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뉴럴링크 본사 대표실.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새벽의 푸른 여명이 도시를 천천히 물들이고 있었다.그러나 집무실 안은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았다.최재혁은 책상 앞에 앉아 결재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평소라면 몇 분이면 끝났을 업무였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펜을 든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눈앞의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대신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행복나무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아이들과 함께 웃던 이주연.회의실에서 설계 도면을 설명하던 차분한 목소리.그리고...그날 밤.아파트 앞에서 미끄러지던 그녀를 붙잡았던 순간.자신의 품 안으로 스며들던 따뜻한 체온.차가운 겨울바람을 머금은 머리카락에서 은은하게 스쳐 지나가던 향기까지.재혁은 눈을 감았다."..."그 짧은 순간이 왜 이렇게 선명한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황시아는 창가에 머리를 살짝 기대고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 황태석은 앞좌석에서 이창수 회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아 역시 조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헤어진 한 남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이진성. 오늘 처음 만난 남자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이 두 번째였다. 물론 진성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시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기억은 자연스럽게 2년 전으로 흘러갔다. 2년 전. 태산그룹 창립 기념행사. 황시아는 아버지 황태석을 따라 행사장을 찾았었다. 정·재계 인사들과 태산그룹 관계자들까지 참석한 큰 행사였다. 시아는 그런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웃으며 악수했지만 그 웃음 뒤에서는 서로의 직함과 배경을 먼저 살폈다. 아버지 곁에서 몇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시아는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태산그룹 이창수 회장 가족이었다. 이창수 회장. 아내 고미혜. 그리고 장남 이진성. 시아도 그들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무렵 태산가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얼핏 들은 적도 있었다. 이창수 회장의 딸이 갑작스럽게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날 행사장의 이창수와 고미혜는 완벽한 재벌가 부부처럼 보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우연히 사람들이 없는 복도에서 마주친 고미혜의 얼굴은 달랐다. 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고미혜는 창가에 혼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 앞에서 웃던 얼굴은 사라져 있었
전직 장관의 딸. 그 정도 집안이라면 단순한 선 자리가 아니었다. 태산그룹과도 충분히 어울리는 혼처였다. 이창수 회장이 직접 나섰다는 것도 이제 이해가 됐다. 유하는 천천히 진성의 품에서 떨어졌다. “미술 한다고 했던가….” 진성이 무심하게 말했다. “미대를 나왔고 지금은 미술 학원을 한대.” “그래요?” “응.” “그게 다야.” 진성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나 그 여자한테 아무 관심 없어.” 유하는 환하게 웃었다.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진성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 피곤했겠다.” “이제 그 이야기 그만해요.” 진성도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웃었다. 하지만 유하의 머릿속은 이미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창수 회장이 진성을 결혼시키려고 마음먹었다. 상대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 전직 장관의 딸이었다. 진성은 아버지에게 맞설 힘을 조금씩 잃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겠네.’ 유하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진성이 자신과 헤어질 마음이 없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보다 상황이 더 강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결국 진성이 황시아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아야 했다. 하지만 붙잡을 수 없다면. 그 전에 자신의 몫을 확실하게 만들어야 했다. 진성이 돌아간 뒤 유하는 늦은 아침을 먹으며 태블릿을 켰다. 유하는 자신이 이 남자에게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가져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진성은 선 자리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여자를 안심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불안해진 사람은 유하였다. 그리고 그 불안은 곧 그녀의 욕심을 더욱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검색창에 이름 하나를 입력했다. 황시아. 그리고 그 아래에 다시 몇 글자를 덧붙였다. 황태
어색한 침묵. 진성은 찻잔을 들었다. 시아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차를 마셨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성이었다. “미안합니다.” 시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오늘 자리 말입니다.” 진성은 숨길 생각이 없었다. “저는 자의로 나온 게 아닙니다.” 시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알아요.” 진성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압니까?” “네.” 시아가 작게 웃었다. “들어오실 때부터 얼굴에 쓰여 있었는데요.” 진성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정도였습니까?” “조금요.” 시아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천천히 만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 “저도 오늘 당장 누구하고 결혼할 사람을 결정하러 나온 건 아니니까요.” 진성이 처음으로 그녀를 조금 길게 바라보았다. 시아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좋은 분들이라고 하셔서 그냥 식사하러 나온 거예요.”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맛있는 것도 사주신다고 했고요.” 진성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그게 이유입니까?” “중요한 이유죠.” 시아도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밥 한번 같이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고요.” “그건 황시아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죠.” 시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저도 이진성 씨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으니까요.” 진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그런 말을 남자 앞에서 바로 합니까?” “왜요?” 시아의 맑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아직 서로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진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아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알면 되죠.” “싫으면 여기까지고.” 너무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진성의 마음을
