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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꼬미 요괴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

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

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

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

“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

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린 그때 허서령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안 가?”

허서령이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다가갔다.

‘다시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날 기다렸던 거야?’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구석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지강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지강산의 키가 훤칠했고 짧게 자른 머리가 아주 깔끔했으며 뒤통수마저 참 예뻤다. 그리고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은 데다가 몸매까지 다부져서 옷을 입으면 날씬하고 맵시가 있어 보였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예전의 허서령은 지강산이 요리를 할 때마다 몰래 백허그를 하는 걸 좋아했다. 그의 넓은 등에 얼굴을 파묻으면 편안하고 마음이 놓였다.

그럴 때면 지강산이 웃으며 묻곤 했다.

“이렇게 매달려 있으면 요리를 어떻게 해?”

허서령이 애교를 부렸다.

“손은 안 잡았잖아요. 강산 씨는 요리해요. 난 이렇게 안고 있을 테니까.”

“네 몸이 얼마나 말랑거리는지 잊었어? 자꾸 이러면 나 속이 근질거려서 밥이 아니라 널 먹고 싶어져.”

“요리나 해요. 엉뚱한 소리 그만하고.”

지강산이 농담으로 끝내는 법이 없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허서령을 번쩍 들어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힌 다음 ‘처벌’을 내리곤 했다. 만족할 만큼 그녀를 탐한 뒤에야 기진맥진한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다시 식사 준비를 했다.

예전에는 이토록 달콤했었는데 추억하는 지금은 쓰디쓰기만 했다.

허서령이 더는 지강산의 뒷모습을 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후에도 두 사람은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나란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지강산의 차가 아파트 단지에 세워져 있었는데 허서령이 그의 차 옆을 그냥 지나가려 했다.

“타.”

뒤에서 들려온 지강산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허서령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지강산이 운전석 문을 잡고 서서 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서령을 쳐다보는 얼굴이 무표정했고 눈빛이 서늘했으며 목소리에도 그 어떤 온기가 섞여 있지 않았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고마워요.”

허서령은 여전히 그가 두려웠다.

“타라고.”

그의 말투가 조금 더 세졌다.

“정말 괜찮아요. 난...”

“세 번 말하게 하지 마.”

허서령이 멍하니 선 채 의아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무슨 뜻이지?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지강산이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안전벨트를 한 뒤 허서령이 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허서령도 잘 알고 있었다. 지강산이 그녀를 아무리 미워하고 혐오한대도 그가 좋은 남자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강산의 성품과 교양이라면 새벽 두 시가 넘은 심야에 여자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더 망설이지 않고 뒷좌석 쪽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당겼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힘껏 당겨보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지강산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팔을 뻗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웠다.

허서령은 열린 조수석 문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체념한 듯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비좁은 차 안에 두 사람밖에 없었다. 차 안을 감도는 은은한 라벤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허서령이 좋아하던 향이자 지강산도 즐겨 쓰던 향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허서령이 안절부절못했다. 지강산의 체취가 그녀를 휘감은 듯한 기분에 가슴이 요동쳤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차 안의 불이 꺼지고 지강산이 시동을 걸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그가 내비게이션을 클릭하며 짧게 말했다.

“주소.”

“아...”

허서령이 손을 뻗어 화면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지강산이 화면을 힐끗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가는 내내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잔인할 만큼 더디게 흘렀다. 허서령에게 1분 1초가 고문과도 같았다.

차마 지강산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창밖의 야경만 내다봤다. 심장이 계속 쿵쾅거렸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공기마저 점점 희박해지는 것 같았다.

5년 만에 다시 앉게 된 그의 조수석이 이토록 가시방석 같을 줄은 미처 몰랐다.

예전에 지강산이 수업을 마친 허서령을 데리러 갈 때마다 늘 요구르트 같은 간식거리를 사 가곤 했다.

깔끔한 성격의 지강산이었지만 허서령이 차 안을 어질러 놓는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차 안에서 간식을 먹으며 지강산에게 먹여주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허서령이 주는 거라면 독약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

40분 후 차가 울심시 외곽인 낡은 3층짜리 아파트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의 가로등이 무척 어두웠고 골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다 왔어요. 고마워요.”

