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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꼬미 요괴
다음 날.

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혜야, 깼어?]

[어, 깼어.]

[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

[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

[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

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서령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울심시가 넓고 사람도 많았다. 마음먹고 피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허서령도 바빴고 지강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평행선처럼 영원히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도 일부러 그를 피했다.

심인혜와 백시욱이 주선한 자리는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친구들이 부를 때마다 누가 오는지 낱낱이 확인하며 지강산과 마주칠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그렇게 보름 뒤.

변호사 나정민이 서류 한 뭉치를 들고 허서령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허변, 이 사건 의뢰인이 꼭 허변한테 사건을 맡기고 싶다네요.”

허서령이 서류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상표권 침해 소송요? 나변,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닌데요? 전 공익 쪽을 위주로 맡고 있고 이런 상업 소송은 나변 담당이잖아요.”

“그쪽에서 꼭 허변한테 맡기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

나정민이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면서 감탄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수임료를 무려 30%나 더 주겠다는데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건...”

“허변 능력을 믿어요.”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의뢰인 집 주소니까 바로 가보세요.”

“집으로요?”

“네, 집으로.”

...

에버그린 힐.

울심시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주택이자 고소득 전문직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항공우주연구원과도 차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보안이 매우 철저하여 신원 확인과 전화 문의를 거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허서령이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린 순간 허서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소유하였다. 실크 슬립 차림에 긴 머리를 늘어뜨렸고 짙은 메이크업을 해서 그런지 더욱 요염해 보였다.

“들어와. 문은 안 닫아도 돼.”

상업 소송을 굳이 공익 변호사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모든 의문이 그제야 풀렸다.

소유하가 허서령을 곤란하게 만들고 모욕할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 그녀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허서령은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허서령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장 앞에 놓인 남성용 검은색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가 신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커플 슬리퍼였다.

소유하가 무심한 척 말했다.

“이건 강산 오빠 슬리퍼니까 신발장 안에서 새것 꺼내 신어.”

‘지강산이랑 동거 중이야?’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그나저나 신발은 신발장 안에 넣어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보란 듯이 꺼내놓았다는 건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발장을 열어 새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의뢰인을 상대하는 자리라 일단 예의 바르게 대했다.

“소유하 씨, 저는...”

업무적인 태도로 대화를 시작하려던 그때 소유하가 말을 가로챘다.

“소개할 필요 없고 쓸데없는 얘기도 할 필요 없으니까 일단 앉아.”

소유하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하얀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했다. 긴 웨이브 머리가 소파 뒤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빛에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했고 태도 또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소유하 씨, 의뢰하신 상표권 침해 사건에 대해...”

소유하가 또 한 번 말을 끊고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목 좀 축여. 미리 커피 타 놨으니까.”

티테이블 위에 컵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커플 컵이었다. 이토록 유치하고 노골적인 수작에 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

상표권 침해 사건도 왠지 소유하가 지어낸 거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컵은 건드리지 마. 강산 오빠 거니까.”

소유하가 커플 컵을 들고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허서령을 쳐다보며 승리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허서령이 가볍게 웃었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더는 이런 저급한 연극을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소유하 씨, 이제 그만하시죠. 사건은 핑계고 날 모욕하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콧방귀를 뀌고 비아냥거렸다.

“허서령, 너 같은 쓰레기도 결국 천벌을 받는구나. 강산 오빠 버리고 떠나서 대단한 재벌 2세라도 만날 줄 알았더니. 금융학과에서 잘나가던 수재가 고작 이런 작은 법률 사무소에서 공익 변호사나 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러고 보면 하늘이 참 공평해.”

허서령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오만한 태도를 지켜보았다.

소유하가 말을 이었다.

“그때 강산 오빠가 너 같은 근본 없는 애를 만나준 것만으로도 조상님이 도운 줄 알았어야지. 감히 양다리를 걸쳐? 그러니까 지금 버림받은 신세가 된 거야. 네가 떠나고 나서 오빠는 나랑 만나기 시작했어. 우린 지금 너무 행복해.”

허서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소유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여전히 좁구나.”

“뭐라고?”

소유하의 안색이 확 어두워진 걸 볼 허서령이 차분하게 반격했다.

