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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Autor: Jino

1화. 오늘 영업 끝

Autor: Jino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23 23:35:36

“조심히 가세요.”

진서후가 계산대 너머에서 말했다. 구해담은 피로회복제 한 병을 남색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약국 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약국 안보다 차가웠다. 구씨열쇠 셔터를 내린 지 10분. 오늘도 8시 40분에 맞춰 길을 건넜다. 늘봄약국에서 구씨열쇠까지, 해담의 걸음으로 23걸음이었다.

약국 문이 닫히기 전에 서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심히 가세요.”

해담은 걸음을 멈췄다. 약국 앞 평상 아래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두레슈퍼 고양이 깜이였다. 서후는 깜이 쪽으로 몸을 조금 숙이고 있었다.

“조심히 가세요.”

해담은 손에 든 피로회복제 병을 내려다봤다. 병의 뚜껑을 엄지로 문질렀다. 서후는 사람에게 하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로 고양이에게 인사했다. 특별한 말도, 특별한 표정도 없었다.

깜이는 꼬리를 한 번 흔들고 평상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후는 약국 문을 닫고 안으로 돌아갔다.

해담은 길을 건너지 않은 채 약국 유리문을 바라봤다. 유리문 안쪽에 붙은 영업시간 안내판이 보였다. 9시부터 21시까지. 21 아래에는 지운 숫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 숫자는 몇 번을 봐도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오늘 해담이 본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참.”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작았다. 지나가던 사람은 없었다.

해담은 병을 앞치마 주머니 안쪽으로 밀어 넣고 구씨열쇠로 돌아갔다. 허리에 매단 열쇠 꾸러미가 짤랑거렸다. 셔터 안쪽의 불을 끄고, 유리문에 걸어 둔 자물쇠를 확인했다. 손잡이를 당기자 문이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았다. 늘 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가게 안에 들어서자 기계의 쇳가루 냄새가 코에 닿았다. 저녁 내내 기계를 돌린 탓이었다. 해담은 앞치마를 벗지 않고 계산대 뒤로 가 장부 서랍을 열었다. 오늘 복사한 열쇠의 종류와 값을 적고 서랍을 닫았다.

가게는 3평 남짓했다. 왼쪽 벽에는 열쇠 블랭크가 종류별로 걸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복사 기계 2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쓰던 공구함은 선반 위에 있었다. 뚜껑에는 『열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해담은 공구함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오늘은 열쇠 블랭크 판을 다시 정리할 기분도 아니었다.

그녀는 계단으로 향했다. 가게와 집을 잇는 철계단은 14칸이었다. 올라가며 열쇠 꾸러미가 한 칸마다 부딪쳤다. 2층 원룸 문을 열고 들어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피로회복제 한 병을 꺼냈다.

식탁 위에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해담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공책 첫 장부터 이어진 작대기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하루씩 그은 선이었다. 빠뜨린 날도 있었고, 두 줄을 그은 날도 있었다. 오래된 종이는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계산기를 꺼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해담은 공책을 넘겨가며 다시 셌다. 작대기를 세고, 적어 둔 수를 확인하고, 마지막 장의 숫자를 훑었다.

2,556일 가운데 2,523병.

명절 당일에 못 간 날이 14일. 몸살이 나서 누워 있던 날이 19일. 합쳐서 33일은 건너지 않았다.

오늘은 그 33일에 들어가지 않았다. 해담은 2,523번째 병을 사 왔다. 매일 8시 40분이면 셔터를 내리고 길을 건넜다. 피로회복제 한 병을 사고, 서후에게 인사를 받고, 돌아왔다.

7년 동안 그랬다.

해담은 공책을 덮었다. 병은 뜯지 않고 식탁 한쪽에 세워 두었다. 유리병 안에 든 액체가 흔들렸다가 가라앉았다.

“장사였나.”