허서령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지강산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가 차에서 내려 차 앞을 돌아 허서령에게 다가가더니 낡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살아?”

순간 움찔한 허서령은 대답하지 않고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누런 가로등 불빛이 지강산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비췄다. 안색이 말이 아니게 굳어졌고 약간의 분노도 섞여 있었다.

가슴에 돌덩이가 막힌 듯 가슴이 답답해진 그가 무거운 숨을 내쉰 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서령, 이게 네가 말하던 행복한 삶이었어?”

허서령은 갑자기 마음이 저렸다. 지강산이 뒤이어 어떤 말을 쏟아낼지 짐작한 듯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상할까 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강산이 빠르게 뒤따라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다시 끌어당겼다.

지강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허서령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마음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버려져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기분이었다.

“허서령, 너 이거밖에 안 되는 여자였어?”

지강산의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했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그때 날 배신하고 그 남자를 따라갔던 거야? 그 남자는 어디에 있어? 널 실컷 가지고 놀다가 버리기라도 한 거야?”

“이거 놔요.”

허서령이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목구멍이 칼날에 베인 것처럼 아려와 말을 잇기 힘들었다.

사실 그녀는 무척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과거 명문대 금융학과를 졸업하고 제산시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훌륭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던 허서령이었으나 지금은 공익 변호사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다. 게다가 거액의 빚까지 짊어진 채 외곽의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고단했다.

예전에 헤어질 때 내뱉었던 변명들이 이제 고스란히 되돌아와 허서령을 힘들게 했다. 자업자득이라 울 자격조차 없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면서 밀려온 고통에 온몸이 다 떨렸다.

“제발 나 좀 놔줘요.”

지강산이 대놓고 비웃었다.

“그 남자 그래도 재벌 2세는 된다고 들었는데 그 남자한테서 아무런 이득도 못 챙긴 거야?”

허서령이 손목을 빼내려 애를 썼지만 지강산이 꽉 잡고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손목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눈을 감자 눈물이 창백한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두컴컴한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수척한 얼굴을 비추었다.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강산은 허서령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턱을 잡고 강제로 들어 올린 다음 또박또박 말했다.

“5년이야. 이 예쁜 얼굴이랑 몸매로 마음만 먹으면 돈 많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나서 팔자를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 꼴이 됐어?”

허서령이 흐릿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산 씨, 날 모욕하면 화가 조금이라도 풀려요?”

지강산이 코웃음을 쳤다. 희미한 불빛이 그의 차가운 얼굴에 드리워졌고 짧은 머리카락의 그림자가 붉게 충혈된 눈을 가렸다.

그가 허서령의 옷깃을 잡아챘다. 분노가 치솟아 짙은 증오심을 담아 말했다.

“나랑 자면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차도 줄게.”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려 허서령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허서령의 흰 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옷이 벌어지면서 하얀 어깨와 글래머한 가슴이 절반 드러났고 하얀 속옷이 살짝 보였다.

지강산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주먹을 꽉 쥐고 침을 꿀꺽 삼켰다.

허서령은 더 이상 저항할 기력조차 없었다. 얼굴이 눈물범벅이 돼버렸고 영혼이라도 잃은 듯 공허한 눈빛으로 지강산을 쳐다봤다.

“필요 없어요.”

지강산이 허서령을 놓아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한심한 놈.”

이건 자신에게 하는 욕이었다.

그 말이 허서령의 귀에 유독 날카롭게 박혔다.

지강산의 얼굴이 섬뜩할 정도로 험악해졌다.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탄 뒤 차 문을 세게 닫고 가장 빠른 속도로 휙 가버렸다.

