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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꼬미 요괴
지강산이 몸부림치는 허서령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 벽에 고정시킨 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키스를 퍼부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허서령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허서령이 그의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윽.”

날카로운 통증에 지강산이 입술을 뗐다.

허서령이 기억하는 지강산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사납게 구는 건 분명 그녀를 뼛속 깊이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허서령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지강산이 허서령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짓눌렀다.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볼에 닿았다.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지강산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허서령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허서령이 울컥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간결하게 답했다.

오직 그녀만 알고 있었다. 지강산이 그녀의 세상에서 단 한순간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어린 시절 너무 눈부신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남은 생이 외로워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문득 알 것만 같았다.

지강산이 허서령을 놓아주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깨물린 입술을 쓱 닦아냈다. 그러고는 일말의 미련도 없다는 듯 돌아서서 비상계단을 나갔다.

허서령이 맥없이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고 입술 위에 지강산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다시 한번 심장이 부서져 내리는 고통에 한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비상계단에서 마음을 추스른 뒤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휴대폰을 꺼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 미안한데 내 가방 좀 퀵으로 보내줘.]

메시지를 보낸 후 벽을 짚고 일어나 고개를 들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다시 눈물을 훔쳤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더는 지강산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인혜에게서 답장이 왔다.

[잘했어, 서령아. 지강산의 입술이 터진 거 봤어. 아주 격렬했나 본데? 잘했어.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는 건드려선 안 돼.]

허서령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텅 빈 것 같은 허망함을 안은 채 쓸쓸히 호텔을 떠났다.

...

밤이 깊어서야 모임이 끝이 났다.

한산한 대로변 위 노란 가로등 불빛이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지강산의 어두운 얼굴을 비췄다.

그의 입술에 생긴 상처가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술을 마시지 않은 소유하가 운전대를 잡았다. 핸들을 꽉 쥔 그녀의 손가락 끝에 서슬 퍼런 분노가 서려 있었다.

소유하가 지강산의 입술을 힐끗 보더니 화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울심이 얼마나 큰데 하필 거기서 그 여자를 만나다니.”

지강산이 고개를 돌려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의 풍경을 내다봤다. 소유하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소유하가 뜨끔했다.

“시욱 오빠한테 오빠가 어디 있는지 물어봤어.”

지강산이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 친구들 모임에 억지로 끼어들려 하지 마.”

“오빠, 허서령이 그 사람들이랑 아는 사이인 걸 알고 일부러 온 거야?”

짜증이 난 지강산이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소유하가 말을 이어갔다.

“허서령 걔 오빠를 배신하고 떠난 년이야.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다시 잘해볼 생각인 건 아니지?”

지강산이 차갑게 말했다.

“서령이가 나한테 어떻게 했든 그건 내 일이야. 네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던 소유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는 왜 아직도 걔 편을 들어? 그때 걔가 오빠한테...”

지강산이 말을 가로챘다.

“입 좀 다물래?”

그 말에 소유하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소유하는 지강산이 허서령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헤어질 당시 지강산이 울면서 무릎을 꿇었었고 이성을 잃고 무너졌었다.

허서령을 붙잡기 위해 늦가을 찬 바람이 불던 제산시의 빗속에서 일곱 시간을 꼬박 서 있다가 결국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다.

허서령이 세상에서 가장 모진 말들을 쏟아내며 밀어내도 지강산은 계속 미친 듯이 매달렸었다.

결국 대학교 졸업 후 허서령이 모든 연락처를 바꾸고 제산시를 떠나고 나서야 두 사람의 지독했던 인연도 마침표를 찍었다.

...

“서령아, 우리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자.”

“뭐가 그렇게 급해요?”

“사회에 나가면 유혹이 너무 많아. 우리 이쁜 서령이를 탐내는 놈들이 얼마나 많겠어.”

“걱정하지 말아요. 평생 강산 씨만 사랑할 거니까.”

“사랑한다면 나랑 결혼해줘. 마음을 놓게.”

“그래요. 졸업하면 바로 결혼해요.”

“결혼식은 어디서 하고 싶어?”

“난 바다가 좋아요. 햇살이 쬐는 모래사장 같은 곳에서 하고 싶어요.”

“네가 좋아하는 거면 나도 다 좋아. 그럼 우리 바닷가에서 결혼식 올리자.”

시끄러운 벨 소리에 허서령이 꿈에서 깨어났다.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든 가느다란 햇살이 어두컴컴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눈가가 축축한 걸 보니 또 과거의 꿈을 꾼 모양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진성호의 이름이 떴다. 허서령은 그 이름만 봐도 생리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간 뒤 잠기운을 억눌렀다.

