다. 뇌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다시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관리국의 감시망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변하며 경고 메시지를 쏟아냈다. 그들의 통제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결은 거대한 고층 빌딩 숲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그는 이제 시스템의 레이더를 피해, 가장 은밀한 곳으로 향해야 했다. 서지우와 만나기로 한 지하 데이터 센터, 그곳이야말로 시스템의 뿌리를 자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한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걸어가는 길마다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틈의 어둠이 그를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그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길거리의 전광판들이 일제히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화면이 뒤틀렸다. 한결이 걷는 방향으로 세상의 정보가 데이터화되어 흩어졌다. 사람들의 행복한 기억이 마치 눈송이처럼 공중에 떠다니다가 사라졌다. 관리국이 훔쳐간 것들이었다. 한결은 그 공허한 공간을 지나며, 자신이 반드시 찾아야 할 기억들을 되새겼다. 자신의 부모님, 이름조차 잊혀가는 사람들의 표정, 그리고 자신이 응급구조사로서 지키려 했던 생명들의 무게. 그 모든 것이 저 틈 어딘가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는 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틈을 찢고 현실로, 아니 그 너머의 진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고, 도시의 어둠은 점점 더 짙게 한결을 삼켰다.
이제 한결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의 목표뿐이었다. 자신을 실험체로 가둔 관리국을 무너뜨리고, 영겁의 1분 속에 갇힌 모든 이들을 기억의 감옥에서 해방하는 것.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죽음이었다. 육체는 이곳에 남아있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관리국장의 집무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칩을 더욱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이 디스토피아는 결코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한결은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시스템의 눈이 그를 추적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시스템의 바깥에 서 있었다. 이것은 복수극이자, 가장 완벽한 해방의 서사였다.
구급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김 팀장의 당황스러운 외침이 점점 선명해졌다. 한결은 눈을 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이전의 세상과는 달랐다. 차가운 구급차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것은 김 팀장의 걱정 어린 눈빛이 아니라, 관리국 요원들의 감시하는 눈길이었다. 그들은 한결이 틈에서 무사히 돌아왔음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또 다른 틈의 시작이었다. 몸은 현실에 있었지만, 여전히 뇌는 시스템과 동기화되어 있었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에 감겨진 붕대 아래, 칩이 삽입된 흉터가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틈에서 본 정보를 바탕으로 이 거대한 감옥을 무너뜨릴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를 다시 살려냈지만, 그것은 그가 겪어야 할 지옥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숨소리가 마치 시스템의 작동음처럼 들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응급구조사가 아니었다.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스스로 걸어 들어간, 가장 위험한 실험체였다.
첫눈은 12월 22일 밤에 왔다.자정이 조금 지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철웅이었다. 문자 대신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병실 창가,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 사이를 비스듬히 내리는 눈. 그리고 사진 앞쪽에 누군가의 손. 앙상한 손가락, 누런 피부. 새끼손가락 손톱 끝에 주황색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만큼 가는 초승달. 거의 다 자라 나가서, 손톱깎이로 한 번만 깎으면 없어질 만큼.사진 아래 한 줄이 따라왔다.남았다.나는 옥탑방 창문을 열었다. 눈이 빨랫줄 위에 얇게 쌓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소원 뭐래요. 답은 한참 뒤에 왔다. 안 알려 준대. 말하면 안 이루어진대.나는 그날 밤 무전을 켜지 않고 잤다. 1년 만에 처음이었다.그 뒤로 2주가 흘렀다. 그 2주 동안 세상은 빠르게 움직였다.연말 뉴스는 올해의 말을 뽑았다. 1위는 마지막 1분이었다. 보험사 네 곳이 실손 보험에 라스트 미닛 특약을 기본으로 끼워 넣었다. 새로 보험에 드는 사람은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패치가 집으로 배송되었다. 대형 병원 스무 곳이 호스피스 병동 전체에 도입했다. 요양 시설 단체 가입이 줄을 이었다. 1월 첫 주, 안식은 가입자 이백만 명 돌파를 발표했다. 11월에 삼십만이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였다.지하철 광고판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약국 계산대 옆 전단지에서 하얀 바탕의 노인의 손이 나를 따라왔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는데, 계산대 아르바이트생의 귀 뒤에 흰 동그라미가 붙어 있었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나는 그걸 보고 한참 서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봉투 필요하세요, 하고 두 번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나오다가 돌아서서 물었다. 그거, 왜 붙였어요? 아르바이트생은 귀 뒤를 만지며 웃었다. 보험 들었더니 그냥 왔어요. 떼기 귀찮아서요. 그리고 이거 있으면 좀 덜 무섭잖아요, 오토바이 탈 때. 나는 고개를 끄덕