혼잣말을 하고 나서 입술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허리를 다쳐 집에 누워 있었다. 23살이던 3월 2일, 해담은 처음으로 혼자 출장을 나갔다. 그 무렵 길 건너에 약국이 새로 열었다. 그 뒤로 피로회복제를 사러 갈 때마다 약사 서후가 웃으며 인사했다. 약국에 갈 핑계는 늘 있었다. 별일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병이었다.

서후가 해담을 기억하는 것도 당연했다. 매일 찾아가는 손님이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해담은 식탁 서랍에서 빈 종이를 꺼냈다. 한쪽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 종이를 펴고 펜을 들었다. 첫 줄에 또박또박 썼다.

『짝사랑 폐업 신고서』

아래에 줄을 그었다. 신고 사유를 적으려다가 펜끝이 종이에 닿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쇳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해담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얼룩은 옅어졌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폐업 사유.

해담은 잠시 생각한 뒤 문장을 썼다.

『7년 동안 손님이 저 하나뿐인 장사.』

읽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담 혼자 마음을 쓰고, 혼자 값을 치렀다. 서후는 약사로서 인사했고, 해담은 단골로서 돈을 냈다. 피로회복제는 한 병에 1,000원이었다. 특별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다.

해담은 신고서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구해담.

날짜 칸에는 3월 1일이라고 썼다. 월요일, 휴일. 가게는 쉬지 않았지만, 오늘은 짝사랑을 쉬게 할 수 있었다.

펜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반으로 접으려다가 멈췄다. 다시 펴서 식탁 한가운데 놓았다. 종이가 말려 올라가지 않도록 공책으로 눌렀다.

내일은 안 가면 됐다. 영업시간이 끝나면 셔터를 내리고, 계단을 올라오면 됐다. 23걸음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됐다.

해담은 피로회복제 병을 냉장고에 넣지 않았다. 괜히 병을 챙겨 두면 또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서랍을 열고 공책을 넣었다. 『짝사랑 폐업 신고서』는 서랍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해담은 신고서를 그대로 둔 채 불을 껐다.

◎

아침 9시, 해담은 구씨열쇠 셔터를 올렸다. 전동 셔터가 소리를 내며 올라갔다. 작업 앞치마를 두르고, 벽에 걸린 열쇠 블랭크 판을 한 번 훑었다.

가게 문을 열어 둔 뒤 가장 먼저 찾아온 손님은 택배를 받으러 나온 이웃이었다. 해담은 인사를 나누고 계산대 위 먼지를 닦았다. 오전에는 열쇠 복사 의뢰가 몇 건 있었다. 복사 기계가 위잉 소리를 냈고, 해담은 잘린 부분을 줄로 다듬었다.

값을 받고, 장부에 기록하고, 손님에게 열쇠를 건넸다. 손끝에 쇳가루가 묻었다. 왼손 엄지의 굳은살이 열쇠 머리에 닿았다.

낮이 되자 골목 입구에서 큰 책가방이 보였다. 방은결이 빌라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딱지 몇 장을 쥐고 있었다. 해담은 가게 문을 잠그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은결아, 무슨 일이야?”

은결은 가방끈을 잡아당겼다.

“열쇠를 또 잃어버렸어요.”

“또?”

“주머니에 넣었는데 없어졌어요.”

해담은 빌라 문 앞을 살폈다. 아이는 복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문 옆에 서 있었다. 해담은 허리의 열쇠 꾸러미에서 얇은 공구 두 개를 골랐다. 열쇠 구멍에 넣고 손끝으로 핀을 하나씩 밀어 올리자 딸깍 소리가 났다. 1분이 채 안 걸렸다. 문고리와 자물쇠에는 고장 난 데가 없었다.

“됐다. 엄마한테 연락은 했어?”

“야간 근무 가셨어요. 끝나면 전화하신대요.”

“그럼 안에서 기다려. 문은 잠가 두고.”

은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담은 열쇠집으로 돌아가려다 아이가 손에 쥔 딱지를 봤다. 작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 딱지였다.

“출장비는?”

“없어요.”

“그건 알아. 공짜로 문 열어 달라고 부른 건 아니잖아.”

