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화면을 확인하자, 허도준의 이름이 떠 있었다.“여보세요?”정루아는 베란다 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웃음기가 묻어나는 허도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며칠 뒤면 법원에서 조정 절차 때문에 연락이 갈 거야. 마음 준비 단단히 해둬.”이미 벼랑 끝까지 몰린 지 오래였다. 각오는 진작부터 마친 상태였다.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고 나지막이 물었다.“패소할 가능성도 있어?”“그럴 확률이 꽤 높지.”허도준이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매번 질 거라 겁먹을 필요는 없어. 만에 하나 이기기라도 하면 대박인 거니까.”정루아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당장 뾰족한 수는 없었다.“응, 알았어. 고마워.”“별말씀을.”허도준이 피식 웃었다.“수임료나 넉넉하게 챙겨주면 돼.”정루아가 미소를 지었다.“알았어.”전화를 끊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부동산 중개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집으로 할게요.”내부 인테리어가 완벽하게 끝난 곳이라 당장 몸만 들어와 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늦은 오후에 집 보러 왔기에 서류 절차는 다음 날로 미루었다.정루아는 중개사와 내일 다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배진욱은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다.그녀가 대화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이따가 또 다른 일정 있어?”“응, 연차 내고 왔거든.”정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회사에 들어가서 마저 일해야 해.”배진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스케줄 없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으려 했더니 아쉽네. 거기 레스토랑 진짜 괜찮더라. 또 가고 싶은데 참는 중이야.”“그럼 혼자 가. 아니면 친구 부르던가.”“사실...”배진욱이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귀국하고 나서 사귄 첫 번째 친구가 루아 씨야.”정루아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그럼 외국 나가기 전에는?”“어릴 적 친구들은 진작에 연락이 끊겼지.”배진욱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나 좀 불쌍하지 않아?”정루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건 진욱 씨가 애초에 친구 사귀는 데 관심이 없는 탓이겠
구태윤은 정루아의 허리를 낚아채 위로 번쩍 치켜들더니, 차가운 벽면에 밀어붙였다.처절한 몸부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루아야, 나 정관복원 수술했어. 이제 우리 진짜 아이 가질 수 있어.”“싫다고 했잖아, 당장 안 놔?”정루아는 그를 사정없이 할퀴었다.어느덧 목소리마저 갈라졌다.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남녀 간의 신체적 차이가 이 순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증명되었다.발버둥 치는 그녀의 저항은 마치 아이의 장난질처럼 손쉽게 제압당했다.광기만 남은 거친 행위가 끝난 뒤, 정루아는 녹차가 되어 있었다.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구태윤은 정루아의 아랫배를 쓸어내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루아야, 씨앗은 안에 심었어. 금방 싹을 틔울 거야.”정루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구태윤을 등 진 그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원망과 증오만 가득했다.이 남자가 지독하게 혐오스러웠다.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며 간신히 감정을 억눌렀다.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침실로 돌아온 구태윤은 그녀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이내 쌕쌕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정루아는 고단한 몸과 달리 정신이 유독 맑았다.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기다린 끝에, 그녀는 다리 사이의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서재로 향했다.서랍을 열어 꺼낸 것은 약병이었다. 미리 준비해 둔 사후 피임약이었다.구태윤이 언제 미쳐 날뛸지 모른다.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사람이며, 게다가 오래전부터 아이를 원한다는 뜻을 내비쳐 왔었다.그러니 정관복원 수술은 진작 해두었을 터였다.구태윤의 아이만큼은 절대 가질 수 없다.차가운 물 한 모금으로 알약을 삼키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녀는 맥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밤은 점점 더 깊어만 갔고, 짙은 고독만이 방안을 에워쌌다.가녀린 몸이 한껏 웅크려져 있었다.먹구름처럼 밀려오는 서러
정루아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결국 홧김에 그의 입술을 힘껏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두 사람의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지독하게 거북한 맛이었다.구태윤은 그제야 입술을 뗐다.거친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혔고, 코끝이 스칠 듯 바짝 밀착해 있었다.정루아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거렸다. 붉게 물든 눈시울이 그를 똑바로 향했다.“기분이 나빠? 당신이 화를 내는 이유는 뭔데.”차갑게 식어 버린 눈빛에 선명한 비아냥이 묻어났다.구태윤의 도드라진 목젖이 위아래로 일렁였다.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배진욱이랑 만나고, 내 말도 안 들었잖아.”“하!”정루아는 기가 막혀 실소를 터뜨렸다. 눈가가 한층 더 붉게 달아올랐다.“당신은 내 기분 따위 안중에도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내가 맞춰주길 바라는 건데?”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았다.두 손이 결박당한 탓에 이런 상황에서도 철저히 그에게 휘둘리는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엄연한 부부였지만, 단 한 번도 평등한 적이 없었다.“당신이 정시연 챙기고 구하준 돌보며, 그 모자 편들면서 나 괴롭힐 때 단 한 번이라도 내 기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싫다고, 그 사람들 만나지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을 때 당신 어땠는데? 나한테 무슨 짓을 했냐고!”손목이 부러질 듯 아팠지만 정루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부림쳤다.“당신은 내 기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어. 대체 당신한테 나는 뭐야?”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눈가는 더욱 붉게 물들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참으로 장했다.어쩌면 이제는 슬프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사랑이 식었으니까.예전의 그녀라면 구태윤과 정시연이 같이 있다는 소식에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곤 했다.그러나 지금은 가슴 한구석에 씁쓸함만이 감돌 뿐이었다.사랑을 잊는 법은 참 어려울 거로 생각했다.그런데 막상 해 보니 허무할 만큼 간단한 일이었
