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그 대답은 성이남에게 뜻밖이었다.배준석은 워낙 이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집안에서도 그런 성향을 보고 공직의 길을 택하게 한 사람이었다.성이남이 아는 배준석이라면 첫눈에 반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것 같았다.게다가 배준석의 집안이 장래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기준도 높았고, 배준석 본인 역시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로웠다.그래서 성이남이 물었다. “형이 첫눈에 반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분이겠네요?”“맞아.” 배준석은 망설이지 않았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야.”성이남은 더 궁금해졌다. “대체 누구예요?”하지만 배준석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강서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감정을 공개하면 강서이에게 괜히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언젠가 정말 강서이와 연인이 된다면, 그때는 누구보다 먼저 세상에 당당히 알릴 생각이었다.성이남은 더 물어도 답을 얻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 사진을 한 장 찍어 노아리에게 보내며 축하한다는 말을 남겼다.노아리는 조금 뒤 답장을 보내면서, 배준석과 있는 곳이 금슬 프라이빗 클럽이냐고 물었다.성이남은 어떻게 알았냐며 되물었다.노아리는 사진 구석에 찍힌 금슬 로고를 표시해서 보내 줬고, 그제야 성이남은 자신이 장소를 드러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우리 쪽에 올래?]노아리가 물었다.성이남이 바로 대답했다. [친구랑 같이 와서 좀 애매해.]그러자 노아리는 어느 룸에 있는지 알려 달라며, 자기가 잠깐 들러서 인사만 하겠다고 했다.성이남은 거의 고민하지 않고 바로 룸 번호를 보냈다.노아리는 금방 찾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배준석을 발견하자 흠칫하며 굳어졌다.하지만 곧 평소의 여유를 되찾고 먼저 인사했다. “배 과장님, 오랜만이에요.”성이남이 의아하게 물었다. “두 분 아세요?”“응, 몇 번 봤어.” 노아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
두 사람이 강서이에게 완전히 넘어가서 자신과 거리를 두는 거라고 노아리는 생각했다.강서이는 유독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가려고 했다. 자신을 나쁘게 말하고 인간 관계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민도하는 빼앗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도 데려가려는 걸까?’참 공을 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안 오면 말아. 우리끼리 놀면 돼.” 노아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그때 성이남에게 메시지가 왔다. 방금 B시에 도착했는데 시간 되면 같이 식사하자는 내용이었다.노아리는 위치를 보내며 답했다. [타이밍 좋다. 나 지금 약혼 전 파티 중인데 사람이 별로 없어. 와서 자리 좀 채워줘.]노아리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성이남은 바로 가겠다고 대답할 뻔했다.하지만 약혼 전 파티라면 민도하도 분명 있을 것이다.잠깐 고민한 뒤 성이남은 정중하게 거절했다.대신 즐겁게 보내라는 인사를 덧붙였다.노아리는 ‘알았다’라고 짧게 답한 뒤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성이남의 마음에는 허전함만 남았다.이번에 B시에 온 건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곧 약혼하는 노아리를 한 번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었다.그런 만남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이곳까지 왔다.한참 뒤, 성이남은 배준석에게 전화했다. “형, 시간 괜찮으세요? 한잔하실래요?”배준석은 괜찮다고 했다.잠시 후 성이남이 위치를 보냈다.프라이빗 클럽 이름을 확인한 배준석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는 답답한 듯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배준석이 곧바로 물었다. [왜 하필 거기야?]성이남이 대답했다. “그냥 골랐는데요. 왜요?”[아니야. 금방 갈게.]사실 아무 데나 고른 곳이 아니었다. 성이남은 일부러 그 클럽을 선택했다.노아리가 바로 그곳에서 약혼 전 파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자신이 직접 참석해서 축하할 수 없다면 가까이에라도 있고 싶었다.배준석은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했다. 성이남이 물었다. “좋아하는 분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같이 오시지 그랬어요.”“
