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서프라이즈라는 게 나한테 약을 먹이고, 다른 여자를 방으로 보내는 거였어?”말을 이어가다가도 믿을 수 없는지, 어조에는 충격과 허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그러면서도 목을 움켜쥔 손만큼은 차마 힘을 주지 못했다. 혹여라도 정루아를 다치게 할까 봐.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구태윤의 굽어진 등허리가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그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정루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여태껏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해 왔지만, 오늘 밤 그 믿음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그녀는 정말로 마음이 떠난 것이다.기어이 이혼하겠다고, 이런 짓까지 마다하지 않다니.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오랫동안 원하고 바라서 난 그저 두 사람 마음을 이어준 것뿐이야.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정루아는 왠지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눈동자에 서린 참담한 감정을 차마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분명 먼저 정시연에게 마음을 준 건 구태윤 본인이었다.형수를 위해서라면 아내가 서러움을 겪든 억울한 누명을 쓰든 안중에도 없던 사람 아니던가.그런 남자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마치 자신이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눈빛을 보인단 말인가.그저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판을 깔아주었을 뿐.‘난 잘못한 게 전혀 없어!’“그거 알아? 난 네가 준다는 그 선물이 얼마나 기대됐는지 몰라. 나한테 보여준 그 다정한 온기에 이제 다시는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될 거로 생각했어. 그런데 이 모든 게 전부 거짓말이었어... 다 속임수였다고!”구태윤이 울분을 토해내며 악을 썼다.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조차 없는 듯 그녀만 뚫어지라 응시했다.정루아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던진 곳에는 남자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그녀는 흠칫 놀라다가, 이내 씁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전부 당신이 자초한 결과야. 처음 내가 이혼 얘기를 꺼냈을 때 받아들였다면, 이렇게까지 지긋지긋하게 얽히는 일은 없었어.”이내 손
정루아는 이미 구씨 본가를 빠져나와 차를 몰고 천천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짙은 어둠이 내린 차창 밖으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스쳐 지나갔고, 어스름한 차 안에서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단지 양손으로 핸들을 꽉 잡은 채 정면만 응시했다.‘서프라이즈’의 정체는 당연히 정시연이었다.방을 빼져 나온 그녀는 곧장 장옥경을 찾아갔다.자신의 선에서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끝났기에 남은 건 본인에게 달렸다.아마 장옥경도 정시연에게 귀띔해두었을 터였다.정시연이 그 제안을 마다할 리 없었다.그동안 온갖 수단을 동원해 구태윤의 눈에 들려고 발버둥 친 게, 결국 오늘 같은 순간을 노린 짓이 아니던가.정루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음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얼마나 지났을까.30분...그 약은 장옥경이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약효가 워낙 독해서, 30분이면 거사를 치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정루아는 옆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그때, 뒤에서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더니 한 차량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급정거했다.정루아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설마 실패한 건가?곧이어 차 두 대가 더 따라붙더니 양옆에 멈춰서면서 그녀의 도주로를 완전히 봉쇄했다.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부터인가 다른 차량이 단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운전석에 앉은 정루아는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싸늘한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마지막 차가 그녀의 뒤쪽에 멈춰 섰고,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정루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바라보자 남자의 왼쪽 팔뚝을 따라 선혈이 흘러내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등 뒤의 눈 부신 헤드라이트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그 모습은 마치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온 악마처럼 보였다.희미한 불빛 사이로 드러난 안색은 음산하고도 서늘한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정루아는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장옥경은 그녀를 붙잡고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갔다.옆에 앉은 구태윤이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아랫배에서 묘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 느낌은 아주 느리면서도 끈질기게 파고들었는데, 마치 정루아와 밤을 보낼 때처럼 야릇했다.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얼굴부터 가슴,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부부끼리 무슨 짓을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이내 입을 열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루아야, 어깨에 난 상처가 좀 욱신거리는데 올라가서 봐줄래?”장옥경이 정루아의 손등을 토닥이며 한마디 거들었다.“그래, 어서 가 봐. 태윤이가 널 구하려다 다친 거잖아. 흉터는 다 아물었는지 꼼꼼히 살펴 줘.”“네.”정루아는 마다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팔을 붙잡아 부축해주었다.구태윤이 몸을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넓은 손바닥이 허리춤에 닿자, 얇은 옷감 너머로 후끈거리는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마신 국에 무언가 들어있었다는 걸.정루아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위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신혼 방은 2층에 있다.그동안 박정란이 버티고 있었기에 본가에서 자고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그래서인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태윤의 뜨거운 숨결이 뺨에 훅 끼쳐왔다.곧이어 그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루아야...”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잔뜩 잠긴 채 짙은 욕망이 묻어났다.정루아가 입을 열었다.“아, 당신 주려고 챙겨둔 걸 깜빡했네. 잠깐만 기다려 봐, 금방 다녀올게.”하지만 순순히 보내 줄 구태윤이 아니었다.“뭔데? 이따가 가져와도 되잖아.”그리고 고개를 숙여 앙증맞은 입술을 탐하려 했다.정루아는 슬쩍 피하며 딱 잘라 말했다.“안 돼. 