은결이 딱지를 내밀었다.

“이거 드릴게요. 제가 제일 아끼는 거예요.”

해담은 딱지를 받았다. 모서리가 접혀 있었지만 그림은 잘 보였다.

“이걸로 계산 끝?”

“네.”

“그럼 다음부터는 열쇠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 주머니가 비었는지 확인하고.”

은결은 가방 지퍼를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안쪽 주머니가 어딘데요?”

해담은 가방을 받아 옆 주머니와 안쪽 주머니를 차례로 보여 줬다. 은결은 딱지를 모아 넣는 작은 주머니를 가리켰다.

“여기에 넣으면 딱지랑 섞여요.”

“그러니까 다른 데 넣어야지.”

“열쇠가 딱지보다 작잖아요.”

“그건 맞네.”

해담은 아이의 가방 옆에 달린 고리를 확인했다. 끊어진 자국은 없었다. 열쇠고리도 달려 있지 않았다.

“목에 거는 건 싫어?”

“답답해요.”

“알았다. 싫은 건 하지 말자. 대신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열쇠 놓는 자리를 정해 달라고 해.”

은결은 문 안으로 들어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해담은 문이 닫히고 잠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열쇠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해담은 은결에게 받은 딱지를 계산대 서랍에 넣었다. 장부 옆에 놓으니 작고 얇았다. 해담은 서랍을 닫았다가 다시 열어 딱지가 접히지 않도록 안쪽으로 옮겼다.

점심시간은 정해 두지 않았다. 손님이 없을 때 잠깐 먹었다. 손님이 오면 내려놓고 응대했다. 오후에는 열쇠를 잃어버린 손님이 찾아왔고, 해담은 문을 열러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기계에 붙은 쇳가루를 털었다.

유리문 너머로 늘봄약국이 보였다. 서후는 흰 가운을 입고 계산대 안에 서 있었다. 약국 문이 열릴 때마다 손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해담은 그쪽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을 정리했다.

길이가 비슷한 열쇠를 한 줄에 맞추고, 작은 구멍이 있는 것들을 옆으로 옮겼다. 이미 가지런한 판이었지만 다시 확인했다. 마지막 열쇠를 걸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해담은 손바닥을 앞치마에 닦았다.

「영업 끝.」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해가 지고 골목 가게들이 하나씩 문을 닫았다. 봉미용실의 불이 먼저 꺼졌고, 탁씨정육의 셔터가 내려갔다. 두레슈퍼 앞 평상에는 엄분이가 앉아 있었다. 깜이는 평상 아래에 웅크렸다.

해담은 가게에서 하루치 장부를 정리했다. 복사한 열쇠의 종류와 받은 금액을 적고, 계산대 서랍을 잠갔다. 앞치마를 벗지 않은 채 셔터를 내릴 준비를 했다.

8시 30분이 지나자 거리는 한산해졌다. 약국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늘봄약국은 9시까지 문을 열었다. 구씨열쇠는 8시 30분에 영업을 마쳤다. 셔터를 내리고 10분 뒤 약국에 가는 것이 해담의 오랜 습관이었다.

해담은 계산대 옆에 놓인 피로회복제 병을 떠올렸다. 어젯밤 사 온 병은 2층 식탁에 있었다. 오늘은 사러 가지 않을 거였다.

8시 29분. 해담은 유리문을 잠갔다. 셔터 스위치 앞에 섰다. 손을 뻗었다가 내렸다. 시계 초침이 움직였다.

8시 30분.

해담은 스위치를 눌렀다. 셔터가 내려오며 금속 소리를 냈다. 가게 안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끝까지 내려온 셔터가 바닥에 닿자 해담은 문을 한 번 당겨 확인했다.

그 시각, 길 건너 약국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해담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허리에 달린 열쇠 꾸러미를 풀어 계산대 위에 올렸다. 딱지가 든 서랍을 열었다가 닫았다.

