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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Penulis: 꼬미 요괴
병원 안.

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

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

“미친놈.”

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예물로 줄게. 우리 두 집안끼리 얽힌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걸로 다 끝내는 거야.”

허서령은 진성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자 진성호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다시 허서령의 팔을 잡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네 엄마도 동의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콧대를 세울 거야?”

허서령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우리 엄마랑 결혼하든가.”

화가 난 진성호가 입을 파르르 떨었다. 허서령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널 눈여겨본 걸 너의 복인 줄 알아야지.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으니까 거절도 적당히 해. 그때 가서 감당 못 하겠다고 울지 말고.”

더러운 손이 뒷머리에 닿은 순간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허서령이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은 법치 사회야.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 수도 있어.”

“흥. 법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 마.”

진성호가 콧방귀를 뀌며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진 빚을 딸인 네가 몸으로 갚는 게 뭐가 어때서? 지극히 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허서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무죄야.”

반드시 재심을 청구하여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배상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고 이미 지불한 병원비도 전부 돌려받을 것이다. 5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기에 법원에도 배상을 청구하리라 마음먹었다.

진성호가 대놓고 비웃었다.

“22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아직도 무죄 타령이야?”

허서령이 진성호의 손을 힘껏 밀쳐냈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진성호의 분노 섞인 고함이 울려 퍼졌다.

“허서령, 넌 내 거야. 절대 도망 못 가.”

귀가 오염된 것 같은 불쾌감에 허서령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법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

일주일 뒤 새벽 한 시.

깊은 잠에 빠졌던 허서령이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아 화면을 밀어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서령아, 나 결혼 안 해. 엉엉... 백시욱이랑 헤어질 거야...”

휴대폰 너머로 술에 취한 심인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순식간에 깬 허서령이 벌떡 일어나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야? 술 마셨어?”

결혼식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이었다. 혼인신고를 마쳤고 청첩장도 다 돌렸다. 웨딩 촬영, 식장 예약까지 다 끝낸 마당에 파혼이라니.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허서령이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야?”

“밤의 온도.”

“거기서 기다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지금 바로 갈게.”

허서령이 서둘러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그녀가 숨 가쁘게 달려간 술집의 룸 안에 백시욱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만취한 상태로 2m 정도 거리를 둔 채 소파 양 끝에 주저앉아 있었다.

“서령아...”

허서령을 본 심인혜가 울면서 손을 내밀었다. 술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아직도 울먹거리고 있었다.

“나 이 사람이랑 끝낼 거야. 제발 나 좀 데려가 줘. 다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허서령이 가방을 내려놓고 심인혜의 옆에 앉아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너무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일단 술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

그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시욱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지강산, 왔어?”

그 소리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고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차갑고 고귀한 아우라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두 눈이 허서령에게 머물러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주 그에게 강제로 입맞춤 당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강산의 입술 상처는 아물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가슴 속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백시욱이 휘청거리며 지강산에게 기대자 지강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인혜가 나랑 헤어지겠대.”

그가 심인혜를 가리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이 여자 진짜 양심도 없지 않냐?”

하지만 지강산의 시선은 심인혜가 아니라 허서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허서령은 마음이 씁쓸해졌다.

“맞아. 양심이 없어.”

지강산의 목소리가 지극히 낮고 무거웠으며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웠다.

허서령이 켕기는 게 있는 듯 지강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심인혜를 부축해 일으키며 그녀와 심인혜의 가방을 챙겼다.

“인혜야, 집에 가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심인혜를 부축한 채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술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인혜야, 너의 엄마 집으로 데려다줄게.”

허서령이 심인혜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엄마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소리에 심인혜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엄마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속상해하실 거란 말이야.”

“그럼 우리 집으로 가.”

“아니야. 네가 쉬는 데 방해돼. 그냥 신혼집으로 데려다줘.”

“하지만 시욱 씨도 그리로 갈 텐데. 밤에 또 싸우면 어쩌려고.”

심인혜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분노를 쏟아냈다.

“그 사람은 아직 젖도 못 뗀 애야. 엄마 집으로 돌아가라, 신혼집엔 절대 못 들어와.”