노아리가 그로스캐피탈이 곧 조송메디컬의 경영권을 확보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약혼 전 파티를 열고 있던 중이었다.평소라면 가장 신나게 떠들었을 서태우는 그날 내내 구석에 앉아 조용히 술만 마셨다.노아리는 서정송이 왜 그렇게까지 강서이를 믿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게다가 서태우의 태도를 보니 이미 그 결정을 받아들인 듯했다.“너 강서이 싫어했잖아. 그로스캐피탈이 조송메디컬에 들어오면 앞으로 자주 마주칠 텐데 괜찮겠어?” “네 말대로면 큰 결정은 다 강서이가 하고, 너한테는 실질적인 권한도 거의 없는 거잖아.” 노아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했다.서태우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사실 그 문제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서태우가 속에 품고 있는 건 훨씬 더 큰 비밀이었다.하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어 결국 침묵했다.중간중간 민도하를 흘끗 바라보며 뭔가 눈치챌 만한 게 없는지 살폈다.그러나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민도하는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강서이는 능력이 있어. 네 아버지도 그걸 보고 조송메디컬을 맡긴 거겠지. 앞으로 네가 강서이 말 좀 듣는 게 손해는 아닐 거야.”민도하가 강서이를 인정하는 말을 하자, 노아리의 마음이 왠지 가라앉았다.노아리는 저도 모르게 민도하를 바라봤다. 다른 여자를 칭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그 대상이 강서이라는 점이 더 그랬다.민도하는 과일 접시에 놓인 귤을 하나 집어 껍질을 벗겼다. 태도는 느긋했고 표정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마치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객관적인 평가를 했을 뿐, 다른 뜻은 전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귤을 다 깐 뒤 노아리에게 내밀었다. “이거 달다. 먹어 봐.”그 태도에 노아리도 다시 마음이 놓였다.달콤한 귤을 먹으니 마음까지 달아지는 기분이었다.노아리는 민도하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시가총액 40조 원짜리 상장사를 아무 대가 없이 자신에게 넘긴 사람이었다.노아리를 위해서 주주들의 압박도 혼자서 감당했다.민두해와 부딪치는 한이 있어도 약혼하겠다는
강서이는 끝내 그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태우 성격이 원래 저래.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서한승이 강서이의 잔에 다시 차를 따르면서 서태우를 대신해 몇 마디 덧붙였다.강서이는 개의치 않았다. “조송메디컬은 경영 구조 자체에 문제가 커요. 자금을 끌어와도 지금 구조로는 다시 살리기 쉽지 않을 거예요.”서한승도 문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만 본인 일만으로도 여력이 없어서 다른 곳까지 챙길 형편이 아니었다.그날 저녁, 서태우는 병원에 있는 서정송을 찾아가 강서이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기운 없이 누워 있던 서정송은 그 말을 듣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강 대표가 조송메디컬 지분을 가지겠다고 했다고?”“네. 그런데 조건이 너무 심해요. 지분도 가져가고 경영권까지 달래요.”“달라면 줘! 그걸 뭘 고민하고 앉아 있어!” 흥분한 서정송은 침대 가장자리를 두드리다가 기침까지 거칠게 터뜨렸다.서태우가 물을 건네고 등을 쓸어 준 뒤에야 서정송의 숨소리가 겨우 조금 가라앉았다.서정송이 서태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가자.”“이 밤에 어딜 가세요?”“강 대표 만나러 가야지! 마음 바꾸기 전에 지금 당장 가자. 나도 데려가!”서태우가 창밖의 어두운 밤을 한 번 봤다. “너무 늦었어요. 벌써 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럼 내일 아침 일찍 가! 무조건 제일 먼저 만나야 해. 강 대표 집 주소는 알아?”서태우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그럼 얼른 알아봐!”계속 재촉을 받자, 서태우도 어쩔 수 없이 강서이의 집 주소를 알아보기로 했다.머릿속으로 아는 사람을 훑어보니 강서이의 주소를 알 만한 사람은 민도하뿐이었다.전화를 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민도하가 받았다.서태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 방해한 거 아니지?”[아니. 왜, 무슨 일 있어?]“그게... 지금 통화 괜찮아?”강서이와 관련된 일이었다. 노아리가 알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 사
