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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꼬미 요괴
다음 날.

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인혜야, 깼어?]

[어, 깼어.]

[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

[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

[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

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허서령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울심시가 넓고 사람도 많았다. 마음먹고 피하기만 한다면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허서령도 바빴고 지강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평행선처럼 영원히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실제로도 일부러 그를 피했다.

심인혜와 백시욱이 주선한 자리는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했고 친구들이 부를 때마다 누가 오는지 낱낱이 확인하며 지강산과 마주칠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그렇게 보름 뒤.

변호사 나정민이 서류 한 뭉치를 들고 허서령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허변, 이 사건 의뢰인이 꼭 허변한테 사건을 맡기고 싶다네요.”

허서령이 서류를 받아 대충 훑어보았다.

“상표권 침해 소송요? 나변, 이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닌데요? 전 공익 쪽을 위주로 맡고 있고 이런 상업 소송은 나변 담당이잖아요.”

“그쪽에서 꼭 허변한테 맡기고 싶다는데 어쩌겠어요.”

나정민이 검은 뿔테 안경을 올리면서 감탄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수임료를 무려 30%나 더 주겠다는데 내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건...”

“허변 능력을 믿어요.”

“알겠어요. 한번 해볼게요.”

“의뢰인 집 주소니까 바로 가보세요.”

“집으로요?”

“네, 집으로.”

...

에버그린 힐.

울심시에서 손꼽히는 최고급 주택이자 고소득 전문직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항공우주연구원과도 차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보안이 매우 철저하여 신원 확인과 전화 문의를 거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허서령이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린 순간 허서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소유하였다. 실크 슬립 차림에 긴 머리를 늘어뜨렸고 짙은 메이크업을 해서 그런지 더욱 요염해 보였다.

“들어와. 문은 안 닫아도 돼.”

상업 소송을 굳이 공익 변호사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모든 의문이 그제야 풀렸다.

소유하가 허서령을 곤란하게 만들고 모욕할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 그녀에게 맡겼던 것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허서령은 그녀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끝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허서령이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발장 앞에 놓인 남성용 검은색 슬리퍼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가 신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커플 슬리퍼였다.

소유하가 무심한 척 말했다.

“이건 강산 오빠 슬리퍼니까 신발장 안에서 새것 꺼내 신어.”

‘지강산이랑 동거 중이야?’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팠다.

‘그나저나 신발은 신발장 안에 넣어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보란 듯이 꺼내놓았다는 건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겠지.’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발장을 열어 새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의뢰인을 상대하는 자리라 일단 예의 바르게 대했다.

“소유하 씨, 저는...”

업무적인 태도로 대화를 시작하려던 그때 소유하가 말을 가로챘다.

“소개할 필요 없고 쓸데없는 얘기도 할 필요 없으니까 일단 앉아.”

소유하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하얀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지탱했다. 긴 웨이브 머리가 소파 뒤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빛에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했고 태도 또한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허서령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옆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소유하 씨, 의뢰하신 상표권 침해 사건에 대해...”

소유하가 또 한 번 말을 끊고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목 좀 축여. 미리 커피 타 놨으니까.”

티테이블 위에 컵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커플 컵이었다. 이토록 유치하고 노골적인 수작에 허서령은 어이가 없었다.

상표권 침해 사건도 왠지 소유하가 지어낸 거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컵은 건드리지 마. 강산 오빠 거니까.”

소유하가 커플 컵을 들고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허서령을 쳐다보며 승리감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허서령이 가볍게 웃었다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더는 이런 저급한 연극을 참아줄 이유가 없었다.

“소유하 씨, 이제 그만하시죠. 사건은 핑계고 날 모욕하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닌가요?”

그러자 소유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콧방귀를 뀌고 비아냥거렸다.

“허서령, 너 같은 쓰레기도 결국 천벌을 받는구나. 강산 오빠 버리고 떠나서 대단한 재벌 2세라도 만날 줄 알았더니. 금융학과에서 잘나가던 수재가 고작 이런 작은 법률 사무소에서 공익 변호사나 하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이러고 보면 하늘이 참 공평해.”

허서령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녀의 오만한 태도를 지켜보았다.

소유하가 말을 이었다.

“그때 강산 오빠가 너 같은 근본 없는 애를 만나준 것만으로도 조상님이 도운 줄 알았어야지. 감히 양다리를 걸쳐? 그러니까 지금 버림받은 신세가 된 거야. 네가 떠나고 나서 오빠는 나랑 만나기 시작했어. 우린 지금 너무 행복해.”

허서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 약간의 연민이 섞여 있었다.

“소유하, 세상을 보는 시야가 여전히 좁구나.”

“뭐라고?”

소유하의 안색이 확 어두워진 걸 볼 허서령이 차분하게 반격했다.

“네 눈에는 남자, 금수저, 명분 그런 것밖에 안 보이지? 한낱 일개미가 자기가 옮긴 똥 덩어리가 제일 크다고 자랑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난 지금 이 자리에서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절차적 정의와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드는 판례들을 보고 있어.”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유하를 쏘아보았다.

“굳이 남자한테 기대어 내 가치를 증명할 필요 없어. 공익 변호사가 뭐 어때서? 내가 맡은 사건 하나하나가 이 사회의 공정함을 수리하고 있어. 그런데 넌 내가 오래전에 버린 과거와 그 남자를 붙들고 있는 것 말고 뭐가 있는데?”

소유하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주먹을 꽉 쥐고 일어나 허서령을 노려봤다.

허서령을 제대로 밟아주려고 집으로 부른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녀가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그때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유하가 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허서령이 서류와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밖의 대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오빠, 퇴근했어? 내가 국 끓여놨는데 얼른 가서 먹어.”

지강산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됐어. 저녁 먹고 왔어.”

“다 끓여놨는데 버리면 아깝잖아. 내가 12시간이나 정성 들여 끓인 거라고.”

허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강산을 피했는데 결국 소유하 때문에 또 만나고 말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소파 옆 쓰레기통에 담긴 진씨네 영양탕 포장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소유하에게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온 지강산이 현관에서 허서령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 순간 모두 돌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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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4화

    병원 안.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미친놈.”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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