허서령이 두 사람이 싸운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산 백시욱과 달리 심인혜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공주처럼 자랐기에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그런 그녀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걸 절대 동의할 리가 없었다.

결국 허서령은 심인혜를 그들의 신혼집에 데려다주었다. 아파트가 편안하면서도 아늑했다.

집으로 들어가 심인혜를 침대에 눕히고 신발과 양말을 벗겨주었다. 그다음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정성스레 화장을 지워준 뒤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머리맡에 숙취해소제와 내일 아침에 신을 슬리퍼까지 챙겨놓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허서령이 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지강산이 인사불성이 된 백시욱을 부축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강산은 백시욱을 소파에 던지고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허서령이 황급히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긴장감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던 지강산의 경고가 떠올랐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서령은 한참을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밖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지강산이 이미 떠나고 없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백시욱을 보고 있자니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자들은 참 무심하단 말이야.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이불이라도 좀 덮어주고 가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허서령이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 백시욱에게 덮어주었다.

시간이 어느덧 새벽 두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 허서령은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데 문이 닫힌 순간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등이 현관문에 부딪혔다. 허둥지둥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문이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고 숨도 가빠왔으며 긴장감에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지강산이 현관문 앞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로 허서령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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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32화

    안도한 김우빈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지하 1층 버튼을 누른 뒤 한 걸음 물러나 지은영과 나란히 섰다.숨결은 무거웠고 얼굴에는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지은영은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깨야 할지 고민했다.조금 전에는 너무 놀라 과민하게 반응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에야 진정됐고, 생각해 보니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김우빈의 여자 친구였고, 연인 사이에 스킨십이 오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렇게 화를 내며 ‘왜 키스하냐’고 따져서는 안 됐다.상처가 될 만한 말이었다.하지만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키스라니. 속도가 로켓처럼 빨랐다. 지은영에게는 받아들이기 벅찼다.‘스물아홉 살 남자라면 연애 경험도 많겠지? 여자 친구도 여럿 사귀었을 테고. 나도 그동안 주변에 있던 수많은 여자와 같다고 생각하는 걸까?’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지은영은 입을 다물었다.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 주차장에 멈추자 지은영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김우빈도 뒤따랐다.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차로 향했다.김우빈이 차 키를 꺼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지은영은 어두운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았다.김우빈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밤이 깊어 도시 곳곳이 네온사인으로 빛났다. 널찍한 길은 차량으로 꽉 막혔고 길게 늘어선 붉은 미등 아래로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했다.어둑한 차 안에는 답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은영은 창밖 거리를 바라보며 가방끈을 꼭 쥐었다.“미안해.”먼저 입을 연 건 김우빈이었다.지은영의 심장이 작게 떨렸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는 조금 전의 키스가 다시 떠올랐다. 낯선 촉촉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뺨이 뜨거워지고 심장도 이상하게 빨라졌다.김우빈이 말을 이었다.“나도 모르게 그랬어. 네 기분은 생각하지 못했어. 내 잘못이야.”지은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가 싫다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김우빈의 목소리가 낮게 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31화

    지은영의 마음속에 전에 없던 감정이 조금씩 피어올랐다.무슨 감정인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자신도 알 수 없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김우빈은 손을 깨끗이 닦다가 지은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손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따스한 정이 어렸다.무엇 때문이었을까...어느새 깊어진 저녁 어둠 때문인지, 방 안의 조명이 지나치게 포근해서인지, 아니면 둘 사이를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너무 짙어진 탓인지...김우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고 뜨거워졌고,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은영아.”김우빈은 잠긴 목소리로 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네?”지은영은 눈을 피하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김우빈의 얼굴을 바라보며 빠져들었다.김우빈이 고개를 숙였다. 지은영은 피하지 않았다.끝내 참지 못한 김우빈은 지은영의 뒤통수를 감싸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지은영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피가 멎은 듯 몸이 뻣뻣해지고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지은영은 코앞으로 다가와 흐릿하게 보이는 김우빈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온몸의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오직 입술에서 느껴지는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만이 짜릿하게 머리와 심장을 파고들었다.낯설면서도 정신을 빼앗길 만큼 황홀한 감각이었다. 너무도 이상했다.김우빈의 혀가 지은영의 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우빈이 자신에게 키스하고 있었다.이성을 되찾은 지은영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김우빈은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지은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심장에 모터라도 달린 듯 정신없이 뛰었다. 당황하고 긴장한 지은영이 소리쳤다.“갑자기 왜 키스해요?”그 말을 내뱉자마자 지은영은 몸을 돌려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거실의 장식장 쪽으로 달려가 가방을 집어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은영아!”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30화

