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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꼬미 요괴
병원 안.

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

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

“미친놈.”

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예물로 줄게. 우리 두 집안끼리 얽힌 지긋지긋한 악연도 이걸로 다 끝내는 거야.”

허서령은 진성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기자 진성호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다시 허서령의 팔을 잡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네 엄마도 동의했는데 대체 언제까지 콧대를 세울 거야?”

허서령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우리 엄마랑 결혼하든가.”

화가 난 진성호가 입을 파르르 떨었다. 허서령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듯 눈빛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그녀의 뒷머리를 잡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널 눈여겨본 걸 너의 복인 줄 알아야지.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으니까 거절도 적당히 해. 그때 가서 감당 못 하겠다고 울지 말고.”

더러운 손이 뒷머리에 닿은 순간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허서령이 그를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은 법치 사회야.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 수도 있어.”

“흥. 법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 마.”

진성호가 콧방귀를 뀌며 건방진 태도로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진 빚을 딸인 네가 몸으로 갚는 게 뭐가 어때서? 지극히 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허서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무죄야.”

반드시 재심을 청구하여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배상금은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고 이미 지불한 병원비도 전부 돌려받을 것이다. 5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기에 법원에도 배상을 청구하리라 마음먹었다.

진성호가 대놓고 비웃었다.

“22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아직도 무죄 타령이야?”

허서령이 진성호의 손을 힘껏 밀쳐냈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뒤에서 진성호의 분노 섞인 고함이 울려 퍼졌다.

“허서령, 넌 내 거야. 절대 도망 못 가.”

귀가 오염된 것 같은 불쾌감에 허서령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법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을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

일주일 뒤 새벽 한 시.

깊은 잠에 빠졌던 허서령이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더듬더듬 찾아 화면을 밀어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서령아, 나 결혼 안 해. 엉엉... 백시욱이랑 헤어질 거야...”

휴대폰 너머로 술에 취한 심인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순식간에 깬 허서령이 벌떡 일어나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야? 술 마셨어?”

결혼식을 불과 보름 앞둔 시점이었다. 혼인신고를 마쳤고 청첩장도 다 돌렸다. 웨딩 촬영, 식장 예약까지 다 끝낸 마당에 파혼이라니.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허서령이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야?”

“밤의 온도.”

“거기서 기다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지금 바로 갈게.”

허서령이 서둘러 옷장을 열어 옷을 꺼내 입었다.

그녀가 숨 가쁘게 달려간 술집의 룸 안에 백시욱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만취한 상태로 2m 정도 거리를 둔 채 소파 양 끝에 주저앉아 있었다.

“서령아...”

허서령을 본 심인혜가 울면서 손을 내밀었다. 술 때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아직도 울먹거리고 있었다.

“나 이 사람이랑 끝낼 거야. 제발 나 좀 데려가 줘. 다시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허서령이 가방을 내려놓고 심인혜의 옆에 앉아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너무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일단 술 깨고 나서 다시 얘기해.”

그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시욱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지강산, 왔어?”

그 소리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고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차갑고 고귀한 아우라를 풍기며 서 있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두 눈이 허서령에게 머물러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허서령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고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주 그에게 강제로 입맞춤 당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강산의 입술 상처는 아물었을지 몰라도 그녀의 가슴 속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백시욱이 휘청거리며 지강산에게 기대자 지강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인혜가 나랑 헤어지겠대.”

그가 심인혜를 가리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이 여자 진짜 양심도 없지 않냐?”

하지만 지강산의 시선은 심인혜가 아니라 허서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서늘한 눈빛에 허서령은 마음이 씁쓸해졌다.

“맞아. 양심이 없어.”

지강산의 목소리가 지극히 낮고 무거웠으며 한겨울 서리처럼 차가웠다.

허서령이 켕기는 게 있는 듯 지강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심인혜를 부축해 일으키며 그녀와 심인혜의 가방을 챙겼다.

“인혜야, 집에 가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심인혜를 부축한 채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술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인혜야, 너의 엄마 집으로 데려다줄게.”