정루아의 마음이 뭉클해졌다.문득 배진욱이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남에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일 수도 있었다. 정작 자신에겐 그저 가벼운 호의였을지 몰라도.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이미 다 지난 일이야, 말이라도 고마워.”배진욱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나직하게 대답했다.“너무 부담 느끼지는 말고.”“알았어.”아파트 단지에 도착하자 정루아는 차에서 내렸다.배진욱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고, 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문 앞에 서 있는 길고 훤칠한 형체가 보였다.주위를 압도하는 차갑고 서슬 퍼런 기운 탓에 보기만 해도 오한이 서릴 정도였다.정루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나가려 했다.도무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대체 왜 또 나타난 거란 말인가.정말 너무하다 싶었다.“어디 가, 루아야.”구태윤이 걸어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꼭 움켜쥐고는 다른 한 손으로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았다.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스치자,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그녀의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쌀쌀맞은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오히려 내가 묻고 싶네. 왜 자꾸 찾아오는 거야?”“우리가 남이야? 아내가 있는 곳에 남편이 있어야지.”구태윤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그 새끼랑 밥 먹으니까 좋아?”낮게 깔린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정루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내 남자를 힘껏 밀어냈다.“내가 누구랑 밥을 먹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하지만 구태윤은 그녀의 반항을 진작 예상했다는 듯, 그대로 차가운 벽면으로 밀어붙였다.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고, 칠흑 같은 눈동자가 서서히 가늘어졌다.“루아야,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배진욱이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그 새끼 위험한 놈이야. 대체 왜 내 말을
“지난번 일은 정말 미안했어. 많이 놀랐지?”배진욱은 죄책감을 감추지 못했다.정루아가 대답했다.“솔직히 진짜 깜짝 놀라긴 했지. 근데 대체 그 사람들 정체가 뭐야? 다 잘 해결된 거 맞아?”“응.”배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거의 정리됐으니까, 이제 나랑 같이 있을 땐 겁먹지 않아도 돼.”그는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풀어내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아까 들어올 때만 해도 누구 기다리나 했더니, 혼밥하러 왔을 줄은 몰랐네.”배진욱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혹시 무슨 일 있어? 내가 도와줄 건 없고?”정루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지금은 딱히 없어. 걱정 마,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먼저 연락할 테니까.”“루아 씨가 나한테 전화한 적이 있었나?”그러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지금 한번 걸어볼래? 번호 저장해 두게.”정루아는 다소 의아해했으나, 어쨌든 친구 사이이기도 하고 혹시 나중에 정말 신세를 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낯선 번호로 뜨면 안 받을 수도 있으니까.이내 순순히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벨 소리가 울리자 배진욱은 화면을 확인하고 연락처를 저장했다.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이제야 좀 친구 같네.”정루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게 무슨 말이야?”“음... 솔직히 그동안은 살짝 거리감이 느껴졌었거든. 지금은 훨씬 편해진 것 같네.”배진욱은 담담히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정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혹시 더 먹고 싶은 거 있어?”“아니, 충분해.”레스토랑의 음식은 확실히 훌륭했다.배진욱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나중에도 꼭 다시 와야겠다고 덧붙였다.두 사람이 함께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 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배진욱이 길가에 서서 입을 열었다.“집까지 바래다줄게. 혼자 보내기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정루아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걱정 마. 우리나라 치안 좋은 거 알잖아
“그럼 내 사무실로 가지.”구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짜고짜 정루아의 손목을 낚아챘다.“싫다고!”정루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나 일하는 거 안 보여? 상처도 이제 나았으니까 그만 꺼져줄래? 괜히 눈에 거슬리지 말고.”하지만 구태윤의 시선은 그녀의 손목에 고정되었다.하얗고 매끄러운 손목뼈 위가 휑하니 비어 있었다. 영롱한 보라빛 다이아몬드 팔찌가 온데간데없었다.이내 칠흑처럼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구태윤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팔찌는?”정루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거추장스러워서 안 찼어.”자신이라는 존재는 눈에 거슬리고, 그가 준 선물은 거추장스럽다니.가슴 밑바닥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덧 눈빛마저 한층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정루아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나 이제 바빠지거든? 대기업 대표라는 분이 어쩜 이렇게 한가하신지 모르겠네.”구태윤이 한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그 팔찌, 내가 직접 찾아낼 거야. 그리고 발견하는 순간, 팔찌 대신 수갑 차고 집에 갇히는 줄 알아. 아무 데도 못 가게 할 테니까 각오해.”정루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병이 있으면 제발 병원 가서 치료나 받아!”말을 마치고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왔다.잠시 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이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루아야! 왜?”이연희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그도 그럴게, 벌써 구매자를 찾았는데 상대가 자그마치 3천 3백만 원이나 불렀기 때문이다.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정루아가 무기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팔찌 못 팔게 됐어.”“어?”이연희는 어안이 벙벙했다.“갑자기?”정루아가 대답했다.“구태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겠대. 만약 발작이라도 하면 그 후폭풍 우리 둘 다 감당 못 해.”눈앞에서 거액의 공돈이 날아갔다고 생각하자 이연희는 어깨가 축 처졌다.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친구의 신변 안전이 최우선이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