    지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풀었다.“집에 재료는 뭐가 있어요?”“다 있어.”“그런데 저 요리 못하는데. 오빠는 할 줄 알아요?”“응.”“둘째 오빠랑 비교하면 누가 더 잘해요?”“나.”지은영은 ‘풋’ 하고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어쩌면 그렇게 태연하게 단 두 글자로 자신이 더 잘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허풍을 떨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걸까?’“외국에서 유학하던 몇 년 동안 공부하고 남는 시간엔 고향 음식을 만들어 봤어. 거긴 정말 먹을 만한 게 별로 없거든. 굶어 죽기 싫으면 직접 만들어야 했지.”지은영은 그의 능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차에서 내린 지은영은 김우빈을 따라 호화로운 지하 주차장을 나왔다.정말 주차장마저 화려했다. 전시장보다 고급 승용차가 많았고 환하게 빛나는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천장은 반짝이는 별하늘 같았다.주차장만 봐도 김우빈의 취향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저택 3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눈길 닿는 곳마다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넓고 밝은 공간은 간결하면서도 세련됐고, 촌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적인 디자인에 화려함을 절제한 인테리어였다.거실에 선 지은영은 넋을 잃었다.머릿속에는 단 한마디만 떠올랐다.‘세상에!’“은영아, 가방 줘.”김우빈이 손을 내밀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은영은 얼른 배낭을 벗어 건넸다.김우빈은 배낭을 선반에 올려놓고 정장 재킷을 벗었다. 하얀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고 팔을 걷어 올리더니 개방형 주방으로 향했다.“내가 밥할게.”지은영도 혼자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어 그를 따라가 일을 거들었다.커다란 냉장고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제가 도와줄 일 없어요?”손을 씻은 지은영이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김우빈은 채소를 씻고 파, 생강, 마늘을 손질하는 일을 맡겼다.자신은 고기를 썰고 밥을 짓고 음식을 볶느라 분주했다.두 사람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9화

    “닷새 내내 바빠서 닷새 내내 잊은 거야? 이모티콘 하나 보내는 데 몇 초면 되는데. 시간이 없었던 거야, 아니면 마음이 없었던 거야?”김우빈이 물었다.지은영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김우빈은 부드럽지만 어딘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저 하루에 조금이라도 나한테 시간을 내줬으면 해. 난 네 남자 친구잖아.”“네.”지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김우빈이 차분하게 물었다.“원준이가 너한테 고백했어?”깜짝 놀란 지은영이 그를 올려다봤다.“그건 어떻게 알았어요?”“짐작했어.”지은영은 놀라웠다.‘우빈 오빠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슨 능력이 있기에 무엇이든 해결하고 모든 일을 아는 것처럼 보일까?’그 앞에 서면 자신이 속마음 하나 숨기지 못하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애송이가 된 기분이었다.지은영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러자 김우빈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조용히 물었다.“마음이 흔들렸는데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하기 미안한 거야?”“아니에요.”지은영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흔들리지 않았어요.”“그럼 우리 매일 만나자.”김우빈이 말했다.“매일요?”“응. 마음을 키우려면 자주 만나야 해. 온라인으로 연락만 해선 한계가 있으니까.”“우빈 오빠, 사실 우리 둘 사이는...”김우빈이 즉시 말을 끊었다.“우선 부르는 것부터 바꾸자. 그냥 우빈 씨라고 불러.”“우빈 씨라고요?”“응.”“하지만 제가 훨씬 어리잖아요.”“나이 차이는 나지만 우린 동등한 사이야. 오히려 너를 더 존중해야 하는 입장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름으로 불러도 돼.”지은영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사실 송원준 때문이 아니라 김우빈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부담감 때문에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김우빈의 말에 다시 한번 마음이 따뜻해져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 준다는 느낌도 들었다.김우빈은 정말 좋은 남자 친구였다.아직 서로를 잘 모르고 특별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지만 굳이 지금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8화