허서령이 심인혜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겼다. 엄마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소리에 심인혜가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엄마한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속상해하실 거란 말이야.”

“그럼 우리 집으로 가.”

“아니야. 네가 쉬는 데 방해돼. 그냥 신혼집으로 데려다줘.”

“하지만 시욱 씨도 그리로 갈 텐데. 밤에 또 싸우면 어쩌려고.”

심인혜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분노를 쏟아냈다.

“그 사람은 아직 젖도 못 뗀 애야. 엄마 집으로 돌아가라, 신혼집엔 절대 못 들어와.”

허서령이 두 사람이 싸운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산 백시욱과 달리 심인혜는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공주처럼 자랐기에 자유로운 삶을 원했다. 그런 그녀가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걸 절대 동의할 리가 없었다.

결국 허서령은 심인혜를 그들의 신혼집에 데려다주었다. 아파트가 편안하면서도 아늑했다.

집으로 들어가 심인혜를 침대에 눕히고 신발과 양말을 벗겨주었다. 그다음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정성스레 화장을 지워준 뒤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혔다.

머리맡에 숙취해소제와 내일 아침에 신을 슬리퍼까지 챙겨놓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허서령이 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지강산이 인사불성이 된 백시욱을 부축해 들어오고 있었다.

지강산은 백시욱을 소파에 던지고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허서령이 황급히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고 긴장감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던 지강산의 경고가 떠올랐다.

잠시 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서령은 한참을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밖이 완전히 조용해진 뒤에야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지강산이 이미 떠나고 없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백시욱을 보고 있자니 가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남자들은 참 무심하단 말이야.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이불이라도 좀 덮어주고 가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허서령이 이불장에서 이불을 꺼내 백시욱에게 덮어주었다.

시간이 어느덧 새벽 두 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에 허서령은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런데 문이 닫힌 순간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놀란 나머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등이 현관문에 부딪혔다. 허둥지둥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문이 이미 굳게 잠겨 있었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고 숨도 가빠왔으며 긴장감에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지강산이 현관문 앞에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로 허서령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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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tuellstes Kapitel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00화

    허서령은 순간 긴장이 풀리며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골목길은 텅 빈 채 고요하고 아무도 없었다.순간 차오르던 희망이 와르르 무너졌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손목을 비틀더니 전기충격기를 빼앗아 덤불 속으로 던져버렸다.허서령은 겁에 질린 채 달리기 시작했다.“살려주세요!”진성호가 빠르게 따라붙더니 그녀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아악!”두피가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는 더는 앞으로 달릴 수 없었다.진성호는 덩치가 크진 않았지만 남녀 간 힘 차이는 명확했다.그의 앞에서 허서령은 여전히 약자였다.진성호는 한 손으로 그녀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끌며 덤불 사이 좁은 길로 끌고 갔다.그의 집 방향이었다.“읍읍...”허서령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두피가 너무 아파 눈물이 핑 돌았고, 공포는 수많은 독화살처럼 그녀 심장을 찔러댔다.몸부림치는 사이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그 순간 그녀는 휴대폰이 아직 외투 주머니 안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녀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휴대폰을 꺼내 뒤로 숨긴 뒤 익숙한 동작으로 지문 잠금을 해제했다.아마 채팅 화면이 그대로 떠 있을 터였다.그녀는 손가락으로 화면 아래 ‘말하기’ 버튼을 길게 눌렀다.그리고 있는 힘껏 진성호의 손을 물어버렸다.“젠장!”고통을 느낀 진성호는 그녀의 입을 놓았다.그 틈을 타 허서령은 소리 높이 외쳤다.“진성호! 왜 날 네 집으로 끌고 가는 건데! 살려줘...”진성호는 분노에 눈이 뒤집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짝!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허서령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뺨은 화끈거렸고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으며 휴대폰도 멀리 튕겨 나갔다.진성호는 즉시 그녀 휴대폰을 주워 확인했다.잠금 화면 상태인 걸 보고 그대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허서령이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힘이 너무 세서 턱과 볼이 부서질 듯 아팠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9화

