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빗소리가 일정한 백색소음처럼 들려서 강서이는 오랜만에 푹 잤다.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진인자가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둔 뒤였다.진인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자고 가길 정말 잘했어요. 아침에 입주민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이랑 영상을 봤는데 너무 무섭더라고요.” “길 한 구간이 아예 내려앉아서 지나가던 차까지 빠졌대요. 다친 사람이 있는지도 아직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진인자가 한숨을 쉬었다. “민 대표도 어젯밤에 위험한 일은 없었는지 모르겠네요.”그건 강서이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말없이 식사만 이어 갔다.아침을 먹은 뒤 강서이는 진인자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내비게이션에는 도로 일부가 내려앉아 통행할 수 없으니 우회하라는 안내가 떴다.평소보다 늦게 회사에 도착하자, 데스크의 직원이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알려줬다.서한승이었다.강서이는 꽤 의외였다.서한승이 이유를 설명했다. “한동안 ZH은행 일 때문에 정신없어서 네 회사 제대로 둘러본 적도 없잖아. 강 대표, 괜찮으면 안내 좀 해 줄래?”“물론이죠. 그런데 30분만 기다려주세요. 아침 회의가 하나 있거든요.”“난 상관없어.” 서한승은 오늘 시간이 충분했다.강서이가 회의에 들어간 사이에, 서태우가 또 서한승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꿈결엔진이 오늘 ‘꿈결’ 미디어 쇼케이스를 연다며 노아리를 응원하러 같이 가자고 했다.서한승은 바로 거절했다. “시간 없어.”[뭐 하는데? 요즘 왜 맨날 시간이 없어?]“협력사 점검 중.”서태우는 더 이해가 안 됐다. [협력사 둘러보는 걸, 직접 해야 해? 그냥 빨리 와.]“네가 있으면 됐지. 나 이쪽은 바빠. 끊는다.”서태우가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서한승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다시 전화해도 안 받을 것 같자, 서태우는 서한승의 비서에게 연락해서 오늘 어느 협력사를 방문했는지 물었다.비서는 그로스캐피탈이라고 답했다.서태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서한승이 굳이 말을
객관적으로 봐야 올바른 판단도 내릴 수 있었다.차를 다 마신 뒤, 민두해는 바깥의 빗줄기가 더 거세진 걸 보고 강서이에게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라고 했다. 이런 비에 운전하는 건 위험했다.강서이는 상황을 조금 더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거실로 돌아오자, 식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민도하가 보였다.민도하도 마침 강서이 쪽을 보고 있어서 시선이 마주쳤다.두 사람의 눈길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강서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시선을 거두고 진인자에게 물었다. “배즙 드시고 좀 괜찮아지셨어요?”“훨씬 나아졌어요.”물론 기침이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다.진인자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민 대표는 서이 씨가 온 줄 몰랐어요. 제가 아프다는 얘기 듣고 들른 거예요.”강서이는 민도하가 자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착각할 만큼 자의식이 과하지는 않았다.“시간도 늦었으니 저는 이제 갈게요. 남은 배즙은 보온병에 담아 뒀어요. 생각나실 때 조금씩 드세요.” 빈 그릇을 주방에 가져다놓은 강서이가 다시 나오면서 진인자에게 말했다.말이 끝나자마자 바깥에서 엄청난 천둥소리가 울렸다.창문까지 덜컹거릴 만큼 거센 소리라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비도 갈수록 더 세게 쏟아졌다.진인자가 급하게 말했다. “관리사무소에서 방금 연락이 왔는데 근처 도로가 여러 군데 잠겼대요. 운전하면 위험하니까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될까요?”민도하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강서이도 안전을 생각해서 남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강서이가 거절하기도 전에 민도하가 먼저 말했다. “넌 그냥 있어. 난 좀 있다 갈게.”진인자는 민도하도 걱정됐다. “비가 너무 많이 와요. 길도 잠겼다는데 괜찮으시겠어요?”민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갈게요.”강서이는 입을 열어 민도하를 부르려고 했다.“민 대...” ‘민 대표’를 채 부르기도 전에 민도하는 이미 서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진인자가 두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며 가슴
