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람들 사이에 선 도현과 눈이 마주칠 뻔하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지사에서는 아무도 모르던데요.""이번 파견 때문에 공개하지 못하고 있어요. 윤 대리님은 제 사정을 알고 있지만 다른 분들 앞에서는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고요."준호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소율이 거짓말로 자신을 밀어낸다고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장면들을 하나씩 맞춰 보는 표정이었다."남편분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됩니까?""그건 임무가 끝나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남편의 신분도 이번 일과 연결돼 있거든요."소율은 다시 한 번 선을 분명히 그었다."누구인지 밝히지 못해도 제 대답은 같아요. 저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다른 마음을 받아 드릴 생각은 없어요."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늦었네요.""누가 먼저였는지의 문제는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제가 이미 선택한 사람이라서요."그 대답에 준호가 짧게 웃었다. "하, 하하…"마음이 편해서 나온 웃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련을 붙여 둘 여지는 없다는 걸 받아들인 얼굴이었다."확실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애매하게 굴지 않으셔서요.""강 대표님께서 솔직하게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래야죠."준호는 방파제 아래로 밀려오는 파도를 잠깐 봤다. 고백하기 전까지 준비했던 말들이 더 있었지만, 이제는 꺼낼 이유가 사라졌다."협동조합 일에는 제 감정을 섞지 않겠습니다. 해담지사하고 다시 거래하기로 한 것도 차장님 한 사람만 보고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직원들이 움직이는 걸 봤고, 생산자들도 변화를 확인했으니까요.""네. 저도 오늘 이야기를 업무에 섞지 않을게요. 강 대표님을 피하거나 불편하게 만들 생각도 없어요.""앞으로는 동료로 돕겠습니다. 남편분이 누군지는... 나중에 알려 주실 수 있으면 꼬옥… 알려 주세요."소율의 눈에 웃음이 조금 돌아왔다."그때는 강 대표님도 많이 놀라실 거예요.""그 정도입니까?""네. 아마 오늘보다 더요."준호도 따
그다음 날 일요일 오후 7시 15분, 해담 지역축제장 해변 임시 판매장."한 차장님, 잠깐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마지막 판매 상자를 접던 강준호가 한소율 앞에 섰다. 평소처럼 시원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상자 끈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조금 떨어진 천막 아래에서 차도현의 손도 멈췄다.축제 둘째 날 판매가 끝난 참이었다. 해담지사는 낮 동안 본 부스를 운영하고, 저녁에는 해변 쪽 임시 판매장으로 일부 물량을 옮겼다. 직원들은 남은 상품을 세고 생산자들은 빈 상자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전날 온담 생중계에 잡힌 도현의 얼굴은 원본과 확인된 공유 게시물에서 내려간 상태였다. 다만 누가 영상을 저장했는지까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해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축제 둘째 날까지 현장을 멈출 수는 없어 휴대전화 알림을 계속 확인하며 일했다.소율은 준호의 굳은 표정을 살폈다."업무 이야기인가요?""개인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준호가 방파제 쪽 쉼터를 가리켰다. 판매장에서 걸어서 1분도 걸리지 않고, 직원들 눈에도 보이는 곳이었다."네. 저쪽에서 말씀하세요."소율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준호는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고 그녀를 따라갔다.도현도 손에 든 생수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두 사람을 따라가려는 듯 발끝이 방파제 쪽으로 돌아갔다.윤해나가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았다."앗! 그… 어… 차 과장님은 여기 계시는 게… 하, 하하.""비켜… 주십시오.""시, 싫어요. 한 차장님이 단둘이 이야기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저희가 따라가면 더 이상해져요."도현은 해나의 어깨 너머를 봤다. 소율과 준호는 사람 없는 쉼터 앞에서 마주 섰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파도 소리와 철거 작업 소리 때문에 대화까지 들리지는 않았다."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막으시는 겁니까?""대충은요. 그래서 더 막는 거예요."해나가 양팔을 벌렸다. 체격 차이만 보면 도현이 옆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순간 끝날 방어였다. 그