허름한 골목이 다시 깊은 정적에 잠겼고 어두운 밤에 쓸쓸함이 더해졌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허서령이 휘청거렸다. 눈물 젖은 눈으로 멀어지는 지강산의 차를 바라보면서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잡았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지강산을 만난 이후 정말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이제 어디로 숨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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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tuellstes Kapitel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00화

    허서령은 순간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골목길은 텅 빈 채 고요하고 아무도 없었다.순간 차오르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손목을 비틀더니 전기충격기를 빼앗아 덤불 속으로 던져버렸다.허서령은 겁에 질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살려주세요!”진성호가 빠르게 따라붙더니 그녀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아악!”두피가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더는 앞으로 달릴 수 없었다.진성호는 덩치가 크진 않았지만 남녀 간 힘 차이는 명확했다.그의 앞에서 허서령은 여전히 약자였다.진성호는 한 손으로 그녀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끌며 덤불 사이 좁은 길로 끌고 갔다.그의 집 방향이었다.“읍읍...”허서령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두피가 너무 아파 눈물이 핑 돌았고, 공포는 수많은 독화살처럼 그녀 심장을 찔러댔다.몸부림치는 사이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 순간 그녀는 휴대폰이 아직 외투 주머니 안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휴대폰을 꺼내 뒤로 숨긴 뒤 익숙한 동작으로 지문 잠금을 해제했다.아마 채팅 화면이 그대로 떠 있을 터였다.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 아래 ‘말하기’ 버튼을 길게 눌렀다.그리고 있는 힘껏 진성호의 손을 물어버렸다.“젠장!”고통을 느낀 진성호는 그녀의 입을 놓았다.그 틈을 타 허서령은 소리 높이 외쳤다.“진성호! 왜 날 네 집으로 끌고 가는 건데! 살려줘...”진성호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허서령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뺨은 화끈거렸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으며 휴대폰도 멀리 튕겨 나갔다.진성호는 즉시 그녀 휴대폰을 주워 확인했다.잠금 화면 상태인 걸 보고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허서령이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힘이 너무 세서 턱과 볼이 부서질 듯 아팠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9화

    “직접 만드는 거예요?”“그건 진짜 무리야. 포장된 거 사와야 해.”허서령은 걸어가며 음성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입가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지강산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음성 메시지로 들어도, 직접 들어도 여전히 좋았다.그녀는 일부러 서운한 척 늘어진 말투로 답했다.“아쉽네요...”그러자 지강산이 바로 물었다.“삐졌어?”허서령은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괜히 자기 한마디에 또 레시피를 찾아보며 복잡한 팥죽을 만들려고 애쓸까 봐 서둘러 말했다.“안 삐졌어요. 기대 중이에요. 내일 동지라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랑 드론쇼 한다더라고요.”“같이 보러 갈까?”“내일 봐서요. 야근할지도 모르잖아요.”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집에 가서 이야기하길 기다릴 수조차 없는 것처럼 지강산과의 음성 메시지는 끊임없이 이어졌다.밤안개가 내려앉은 단지 산책로에는 사람 그림자도 드물었고 가로등 불빛도 희미했다.“허서령!”갑자기 남자의 익숙하면서도 분노에 찬 고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허서령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움켜쥔 채 뒤를 돌아봤다.진성호였다.그는 얼굴이 잔뜩 굳은 채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분노에 휩싸인 모습이었다.허서령은 즉시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전기충격기를 움켜쥐었다.“무슨 일이야?”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네 엄마 대체 왜 그러는데?”진성호는 폭발하듯 소리쳤다.“네 동생 결혼식이 다음 달 1일, 새해 첫날이잖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내 돈 필요 없다 그러고, 네가 나랑 결혼하기 싫어하면 강요 안 하겠다고 하고, 나더러 너 괴롭히지 말라더라.”허서령 역시 궁금했다.지강산이 도대체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한 건지.하지만 그 뒤로 어머니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그녀의 삶은 오랜만에 평온하고 편안해졌다.“법적으로 성인은 결혼의 자유가 있어. 내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 못 해. 그러니까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8화

