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이야, ‘문심’ 상장하면 우리 제대로 식사 한번 하자.”그때라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강서이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서한승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약속한 거다. 그때 꼭 보자!”서한승을 보내고 집에 들어온 강서이는 샤워를 했다.이틀 동안 바쁘게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김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예보됐다며 문과 창문을 잘 닫으라고 했다.그제야 강서이는 노트북을 덮고 창문을 닫으러 일어났다.밖에는 벌써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강서이는 7층짜리 건물의 맨 위층에 있는 복층 집에 살았다.창밖으로는 아래쪽 나무의 꼭대기가 보였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그중 한 그루 아래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이런 날씨에 나무 밑에 주차하다니, 배짱도 좋네.’강서이는 더 신경 쓰지 않았다. 커튼을 닫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잠자리에 들었다....영안 회계법인과 바스테크가 계약한 바로 그날, 강서이도 무성 회계법인과 계약을 맺었다.이 업계에서는 소식이 빠르게 오갔다.노아리도 곧 그 사실을 알게 됐다.마침 이예수와 함께 피부 관리를 받던 중이었다.메시지를 읽자마자 노아리는 관리 베드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단톡방에 올라온 글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어떻게 이런 일이...”노아리가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강서이와 계약한 무성 회계법인은 업계 최정상급의 회계법인이었다.영안 회계법인조차 따라가기 어려운 곳이었다.노아리도 감히 노려보지 못한 곳을 강서이가 잡은 것이다.이예수에게 그 사실을 전하자, 이예수도 몹시 놀랐다.“강서이가 무성 회계법인하고 어떻게 만났지?” 이예수가 의아해했다.노아리의 머릿속에 바로 고상만이 떠올랐다.무성 회계법인은 고상만의 제자 중 한 명이 세운 회계법인이었다. 고상만을 통해 연결된 게 분명했다.결국 강서이를 도운 건 서한승이었다.‘강서이한
노아리는 걸음을 뚝 멈췄다.약간 앞서 가던 민도하가 노아리가 뒤따라오지 않는 걸 보고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노아리는 시선을 거뒀다.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방금 강서이와 서한승을 봤기 때문이다.두 사람만 보면 서한승이 강성대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7년 동안 마음에 품어 온 사람이 강서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노아리는 그 일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예약한 룸에 들어가니 남유환은 이미 와 있었다.서태우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도 몇 명 있었다.노아리는 룸 안을 둘러보고 물었다. “한승이는? 아직 안 왔어?”“일이 있어서 좀 늦는대.” 서태우가 대답했다.노아리는 속으로 비웃었다.‘일이라는 게 강서이랑 같이 있는 거였어?’서한승은 정말 한참이나 늦었다.파티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노아리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왔다. 일부러 VIP룸이 있는 구역에서 조금 더 머물렀다.예상대로 어느 룸 안에서 서한승이 보였다.바로 옆에는 강서이가 앉아 있었다.두 사람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웃으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서한승은 내내 강서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중간 음식을 덜어주면서 새우도 까 줬다.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정하게 챙겼다.그 모습을 보자 노아리의 속이 쓰렸다. 가슴에 가시가 깊이 박힌 듯했다.견디기 어려울 만큼 불쾌했다.마침 음식을 가져온 직원이 문을 조금 더 밀었다.그제서야 노아리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군지 똑똑히 봤다.바로 고상만이었다.며칠 전 함께 식사했을 때 고상만은 내내 무뚝뚝했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노아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서한승이 강서이한테 고상만 교수까지 소개해 줬다고?’강서이의 학력과 실력으로는 고상만 같은 사람을 만날 기회조차 없을 터였다.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고상만이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강서이가 계속 달라붙었다.‘정말 약삭빠르네!