    “직접 만드는 거예요?”“그건 진짜 무리야. 포장된 거 사와야 해.”허서령은 걸어가며 음성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입가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지강산의 낮고 깊은 목소리는 음성 메시지로 들어도, 직접 들어도 여전히 좋았다.그녀는 일부러 서운한 척 늘어진 말투로 답했다.“아쉽네요...”그러자 지강산이 바로 물었다.“삐졌어?”허서령은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괜히 자기 한마디에 또 레시피를 찾아보며 복잡한 팥죽을 만들려고 애쓸까 봐 서둘러 말했다.“안 삐졌어요. 기대 중이에요. 내일 동지라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랑 드론쇼 한다더라고요.”“같이 보러 갈까?”“내일 봐서요. 야근할지도 모르잖아요.”허서령은 고개를 숙인 채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집에 가서 이야기하길 기다릴 수조차 없는 것처럼 지강산과의 음성 메시지는 끊임없이 이어졌다.밤안개가 내려앉은 단지 산책로에는 사람 그림자도 드물었고 가로등 불빛도 희미했다.“허서령!”갑자기 남자의 익숙하면서도 분노에 찬 고함이 뒤에서 터져 나왔다.허서령은 깜짝 놀라 휴대폰을 움켜쥔 채 뒤를 돌아봤다.진성호였다.그는 얼굴이 잔뜩 굳은 채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분노에 휩싸인 모습이었다.허서령은 즉시 휴대폰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전기충격기를 움켜쥐었다.“무슨 일이야?”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네 엄마 대체 왜 그러는데?”진성호는 폭발하듯 소리쳤다.“네 동생 결혼식이 다음 달 1일, 새해 첫날이잖아.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내 돈 필요 없다 그러고, 네가 나랑 결혼하기 싫어하면 강요 안 하겠다고 하고, 나더러 너 괴롭히지 말라더라.”허서령 역시 궁금했다.지강산이 도대체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을 한 건지.하지만 그 뒤로 어머니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고, 그녀의 삶은 오랜만에 평온하고 편안해졌다.“법적으로 성인은 결혼의 자유가 있어. 내가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강요 못 해. 그러니까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8화