“네 눈에는 남자, 금수저, 명분 그런 것밖에 안 보이지? 한낱 일개미가 자기가 옮긴 똥 덩어리가 제일 크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절차적 정의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판례들을 보고 있어.”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유하를 쏘아보았다.

“굳이 남자한테 기대어 내 가치를 증명할 필요 없어. 공익 변호사가 뭐 어때서? 내가 맡은 사건 하나하나가 이 사회의 공정함을 수리하고 있어. 그런데 넌 내가 오래전에 버린 과거와 그 남자를 붙들고 있는 것 말고 뭐가 있는데?”

소유하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주먹을 꽉 쥐고 일어나 허서령을 노려봤다.

허서령을 제대로 밟아주려고 집으로 부른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녀가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때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유하가 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허서령이 서류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밖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오빠, 퇴근했어? 내가 국 끓여놨는데 얼른 가서 먹어.”

지강산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됐어. 저녁 먹고 왔어.”

“다 끓여놨는데 버리면 아깝잖아. 내가 12시간이나 정성 들여 끓인 거라고.”

허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강산을 피했는데 결국 소유하 때문에 또 만나고 말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소파 옆 쓰레기통에 담긴 진씨네 영양탕 포장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온 지강산이 현관에서 허서령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모두 돌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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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32화

    안도한 김우빈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지하 1층 버튼을 누른 뒤 한 걸음 물러나 지은영과 나란히 섰다.숨결은 무거웠고 얼굴에는 어두운 기색이 감돌았다.지은영은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깨야 할지 고민했다.조금 전에는 너무 놀라 과민하게 반응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뒤에야 진정됐고, 생각해 보니 자신의 반응이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었다.이제 김우빈의 여자 친구였고, 연인 사이에 스킨십이 오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그렇게 화를 내며 ‘왜 키스하냐’고 따져서는 안 됐다.상처가 될 만한 말이었다.하지만 사귄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키스라니. 속도가 로켓처럼 빨랐다. 지은영에게는 받아들이기 벅찼다.‘스물아홉 살 남자라면 연애 경험도 많겠지? 여자 친구도 여럿 사귀었을 테고. 나도 그동안 주변에 있던 수많은 여자와 같다고 생각하는 걸까?’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지은영은 입을 다물었다.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 주차장에 멈추자 지은영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김우빈도 뒤따랐다.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차로 향했다.김우빈이 차 키를 꺼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지은영은 어두운 표정으로 조수석에 앉았다.김우빈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밤이 깊어 도시 곳곳이 네온사인으로 빛났다. 널찍한 길은 차량으로 꽉 막혔고 길게 늘어선 붉은 미등 아래로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했다.어둑한 차 안에는 답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은영은 창밖 거리를 바라보며 가방끈을 꼭 쥐었다.“미안해.”먼저 입을 연 건 김우빈이었다.지은영의 심장이 작게 떨렸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는 조금 전의 키스가 다시 떠올랐다. 낯선 촉촉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뺨이 뜨거워지고 심장도 이상하게 빨라졌다.김우빈이 말을 이었다.“나도 모르게 그랬어. 네 기분은 생각하지 못했어. 내 잘못이야.”지은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네가 싫다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김우빈의 목소리가 낮게 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31화

    지은영의 마음속에 전에 없던 감정이 조금씩 피어올랐다.무슨 감정인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자신도 알 수 없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김우빈은 손을 깨끗이 닦다가 지은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의 손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따스한 정이 어렸다.무엇 때문이었을까...어느새 깊어진 저녁 어둠 때문인지, 방 안의 조명이 지나치게 포근해서인지, 아니면 둘 사이를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너무 짙어진 탓인지...김우빈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고 뜨거워졌고,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은영아.”김우빈은 잠긴 목소리로 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네?”지은영은 눈을 피하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김우빈의 얼굴을 바라보며 빠져들었다.김우빈이 고개를 숙였다. 지은영은 피하지 않았다.끝내 참지 못한 김우빈은 지은영의 뒤통수를 감싸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지은영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피가 멎은 듯 몸이 뻣뻣해지고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지은영은 코앞으로 다가와 흐릿하게 보이는 김우빈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았다.온몸의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오직 입술에서 느껴지는 촉촉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만이 짜릿하게 머리와 심장을 파고들었다.낯설면서도 정신을 빼앗길 만큼 황홀한 감각이었다. 너무도 이상했다.김우빈의 혀가 지은영의 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순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김우빈이 자신에게 키스하고 있었다.이성을 되찾은 지은영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쳤다.김우빈은 한 걸음 뒤로 밀려났다.지은영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심장에 모터라도 달린 듯 정신없이 뛰었다. 당황하고 긴장한 지은영이 소리쳤다.“갑자기 왜 키스해요?”그 말을 내뱉자마자 지은영은 몸을 돌려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거실의 장식장 쪽으로 달려가 가방을 집어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은영아!”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30화

