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또 무슨 바람이 든 거야?’강서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끊지도 않았지만 받을 생각도 없었다.그냥 울리게 놔뒀다.어차피 민도하는 참을성이 긴 사람이 아니었다.한 번 전화가 끝나자 핸드폰은 조용해졌다.민도하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강서이가 잠옷을 들고 다시 욕실로 가려는데, 하필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강서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아예 전원을 꺼 버리고 평온한 밤을 방해받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발신자는 진인자였다. 강서이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진인자의 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강서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진인자는 기침이 너무 심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힘겹게 말했다. [서이 씨, 전에 기침에 좋다고 직접 만들어 주셨던 배즙 있잖아요.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였죠?]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기침이 이어졌다.강서이가 바로 말했다. “직접 하지 마세요. 제가 가서 해 드릴게요.”[밖에 비가 너무 많이 와요.]“괜찮아요.” 강서이는 외투를 챙긴 뒤 바로 집을 나섰다. 최대한 서둘러서 민두해 집으로 차를 몰았다.진인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꽤 심했다. A형 독감 때문에 기침이 심해진 것이었다.진인자 말로는 꽤 전부터 기침이 이어졌고, 약을 먹고 수액까지 맞았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고 했다.그러다 지난해 독감이 유행했을 때, 강서이가 가져다준 도라지배즙이 효과가 좋았던 게 떠올라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제가 금방 만들게요. 잠깐 쉬고 계세요. 다 되면 말씀드릴게요.”진인자가 부탁했다. “그럼 조금 넉넉하게 부탁드려요. 회장님도 A형 독감이세요.”“네.”강서이는 익숙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원래 요리에는 재능이 없어서 간단한 해장국이나 도라지배즙밖에 만들지 못했다.그마저도 민도하와 사귀고 난 뒤 일부러 배운 것이었다.처음에는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다.하지만 강서이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끝을 보는 사람
노아리의 눈에는 실망의 기색이 비쳤다.저녁 모임에 서한승이 나오기는 했지만 혼자였다.서태우는 낮에 같이 있던 여자는 왜 안 데리고 왔냐고 물었다.서한승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해.”“벌써부터 감싸는 거 봐라?”서태우가 놀렸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애지중지해?”“뭐가 그렇게 급해?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그때가 언젠데? 결혼식? 애 돌잔치?”“둘 다 될 수도 있고.”서태우가 벌떡 일어날 기세로 반응했다. “그러니까 진짜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응.” 서한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노아리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둘의 대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귀에 들어오자 표정이 굳어졌다.서한승과 알고 지낸 시간이 6년이 넘었지만, 서한승은 결혼 이야기에 진지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노아리가 몇 번 돌려서 떠봤을 때도 제대로 된 반응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노아리는 손에 든 잔을 꽉 움켜쥐었다. 표정도 편하지 않았다.다만 누구도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서한승은 자연스러운 척 민도하 쪽을 한번 바라봤다.민도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에는 방금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아무리 캐물어도 서한승에게서 더 알아낼 수 없자, 서태우는 결국 포기했다.자기 잔에 술을 따르려다가 문득 보니, 민도하 혼자 어느새 반 병 넘게 비우고 있었다.“도하야, 왜 그래?” 서태우가 거의 빈 술병을 흔들었다. “접대 자리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마셔?”민도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주량 좀 늘리려고.”“아리 술 대신 마셔 주려고?”민도하가 답했다. “응. 곧 약혼식이잖아.”서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세심하다.”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노아리도 민도하의 말을 듣자 한결 나아졌다.노아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하야, 너무 많이 마시지 마.”“알았어.”서태우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워낙 많이 봐서
두 사람은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다. 강서이는 시청에서 예정돼 있던 회의까지 미루고 서한승에게 따로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강서이가 데려간 곳은 보양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매니저는 강서이와도 안면이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강서이를 반갑게 맞으며 요즘 숙면에 도움이 되는 한방 보양 메뉴가 새로 나왔다고, 한번 먹어 보겠냐고 물었다.강서이는 괜찮다고 했다.예전에는 민도하의 불면증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 보려고, B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괜찮은 보양식과 건강식을 찾아다녔다.몇 번씩 드나들다 보니 매니저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매니저는 강서이가 이젠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하자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요즘 통 안 오셔서 남자 친구분 불면증이 드디어 나아졌나 했어요. 정말 다행이네요.”강서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헤어졌어요.”매니저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강서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자리에 앉은 뒤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까 말씀하신 보양 메뉴 중에 속을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있어요?”“있죠, 있어요!” 매니저가 얼른 설명했다. “저희 사장님이 유명한 한의사에게 자문을 받아서 보양 메뉴를 여러 가지 개발했거든요.” “특히 위장에 부담도 없고 기력 보충에도 좋은 쪽으로 많이 연구해서, 반응도 아주 좋아요.”“한약 냄새는 안 나요?” 강서이는 서한승이 약 냄새를 싫어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거의 안 나요. 그래서 더 인기 있는 거예요.”매니저가 그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니 강서이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속을 편하게 해 줄 만한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매니저는 메뉴판에서 망설임 없이 황기 닭곰탕을 골랐다.그러면서 덧붙였다. “저희 사장님 여자 친구분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예요.”강서이도 말했다. “이거 괜찮아요. 제 비서도 비슷하게 자주 끓여 줘요. 선배님도 한번 먹어 봐요.”강서이가 골라 준 음식이니 서한승도 굳이 다른 걸 고르지 않았다.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강서이는 서한승