성이남이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려는데, 하장현의 핸드폰이 울렸다.하장현은 성이남에게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업무와 관련된 소식을 듣자 표정이 바로 진지해졌다. “지금 돌아가겠습니다.”떠나기 전에 배준석에게 급히 인사를 건넸다.배준석도 이해했다. “회사 일이 먼저지요. 회의록은 나중에 다른 주무관이 정리하도록 해서 강 대표께 보내 드리겠습니다.”노아리는 가장 늦게 도착했다.회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노아리를 보고 저마다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성이남도 노아리에게 가려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만뒀다. 시야가 탁 트인 자리에 앉은 뒤로도 자꾸 노아리 쪽으로 눈길이 갔다.오늘 노아리는 혼자였다. 민도하는 함께 오지 않았다.덕분에 성이남은 조금 더 마음 놓고 노아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성이남의 옆자리에는 남유환이 앉아 있었다.하지만 남유환은 노아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줄곧 출입문 쪽만 보고 있었다.그러다 배준석이 회의장에 들어와서 개회를 알렸다.남유환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옆자리의 심진호에게 물었다. “강 대표는 안 오십니까?”심진호가 답했다. “글쎄요. 저도 찾고 있었는데요.”심진호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노아리가 우연히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그러다 곧바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강서이는 지금 제 앞가림도 못 하고 있겠지?’회계법인에 법무법인, 상장 주관사까지 노아리가 전부 다 빼앗아 온 상태였다.그렇다면 ‘문심’의 상장 계획은 아마 바로 멈춰 서게 될 터였다.솔직히 강서이를 한번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사방에서 일이 꼬이는 와중에도 태연한 척할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배준석의 본격적인 발언이 시작되자, 남유환도 비로소 강서이가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였다.꽤 아쉬웠다.이번에도 강서이를 볼 생각으로 참석한 자리였기 때문이다.그런데 또 허탕이었다.돌이켜 보니 강서이를 못 본 지도 한참 됐다.그렇다고 따로 만나자고 할 만한 적당한 명분도 떠오
고상만은 식사를 절반쯤 하다 핑계를 대고 먼저 일어났다.식사 모임이 영 재미가 없었다.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강서이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고상만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아직도 안 갔냐?”“교수님 기다렸죠.” 강서이가 가사도우미에게 눈짓했다.가사도우미가 곧 달여 둔 약을 가져왔다.고상만은 주사도 싫어하고 약 먹는 것도 질색이었다.그중에서도 탕약은 더 싫어했다.바로 몸을 일으키면서 도망치려고 했다.강서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바로 그 앞을 막았다. “하강진 원장님이 구하기 힘든 약재들을 정말 오래 기다리셔서 겨우 구하셨대요. 버리면 아깝잖아요.”“꼭 먹어야 하냐?” 고상만이 마지막으로 버텨봤다.“꼭 드셔야 해요.”결국 고상만이 졌다.강서이가 얼마나 끈질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고상만이 약을 다 먹은 뒤에야 강서이는 도움을 청할 일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고상만은 코웃음을 쳤다. “끝까지 나한테는 말을 안 하려나 했지!”업계에서 도는 이야기는 고상만도 전부 다 듣고 있었다.다만 강서이가 어디까지 해내는지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었다.고상만은 강서이를 대할 때 엄격한 어른처럼 굴었다. 비틀거리더라도 제 힘으로 앞으로 가기를 바랐다.넘어진다고 곧장 손을 내밀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보라고 격려했다.정말 크게 넘어져서 도움을 청할 때에만 손을 내밀어 줬다.강서이가 창업한 뒤 고상만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처음이었다.“그러니까 부탁할 게 있어서 약을 가져온 거야?”고상만은 그런 것까지 따져 물었다.강서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강진 원장님이 한참 기다려서 약재를 다 구하셨어요. 마침 시기가 겹친 것뿐이에요. 원래 진맥도 받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교수님이 도망가셨잖아요.”그제서야 겨우 기분이 풀린 고상만이 말했다. “도와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대신 내 조건 하나는 들어줘야겠다.”...다음 날 아침, 강서이는 다른 회계법인을 만나러 가야 했다. 시청 회의 참석은 하장현에게 맡겼