서울의 한 고급 한정식집. 검은 세단이 조용히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먼저 내린 이창수 회장의 뒤를 고미혜 여사가 따랐고, 마지막으로 진성이 무거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진성은 고개를 들어 한정식집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전통 한옥을 현대적으로 꾸민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마당 한쪽에는 소나무와 작은 연못이 어우러져 있었고, 돌길을 따라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진성에게는 그 어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 자리. 정확히 말하면 선택권조차 없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다. 진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때 앞서 걷던 이창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진성아.” “네.” “표정 관리해라.” 진성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오늘은 네가 싫든 좋든 어른들끼리 약속해서 만든 자리다.” 이창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상대에게 예의 없이 행동하지 마라.”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고미혜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진성아.” 진성이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냥 편하게 밥 먹는다고 생각해.” “누가 오늘 당장 결혼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니.” 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아버지가 그냥 밥이나 먹으라고 절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을 것 같습니까?” 고미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창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고 들어가자.” 진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얌전히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세 사람이 별실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황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회장!” “황 장관, 오래
아버지 이창수 회장이 내민 선택지는 거절할 수 없는 단단한 족쇄였다. 명문가 규수와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저지른 공금 횡령과 사생활의 추태는 순식간에 수면 위로 드러나 모든 것을 앗아갈 터였다 그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창수 회장은 진성이 손댄 회사 자금을 자신의 돈으로 메워 주기로 했다. 적어도 횡령 문제로 감옥에 가는 것만큼은 막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진성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의 인생인데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정략결혼을 치르기 위해서는 유하를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떠나버릴까 봐, 혹은 이 모든 비밀을 폭로해 버릴까 봐 기묘한 불안감이 진성의 목을 조여왔다. 결국 진성은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유하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현관문이 열리자 유하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진성 씨.” 그녀는 진성의 얼굴을 살피더니 곧 표정을 바꾸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얼굴이 이렇게 안 좋아?” 진성은 대답하지 않은 채 거실로 들어갔다. 유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코트를 받아 걸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앉아요. 차라도 가져올게.” “유하야.” 그녀가 돌아보았다. 진성은 소파에 앉지도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성이 갑자기 물었다. “너 나 사랑하니?” 유하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멈췄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남자를 상대해 온 유하는 이런 순간에 절대로 당황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다가가 진성의 앞에 섰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그냥 대답해.” 진성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나 사랑해?” 유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걸 꼭 말
친구들의 질문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진짜 중요한 질문.” 한 친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주연이 웃으며 물었다. “뭔데요?” 그가 재혁을 한번 가리킨 뒤 말했다. “제수씨는 이 재미없는 인간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맞아!” “이건 꼭 들어야 돼.” “재혁이가 공부밖에 모르데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어요?” 재혁이 인상을 썼다. “너희는 꼭 표현을 그렇게 해야 하냐?” 하지만 주연은 웃지 못했다. 질문이 생각보다 깊게 가슴에 들어왔다. 재혁 씨 어디가 좋아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돈이 필요해서 자신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결혼식 날에도 그를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얼굴을 가리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 자신의 상처를 과장하지 않고 견뎌온 강인함.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되돌려주려는 자존심. 그리고 자신을 밀어내면서도 늘 지켜주었던 사람. 주연은 천천히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잠시 멀어진 것 같았다. 주연은 조금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하나둘 조용해졌다. “잘 몰랐어요.” 재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주연은 작게 웃었다. “조금 차갑고.” 친구들이 동시에 웃었다. “그건 맞지.” “완전 맞아.” 주연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다시 재혁을 바라보았다. “말도 별로 없고.” “그것도 맞습니다.” 친구들이 또 웃었다. 재혁은 어이없다는 듯 주연을 바라보았다. “오늘 제 흉을 보러 나오신 겁니까?” 주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