“병원비 낼 때가 됐으니까 얼른 병원으로 와.”

진성호의 말투가 무척이나 강압적이었다.

“알았어.”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다음 휴대폰을 던지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5년 전 허서령의 아버지가 진성호의 아버지 진병철을 때려 식물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며 누명을 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모든 증거와 증언이 아버지를 향했다. 게다가 사건 전날 아버지가 진병철과 크게 다투며 이런 폭언을 퍼부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내일 네놈의 목숨줄을 끊어버릴 거야.”

명확한 살인 동기로 인해 아버지는 결국 22년형과 1억 6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진병철의 치료비도 전부 부담해야 했다.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달리 진병철은 동네에서 악명이 자자한 건달이었다. 허서령은 아버지가 무죄라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허서령은 변호사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재심을 청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사하고 새로운 증거를 수집했다.

허서령은 반드시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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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8화

    “고마워요. 우빈 오빠.”황급히 호칭을 고친 지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김우빈은 맞은편에 앉았다.두 사람도 자리에 앉았다. 혜원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대표님, 오늘 찾아뵌 건 광고 협찬에 관해 상의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구체적으로는...”“그건 진 이사와 이야기하시면 됩니다.”김우빈이 말을 끊었다.“진 이사님이요?”김우빈은 휴대전화를 꺼내 업무용 메신저로 메시지를 하나 보내고 내려놓았다.“이런 업무는 내가 직접 맡지 않아요. 진 이사가 와서 이야기할 겁니다.”혜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지은영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마침 물을 마시던 지은영은 잔을 쏟을 뻔하다 겨우 물잔을 바로 잡고 혜원을 바라봤다.혜원이 눈짓했다.지은영도 뜻은 알았다. 하지만 김우빈이 협찬 업무는 진 이사 소관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옆구리를 찌른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김우빈은 예리한 눈으로 혜원의 행동을 보더니 지은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지은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혜원에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의 작은 행동까지 모두 김우빈에게 보였다.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때 진 이사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정중하게 인사했다.김우빈은 혜원을 데리고 가 사무실에서 협찬 업무를 논의하라고 지시했다.혜원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진 이사를 따라갔다. 지은영도 따라 일어서려는 순간 김우빈이 불렀다.“은영아, 넌 남아.”지은영은 긴장한 채 멈춰 서서 나가는 혜원을 보았다가 다시 김우빈을 바라봤다.“우빈 오빠, 무슨 할 말 있어요?”“업무 협상하러 가는 건데 네가 따라가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어?”김우빈이 물었다.지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김우빈이 손짓하며 자리를 권했다.“다시 앉아. 너랑 할 얘기가 있어.”지은영은 얌전히 돌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넓은 대표실에 김우빈과 단둘이 남자 지은영은 더 긴장됐다. 몸이 굳고 압박감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7화

    안내 데스크 직원도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김우빈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였다.혜원 옆을 지나려는 순간, 혜원이 손을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김우빈은 혜원을 그대로 지나쳤다. 시선은 오직 지은영에게 고정돼 있었다.지은영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김우빈을 바라봤다. 차갑고 고고하면서도 침착하고 날카로운 분위기, 마치 김우빈이 나타나는 순간 모든 상황이 그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지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은영아.”가까이 온 김우빈이 먼저 인사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숨결에는 묘한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여긴 어떻게 왔어?”“혜원 언니랑 광고 협찬 때문에 왔어요.”지은영이 멋쩍게 말했다.“그렇다고 오해하진 마세요. 그냥 업무대로 처리하면 돼요. 저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는...”은영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혜원이 급하게 끼어들어 지은영의 앞을 가로막고 김우빈에게 공손히 인사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지은영이가 말한 혜원이 접니다. 그냥 혜원이라고 불러 주세요.”김우빈은 혜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지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내 사무실로 올라가서 얘기하자.”“네, 대표님!”혜원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한 걸음 물러나 두 사람이 먼저 가도록 길을 비켰다.지은영은 아까 벗어 놓았던 배낭을 손에 들고 있었다. 촬영 장비와 개인 물건이 많이 들어 있어 제법 무거웠다.옆에서 걷던 김우빈이 배낭끈에 손을 뻗었다.“내가 들게.”“괜찮아요.”지은영은 황급히 거절했다. 하지만 김우빈의 따뜻한 손이 이미 지은영의 손등에 닿으며 배낭끈을 잡았다.손바닥이 스치는 순간 지은영은 괜히 긴장하며 깜짝 놀라 손을 빼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가방을 내주었다.그러자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부하 직원 여러 명이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6화