    “고마워요. 우빈 오빠.”황급히 호칭을 고친 지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김우빈은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혜원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늘 찾아뵌 건 광고 협찬에 관해 상의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구체적으로는...”“그건 진 이사와 이야기하시면 됩니다.”김우빈이 말을 끊었다.“진 이사님이요?”김우빈은 휴대전화를 꺼내 업무용 메신저로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내려놓았다.“이런 업무는 내가 직접 맡지 않아요. 진 이사가 와서 이야기할 겁니다.”혜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지은영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마침 물을 마시던 지은영은 잔을 쏟을 뻔하다 겨우 물잔을 바로 잡고 혜원을 바라봤다.혜원이 눈짓했다.지은영도 뜻은 알았다. 하지만 김우빈이 협찬 업무는 진 이사 소관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옆구리를 찌른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김우빈은 예리한 눈으로 혜원의 행동을 보더니 지은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은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혜원에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작은 행동까지 모두 김우빈에게 보였다.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때 진 이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했다.김우빈은 혜원을 데리고 가 사무실에서 협찬 업무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혜원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진 이사를 따라갔다. 지은영도 따라 일어서려는 순간 김우빈이 불렀다.“은영아, 넌 남아.”지은영은 긴장한 채 멈춰 서서 나가는 혜원을 보았다가 다시 김우빈을 바라봤다.“우빈 오빠, 무슨 할 말 있어요?”“업무 협상하러 가는 건데 네가 따라가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어?”김우빈이 물었다.지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김우빈이 손짓하며 자리를 권했다.“다시 앉아. 너랑 할 얘기가 있어.”지은영은 얌전히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넓은 대표실에 김우빈과 단둘이 남자 지은영은 더 긴장됐다. 몸이 굳고 압박감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7화

    안내 데스크 직원도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김우빈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였다.혜원 옆을 지나려는 순간, 혜원이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김우빈은 혜원을 그대로 지나쳤다. 시선은 오직 지은영에게 고정돼 있었다.지은영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우빈을 바라봤다. 차갑고 고고하면서도 침착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마치 김우빈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상황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지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은영아.”가까이 온 김우빈이 먼저 인사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숨결에는 묘한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혜원 언니랑 광고 협찬 때문에 왔어요.”지은영이 멋쩍게 말했다.“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그냥 업무대로 처리하면 돼요. 저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는...”은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혜원이 급하게 끼어들어 지은영의 앞을 가로막고 김우빈에게 공손히 인사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지은영이가 말한 혜원이 접니다. 그냥 혜원이라고 불러 주세요.”김우빈은 혜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지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내 사무실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네, 대표님!”혜원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나 두 사람이 먼저 가도록 길을 비켰다.지은영은 아까 벗어 놓았던 배낭을 손에 들고 있었다. 촬영 장비와 개인 물건이 많이 들어 있어 제법 무거웠다.옆에서 걷던 김우빈이 배낭끈에 손을 뻗었다.“내가 들게.”“괜찮아요.”지은영은 황급히 거절했다. 하지만 김우빈의 따뜻한 손이 이미 지은영의 손등에 닿으며 배낭끈을 잡았다.손바닥이 스치는 순간 지은영은 괜히 긴장하며 깜짝 놀라 손을 빼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가방을 내주었다.그러자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부하 직원 여러 명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5화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화

    지강산이 몸부림치는 허서령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 벽에 고정시킨 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키스를 퍼부었다.참아왔던 눈물이 허서령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허서령이 그의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윽.”날카로운 통증에 지강산이 입술을 뗐다.허서령이 기억하는 지강산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이토록 사납게 구는 건 분명 그녀를 뼛속 깊이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허서령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지강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2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그러자 소유하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화

    지강산과 함께한 4년은 허서령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별 후 허서령은 5년을 울며 보냈다.매일같이 눈물을 쏟은 건 아니었지만 지강산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속에 장마라도 진 것처럼 축축하고 눅눅한 비가 내렸고 이내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들곤 했다.살면서 지강산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백시욱이 주선한 술자리.떠들썩한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허서령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에 닿았다.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해일이라도 밀려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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