같은 날 오후 3시 10분, 축제장 휴식 천막 뒤.소율은 사람들 눈에 닿지 않는 천막 안쪽으로 도현을 데려갔다. 바깥에서는 해나가 손님을 안내하는 소리와 조리대에서 기름 튀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잠깐 숙이세요. 머리 벗겨 드릴게요."도현이 고개를 낮추자 소율이 탈 머리를 들어 올렸다. 안에 갇혔던 더운 공기가 확 빠져나왔다. 그의 앞머리가 이마에 젖어 붙어 있었다."어휴... 벌써 몇 바퀴를 도셨어요. 눈은 안 불편해요?""시야는 괜찮아. 다리가 생각보다 짧아서 걷는 게 불편하지."그는 소율이 건넨 물을 한참 마셨다. 소율은 깨끗한 수건을 펼쳐 그의 이마에 대 줬다. 탈을 벗은 남편이 평소보다 숨을 조금 빠르게 고르자, 아까 해나에게 한 바퀴만 더 돌게 하겠다고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이제 다른 직원이랑 교대해요. 오전부터 계속 계셨잖아요.""조금 쉬고. 메인 통로는 지금 사람들이 몰릴 때라,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올게.""차 과장님, 제가 현장 책임자예요. 교대도 제가 정할 수 있어요."도현이 물병을 내리고 그녀를 봤다. 소율은 팔짱을 낀 채 버텼지만, 수건을 든 손은 계속 그의 이마를 닦고 있었다."그럼 한 차장님 지시대로 쉬지. 대신 보상은 있어야겠는데.""방금 쉬라고 했더니 무슨 보상이요?""오늘 온종일 한 번도 못 했잖아."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소율은 저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았다. 부스에서 웃음만 마주쳐도 다른 직원 시선이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천막 하나 뒤에 남편이 가까이 서 있었다."여긴 축제장이에요.""알아. 그래서 사람 없을 때 말하는 거야."소율은 밖을 확인하고 남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탈의 둥근 몸통이 둘 사이에 끼어 팔을 뻗어도 그의 셔츠까지 닿지 않았다."...푸흡. 여기서 어떻게 해요?""방금까지는 가까웠는데."도현이 한 걸음 다가오자 문어 배가 소율의 앞에 먼저 닿았다. 소율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잠깐, 잠깐만요. 다리 밟겠어요!""당신이 이걸 입혔잖아."
같은 날 오후 1시 15분, 해담지사 판매 부스.백세라가 온담 직원과 함께 부스로 들어왔다. 직원은 휴대전화 거치대를 들고 있었고, 세라는 판매대를 한 바퀴 둘러봤다."아침에 올린 영상 보고 온담 계정에도 문의가 들어왔어요. 여기서 잠깐 생중계해도 될까요? 상품하고 조리 과정만 비추겠습니다.""생산자분들께 먼저 여쭤볼게요. 화면에 나오실 분들 의견도 들어야 하고요."소율이 묻자 준호는 조리대를 정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생산자도 상품 설명은 직접 하겠다며 앞치마를 바로 맸다."우리 얼굴 나와도 돼요. 이 물건 만든 사람이 누군지 보여 줘야죠."온담 직원은 화면에 잡힐 사람과 범위를 확인하고 카메라를 고정했다. 부스 뒤쪽 생산자와 상품이 잘 보이는 각도였다.방송이 시작되자 준호가 갓 구운 문어전을 들어 보였다."어, 지금 찍는 거예요? 잠깐. 제가 팬부터 닦고...""이미 시작했어요, 대표님!"해나가 웃자 준호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하하! 좋습니다. 지금 부치는 건 오늘 들어온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겉은 이렇게 익고, 안은... 아, 잠깐만요. 먹어 보시면 훨씬 빨리 알아요."직접 만든 사람의 말에 화면 밖에서도 웃음이 났다. 세라는 휴대전화에 올라오는 질문을 골라 생산자에게 넘겼다. 맛과 보관 방법을 물으면 생산자가 답하고, 살 수 있는 곳을 물으면 해나가 부스 위치를 가리켰다.도현은 탈을 쓴 채 화면 바깥에 서 있었다. 온담 직원이 문어도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그는 한 손으로 시식대를, 다른 손으로 상품을 가리켰다. 화면 속 문어가 장바구니를 들고 판매대 앞을 맴돌자 댓글에 웃음 표시가 쏟아졌다.세라가 소율에게 낮게 말했다."사람들이 문어 보러 들어왔다가 물건을 보고 있어요. 잘 쓰시네요, 운영 담당을.""본인이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 지나가는 길을 아침부터 바꿔 놨거든요.""탈 안에서요?""네. 손짓만 해도 윤 대리님이 알아듣더라고요."해나가 바로 끼어들었다."처,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어요! 세