    지은영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풀었다.“집에 재료는 뭐가 있어요?”“다 있어.”“그런데 저 요리 못하는데. 오빠는 할 줄 알아요?”“응.”“둘째 오빠랑 비교하면 누가 더 잘해요?”“나.”지은영은 ‘풋’ 하고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어쩌면 그렇게 태연하게 단 두 글자로 자신이 더 잘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허풍을 떨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걸까?’“외국에서 유학하던 몇 년 동안 공부하고 남는 시간엔 고향 음식을 만들어 봤어. 거긴 정말 먹을 만한 게 별로 없거든. 굶어 죽기 싫으면 직접 만들어야 했지.”지은영은 그의 능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차에서 내린 지은영은 김우빈을 따라 호화로운 지하 주차장을 나왔다.정말 주차장마저 화려했다. 전시장보다 고급 승용차가 많았고 환하게 빛나는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천장은 반짝이는 별하늘 같았다.주차장만 봐도 김우빈의 취향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엘리베이터를 타고 저택 3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눈길 닿는 곳마다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넓고 밝은 공간은 간결하면서도 세련됐고, 촌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현대적인 디자인에 화려함을 절제한 인테리어였다.거실에 선 지은영은 넋을 잃었다.머릿속에는 단 한마디만 떠올랐다.‘세상에!’“은영아, 가방 줘.”김우빈이 손을 내밀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은영은 얼른 배낭을 벗어 건넸다.김우빈은 배낭을 선반에 올려놓고 정장 재킷을 벗었다. 하얀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고 팔을 걷어 올리더니 개방형 주방으로 향했다.“내가 밥할게.”지은영도 혼자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어 그를 따라가 일을 거들었다.커다란 냉장고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제가 도와줄 일 없어요?”손을 씻은 지은영이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김우빈은 채소를 씻고 파, 생강, 마늘을 손질하는 일을 맡겼다.자신은 고기를 썰고 밥을 짓고 음식을 볶느라 분주했다.두 사람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9화

    “닷새 내내 바빠서 닷새 내내 잊은 거야? 이모티콘 하나 보내는 데 몇 초면 되는데. 시간이 없었던 거야, 아니면 마음이 없었던 거야?”김우빈이 물었다.지은영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널 탓하려는 게 아니야.”김우빈은 부드럽지만 어딘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저 하루에 조금이라도 나한테 시간을 내줬으면 해. 난 네 남자 친구잖아.”“네.”지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김우빈이 차분하게 물었다.“원준이가 너한테 고백했어?”깜짝 놀란 지은영이 그를 올려다봤다.“그건 어떻게 알았어요?”“짐작했어.”지은영은 놀라웠다.‘우빈 오빠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무슨 능력이 있기에 무엇이든 해결하고 모든 일을 아는 것처럼 보일까?’그 앞에 서면 자신이 속마음 하나 숨기지 못하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애송이가 된 기분이었다.지은영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그러자 김우빈은 눈빛이 어두워진 채 조용히 물었다.“마음이 흔들렸는데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하기 미안한 거야?”“아니에요.”지은영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흔들리지 않았어요.”“그럼 우리 매일 만나자.”김우빈이 말했다.“매일요?”“응. 마음을 키우려면 자주 만나야 해. 온라인으로 연락만 해선 한계가 있으니까.”“우빈 오빠, 사실 우리 둘 사이는...”김우빈이 즉시 말을 끊었다.“우선 부르는 것부터 바꾸자. 그냥 우빈 씨라고 불러.”“우빈 씨라고요?”“응.”“하지만 제가 훨씬 어리잖아요.”“나이 차이는 나지만 우린 동등한 사이야. 오히려 너를 더 존중해야 하는 입장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름으로 불러도 돼.”지은영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사실 송원준 때문이 아니라 김우빈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부담감 때문에 그만 만나자고 말하려 했다.그런데 김우빈의 말에 다시 한번 마음이 따뜻해져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자신을 동등하게 대해 준다는 느낌도 들었다.김우빈은 정말 좋은 남자 친구였다.아직 서로를 잘 모르고 특별한 감정도 생기지 않았지만 굳이 지금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8화

