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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Auteur: 낙화
“루아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시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고는 황급히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구태윤의 얼굴에 튄 물을 닦아주었다.

구태윤은 그녀를 밀어내고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정루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곁엔 사람이 필요해. 너 먼저 돌아가. 운전기사 불러줄게.”

정루아는 물병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었다.

“간병인을 부르든지, 집사에게 시키든지 하면 되잖아. 아무튼 오늘 당신은 반드시 나랑 이혼하러 가야 해.”

“이런 망할 것!”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정석주의 고함이었다.

임혜숙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정석주가 험악해진 얼굴로 말했다.

“정루아, 내가 전에 뭐라고 경고했는지 다 잊어버린 거냐?”

임혜숙이 서둘러 정루아의 손을 붙잡았다.

“루아야, 노부인께서 깨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이런 때에 그런 말로 어르신을 자극하면 안 돼.”

한 사람은 불같이 그녀를 꾸짖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있었다.

정루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모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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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60화

    안경 렌즈 너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앞을 가로막고 악을 쓰는 모녀를 바라보던 배진욱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요, 안 갈 테니까 진정해요.”결국, 그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루아 씨, 미안해. 내 능력으로는 의사 데려오는 게 한계가 있네.”배진욱의 목소리에는 짙은 죄책감이 묻어났다.정루아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던 마지막 희망의 불씨마저 꺼져버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애써 냉정을 되찾고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내가 다른 방법을 알아볼게.”배진욱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전화가 뚝 끊겼다.그는 한숨을 내쉬었다.조금 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가늘게 떨리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이유 모를 초조함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정루아는 병원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분명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실내인데도 온몸이 시려 왔다. 마치 끝없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그때, 묵직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체취에 눈을 질끈 감았다.귓가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루아야, 생각은 끝났어?”정루아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빛은 소름 끼칠 정도로 낯설었다.“구태윤, 너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앞으로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구태윤은 집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난 지금 이 순간이 더 중요해. 우리가 함께 있다는 거.”“...하.”정루아는 냉소를 흘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비참함이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망설일 시간 따위 없었다. 외할머니의 남은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결국 갈라진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 소송 취하할게.”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단한 가슴팍에 안겼다.다부진 팔뚝이 빈틈없이 에워쌌고, 수컷의 향기가 숨 막힐 듯 옥죄어 왔다.정루아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서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구태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59화

    정루아는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지금 진욱 씨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배진욱은 그녀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이내 차분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달랬다.“일단 진정해. 무슨 일인데? 차근차근 얘기해 봐.”정루아는 몇 번이고 깊은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추스른 뒤, 송문애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온 일을 털어놓았다.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배진욱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방법 찾아볼게.”정루아의 눈동자에 실낱같은 희망의 빛이 어렸다.“응, 부탁할게.”오죽 급했으면 그를 떠올렸을까.배진욱은 은혜를 갚겠다고 누누이 말했었다. 그땐 흘려듣고 대충 넘겼지만 지금은 유일한 동아줄이었다.가장 중요한 건 외할머니의 안위였으니까.응급 수술과 긴급 처치가 끝난 뒤, 송문애의 상태는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정루아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고 병실로 돌아왔다.외할머니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다.그녀는 침대 곁에 조용히 앉아 거친 손을 꼭 감싸 쥐고는, 이마를 손바닥 위에 갖다 대었다.마음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리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삼켰다.투박한 손은 여전히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평소처럼 다정하게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지도,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지도 않았다.왈칵 치밀어 오르는 설움에 정루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배진욱은 즉시 유명한 전문의를 수소문해 연락을 취했고, 전용기를 띄워 이곳으로 모셔 왔다.비밀리에 진행된 일이 아니었기에 배씨 가문 사람들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그들은 배진욱이 명의를 초청한 이유가 당연히 수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하지만 웬 유부녀의 외할머니를 치료하려는 걸 줄이야.배다인이 가장 먼저 나서서 반대했다.그녀는 사람을 시켜 공항에서 바로 전문의를 픽업해 본가로 데려오게 했다.“아빠가 누워 지낸 게 몇 년인데,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모셔 왔으면 아빠 치료부터 먼저 해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58화

    “할머니!”찢어질 듯한 정루아의 비명에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그녀가 급히 송문애를 부축했다. 중심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해 둘 다 바닥에 고꾸라질 뻔한 찰나, 구태윤이 잽싸게 붙잡아주었다.그의 얼굴 역시 순식간에 굳어졌다.“일단 외할머니부터 병원에 모셔.”그리고 곧바로 송문애를 번쩍 안아 들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내 차에 올라타더니 풀 액셀을 밟고 병원을 향해 질주했다.가는 내내 정루아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외할머니의 손을 꼭 맞잡은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려 구태윤을 노려보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추궁했다.“당신이 할머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핸들을 쥔 구태윤의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험악하게 굳어진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자신을 향해 그런 끔찍한 의심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차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정루아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외할머니가 왜 갑자기 쓰러진단 말인가.극한의 혼란과 공포 속에서 그녀가 원망할 대상은 지금 눈앞의 이 남자밖에 없었다.하지만 묵묵부답하는 그를 향해 더 이상 쏘아붙이진 않았다.지금 따져봤자 무의미하니까.그저 간절히 빌고 또 빌었을 뿐이다. 외할머니가 제발 무사하길 바란다고.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송문애는 곧바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마침내 나온 검사 결과는 청천벽력 같았다. 병명은 뇌종양이었다.종양의 위치가 워낙 위험한 부위라 이미 신경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수술 위험성은 상상을 초월했다.자칫하다가는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다리가 풀린 정루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구태윤이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뚝을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그가 의사를 향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전 세계적으로 가장 실력 있는 뇌종양 전문가를 모셔 온다면 생존 확률은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57화