    여은 테크. 인공지능 로봇과 통신 기술 분야의 거대 기업으로, 시가총액이 400조가 넘는 회사였다.여은 빌딩은 제산시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지은영과 혜원은 화려한 건물 1층 로비에 들어섰지만 곧 출입 게이트에 가로막혔다.사원증도, 사전 예약도 없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안내 데스크로 가자 직원이 물었다.“방문 예약하셨나요?”혜원이 답했다.“아니요.”지은영은 어이가 없었다.‘예약도 없는데 국장님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두 사람을 보낸 걸까.’“죄송합니다. 예약 없이 출입하실 수는 없습니다.”직원이 정중하게 말했다.그때 혜원이 지은영을 앞으로 밀었다.“이분이 김 대표님 여자 친구예요. 여자 친구가 찾아왔다고 대표님께 말씀해 주세요.”지은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난데없이 앞으로 떠밀려 방패가 된 기분이라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직원이 지은영에게 고개를 숙였다.“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셔서 바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비서실에는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지은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혜원이 대답했다.“은영이요. 지은영 씨예요.”“네, 저쪽에서 잠시 앉아 기다려 주시겠어요?”직원이 옆을 가리켰다.지은영은 혜원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속이 불안해진 지은영이 혜원에게 조용히 말했다.“혜원 언니,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잖아요. 우빈 오빠가 중요한 회의 중이라는데 어떻게 만나겠어요.”혜원은 태연했다.“국장님이 그러셨어. 나는 못 만나도 넌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국장님은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하신대요?”지은영은 피식 웃으며 배낭을 벗고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글쎄. 국장님도 남자라서 그런 거 아닐까?”혜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자료를 내려다보며 협찬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지 생각했다.그때 지은영은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언니, 여은 테크는 옆 방송국처럼 큰 곳이랑 협력하잖아요. 우리처럼 작은 방송국에도 관심이 있을까요?”“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혜원은 자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5화

    “아니요.”은영은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인제 그만 연락했으면 좋겠어요. 전 우빈 오빠의 여자 친구예요. 친구의 여자 친구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앞으로 전화하지 말아요. 제 남자 친구가 오해하는 건 싫어요.”“너...”송원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은영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젖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남자를 거절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언제쯤 이 아픔이 사라질지 알 수 없었고, 송원준을 완전히 잊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몰랐다.오늘은 겨우 첫걸음을 뗐을 뿐이었다.지은영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침대에 벌렁 누워 눈을 감고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한참을 그렇게 있어도 가슴속 쓰라림은 가시지 않았다.그러다 휴대전화 알림이 두 번 울렸다.기운 없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메신저를 열어 보니 김우빈이 보낸 메시지였다.짧은 한마디였다.[집에 도착했어.]그렇게 간단한 한마디에도 남자 친구다운 배려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귀가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어떻게 답할지 몰라 지은영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김우빈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내일부터 출근해?]지은영은 글을 쓰기도 귀찮았다. 목이 메어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똑같은 이모티콘을 또 보냈다.글자 하나 없는 이모티콘만 반복되자 더는 대화를 이어 갈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늦잠을 잔 지은영은 지각할 것 같아 허겁지겁 가방을 메고 차를 몰아 방송국으로 향했다.방송국에 도착해서는 걸어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김우빈에게서 또 메시지가 와 있었다.[좋은 아침!]딱 네 글자였다. 대화할 시간이 없었던 은영은 아침 인사 이모티콘을 보냈다.[출근 중이야?]곧장 답장이 왔다.마침 사무실에 돌아온 지은영에게 상사가 급하게 들어온 취재 자료를 건넸다.“은영 씨, 현장 취재야. 청백 저수지에서 여성 시신이 발견됐대.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4화