    지강산은 방 안으로 들어가, 한 손엔 간식 상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허서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방문을 두 손으로 붙잡고 또박또박 말했다.“저 혼자 지하철 타고 출근할 거예요. 안 데려다줘도 돼요. 알겠어요?”지강산은 태연하게 웃었다.“친구끼리 왜 그래?. 부담 갖지 마. 차비 안 받을게.”“차비 문제가 아니에요.”허서령은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말했다.“시간이랑 체력 문제라고요.”“난 시간도 체력도 남아돌아.”“강산 씨...”지강산은 여유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문 안 놓으면 오늘 밤 나랑 자고 싶은 거로 알 거야.”갑자기 날아든 노골적인 농담에 허서령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손을 뗐다. 얼굴은 또다시 새빨개졌다.“잘 자.”지강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허서령은 그의 방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머릿속엔 방금 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친구끼리잖아.”‘세상 어느 평범한 친구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아침 차려주고, 출근도 데려다주고.’성인이면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감정이 있었다.허서령의 입가엔 문득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걸어갔다.그와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행운이었다.이제 더는 괜한 감정싸움은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평범한 관계라고 해도, 그게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몰랐다.‘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다음 날, 허서령은 평소보다 30분 더 자고 일어나, 바라던 대로 지강산이 만들어준 달걀 요리와 야채죽을 먹었다.더는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 안에서 끼어 있을 필요도 없었고, 서서 갈 필요도, 급하게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그저 지강산의 따뜻하고 편안한 차 안에 앉아 그가 준비해준 작은 간식을 먹으며 편하게 회사에 도착하면 됐다.그녀의 퇴근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고, 야근하고 늦게 들어오는 일도 많았다.지강산은 그녀를 데리러 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집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7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하는 듯했다.허서령은 손가락으로 그가 들고 있는 간식 세 개를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가리켰다.“쌀과자, 깨강정, 전남친 토스트.”지강산의 코가 순식간에 붉어졌다.그는 입을 다물고 웃음을 참으며 조금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응. 들었어.”“우리 지역 특산물인데 혹시 안 먹어봤을까 봐 가져온 거예요.”“토스트를 많이 먹어봤어도 전남친 토스트는 처음이네. 무슨 맛이야?”“고소하고 부드러워요. 강산 씨 너무 단 거 안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단 과자는 안 가져왔어요.”지강산은 입술을 가볍게 깨문 채 손에 든 과자를 몇 번이나 다시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일부러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허서령은 순간 마음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급히 해명하듯 말했다.“제가 큰 상품 못 뽑아서 회사에서 위로차 선물 준 건데, 대부분 엄청나게 달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이 세 개만 골랐어요. 깨강정이 조금 달긴 한데 나머진 괜찮아요. 강산 씨 입맛에 맞을 것 같아요.”“내가 너무 단 거 안 좋아하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네?”지강산은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허서령은 그 시선에 가슴 깊은 곳이 살짝 떨렸다.두 사람 사이로 묘한 온기가 흐르기 시작하며 눈빛이 오가고 공기마저 뜨겁게 달아올랐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결국 지강산이 먼저 침묵을 깼다.“고마워.”그는 간식 세 개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늦었으니까 들어가서 씻고 자.”허서령은 TV를 가리켰다.“농구 아직 안 끝났잖아요.”그제야 지강산은 TV를 아직 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리모컨을 집어 TV를 끄고,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목소리도 따라서 부드러워졌다.“내일 아침 뭐 먹고 싶어?”“네?”허서령은 멍해졌다.“죽? 아니면 국수?”지강산은 면 요리를 좋아했지만 허서령은 밥 종류를 더 좋아했다.허서령은 가방을 들고 일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6화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새벽 무렵, 회사 단체 버스가 구름타워 밖에 멈춰 섰다.허서령은 마지막 두 동료와 인사를 나눈 뒤 차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이번 워크숍은 울심시 근교 민박으로 떠나 자연을 즐기고 현지 음식을 맛보는 일정이었다.집 앞에 도착한 허서령은 지문으로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밀었다.거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조금 놀랐다.‘이 시간이라면 강산 씨는 벌써 자고 있어야 정상인데...’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갈아신고 거실 쪽을 바라봤다.예상대로 지강산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그는 편한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이 시간까지 농구 경기를 본다고?허서령은 슬리퍼를 끌고 거실로 들어가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지강산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허서령은 화면 오른쪽 위의 선명한 세 글자를 발견했다.[재방송.]“이렇게 늦었는데 아직 농구 보고 있었어요?”허서령은 가방을 소파 위에 올리고 간식 봉투를 테이블에 둔 뒤 그의 옆에 앉았다.지강산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대신 갑자기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예상치 못한 접근에 허서령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고는 두 손으로 소파를 짚은 채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댔다.심장 박동이 순식간에 빨라졌다.쿵, 쿵쿵, 쿵쿵쿵...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라 그녀는 지강산의 짧은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을 수 있었고, 뜨거운 숨결까지 느껴졌다.호흡이 흐트러지고 몸이 긴장된 그녀는 침을 삼키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려는 거예요?”그녀는 지강산이 키스하려는 줄 알고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하지만 그녀가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지강산은 입 맞추지 않았다.그는 그대로 멈춘 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냄새를 맡더니 다시 몸을 세워 앉았다.“좋아. 술 냄새 안 나.”지강산은 담담하게 한마디 던지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허서령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95화