평소라면 지금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갈 때였다. 서후는 계산대 안에서 고개를 들었을 것이고, 해담은 피로회복제 한 병을 사서 1,000원을 냈을 것이다. 서후는 영수증을 건네며 인사했을 것이다.

“조심히 가세요.”

오늘은 그 인사를 듣지 않아도 됐다.

해담은 셔터 안쪽 의자에 앉았다. 일단 10분만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날에도 약국 앞에 사람이 많으면 잠깐 늦게 들어간 적이 있었다. 오늘은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8시 43분. 가게 안에는 벽시계 소리와 냉장고 소리만 났다. 해담은 장부 서랍을 열어 딱지를 다시 봤다. 접힌 모서리를 손톱으로 펴고 원래 자리에 넣었다.

8시 47분. 그녀는 일어나 블랭크 판 앞에 섰다. 작은 열쇠 몇 개를 빼서 방향을 맞춘 뒤 다시 걸었다. 같은 칸에 있던 열쇠가 가지런해졌다.

8시 50분. 해담은 손을 씻었다. 손끝에 붙은 쇳가루가 물에 섞여 내려갔다. 왼손 엄지의 굳은살은 그대로였다.

8시 53분. 해담은 가게 안에 불을 켰다. 셔터 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없었다. 약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가 닫혔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8시 55분.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해담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을 앞치마에 한 번 문지르고 셔터 손잡이를 잡았다. 쇠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셔터를 조금씩 올렸다.

바깥에 흰 가운을 입은 진서후가 서 있었다. 서후의 손에는 낡은 놋쇠 열쇠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하나 복사해 주세요.”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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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80화. 일요일은 쉽니다

    해담은 셔터 손잡이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금속이 레일을 따라 내려오며 골목에 소리를 냈다. 셔터가 바닥에 닿자 해담은 손을 떼고 문 앞에 섰다.간판 귀퉁이의 글씨가 새로 붙인 글씨였다. 노란 바탕과 검은 글씨로 적힌 『구씨열쇠』는 그대로였고, 오른쪽 아래에는 『일요일은 쉽니다』라고 붙어 있었다. 새 글씨는 예전 『연중무휴』와 비슷한 크기였다. 간판 아래쪽에 새로 덧댄 판이 조금 눈에 띄었지만, 멀리서 봐도 자연스러웠다.해담은 고개를 들어 한 번 더 읽었다.『일요일은 쉽니다』오늘은 1월 2일, 새해 첫 일요일이었다. 해담이 가게 셔터를 내려 둔 첫 정기 휴무일이기도 했다.길 건너 늘봄약국의 유리문에도 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기존 영업시간 안내 아래에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일요일 휴무』해담은 약국 문까지의 거리를 눈으로 확인했다가, 자기 가게 간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리의 열쇠 꾸러미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오늘은 열쇠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진짜 쉬네.」골목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셔터를 올린 가게는 몇 곳에 그쳤다. 두레슈퍼는 문을 열어 두었고, 엄분이는 평상에 앉아 깜이의 등을 쓸어 주고 있었다. 봉미용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탁씨정육 앞에는 흰 앞치마가 걸려 있었다.엄분이가 고개를 들었다.“담이야, 간판이 바뀌었네.”“네. 오늘부터 일요일은 쉬려고요.”“쉬는 날도 생겼어?”“생겼어요.”“좋다. 문 닫혀 있으면 괜히 어디 아픈가 걱정했는데.”“그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걱정은 내가 알아서 한다.”엄분이는 깜이의 등을 한 번 더 쓸었다. 깜이는 평상에서 내려와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약국도 쉬나?”“안내판 보세요.”엄분이는 안경을 코 위로 올리고 맞은편을 바라봤다. 약국 유리문 아래 새 종이가 붙어 있었다.“저기도 일요일 휴무네.”“그러네요.”“둘이 같이 쉬네.”해담은 대답 대신 간판을 올려다봤다. 그 말을 들으니 귀퉁이의 글씨가 더 선명해 보였다. 새 안내판을 붙인 약국 문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9화. 열쇠 일괄 양도