역시 예비 사모님이 받을 법한 대접이었다.노아리는 난처하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자랑스러운 기색이 더 많이 묻어났다. “도하도 참. 내가 애도 아닌데 뭘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다들 보기 민망하게.”부사장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저희는 민망한 게 아니라 부럽습니다. 민 대표님과 노아리 본부장님 사이가 정말 좋으신 것 같아서요.”기분이 좋아진 노아리가 말했다. “도하가 너무 많이 보냈네요. 저 혼자 다 먹지도 못하니까 괜찮으시면 다 같이 드세요.”강서이와 하장현에게도 넉넉하게 같이 먹자고 권했다.강서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김설이 먼저 잘라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강 대표님은 돈 주고도 못 사는 정성 가득 도시락이 있으시거든요. 첨가물 잔뜩 든 배달 음식 안 부러워요!”그러고는 강서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표님, 제가 먹을 거 챙겨 왔어요. 차에서 드세요.”“그래.”강서이가 자리를 떠나자 성이남은 그제야 속이 편해졌다.노아리가 같이 먹자고 하자 성이남도 거절하지 않았다.식사 중 성이남이 일부러 물었다. “아리 선배, 고상만 교수님 알아?”노아리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하지. 학계에서 워낙 유명하잖아. 이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성이남의 머릿속에 강서이가 떠올랐다. 곧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네.”자기 짐작이 맞는 듯했다. 노아리야말로 지도교수가 해마다 잊지 못하고 이야기하던 제자였다....차 안에서, 강서이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김설에게 물었다.“이거 다 네가 했어?”“네! 어때요? 저 음식 좀 하죠?”“진짜 잘했네.”하장현도 동의했다. “이 정도면 식당 차리셔도 되겠는데요.”“식당은 생각 없어요! 저는 우리 대표님만 꽉 붙잡고 대표님 따라 인생 역전할 거예요!”김설은 강서이를 재촉했다. “대표님, 얼른 드세요. 식으면 맛없어요.”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서 보기 시작했다.강서이가 반쯤 먹었을 때 김설이 또 호들갑을 떨었다.강서이가 익숙하
하장현은 누군가 강서이를 깎아내리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나서려고 했다.하지만 강서이가 먼저 막았다.강서이는 등받이에 기대며 성이남을 바라봤다. 입가에는 묘한 웃음이 걸렸다. “성 대표님, 사람이 어디가 문제인지 말씀해 보시죠?”성이남은 원래부터 강서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제대로 갖춘 능력도 없이 외모를 이용해 올라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리를 얻었다면 적어도 조용히 처신해야 한다고 봤다.그런데 강서이는 오히려 어디서든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성이남도 굳이 말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이 우습다는 뜻입니다.”성이남은 다리를 꼬고 비웃음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 대표님은 평범한 4년제 대학 학사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요즘 그 정도 학력이 대단한 경쟁력이 되는 것도 아니죠. 듣기 불편하실 수 있지만 사실이지 않습니까?”“평범한 학부 졸업자가 해외 최상위권 대학에서 금융학 박사까지 받은 사람의 분석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지 않습니까?”강서이가 차갑게 되물었다. “성 대표님 말씀은 금융학 박사면 실수할 일이 없다는 뜻인가요?”성이남이 다시 반박하려고 했다.그때 노아리가 적절히 끼어들었다. “강 대표님, 누구나 실수할 수 있죠. 정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고치겠습니다.”말을 마친 노아리는 성이남에게 고맙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잔뜩 굳어졌던 성이남의 미간이 겨우 풀렸다. 노아리의 태도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그릇이 큰 사람은 확실히 달랐다.하장현이 강서이에게 몸을 살짝 기울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성 대표님이 강 대표님께 편견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유독 강서이에게만 날이 서 있었다.강서이도 진작 느끼고 있었다.성이남이 왜 자신을 그렇게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 늘 논리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한번 생긴 선입견은 거대한 벽처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다. 아무리 애를
한지수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K시 토박이면 생활 기반도 탄탄하시겠네요.”강서이는 속으로 진짜 어이가 없었다.‘정말 저 입을 막아 버리고 싶다.’하지만 한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며 배준석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거의 소개팅 자리에서 신상 조사를 하는 수준이었다.배준석은 워낙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 한지수의 질문도 무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묻는 말마다 성실하게 대답했다.결국 견디지 못한 강서이가 한지수의 입을 손으로 막고 나서야 차 안이 조용해졌다.마침 차도 강서이가 머무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배준석은 강서이가 내리기 전에 다음 날 비행기가 몇 시인지 물었다.그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한지수가 강서이의 항공편 시간을 대신 말해 버렸다.강서이가 막을 틈도 없을 만큼 빨랐다.배준석은 웃으며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차가 떠난 뒤에야 강서이는 한지수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대체 뭐 하는 거야!”한지수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새 인생 살기로 했으면 새 남자도 만나 봐야지!”“배준석 씨 괜찮아 보이던데. 한번 생각해 봐.”강서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기가 막혀 하다가 결국 명언 하나를 던졌다.“남자는 돈 버는 속도만 늦춰. 알겠어?”...다음 날 이른 아침, 배준석은 약속이라도 한 듯 호텔 앞에 와 있었다. 공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강서이는 방으로 다시 올라가서 아직 자고 있을 한지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배준석이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거절하는 건 호의를 무시하는 모양새가 될 뿐 아니라 예의에도 맞지 않았다.결국 차에 올라탔다.다행히 배준석은 선을 잘 지켰다. 강서이가 불편할 만한 화제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중 배준석이 휴가를 내고 가족을 보러 왔고, 다음 주에 다시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배준석은 강서이를 공항 탑승 게이트 앞까지 데려다줬다. 강서이가 안으로 들어간 뒤, 배준석도 돌아가려다가 공교롭게도 성이남과 마주쳤다.성이남이 물었다. “형은 여긴 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