    차에 올라탄 지강산은 봉투에서 생수를 꺼낸 뒤 남은 봉투를 허서령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물 사니까 같이 주더라.”허서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어봤다.안에는 우유 한 병과 달걀 샌드위치 하나가 들어 있었다.그녀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지강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고마워요.”허서령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감정이 가슴속을 어지럽게 휘젓는 걸 느꼈다. 심장이 자꾸만 두근거렸다.지강산은 물병을 내려놓고 다시 차를 출발했다.아침밥을 품에 꼭 안은 허서령의 마음속에 씁쓸한 감정이 천천히 번졌다.지강산은 원래부터 정말 좋은 남자였다.언젠가 그와 결혼하는 여자는 분명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로펌 앞에 도착하자 지강산은 차를 세우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가 일하는 곳이 조금 궁금한 듯했다.허서령은 아침거리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고 차 앞을 돌아 로펌 입구에 선 그녀는 몸을 돌려 차 안의 지강산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지강산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그녀의 맑은 눈을 바라보다가 순간 멈칫했다.“좋은 아침, 서령 씨.”그때 허서령의 뒤쪽에서 다급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돌아보니 현리아가 서류를 안고 하이힐을 신은 채 안에서 급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리아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허서령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현리아는 그녀의 곁을 지나가다가 차 안의 지강산을 보고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남자친구 엄청 잘생겼네. 오늘 저녁 모임에 남친도 데려와.”“그 사람은...”허서령이 해명할 틈도 없이 현리아는 이미 옆에 대기 중이던 호출 차량에 타버렸다.허서령은 얼굴이 뜨거워진 채 민망하게 지강산을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반면 지강산은 태연하기만 했다.허서령은 용기를 내어 차 쪽으로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물었다.“두 사람... 서로 몰라요?”지강산은 미간을 좁혔다.“우리가 알아야 해?”‘아니라고?’전에 분명 그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8화

    “대단하다, 너? 어디 두고 봐.”소유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허서령에게 삿대질하면서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네가 강산 오빠랑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빠 부모님께 당장 알릴 거야. 그분들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소유하의 단골 레퍼토리인 일러바치기 협박에도 허서령의 마음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그저 차분하고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소유하를 응시했다.소유하가 씩씩거리며 나가려던 찰나 허서령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쏘아붙였다.“왜? 할 말이라도 남았어?”허서령이 바닥에 흩어진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7화

    소유하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더니 주먹을 꽉 쥐고 허서령을 쏘아보았다.“강산 오빠랑 대체 무슨 사이야? 왜 오빠랑 같이 사는 건데?”“룸메이트야. 셰어하우스라고 생각하면 돼.”“허.”소유하가 코웃음을 쳤다.“내가 바보로 보여?”허서령이 방으로 들어가 서랍에서 셰어하우스 임대 계약서 사본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소유하는 확 낚아채고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계약서를 훑어봤다. 그들이 단지 룸메이트 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계약서를 티테이블 위에 던지면서 강압적인 태도로 명령했다.“당장 이 집에서 나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4화

    허서령은 순간 멍해졌다.‘강산 씨가 지금 날 걱정하고 있는 거야?’진짜든 아니든 지강산이 안달복달하며 애태우는 모습을 더는 볼 수가 없었다.“오해했어요, 강산 씨. 회사 근처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이거 엄마한테 맞은 상처예요. 엄마가 날 바닥에 제압하고 막 때렸거든요.”그 말에 지강산이 멈칫하더니 복부를 감싸 쥐고 있던 허서령의 손을 떼어냈다.“아랫배도 다쳤어?”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난 분명 위쪽을 누르고 있는데.’아마도 그녀가 웅크리고 있어서 시각적인 착각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33화

    경찰은 일반적으로 가정 내 다툼에 개입하는 것을 꺼렸다. 게다가 모녀 사이의 다툼이었고 허서령이 입은 상처라곤 피부의 멍 자국뿐이었으니 더욱 그랬다.경찰이 훈방 조치한 뒤 오정화를 돌려보내려 했다.그때 허서령이 직업이 변호사임을 밝히며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다. 만약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경찰을 직무유기로 고소하겠다고 했다.결국 오정화는 단순 훈방에서 구류 10일과 벌금 10만 원이라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경찰서에 갇힌 오정화가 분노로 날뛰었다. 그녀가 낳은 딸이 이렇게까지 매정할 줄은 몰랐다.‘고작 몇 대 때린 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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