같은 날 오전 10시 20분, 해담지사 판매 부스.준호가 조리대 앞에서 문어전을 뒤집었다.치익.반죽이 가장자리부터 노릇해지자 앞에 선 아이가 코를 킁킁거렸다."맛있는 냄새 나요!""그렇지? 방금 구운 거라 뜨거워. 이건 엄마랑 같이 먹어."준호는 작은 접시에 한 조각을 올려 엄마에게 건넸다. 옆에서는 생산자들이 직접 가져온 채소와 해산물의 보관 방식, 조리법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손님이 묶음 상품을 고르면 직원이 그 자리에서 계산했다.해나는 판매대 끝에 붙인 수량표에 표시를 더하다가 소율을 불렀다."한 차장님! 오전 물량은 절반 넘겼어요. 조금 전까지 부스가 어디 있는지 묻는 분만 있었는데, 지금은 문어 따라왔다는 분이 줄이에요.""차 과장님이 계속 입구를 지키고 계시죠? 쉬는 시간인데…"소율이 시계를 확인했다. 도현은 더위에 약했다. 바람이 드나드는 입구라도 탈 안은 금세 더워질 터였다."제가 바꾸러 갈게요.""아, 제가 먼저 다녀올게요. 차장님은 손님 응대하셔야죠."해나가 물병을 집어 드는 사이, 문어가 아이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도현은 부스 안까지 관광객을 데려온 뒤 계산대 쪽을 손짓했다. 그리고 소율이 건넨 물병을 받아 천막 뒤로 향했다."쉬고 다시 나오세요. 오전 11시까지는 거기 계시지 마시고요."소율의 말에 문어가 팔을 들어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근처 직원이 손님에게 봉투를 건네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한 차장님은 차 과장님 더위 타는 것도 아세요?""아침에 탈 안에 들어가면 누구든 더워지죠.""저는 차장님이 방금 시계 보기 전부터 물을 찾으시길래요."소율의 손이 물병을 꺼낸 가방 위에서 멈췄다. 어제 술자리에서 남편의 웃는 얼굴을 붙잡고 늘어졌던 기억이 슬쩍 올라왔다. 오늘은 반대로 자신이 물 챙기는 모습까지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시간을 정해 뒀어요. 교대가 늦어지면 탈 쓴 사람이 힘드니까요.""아, 그래서였구나. 역시 차장님은 준비가 다 돼 있네요!"직원은 다시 손님 쪽으로 몸을 돌렸
그 주 토요일 오전 8시 10분, 해담 지역축제장 해담지사 판매 부스."네? 오늘 못 온다고요? 지금요?"윤해나가 휴대전화에서 귀를 떼고 천막 안을 돌아봤다. 바닥에는 문어 다리가 잔뜩 달린 옷이 놓여 있었고, 머리만큼 큰 탈이 상자 위에 얹혀 있었다."마스코트 담당 아르바이트생이 열이 난대요. 아침에 병원부터 가야 한답니다.""아… 그럼 쉬어야죠. 무리해서 나오라고 할 수는 없어요."한소율은 판매대 앞을 둘러봤다. 계산 담당은 이미 포장기를 확인 중이었고, 강준호는 시식용 조리대를 손보느라 손이 모자랐다. 해나는 생산자들과 관광객을 연결해야 했다.남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그녀의 눈이 차도현에게 향하자, 해나도 곧장 그를 봤다. 근처 직원들까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왜 다들 저를 보십니까?"도현이 들고 있던 출고표를 내려놓았다."저는 오늘 물량하고 판매 동선을 맡았습니다.""그래서 더 잘하시겠네요. 손님이 어느 길로 들어오면 이 부스까지 걸어오는지 직접 보셨잖아요."소율이 구석 자리에서 메인 통로까지 이어진 지도를 가리켰다. 축제 조직위원회가 부스를 뒤쪽으로 옮긴 뒤, 직원들이 아침 내내 안내 화살표를 붙인 곳이었다."오늘 가장 급한 운영 업무가 사람을 이쪽으로 데려오는 일이에요, 차 과장님."해나가 기다렸다는 듯 문어 머리를 들어 올렸다."한 차장님 지시입니다. 자, 머리부터 써 보세요!"도현은 해나가 내민 문어 탈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둥근 머리 위로 튀어나온 두 눈이 태연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해담지사에 내려오며 현장에서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다만 그 일에 문어가 되는 것까지 포함될 줄은 몰랐다."… 이건 제 체격에 맞습니까?""어제 확인했어요. 팔다리 길이가 차 과장님이랑 제일 비슷해요.""어제 확인하셨다고요?""만약을 대비해서요."해나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도현이 아내를 보자 소율은 태연하게 일정을 확인하는 척했다. 그런데 펜을 쥔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바람에, 누가 봐도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