    이른 아침.방문을 나선 정루아의 눈 밑에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왔다.그런 손녀를 본 송문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루아야, 얼굴이 왜 그래? 잠을 설쳤어?”정루아는 다가가 외할머니를 와락 껴안고는 어리광 부리듯 콧소리를 냈다.“밤새 악몽을 꿨거든요.”구태윤에게 온밤 시달렸으니, 악몽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송문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그럼 눈이라도 좀 더 붙여.”“싫어요.”정루아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할머니 오늘 가시잖아요. 공항까지 배웅해 드릴 거예요.”송문애가 말했다.“그럼 할머니가 아침상 차려줄게.”정루아는 마다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해주는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으니까.씻고 나온 그녀는 화장으로 피곤한 얼굴을 감쪽같이 가렸다.잠시 후, 송문애가 가스레인지 앞에 손을 짚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할머니, 나 예뻐요?”목소리를 듣고서야 송문애는 고개를 돌려 손녀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그럼! 예쁘고말고.”정루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가 송문애에게 찰싹 달라붙어 한껏 어리광을 부렸다.송문애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이내 넌지시 말했다.“자, 이제 밥 먹자.”“네.”아침상이 식탁 위에 오르자, 정루아는 한 숟가락 크게 떠먹으며 남다른 만족감을 드러냈다.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아쉬움도 감출 수 없었다.외할머니가 이대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송문애는 그런 손녀를 인자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마치 평생을 봐도 모자란다는 듯, 눈에 담고 또 담으려는 것처럼.열 살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정루아는 외할머니댁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엄마와 외할머니 사이가 유독 살갑지 못했던 탓이다.그러다 정시연을 입양한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억울하게 모함당할 때마다 서러움에 북받친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홀로 외할머니 집을 찾곤 했다.기가 막히는 건 그다음이었다.그녀가 외할머니 집에서 열흘이 넘도록 머문 뒤에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56화

    정루아는 말문이 막혔다.외할머니는 벌써 몇 걸음은 앞서 나갔다.구태윤과 아직 이혼 도장도 찍기 전이지 않은가.게다가 연애 같은 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추호도 없었다.한 번의 결혼 생활에 기를 다 빨린 터라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 있었다. 감정을 쏟아부을 여력조차 사치인데, 새로운 시작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났다.집으로 돌아와 외할머니와 함께 TV를 좀 보다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한밤중,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요란한 벨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비몽사몽 한 정루아는 발신자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고 무심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루아야.”수화기 너머로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는 끈질긴 집착과 애절함이 묻어났다.정루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미친놈.”짤막한 욕설과 함께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려 퍼졌다.단잠을 방해받아 짜증이 치솟은 정루아는 아예 수신 거부를 해버렸다.청야 라운지.어두컴컴한 룸 안,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들이 나뒹굴었다.장유성은 멍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는 구태윤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이내 침을 꼴깍 삼키며 입을 열었다.“태윤아,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집에 들어가지?”구태윤은 화면만 응시했다.“연결이 되지 않아...”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귓가를 맴돌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도드라진 목젖이 위아래로 꿀렁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 비친 그의 낯빛은 한층 더 짙은 그늘에 휩싸여 있었다.집에 가자고?그에게 이제 돌아갈 ‘집’ 따위는 없었다.구태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유성은 이러다간 정말 사달이 나겠다 싶어 조심스레 말렸다.“태윤아, 이미 마실 만큼 마셨잖아.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자.”“혹시...”구태윤은 그를 바라보며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내가 허도준처럼 위경련이 생길 때까지 마시면, 루아가 나를 보러 와줄까?”장유성은 묵묵부답했다.‘어림없지. 솔직히 말해서

  • 8년의 짝사랑을 폐기 처분합니다   제255화

    “할머니, 저 돈 있어요.”정루아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할머니가 그냥 가지고 계시다 쓰셔야죠.”“너 이혼하고 나면 돈 쓸데가 어디 한두 군데인 줄 아니? 주머니라도 두둑해야 든든한 법이다. 토 달지 말고 받아.”송문애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계속 안 받겠다고 고집 피울래? 그럼 내가 멀리서 혼자 늙어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때 그 돈이 어디로 새 나갈지 난 책임 못 진다.”“아니, 진짜..!”정루아는 발만 동동 굴렀다.“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송문애는 웃음을 터뜨렸다.“어차피 다 내 손녀 줄 생각이었어. 루아야, 사양하지 말고 그냥 받아. 일찌감치 네 이름으로 해놔야 할머니도 시름이 놓이지.”결국 정루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낳아준 부모라는 사람들은 입양 딸을 감싼답시고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켜 버렸다.결국 돈 한 푼 얻어내기 위해서 온갖 비참한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하지만 외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오직 지금 손녀의 처지만 걱정하며 전 재산을 내어주려 했다.정루아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서러움이 조금씩 녹아내렸다.비로소 수긍하는 정루아를 보자, 송문애는 큰 짐이라도 덜어낸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그 덕분인지 저녁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비웠다.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단지 내 산책로로 나섰다.그런데 우연히 배진욱과 마주쳤다.그는 하얀 사모예드 한 마리를 끌고 공원을 산책하는 참이었다.심플한 반팔에 편안한 바지는 한층 더 캐주얼한 분위기를 풍겼다.“루아 씨, 이분은 누구셔?”정루아는 웃으며 소개를 이어갔다.“우리 외할머니야.”“할머니, 이쪽은 제 친구 배진욱이에요.”“어르신, 안녕하십니까.”배진욱은 자세를 곧추세우며 한결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송문애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배진욱이 머뭇거렸다. 귀국한 뒤로 어른들이 나이를 물을 때면 대개 짝을 소개해 주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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