꽤 오래전 일이었는데도, 그 말을 하던 민도하의 냉정한 표정은 아직도 선명했다.강서이가 업무 중 성희롱을 당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상대는 함부로 관계를 끊을 수도 없는 중요한 고객이었다.너무 무서워서 눈시울을 붉힌 채 민도하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그때 돌아온 대답이 바로 그 말이었다.그 뒤로 강서이는 무슨 일이 생기든 혼자 해결하는 데 익숙해졌다.그때 너무 상처를 받아서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은 걸지도 몰랐다.민도하가 어떤 표정으로 말했는지까지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도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노아리였다면, 민도하는 절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차이를 확인할 때마다 강서이의 상처만 더 깊어졌다.강서이의 말을 들은 서한승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이야, 계속 혼자 버티기만 하면 지쳐.”강서이도 힘들다는 건 잘 알았다.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 말고 누굴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그런데 서한승이 다시 일깨워줬다. “너한테 아주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건 잊었어? 그분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강서이의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혹시...”바로 알아듣자 서한승의 눈에 웃음이 차올랐다.“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분.”다음날 강서이는 한의사 하강진과 함께 찾아갔다.하지만 고상만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미리 자리를 피해 버렸다. 강서이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아예 전화도 받지 않으니 강서이도 난감했다.‘그 연세에 아직도 진료받는 게 그렇게 무서우신가?’...그 시각, 고상만은 식사 모임에 참석해 있었다.평소라면 아예 나가지도 않았을 자리였다.오늘은 강서이를 피하려고 눈에 띄는 모임에 무작정 나온 것이었다.하필 민도하가 마련한 자리일 줄은 몰랐다.고상만을 보자 안상철은 곧장 자세를 낮췄다. “교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속으로는 노아리의 인맥에 감탄했다.‘노 사장... 고상만 교수까지 초대하다니.’다른 참석자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고상만 교수는 수년 전부터
안상철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함께하지요.”강서이는 노아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노아리의 눈에는 원하는 걸 손에 넣었다는 우쭐함이 묻어 있었다.노아리의 옆을 지나던 강서이가 걸음을 잠깐 멈췄다.흥미롭다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노 사장님은 남의 걸 뺏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스스로는 가치를 증명할 자신이 없어서요?”노아리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입가의 미소도 바로 사라졌다.안상철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강서이는 가볍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 대표님, 다음에 뵙겠습니다.”노아리를 더 몰아붙이지는 않았다.민도하가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었으니까.노아리의 체면을 깎는 건 민도하의 체면을 깎는 것과 같았다.그토록 노아리를 감싸는 민도하가 이번 일로 강서이에게 등을 돌리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영승반도체가 SH테크에 공유한 자원과 거래망을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만큼,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다.아래층으로 내려온 강서이가 연이도에게 전화하려던 참에 서한승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전화를 받자마자 서한승이 물었다. [너 영안 회계법인이야?]“어떻게 알았어요?” 강서이가 뜻밖이라는 듯 살짝 놀라면서 되물었다.[나도 근처야. 네 차를 봤어.]서한승이 전화 너머로 말했다. [잠깐 보자. 할 얘기가 있어.]서한승의 차는 건물 앞에 세워져 있었다. 강서이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서한승의 차를 발견했다.동시에 민도하도 눈에 들어왔다.민도하 역시 누군가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서한승과 마주치면서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건물에서 나오는 강서이를 본 서한승이 민도하에게 말했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네.”민도하의 서늘하고 무심한 시선이 강서이에게 닿았다.강서이는 그대로 민도하를 지나쳐서, 환하게 웃으며 서한승에게 다가갔다.“많이 기다렸어요?”“별로.” 서한승은 습관처럼 손을 뻗으면서 강서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곁에 있던 민도하는 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