    “고마워요. 우빈 오빠.”황급히 호칭을 고친 지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김우빈은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혜원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늘 찾아뵌 건 광고 협찬에 관해 상의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구체적으로는...”“그건 진 이사와 이야기하시면 됩니다.”김우빈이 말을 끊었다.“진 이사님이요?”김우빈은 휴대전화를 꺼내 업무용 메신저로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내려놓았다.“이런 업무는 내가 직접 맡지 않아요. 진 이사가 와서 이야기할 겁니다.”혜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지은영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마침 물을 마시던 지은영은 잔을 쏟을 뻔하다 겨우 물잔을 바로 잡고 혜원을 바라봤다.혜원이 눈짓했다.지은영도 뜻은 알았다. 하지만 김우빈이 협찬 업무는 진 이사 소관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옆구리를 찌른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김우빈은 예리한 눈으로 혜원의 행동을 보더니 지은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은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혜원에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작은 행동까지 모두 김우빈에게 보였다.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때 진 이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했다.김우빈은 혜원을 데리고 가 사무실에서 협찬 업무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혜원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진 이사를 따라갔다. 지은영도 따라 일어서려는 순간 김우빈이 불렀다.“은영아, 넌 남아.”지은영은 긴장한 채 멈춰 서서 나가는 혜원을 보았다가 다시 김우빈을 바라봤다.“우빈 오빠, 무슨 할 말 있어요?”“업무 협상하러 가는 건데 네가 따라가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어?”김우빈이 물었다.지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김우빈이 손짓하며 자리를 권했다.“다시 앉아. 너랑 할 얘기가 있어.”지은영은 얌전히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넓은 대표실에 김우빈과 단둘이 남자 지은영은 더 긴장됐다. 몸이 굳고 압박감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7화

    안내 데스크 직원도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김우빈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였다.혜원 옆을 지나려는 순간, 혜원이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김우빈은 혜원을 그대로 지나쳤다. 시선은 오직 지은영에게 고정돼 있었다.지은영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우빈을 바라봤다. 차갑고 고고하면서도 침착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마치 김우빈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상황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지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은영아.”가까이 온 김우빈이 먼저 인사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숨결에는 묘한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혜원 언니랑 광고 협찬 때문에 왔어요.”지은영이 멋쩍게 말했다.“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그냥 업무대로 처리하면 돼요. 저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는...”은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혜원이 급하게 끼어들어 지은영의 앞을 가로막고 김우빈에게 공손히 인사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지은영이가 말한 혜원이 접니다. 그냥 혜원이라고 불러 주세요.”김우빈은 혜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지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내 사무실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네, 대표님!”혜원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나 두 사람이 먼저 가도록 길을 비켰다.지은영은 아까 벗어 놓았던 배낭을 손에 들고 있었다. 촬영 장비와 개인 물건이 많이 들어 있어 제법 무거웠다.옆에서 걷던 김우빈이 배낭끈에 손을 뻗었다.“내가 들게.”“괜찮아요.”지은영은 황급히 거절했다. 하지만 김우빈의 따뜻한 손이 이미 지은영의 손등에 닿으며 배낭끈을 잡았다.손바닥이 스치는 순간 지은영은 괜히 긴장하며 깜짝 놀라 손을 빼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가방을 내주었다.그러자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부하 직원 여러 명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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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그러자 소유하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화

    지강산과 함께한 4년은 허서령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별 후 허서령은 5년을 울며 보냈다.매일같이 눈물을 쏟은 건 아니었지만 지강산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속에 장마라도 진 것처럼 축축하고 눅눅한 비가 내렸고 이내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들곤 했다.살면서 지강산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백시욱이 주선한 술자리.떠들썩한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허서령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에 닿았다.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해일이라도 밀려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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