“뭐 하고 있어? 얼른 강 대표한테 의자도 빼 주고 차도 따라야지.” 서한승이 서태우를 재촉했다.보기 드물게 화를 눌러 삼킨 서태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강서이의 의자를 빼 주었다.“고마워.” 한지수가 거리낌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서태우가 직접 빼 준 의자였다. 이런 기회는 또 다시 오기 힘드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이 빼 주는 의자와 뭐가 다른지 한 번쯤 앉아 볼 만하니까.서태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금방이라도 한마디 할 기세였다.하지만 서한승을 통해 겨우 강서이를 만난 데다 한지수는 강서이의 절친이었다. 한지수를 건드리는 건 강서이를 건드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결국 참을 수밖에 없었다.서태우는 다시 강서이 앞으로 의자를 빼 주었다.“고마워.” 강서이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서태우는 바로 차를 우린 뒤 따르기 시작했다.강서이에게 건네려던 때, 한지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서태우는 이를 악물고 또 참았다.한지수가 한 모금 마시고 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차 좋네.”정말 차 맛을 칭찬한 건지, 다른 뜻으로 빈정댄 건지는 알 수 없었다.설령 자신을 비꼰 거라고 해도, 서태우가 할 수 있는 건 못 알아들은 척하면서 강서이에게 얌전히 차를 따라 주는 것뿐이었다.강서이는 잔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서한승이 서태우에게 이제 말하라는 눈짓을 보냈다.서태우는 곧바로 조송메디컬이 그로스캐피탈과 협업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강서이는 끝까지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마음이 급해진 서태우가 몇 번이나 서한승을 바라봤다.“조송메디컬 사정은 너도 어느 정도 들었겠지. 최근 2년 동안 성장세가 막혀서 상황이 썩 좋지 않아.”“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볼게. 지금 조송메디컬 상태에서 그로스캐피탈이 굳이 너희랑 손잡아야 할 이유가 뭐야?”강서이는 차분하게 서태우에게 되물었다.서태우의 표정이 달라졌다.강서이가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현실을 짚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더구나 지금 부탁하는 쪽은 서태우였다.“
민도하의 시선은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룸미러 아래에 걸린 작은 안전 부적에 머물러 있었다.한참 뒤 민도하가 입을 열었다. “저런 게 진짜 효과가 있어?”강서이가 바로 받아쳤다. “왜? 노아리 것도 하나 구해 주려고?”민도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병원 앞에 도착한 뒤에도 강서이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대신 민도하에게 노아리에게 전화하라고 했다.이런 상황이라면 노아리가 와서 돌보는 게 맞았다. 강서이는 이제 완전히 남이었다.오는 길에 병원까지 태워 준 것만으로도 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민도하는 피곤한 듯 눈을 내리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강서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흠칫하며 굳어졌다.너무 익숙한 말이었다.예전의 강서이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큰 고비를 넘기고 겨우 의식을 되찾았을 때, 강서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한지수에게 민도하한테 전화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민도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때 한지수가 뭐라고 했더라.’‘사랑 하나만 믿고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라고 했던가.’강서이는 이제야 그 별명을 벗어서 민도하에게 넘겨줬다. “힘내. 사랑 하나 믿고 돌진하는 용사님.”민도하가 걸음을 멈췄다. “너는 같이 안 들어가?”강서이는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민도하를 힐끗 보더니 그대로 차를 몰고 떠났다.민도하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피가 다시 배어 나오는 상처를 보며 말없이 웃었다.결국 병원 앞 화단 가장자리에 앉았다. 밀려오는 피로를 참으며 미간을 문지른 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에 불을 붙였다.원래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아니었다.다만 요즘은 어디에도 풀어놓을 수 없는 감정이 너무 많아졌다. 담배라도 피워야 조금 가라앉을 것 같았다.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연기가 민도하의 표정과 감정을 흐릿하게 가렸다....“진짜 그대로 두고 왔어?”강서이가 집에 돌아오자 한지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떻게 됐는지 캐물었다.강서이는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