    셔터를 내린 지 10분이 지났다. 해담은 가게 앞에 서서 허리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손으로 눌렀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멎었다.길 건너 늘봄약국 문이 열렸다. 서후가 밖으로 나왔다. 흰 가운 안에는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두 손으로 유리병을 받쳐 들었다.“8시 40분입니다.”“알아요.”해담은 약국 시계를 보지 않았다. 7년 동안 늘 8시 40분에 길을 건넜다. 오늘은 그 자리에 서서 약국에서 나오는 사람을 기다렸다.서후는 몇 걸음 앞에서 멈췄다. 병 안에는 놋쇠 열쇠가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유리병을 기울이지 않아도 열쇠 머리마다 새긴 작은 홈이 보였다.해담은 병을 바라봤다.“다 찼네요.”“네. 가득 찼습니다.”“뚜껑 닫을 때 부딪히는 소리가 났겠어요.”“병을 들면 났습니다.”“그걸 매일 들고 다녔어요?”“약국 서랍에 두었습니다.”“매일 복사한 열쇠도요?”“네.”해담은 두 손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쇳가루가 묻은 손끝이 남색 천에 닿았다.서후는 병을 내밀었다. 해담은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유리가 차가웠다. 안에서 열쇠들이 작게 부딪혔다.“제 약국 뒷문 열쇠입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해담 씨가 깎았습니다.”해담은 병을 들어 안을 들여다봤다. 서로 다른 날 깎은 열쇠들이 모여 있었다. 날의 높이가 조금씩 달랐다. 열쇠 머리에 난 ㄱ자 홈도 하나씩 보였다.“제가 깎은 걸 어떻게 알아요?”“해담 씨가 처음 깎은 열쇠라서요.”“복사한 열쇠도 전부 제가 깎았다고요?”“네.”“약사님이 같은 열쇠를 가져올 때마다요?”“그렇습니다.”“하나도 안 빠지고?”“하나도 빠짐없이요.”해담은 병을 다시 내려다봤다. 유리 너머로 열쇠들이 겹쳤다. 어떤 것은 머리 부분이 반들거렸고, 어떤 것은 옆면에 쇳가루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으로 깎은 흔적이 서로 달랐다.“이걸 다 모아 놓고 뭘 하려고 했어요?”“해담 씨께 드리려고 했습니다.”“왜요?”“해담 씨가 깎은 열쇠니까요.”“그건 이유가 아니잖아요.”“제게 중요했습니다.”해담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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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공책을 사 오면 첫 줄은 제가 쓸 거예요.”해담은 펜을 계산대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서후는 계단 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깜이는 공책 위에서 내려와 난간 옆을 지나갔다. 해담은 고양이가 떠난 뒤 공책을 덮어 품에 안았다.“첫 줄에 뭘 쓸 겁니까?”“그건 공책을 보고 정할 거예요.”“알겠습니다.”“약사님은 뭘 쓸 건데요?”“해담 씨가 정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또 기다려요?”“네.”해담은 대답 대신 공책을 들고 계단을 올랐다. 서후는 계단 아래에 남아 있었다. 철계단을 오르는 동안 공책 모서리가 앞치마에 닿았다.11월 20일 토요일 아침, 해담은 가게 문 옆에 안내문을 붙였다. 종이 위에는 『부재 시 길 건너로 문의하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늘봄약국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길 건너에 있는 가게는 하나뿐이었다.해담은 테이프가 들뜨지 않도록 네 귀퉁이를 눌렀다. 문을 닫고 밖에 나와 살펴보니 안내문이 유리문에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약국 문에도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부재 시 길 건너로 문의하세요』. 서후가 약국 안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흰 가운은 없었고 남색 니트 위에 겉옷을 걸쳤다. 한 손에는 종이가 든 봉투가 있었다.해담은 약국 문에 붙은 안내문을 읽었다.“똑같네요.”“문구를 맞추는 편이 알아보기 쉽습니다.”“누가 먼저 붙였어요?”“해담 씨가 먼저 붙이셨습니다.”“제가 붙이는 걸 보셨어요?”“약국 안에서 봤습니다.”서후가 문 옆의 안내문을 한 번 확인했다. 봉투를 든 손은 내려가 있었다.“이쪽은 오늘 붙이실 겁니까?”“네. 붙일 종이도 가지고 오셨나 봐요.”“그렇습니다.”“약국 문에 붙이면 되겠네요.”“그렇게 하겠습니다.”서후는 약국 유리문에 종이를 대고 테이프를 눌렀다. 해담은 구씨열쇠 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두 안내문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향했다.두레슈퍼 평상에 앉아 있던 엄분이가 안경을 코 위로 올렸다.“이제 한쪽 문이 닫히면 건너가면 되겠네.”“문 닫고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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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담은 공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서후는 철계단 가운데쯤에 앉아 공책을 내려다봤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계단 한 칸이 비어 있었다.해담은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모서리가 닳아 종이 속이 드러난 곳도 있었고, 표지에는 손때가 묻어 있었다. 공책을 펼치자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계단 아래 가게에서는 셔터가 내려간 뒤의 쇳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이게 그 출근부예요?”“네.”“매일 적으셨다고 하셨죠.”“매일은 아니에요.”서후가 공책에서 해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빠진 날이 있습니다.”“몸이 안 좋으셨을 때요?”“그런 날도 있고요. 설이나 추석 당일에는 약국도 쉬었어요. 아빠가 가게를 넘겨주고 나서도 명절 당일만큼은 문을 닫으라고 했어요.”해담은 공책을 조금 돌려 서후가 보기 편하게 했다. 첫 장에는 날짜 대신 짧은 작대기들이 줄을 맞춰 그어져 있었다. 볼펜으로 그은 것도 있고, 연필 자국도 있었다. 중간에는 진하게 눌러 쓴 흔적이 있었다.“하나씩 그은 거예요?”“피로회복제 한 병 사러 갈 때마다요. 가게 셔터 내리고, 8시 40분에 건너가서 한 병 샀어요. 돌아오면 여기다 작대기 하나.”“2,523개가 있습니까?”“네.”“직접 세어 보셨습니까?”“세어 봤죠. 몇 번이나요.”“제가 봐도 됩니까?”“보여 드리려고 가져왔어요.”서후는 공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해담은 그걸 보고 한쪽 입술을 살짝 올렸다.“읽으셔도 돼요. 페이지 넘기는 것도요.”“제가 넘기겠습니다.”“그럼 넘기세요. 종이가 약해서 조심해야 해요.”“알겠습니다.”서후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잡아 천천히 넘겼다. 작대기들은 줄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끝까지 빽빽하게 채워진 페이지도 있었고, 중간에 듬성듬성한 곳도 있었다. 해담은 서후가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무릎 위 공책을 잡고 있었다.“날짜를 쓰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그냥 작대기만 그었어요. 날짜를 쓰면 장부가 되잖아요.”“출근부라고 부르셨습니다.”“가게 출근부랑은 달라요. 그건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6화. 간판 상담