    지강산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 손엔 간식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허서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방문을 두 손으로 붙잡고 또박또박 말했다.“저 혼자 지하철 타고 출근할 거예요. 안 데려다줘도 돼요. 알겠어요?”지강산은 태연하게 웃었다.“친구끼리 왜 그래?. 부담 갖지 마. 차비 안 받을게.”“차비 문제가 아니에요.”허서령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시간이랑 체력 문제라고요.”“난 시간도 체력도 남아돌아.”“강산 씨...”지강산은 여유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문 안 놓으면 오늘 밤 나랑 자고 싶은 거로 알 거야.”갑자기 날아든 노골적인 농담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손을 뗐다. 얼굴은 또다시 새빨개졌다.“잘 자.”지강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허서령은 그의 방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머릿속엔 방금 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친구끼리잖아.”‘세상 어느 평범한 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아침 차려주고, 출근도 데려다주고.’성인이면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감정이 있었다.허서령의 입가엔 문득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그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행운이었다.이제 더는 괜한 감정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평범한 관계라고 해도, 그게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몰랐다.‘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다음 날, 허서령은 평소보다 30분 더 자고 일어나, 바라던 대로 지강산이 만들어준 달걀 요리와 야채죽을 먹었다.더는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끼어 있을 필요도 없었고, 서서 갈 필요도, 급하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그저 지강산의 따뜻하고 편안한 차 안에 앉아 그가 준비해준 작은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회사에 도착하면 됐다.그녀의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고, 야근하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지강산은 그녀를 데리러 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집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7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허서령은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는 간식 세 개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가리켰다.“쌀과자, 깨강정, 전남친 토스트.”지강산의 코가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는 입을 다물고 웃음을 참으며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들었어.”“우리 지역 특산물인데 혹시 안 먹어봤을까 봐 가져온 거예요.”“토스트를 많이 먹어봤어도 전남친 토스트는 처음이네. 무슨 맛이야?”“고소하고 부드러워요. 강산 씨 너무 단 거 안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단 과자는 안 가져왔어요.”지강산은 입술을 가볍게 깨문 채 손에 든 과자를 몇 번이나 다시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일부러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허서령은 순간 마음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급히 해명하듯 말했다.“제가 큰 상품 못 뽑아서 회사에서 위로차 선물 준 건데, 대부분 엄청나게 달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이 세 개만 골랐어요. 깨강정이 조금 달긴 한데 나머진 괜찮아요. 강산 씨 입맛에 맞을 것 같아요.”“내가 너무 단 거 안 좋아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네?”지강산은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허서령은 그 시선에 가슴 깊은 곳이 살짝 떨렸다.두 사람 사이로 묘한 온기가 흐르기 시작하며 눈빛이 오가고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결국 지강산이 먼저 침묵을 깼다.“고마워.”그는 간식 세 개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씻고 자.”허서령은 TV를 가리켰다.“농구 아직 안 끝났잖아요.”그제야 지강산은 TV를 아직 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리모컨을 집어 TV를 끄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목소리도 따라서 부드러워졌다.“내일 아침 뭐 먹고 싶어?”“네?”허서령은 멍해졌다.“죽? 아니면 국수?”지강산은 면 요리를 좋아했지만 허서령은 밥 종류를 더 좋아했다.허서령은 가방을 들고 일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6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새벽 무렵, 회사 단체 버스가 구름타워 밖에 멈춰 섰다.허서령은 마지막 두 동료와 인사를 나눈 뒤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이번 워크숍은 울심시 근교 민박으로 떠나 자연을 즐기고 현지 음식을 맛보는 일정이었다.집 앞에 도착한 허서령은 지문으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밀었다.거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조금 놀랐다.‘이 시간이라면 강산 씨는 벌써 자고 있어야 정상인데...’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예상대로 지강산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그는 편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이 시간까지 농구 경기를 본다고?허서령은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들어가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지강산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허서령은 화면 오른쪽 위의 선명한 세 글자를 발견했다.[재방송.]“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농구 보고 있었어요?”허서령은 가방을 소파 위에 올리고 간식 봉투를 테이블에 둔 뒤 그의 옆에 앉았다.지강산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대신 갑자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예상치 못한 접근에 허서령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고는 두 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댔다.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빨라졌다.쿵, 쿵쿵, 쿵쿵쿵...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라 그녀는 지강산의 짧은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었고, 뜨거운 숨결까지 느껴졌다.호흡이 흐트러지고 몸이 긴장된 그녀는 침을 삼키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예요?”그녀는 지강산이 키스하려는 줄 알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지강산은 입 맞추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멈춘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냄새를 맡더니 다시 몸을 세워 앉았다.“좋아. 술 냄새 안 나.”지강산은 담담하게 한마디 던지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허서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5화

