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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꼬미 요괴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의 색채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오직 지강산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연한 블루 반팔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청량하면서도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평범한 출근룩이었음에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 탄탄한 몸매와 훤칠한 키 덕분에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

소유하가 슬리퍼를 가져와 지강산의 앞에 놓으며 살갑게 굴었다.

“오빠, 신발 갈아 신어.”

하지만 지강산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허서령만 빤히 쳐다봤다. 소유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상표권 침해 사건 때문에 친구한테 법률 사무소를 소개받았는데 거기서 얘를 보낼 줄은 몰랐어.”

허서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분노 섞인 눈빛으로 소유하를 째려봤다.

‘내가 올 줄 몰랐긴 개뿔.’

지강산이 소유하를 돌아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상표권을 따질 회사가 어디 있어?”

당황한 소유하가 멋쩍게 웃었다.

“어... 그게...”

“그럼 이만 가볼게.”

허서령은 가슴을 조여오는 답답함에 단 1초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강산이 신발장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바람에 신발을 갈아 신을 수가 없었다.

“그래. 가봐.”

소유하가 다시 오만한 태도로 비아냥거렸다.

“업무 능력도 별로인 것 같고 전문성도 떨어져서 이런 사건을 너한테 맡기기엔 좀 불안해.”

‘웃겨서 원. 회사도 없으면서 상표권은 무슨.’

당하고만 있을 허서령이 아니었다.

“내 전문성은 법과 사실을 존중하는 데서 나와. 회사도 없는 ‘고객’의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 모욕을 견뎌주는 건 내 업무가 아니야. 오늘 수임료는 초 단위로 계산해서 청구할 거야. 이따가 청구서 보낼 테니까 확인하는 대로 입금해.”

그러고는 지강산과 소유하 사이를 거칠게 비집고 들어가 팔꿈치로 지강산의 가슴팍을 힘껏 밀쳐냈다.

“좀 비켜주시죠.”

허서령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지강산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소유하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허서령, 지금 이게 무슨 태도야?”

허서령은 대꾸도 하지 않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문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이대로 가기엔 억울함이 가시지 않아 다시 돌아서서 소유하에게 말했다.

“아, 아까 그 진씨네 영양탕 있잖아. 그 집 정통 맛집도 아니고 12시간이나 끓이지도 않아. 다음엔 서쪽에 있는 양씨네 영양탕으로 가 봐. 그 집 아주 제대로니까.”

소유하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하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허서령을 노려보았다.

“너!”

그때 지강산의 입가에 남들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소유하가 폭발하기 전에 허서령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얼굴이 잿빛이 된 소유하를 보니 가슴 속 응어리가 그나마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올 때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습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늘은 맑았었다.

‘어떡하지?’

허서령이 가방 안을 뒤져봤으나 우산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검은 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었고 미친 듯이 불어대는 강풍에 단지 내 가로수들이 마구 휘청거렸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오늘 아침부터 태풍 경보가 여러 차례 발령되어 있었다. 업무에 치여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울심시가 바다와 가까워 태풍이 자주 불었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으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이곳에 완전히 발이 묶일 판이었다.

서류 가방이 다행히 방수 재질이었다. 몸이야 젖어도 괜찮았다.

허서령이 결심한 듯 휴대폰을 가방에 넣은 뒤 이를 악물고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폭풍우와 태풍의 위력을 너무 얕잡아 보고 말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가려주는 게 사라진 바람에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강한 바람 때문에 똑바로 걷기는커녕 몸이 자꾸만 옆으로 쏠렸다.

장대비가 온몸을 때려 아팠고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이 흠뻑 젖었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이 가냘픈 데다가 다리에 힘까지 풀린 허서령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잔디밭 위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비바람이 너무 거셌고 추위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간힘을 써서 다시 일어났지만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또다시 넘어졌다.

그녀는 한 손으로 서류 가방을 꽉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 허서령의 허리를 껴안았다.

상대가 확 잡아당기자 그녀의 몸이 붕 뜨면서 등이 따뜻하고 단단한 가슴팍에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남자의 품 같았다.

남자가 등 뒤에서 허서령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발이 공중에 뜬 채 힘없는 인형처럼 남자에게 안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이 거센 바람 속에서도 놀랄 만큼 침착하고 힘이 있었다. 체격이 워낙 건장하고 크다 보니 이 정도 바람 따위는 그를 흔들지 못했다.

다시 1층 로비 안으로 들어오자 허서령은 그제야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허서령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한 손에 서류 가방을 잡고 다른 손으로 얼굴과 눈에 묻은 빗물을 닦으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태풍에 날아갈 뻔했어요. 진짜 고마워요.”

“평소 밥도 안 먹고 다녀? 왜 이렇게 야위었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그 속에 차가움과 분노도 섞여 있었다.

순간 움찔한 허서령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익숙한 목소리와 낯익은 얼굴...

‘지강산?’

넋이 나간 나머지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지강산 역시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젖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손을 들어 젖은 얼굴을 닦더니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허서령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밖에 바람이 불고 비도 오고 난리인데 뛰쳐나가면 어떡해?”

허서령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풍이 한 시간 뒤에 상륙한대요. 지금 안 가면 더 못 갈 것 같아서...”

지강산이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다.

“지금 부는 바람도 널 충분히 날려버릴 것 같은데.”

“저기 혹시 차로 우리 집까지만 태워다줄 수 있어요?”

허서령의 뻔뻔한 질문에 지강산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다음엔?”

“네?”

‘무슨 그다음?’

허서령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널 데려다주고 나면 태풍이 상륙할 거고 거리 전체가 물바다가 될 텐데. 내가 너희 집에 갇히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생각 없는 소리를 했는지 깨닫고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지강산의 눈빛이 점점 뜨거워졌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문밖의 빗줄기를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가자. 올라가서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

지강산과 소유하의 동거 생활을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에 허서령은 마음이 괴로워졌다. 그저 그들과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차라리 여기서 추위에 떨며 옷이 마르길 기다릴지언정 그런 모습을 보고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소유하의 거짓말을 까발렸는데 소유하가 허서령을 다시 들여보내 줄 리도 만무했다.

“왜 이렇게 고집불통이야?”

지강산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흠칫 놀란 허서령이 고개를 들어 지강산을 쳐다봤다. 그제야 말을 하는 내내 지강산의 시선이 문밖으로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허서령이 그녀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류 가방으로 가슴을 가렸다. 심박 수가 미친 듯이 치솟았고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

얇은 흰색 셔츠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금 전 셔츠가 물에 흠뻑 젖어 몸에 달라붙은 바람에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속옷의 색상과 모양까지 훤히 보였다.

지강산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한숨을 가볍게 내뱉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차갑게 말했다.

“올라가자.”

허서령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처지를 생각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태풍이 상륙하기도 전인데 벌써 이 정도라면 잠시 이곳을 떠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서 버티다 병이라도 나면 그 고생은 온전히 그녀 몫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소유하를 한 번 더 참는 수밖에. 날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계단에서 하룻밤 보내면 돼.’

지강산이 엘리베이터를 누르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허서령이 서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서둘러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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