나흘 뒤 밤, 철웅에게서 전화가 왔다."나와."그 한마디였다. 어디냐고 묻자 성진대 후문 앞이라고 했다. 포장마차. 목소리가 이미 조금 풀려 있었다.밤 열 시 반, 후문 건너편 골목 입구에 주황색 비닐 천막이 하나 서 있었다. 천막 안에 백열등 두 개, 플라스틱 탁자 세 개. 어묵 냄비에서 김이 올라 비닐 벽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손님은 철웅 하나였다. 그는 구석 탁자에 앉아 지팡이를 탁자 모서리에 기대 놓고, 소주병 두 개를 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비어 있었다."어머님은요?""자. 오늘 저녁에 한 번 숨이 이상해서 다들 뛰어왔는데, 돌아왔어. 의사가 오늘은 넘긴대." 그가 잔을 비웠다. "미경이가 옆에 있어. 나가서 바람 좀 쐬라고 쫓아냈어."나는 맞은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기우뚱했다. 포장마차 주인 할머니가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떠서 내 앞에 놓았다. 나는 술은 안 마신다고 했고, 할머니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어묵 꼬치 두 개를 국물 옆에 얹었다."지팡이 양반이 매일 여기서 한 병씩 해." 할머니가 철웅을 턱으로 가리켰다. "오늘은 두 병째야. 아가씨가 좀 말려."철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냄비 앞으로 돌아가 어묵을 꼬치에 꿰기 시작했다."이만 명." 철웅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 말이 머리에서 안 나가."나는 국물을 불었다. 나흘 전 가족실에서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이만 명이 서로 옆에 서서, 서로 모르고."아무도 모르잖아. 그 사람들이 거기 있는 거." 그가 소주를 반쯤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가족들은 편히 가셨다고 생각하고, 안식은 이만 명 돌파라고 광고하고. 근데 그 사람들은 그 골목에 서 있어. 아무도 모르는 데에. 아무도 안 찾는 데에.""……네.""나 그런 사람들 옮긴 적 있어.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주치의가 상담실 문을 열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어제 입은 스웨터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원탁 위에는 식은 커피 두 잔과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벽의 뇌 단면 그림 옆에 누군가 모니터 기록을 출력한 긴 종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초록 선을 검은 잉크로 옮긴 띠가 벽을 가로질러 문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밤새 계셨어요?""집에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잠이 안 와서요."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 합니다."나는 앉았다. 그는 수첩을 펼쳤다. 어제 적은 시각들이 빽빽했다."첫째, 어제 그 새 파형이요. 밤 열한 시 이십 분쯤 마지막으로 나오고 멈췄습니다. 오늘 새벽엔 없었어요." 그는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시각을 늘어놓고 보니까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네 시 오십이 분부터 여덟 시까지, 그러니까 정하윤 씨가 병실에 계시던 동안에 제일 촘촘하게 나왔어요. 가시는 뒤로는 점점 드물어지고요.""제가 있어서요?""모릅니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루치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런데 두 번째가 더 큽니다."그는 벽에 붙은 긴 종이 앞으로 갔다."어젯밤에 그 새 파형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확실히 하려고, 1년 치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이 모니터에 분석 기능이 있어요. 파형을 쪼개서 겹쳐 있는 성분을 따로 보여 주는 기능입니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안 켰어요. 선 모양이 1년 동안 똑같았으니까."그가 종이의 왼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선이 가늘었다."이게 작년 11월, 강한결 씨가 처음 오셨을 때입니다. 선 하나예요. 깨끗한 한 줄." 그는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선이 조금 굵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면 여전
다음 주 목요일 아침, 나는 은평 시장에서 귤을 샀다.트럭 것 말고 시장 것으로.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과일 가게 확성기는 여전히 귤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바구니를 샀다. 두 개가 아니라 스무 개쯤 되는 귤이 검은 봉지 안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생선 가게 앞을 지나다 멈췄다. 파란 천막 아래에서 문순자 할머니가 얼음을 깨고 있었다. 두꺼운 고무장갑, 목까지 올린 털 조끼, 머리에 두른 수건. 쇠꼬챙이로 얼음 덩어리를 내리칠 때마다 작은 조각이 튀어 할머니의 앞치마에 붙었다. 며느리가 옆에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랬잖아요.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할머니가 먼저 나를 보았다. 쇠꼬챙이를 든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귤 거기서 샀어? 잘했네. 거기가 싸.""할머니, 얼음 깨셔도 돼요?""이거 안 깨면 내가 죽어." 할머니가 얼음을 한 번 더 내리쳤다. "병원에서 누워 있으니까 자꾸 그 하얀 게 생각나. 여기서 이거 깨고 있으면 안 나. 손이 시리고, 비린내 나고, 저 여편네가 잔소리하고. 그래야 여기가 내 데인 줄 알지."며느리가 한숨을 쉬었고, 할머니는 웃었다. 이 몇 개 빠진 입이었다."오늘은 어디 가?""아빠 보러요. 요양원."할머니가 쇠꼬챙이를 내려놓고 나를 오래 보았다."잘 생각했네. 가서 손 한번 잡아 드려. 늙으면 그게 제일 좋아."솔밭요양원 2층 거실에 들어섰을 때, 창가 끝 의자 옆에 엄마가 서 있었다.1년 사이에 엄마는 작아져 있었다. 머리가 반쯤 하얘졌고, 등이 조금 굽었다. 회색 누빔 점퍼를 입고,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온병을 창턱에 내려놓고 걸어와,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아프지 않게."살 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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