당신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데, 받기 싫어?”선물이라니?그 짧은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라도 그어진 것 같았다.팽팽한 기운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지만, 무형의 장벽에 가로막힌 듯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정루아는 어느새 평온함을 되찾았다.장옥경의 말이 맞았다. 오늘 밤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려면 구태윤과 대립해서는 안 됐다.그래서 아까 비아냥거렸던 것이 살짝 후회되기도 했다. 혹시라도 협조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게임 화면을 보다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구태윤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결국 정루아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밖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마침 거실로 들어선 장옥경이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루아야, 어디 가니?”“바람 쐬러요.”장옥경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멀리 가지 말고. 이따가 저녁 같이 먹자.”“네, 알겠어요.”정루아는 대답하고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조약돌 길을 걷는 동안, 그녀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오늘 밤 고비만 잘 넘기면, 이 징글징글한 이혼 소송도 드디어 매듭이 지어지겠지?이렇게까지 질질 끄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정루아는 정자 안으로 들어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앞을 응시했다.저녁.주방에서는 분주하게 손길이 오갔고, 도우미들이 요리를 하나씩 상에 차려냈다.정루아는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고, 구태윤은 서재로 올라간 뒤였다.그때 장옥경이 다가와 그녀에게 일렀다.“루아야, 올라가서 태윤이한테 내려와서 밥 먹으라고 하렴.”“네.”정루아는 대답하고 TV를 끈 다음 2층으로 향했다.똑똑 노크하자 안에서 들려오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문을 열고 복도에 서서 말했다.“밥 먹으래.”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구태윤이 고개를 들었다.그녀를 확인하는 순간, 날카로운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며 싸늘하던 얼굴에 비로소 온기가 감돌았다.“알았어.”그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시선은 정루아의 얼굴에서 떠날 줄 몰랐고, 무언가 말하
장옥경은 저택 밖으로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어느새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런 짓만 안 벌였어도 태윤이가 어머님을 해외로 보낼 일은 없었어요. 연세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세요?”박정란은 콧방귀를 뀌며 쏘아붙였다.“그럼 그냥 손 털고 앉아서, 정루아 그 년이 구씨 가문을 풍비박산 내는 꼴을 구경만 하라고? 저런 화근을 계속 남겨두면, 나중엔 우리 집안이 아주 쫄딱 망하고 말 거다!”“하지만 끝까지 이혼 안 하겠다고 버티는 건 태윤이에요.”장옥경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정루아는 이미 소장까지 접수했는데, 태윤이가 이혼 안 하겠대요. 뭐 별 수 있나요?”박정란이 코웃음을 쳤다.“저년이 무슨 수작을 부려서 태윤이를 홀려놨나 보지.”장옥경은 할 말을 잃었다.다만 중요한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했기에 진지한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어머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지금 태윤이는 구명 그룹 대표예요. 저한테 남은 자식이라곤 태윤이 하나뿐이고, 어머님께도 손주는 걔밖에 없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입에 담지도 마세요.”박정란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어머님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장옥경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뭔데 그래?”박정란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장옥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라고 정루아가 구씨 가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겠어요? 그래서 한 가지 묘안을 떠올렸죠. 태윤이랑 정시연을 이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태윤이가 먼저 이혼을 요구할 테고, 정루아도 자연스럽게 이 집을 나가게 되겠죠.”“안 돼!”박정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딱 잘라 거절했다.“너 미쳤니? 시동생이랑 형수가 눈이 맞다니, 집안을 아주 그냥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 이게 대체 무슨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야? 당장 그만둬, 난 절대 반대야!”“그럼 어머님께 다른 뾰족한 수라도 있으세요?”장옥경의 목소리가
별장 안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도우미들의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장옥경의 손에 앨범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정시연과 구하준의 모습은 거실에 보이지 않았다.안으로 들어선 정루아의 미간이 그제야 살짝 펴졌다.장옥경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태윤이랑 얘기는 다 끝났니?”“네.”정루아는 무덤덤하게 대답하고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하지만 뜻밖에도 장옥경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이리 와, 여기 앉으렴.”정루아는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자리를 옮겨 앉았다.“이것 좀 봐. 예전의 승태야.”장옥경이 사진 한 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태윤이보다 딱 한 살 많은데, 둘이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사진 속에는 풋풋하고 소년미가 물씬 풍기는 두 청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구승태였다.그 옆에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카메라를 향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구승태와 어깨동무를 한 구태윤이 보였다.두 사람은 이목구비도, 키도 쏙 빼닮았다.“승태는 성격이 유순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통솔력이 있었어. 그래서 구명 그룹을 이끌 후계자로 키웠고, 실제로도 자기 몫을 톡톡히 해냈지...”장옥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사진을 바라보던 정루아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더욱 혼란스러웠다.장옥경이 한숨을 내쉬었다.“하필 결혼하고 나서 이런 일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어. 눈이 썩었지, 골라도 어떻게 저런 여자를 골라. 정시연이 애만 안 가졌어도 이 결혼은 끝까지 반대했을 거야. 아쉽게도 아이는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다행히 결혼하고 나서는 승태가 가정에 충실했고, 정시연도 얌전히 잘 지냈어. 그런데 어쩌다 이런 비극이 생겨 가지고...”정루아는 시선을 거두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사모님, 지나간 일들은 다 잊으세요. 괜히 떠올려봤자 본인만 속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