    “저 간판, 내가 손으로 쓴 거다.”아빠의 말이 끝난 뒤에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해담은 사진 아래쪽을 받치고 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사진 속 간판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였다. 지금 구씨열쇠에 걸린 간판도 그랬다. 글자 획이 조금 굵고, ‘열’의 마지막 획은 오른쪽으로 짧게 올라가 있었다.“아빠가 직접 쓴 거예요?”“가게 열 때 급하게 썼다. 간판집에 맡길 돈도 아꼈고.”“그 글씨가 지금 간판까지 온 거네요.”“그렇지.”구판길은 사진을 해담에게 돌려줬다. 사진 모서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해담은 아래를 받쳤다. 간판 아래에 선 아빠는 지금보다 얼굴이 덜 탔고, 앞치마도 새것처럼 보였다.“아빠는 저때도 무뚝뚝했어요?”“사진에 말투가 나오냐?”“안 나오니까 물어보는 거죠.”“그때도 지금도 똑같다.”봉숙자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그건 내가 똑똑히 봤어. 구 사장님은 가게 열 때도 말이 별로 없었어.”“봉 원장님이 그때부터 골목에 계셨어요?”“내가 미용실을 하기 전에도 이 골목에 살았지. 모르는 게 없어.”“저 사진은 아빠가 몇 살 때예요?”“그걸 왜 나한테 묻니. 네 아빠한테 물어.”“사진 속 아빠가 대답을 안 하시잖아요.”구판길이 해담을 보았다.“가게 문 열던 때니까 지금보다 젊었지.”“그건 저도 알아요.”“그럼 됐다.”사진을 다시 장부 옆에 놓은 뒤에도 해담은 간판 글씨를 몇 번 더 봤다. 아빠 손글씨가 원래부터 간판에 새겨진 줄 알았다. 글씨를 본떠 간판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그날 밤, 가게 셔터를 내린 뒤에도 해담은 계산대 안쪽에서 사진을 펼쳐 놓았다. 사진 속 간판과 유리문 밖 간판을 번갈아 보았다. 사진 속 글자와 현재 간판의 글자 모양은 일치했다. 검은 칠이 벗겨진 모서리와 오른쪽 아래에 붙은 작은 글씨만 달랐다.해담은 사진을 접지 않고 서랍에 넣었다.10월 25일 오전, 벽의 열쇠 블랭크 판을 종류별로 다시 걸었다. 모양이 맞는 열쇠를