    마치 바람피운 여자 친구를 추궁하는 듯, 분노에 질투까지 섞여 있었다.지은영은 송원준이 단순히 소유욕 때문에 그러는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를 놓아주려 했다.어떤 감정은 잠깐 스쳐 가기도 한다.하지만 결혼할 사람은 평생을 함께할 상대였다. 사람을 잘못 고르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었다.“네. 저 우빈 오빠랑 사귀기로 했어요.”지은영은 담담하게 답했다.송원준은 더욱 화를 냈다.“은영아, 왜 너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거야? 내가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고 그런 사소한 일로 네 감정을 걸고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야?”방에 들어간 지은영은 문을 닫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어두워진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원준 오빠, 화풀이하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지하게 만날 사람을 찾는 중이에요. 결혼까지 생각하고요.”“은영아,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잖아. 몇 년이나 날 좋아했는데 정말 포기할 수 있어?”지은영이 허탈하게 웃었다.“뭘 포기하라는 거예요?”“나를.”“전 오빠를 가진 적도 없는데, 무슨 포기를 해요?”“은영아, 나 너 좋아해. 너랑 결혼하고 싶어.”송원준은 진지해지며 한마디 한마디 진심을 담아 이어 갔다.“전부터 계속 좋아했어. 이제 내 잘못도 알겠어. 네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았어야 했고, 네 친구 앞에서 네가 먼저 고백하길 기다린다고 말하지도 말았어야 했어.”그 말을 듣는 순간 지은영의 마음이 요동쳤다. 가슴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젖었다.그토록 오랫동안 좋아했던 남자에게 고백을 들었는데 어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하지만 지은영은 이미 김우빈과 사귀기로 약속했다.그녀는 누군가의 감정을 함부로 갖고 노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우빈도 진지하게 만나고 있었다. 게다가 둘째 오빠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런 일을 장난처럼 처리하고 어떻게 오빠를 보겠는가.“원준 오빠,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저도 오빠 좋아했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23화

    김우빈은 태연히 답했다.그 말에 은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매운 전골을 주문했다.다른 메뉴도 김우빈이 가리는 음식이 없다며 모두 지은영에게 맡겼다.한여름에 먹는 매운 전골, 에어컨을 켠 룸 안에서도 열기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땀을 닦고 매워서 연신 숨을 들이켜며 우유까지 마셔 가며 식사했다.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김우빈의 얼굴은 새빨개졌다.지은영이 신기해서 물었다.“우빈 오빠, 많이 매워요?”“괜찮아.”김우빈이 혀가 얼얼해 발음까지 둔해진 것을 본 지은영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엄청 매워하는 것 같은데요?”“견딜 만해.”김우빈은 다시 소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매운 전골을 다 먹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꽤 늦었다.김우빈은 지은영을 집까지 데려다줬다.강령원 입구에 도착한 차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멈췄다.김우빈은 차에서 내려 지은영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지은영이 옆쪽 철문을 열려던 순간, 김우빈이 불렀다.“은영아.”문고리에 손을 얹었던 은영이 돌아봤다.“나랑 데이트하는 거 재미없었어?”“아니요!”은영이 환하게 웃었다.“다음에는 옛 마을 구경하러 가자.”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와 조바심이 묻어났다.지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김우빈은 한결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지은영은 손을 흔들고 철문 안으로 들어가 집을 향했다.한참 걷다가 뒤돌아보니 김우빈은 여전히 문밖에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지은영은 가볍게 숨을 내쉬고 다시 웃으며 손을 흔든 뒤 집으로 향했다.현관에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들어섰다.거실에는 부모님과 둘째 오빠 부부, 어린 조카 예안이까지 앉아 있었다.“은영아, 왔어?”허서령이 먼저 인사했다.“네.”지은영은 신발을 갈아 신고 거실로 들어갔다.“첫 데이트는 어땠어?”허서령이 물었다.지은영은 한숨을 돌리며 가방을 소파에 던지고 지친 몸으로 털썩 앉아 옆에 있는 예안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빈 오빠는 매력도 있고 추진력도 있어요. 그런데 분위기가 워낙 강해서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1화

    지강산과 함께한 4년은 허서령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이별 후 허서령은 5년을 울며 보냈다.매일같이 눈물을 쏟은 건 아니었지만 지강산을 떠올리기만 하면 마음속에 장마라도 진 것처럼 축축하고 눅눅한 비가 내렸고 이내 눈시울도 뜨겁게 젖어 들곤 했다.살면서 지강산을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백시욱이 주선한 술자리.떠들썩한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자석에 이끌리듯 허서령의 시선이 익숙한 얼굴에 닿았다.그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해일이라도 밀려온 것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7화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의 색채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오직 지강산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연한 블루 반팔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청량하면서도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평범한 출근룩이었음에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 탄탄한 몸매와 훤칠한 키 덕분에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그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소유하가 슬리퍼를 가져와 지강산의 앞에 놓으며 살갑게 굴었다.“오빠, 신발 갈아 신어.”하지만 지강산은 아무 반응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6화

    다음 날.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인혜야, 깼어?][어, 깼어.][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그게 무슨 소리야?][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 5년 만의 재회, 그의 폭주   제5화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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