‘또 무슨 바람이 든 거야?’강서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끊지도 않았지만 받을 생각도 없었다.그냥 울리게 놔뒀다.어차피 민도하는 참을성이 긴 사람이 아니었다.한 번 전화가 끝나자 핸드폰은 조용해졌다.민도하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강서이가 잠옷을 들고 다시 욕실로 가려는데, 하필 그때 또 전화벨이 울렸다.강서이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아예 전원을 꺼 버리고 평온한 밤을 방해받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런데 발신자는 진인자였다. 강서이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진인자의 심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강서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진인자는 기침이 너무 심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힘겹게 말했다. [서이 씨, 전에 기침에 좋다고 직접 만들어 주셨던 배즙 있잖아요. 그거 어떻게 만드는 거였죠?]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기침이 이어졌다.강서이가 바로 말했다. “직접 하지 마세요. 제가 가서 해 드릴게요.”[밖에 비가 너무 많이 와요.]“괜찮아요.” 강서이는 외투를 챙긴 뒤 바로 집을 나섰다. 최대한 서둘러서 민두해 집으로 차를 몰았다.진인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꽤 심했다. A형 독감 때문에 기침이 심해진 것이었다.진인자 말로는 꽤 전부터 기침이 이어졌고, 약을 먹고 수액까지 맞았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고 했다.그러다 지난해 독감이 유행했을 때, 강서이가 가져다준 도라지배즙이 효과가 좋았던 게 떠올라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제가 금방 만들게요. 잠깐 쉬고 계세요. 다 되면 말씀드릴게요.”진인자가 부탁했다. “그럼 조금 넉넉하게 부탁드려요. 회장님도 A형 독감이세요.”“네.”강서이는 익숙하게 주방으로 들어갔다.원래 요리에는 재능이 없어서 간단한 해장국이나 도라지배즙밖에 만들지 못했다.그마저도 민도하와 사귀고 난 뒤 일부러 배운 것이었다.처음에는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다.하지만 강서이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끝을 보는 사람
노아리의 눈에는 실망의 기색이 비쳤다.저녁 모임에 서한승이 나오기는 했지만 혼자였다.서태우는 낮에 같이 있던 여자는 왜 안 데리고 왔냐고 물었다.서한승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술자리 별로 안 좋아해.”“벌써부터 감싸는 거 봐라?”서태우가 놀렸다.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애지중지해?”“뭐가 그렇게 급해?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그때가 언젠데? 결혼식? 애 돌잔치?”“둘 다 될 수도 있고.”서태우가 벌떡 일어날 기세로 반응했다. “그러니까 진짜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응.” 서한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노아리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둘의 대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귀에 들어오자 표정이 굳어졌다.서한승과 알고 지낸 시간이 6년이 넘었지만, 서한승은 결혼 이야기에 진지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노아리가 몇 번 돌려서 떠봤을 때도 제대로 된 반응을 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노아리는 손에 든 잔을 꽉 움켜쥐었다. 표정도 편하지 않았다.다만 누구도 그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서한승은 자연스러운 척 민도하 쪽을 한번 바라봤다.민도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고요한 눈에는 방금 대화에 관심이 없다는 듯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아무리 캐물어도 서한승에게서 더 알아낼 수 없자, 서태우는 결국 포기했다.자기 잔에 술을 따르려다가 문득 보니, 민도하 혼자 어느새 반 병 넘게 비우고 있었다.“도하야, 왜 그래?” 서태우가 거의 빈 술병을 흔들었다. “접대 자리도 아닌데 뭘 그렇게 마셔?”민도하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주량 좀 늘리려고.”“아리 술 대신 마셔 주려고?”민도하가 답했다. “응. 곧 약혼식이잖아.”서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세심하다.”기분이 가라앉아 있던 노아리도 민도하의 말을 듣자 한결 나아졌다.노아리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하야, 너무 많이 마시지 마.”“알았어.”서태우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워낙 많이 봐서