  • 7년 짝사랑을 폐업했더니 길 건너 약사가 단골이 됐다   75화. 금고 개봉 행사

    “다이얼은 제가 돌릴게요. 손대지 마세요.”해담은 옛 솔매우체국 안쪽에 놓인 금고 앞에 섰다.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허리에 열쇠 꾸러미를 찼다. 가을 장터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문 안으로 모여들어 금고 주위에 둥글게 섰다. 문밖에서는 상인들이 장터 물건을 소개하는 소리와 사람들 발소리가 들렸다.봉숙자가 금고 옆에서 손바닥을 내저었다.“다들 조금만 뒤로 물러서요. 해담이가 돌릴 자리가 있어야지.”“저 정도면 넉넉한데.”탁종팔이 말했다. 봉 원장이 탁 사장을 돌아봤다.“사장님은 더 물러서세요. 나중에 금고 열리면 제일 먼저 안에 들어가실 것 같으니까.”“내가 왜 들어가.”“사진에 젊은 모습이 있으면 가져가실 수도 있잖아요.”“사진은 안 가져가.”탁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도 금고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났다.구판길은 사람들 뒤에 서서 금고를 바라봤다. 햇볕에 탄 얼굴에 낚시 조끼를 걸쳤고, 손에는 오래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해담은 아빠를 보았다.“아빠, 안쪽으로 더 들어오세요. 문 열리면 잘 안 보일 수도 있어요.”“여기서도 보인다.”“다들 보러 왔는데 아빠만 안 보이면 안 되잖아요.”구판길은 대꾸하지 않고 사람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에 있던 진서후가 해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해담 씨.”“서후 씨. 오셨어요?”“네. 아버지는 퇴원하셨습니다. 집에서 쉬고 계십니다.”“다행이에요.”“오늘 장터에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도 사진이 궁금하다고 하셨습니다.”해담은 서후의 얼굴을 살폈다. 왼쪽 눈 아래 작은 점이 그대로 보였다. 서후는 약국에서 입던 흰 가운 대신 남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해담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금고로 몸을 돌렸다.“그럼 잘 열어야겠네요.”“해담 씨가 여시면 됩니다.”“그 말은 부담되는데요.”“제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해담은 다이얼을 내려다봤다.「말이 늘 정확해.」금고는 무릎 높이보다 조금 큰 철제 금고였다. 표면에는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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