    차에 올라탄 지강산은 봉투에서 생수를 꺼낸 뒤 남은 봉투를 허서령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물 사니까 같이 주더라.”허서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봤다.안에는 우유 한 병과 달걀 샌드위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그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지강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마워요.”허서령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감정이 가슴속을 어지럽게 휘젓는 걸 느꼈다.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지강산은 물병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출발했다.아침밥을 품에 꼭 안은 허서령의 마음속에 씁쓸한 감정이 천천히 번졌다.지강산은 원래부터 정말 좋은 남자였다.언젠가 그와 결혼하는 여자는 분명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로펌 앞에 도착하자 지강산은 차를 세우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가 일하는 곳이 조금 궁금한 듯했다.허서령은 아침거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차 앞을 돌아 로펌 입구에 선 그녀는 몸을 돌려 차 안의 지강산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지강산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순간 멈칫했다.“좋은 아침, 서령 씨.”그때 허서령의 뒤쪽에서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돌아보니 현리아가 서류를 안고 하이힐을 신은 채 안에서 급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리아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허서령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현리아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다가 차 안의 지강산을 보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남자친구 엄청 잘생겼네. 오늘 저녁 모임에 남친도 데려와.”“그 사람은...”허서령이 해명할 틈도 없이 현리아는 이미 옆에 대기 중이던 호출 차량에 타버렸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민망하게 지강산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반면 지강산은 태연하기만 했다.허서령은 용기를 내어 차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두 사람... 서로 몰라요?”지강산은 미간을 좁혔다.“우리가 알아야 해?”‘아니라고?’전에 분명 그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4화

    허서령은 순간 멍해졌다.‘강산 씨가 지금 날 걱정하고 있는 거야?’진짜든 아니든 지강산이 안달복달하며 애태우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오해했어요, 강산 씨. 회사 근처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이거 엄마한테 맞은 상처예요. 엄마가 날 바닥에 제압하고 막 때렸거든요.”그 말에 지강산이 멈칫하더니 복부를 감싸 쥐고 있던 허서령의 손을 떼어냈다.“아랫배도 다쳤어?”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난 분명 위쪽을 누르고 있는데.’아마도 그녀가 웅크리고 있어서 시각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3화

    경찰은 일반적으로 가정 내 다툼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모녀 사이의 다툼이었고 허서령이 입은 상처라곤 피부의 멍 자국뿐이었으니 더욱 그랬다.경찰이 훈방 조치한 뒤 오정화를 돌려보내려 했다.그때 허서령이 직업이 변호사임을 밝히며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경찰을 직무유기로 고소하겠다고 했다.결국 오정화는 단순 훈방에서 구류 10일과 벌금 10만 원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경찰서에 갇힌 오정화가 분노로 날뛰었다. 그녀가 낳은 딸이 이렇게까지 매정할 줄은 몰랐다.‘고작 몇 대 때린 걸 가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1화

    “알고 있었어요.”허서령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알면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어야지.”지강산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층 다정하게 들려왔다.허서령은 코끝이 찡해졌다. 문득 지강산과 함께 살기로 한 게 잘못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정상적인 남자라면 그를 배신한 전 여자친구에게 이렇게까지 다정하게 대할 리가 없었다.‘지강산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왜 이런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는 건데? 혹시 나한테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나? 나를 홀려서 마음을 빼앗은 뒤 비참하게 차버리려고? 그때 배신당한 복수를 하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7화

    “안 가요.”허서령은 고개를 저었다.이건 단순한 거주 문제도, 가격 문제도 아니었다.이곳에 사는 건 진성호의 어머니를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사실 반년 전부터 이 동네로 이사 오고 싶었지만, 비싼 월세와 부족한 매물 때문에 미뤄왔던 계획이었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게다가 지강산 집 맞은편에는 소유하가 살고 있었다.계속 마주친다면 그것도 큰 스트레스였다.지강산은 휴대폰을 꺼내 채팅 기록을 열어 보여줬다.“너 변호사잖아. 문자나 송금 기록도 법적 효력 있는 거 알지?”허서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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