두 사람은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다. 강서이는 시청에서 예정돼 있던 회의까지 미루고 서한승에게 따로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강서이가 데려간 곳은 보양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었다.매니저는 강서이와도 안면이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강서이를 반갑게 맞으며 요즘 숙면에 도움이 되는 한방 보양 메뉴가 새로 나왔다고, 한번 먹어 보겠냐고 물었다.강서이는 괜찮다고 했다.예전에는 민도하의 불면증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 보려고, B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괜찮은 보양식과 건강식을 찾아다녔다.몇 번씩 드나들다 보니 매니저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매니저는 강서이가 이젠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하자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요즘 통 안 오셔서 남자 친구분 불면증이 드디어 나아졌나 했어요. 정말 다행이네요.”강서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헤어졌어요.”매니저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몹시 난처한 표정이었다.강서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자리에 앉은 뒤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까 말씀하신 보양 메뉴 중에 속을 편하게 해 주는 것도 있어요?”“있죠, 있어요!” 매니저가 얼른 설명했다. “저희 사장님이 유명한 한의사에게 자문을 받아서 보양 메뉴를 여러 가지 개발했거든요.” “특히 위장에 부담도 없고 기력 보충에도 좋은 쪽으로 많이 연구해서, 반응도 아주 좋아요.”“한약 냄새는 안 나요?” 강서이는 서한승이 약 냄새를 싫어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거의 안 나요. 그래서 더 인기 있는 거예요.”매니저가 그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니 강서이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속을 편하게 해 줄 만한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매니저는 메뉴판에서 망설임 없이 황기 닭곰탕을 골랐다.그러면서 덧붙였다. “저희 사장님 여자 친구분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예요.”강서이도 말했다. “이거 괜찮아요. 제 비서도 비슷하게 자주 끓여 줘요. 선배님도 한번 먹어 봐요.”강서이가 골라 준 음식이니 서한승도 굳이 다른 걸 고르지 않았다.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강서이는 서한승
역시 예비 사모님이 받을 법한 대접이었다.노아리는 난처하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자랑스러운 기색이 더 많이 묻어났다. “도하도 참. 내가 애도 아닌데 뭘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다들 보기 민망하게.”부사장이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저희는 민망한 게 아니라 부럽습니다. 민 대표님과 노아리 본부장님 사이가 정말 좋으신 것 같아서요.”기분이 좋아진 노아리가 말했다. “도하가 너무 많이 보냈네요. 저 혼자 다 먹지도 못하니까 괜찮으시면 다 같이 드세요.”강서이와 하장현에게도 넉넉하게 같이 먹자고 권했다.강서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김설이 먼저 잘라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강 대표님은 돈 주고도 못 사는 정성 가득 도시락이 있으시거든요. 첨가물 잔뜩 든 배달 음식 안 부러워요!”그러고는 강서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대표님, 제가 먹을 거 챙겨 왔어요. 차에서 드세요.”“그래.”강서이가 자리를 떠나자 성이남은 그제야 속이 편해졌다.노아리가 같이 먹자고 하자 성이남도 거절하지 않았다.식사 중 성이남이 일부러 물었다. “아리 선배, 고상만 교수님 알아?”노아리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하지. 학계에서 워낙 유명하잖아. 이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성이남의 머릿속에 강서이가 떠올랐다. 곧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네.”자기 짐작이 맞는 듯했다. 노아리야말로 지도교수가 해마다 잊지 못하고 이야기하던 제자였다....차 안에서, 강서이는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고 김설에게 물었다.“이거 다 네가 했어?”“네! 어때요? 저 음식 좀 하죠?”“진짜 잘했네.”하장현도 동의했다. “이 정도면 식당 차리셔도 되겠는데요.”“식당은 생각 없어요! 저는 우리 대표님만 꽉 붙잡고 대표님 따라 인생 역전할 거예요!”김설은 강서이를 재촉했다. “대표님, 얼른 드세요. 식으면 맛없어요.”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서 보기 시작했다.강서이가 반쯤 먹었을 때 김설이 또 호들갑을 떨었다.강서이가 익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