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장옥경은 한숨을 쉬곤 정루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대견함이 가득했다.정루아가 곧바로 손을 빼내며 건조한 목소리를 말했다.“사모님,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거리를 두는 며느리의 태도에 어색한지, 장옥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 너는 들어가서 외할머니나 잘 보살펴 드리렴.”정루아는 쌩하니 자리를 떴다.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옥경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하지만 머지않아 이 재수탱이가 구씨 가문 문턱을 두 번 다시 밟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홀가분했다....그 시각, 구태윤은 번호를 수시로 바꿔가며 끊임없이 문자 폭탄을 날렸다.스팸처럼 끈질기게 울려대는 바람에 정루아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하지만 장옥경에게 약속한 이상, 그의 장단에 맞춰 연기라도 해주는 게 득이 될 터였다.구태윤과 정시연을 확실하게 엮어놓으려면, 일단 경계심부터 풀게 만들어야 하니까.이때,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그녀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는 눈빛을 가렸다.[루아야, 나 상처가 다시 아픈데 와서 얼굴 한 번만 비춰주라.]정루아는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책상에 엎어버렸다. 그러고는 하던 일을 묵묵히 이어갔다....한편, 다른 병원.구태윤의 상처는 꽤 빠르게 아물어 어깨에 앉은 딱지도 곧 떨어져 나갈 참이었다.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답장이 없는 메시지창을 노려보던 그의 잘생긴 눈썹이 한껏 구겨졌다.똑똑.이때, 한민혁이 병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구태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한민혁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해외 용병 조직의 거래 내역을 파악하다가 의뢰인 명단에서 그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타깃 제거를 의뢰한 측은 익명을 썼지만, 정보가 발신된 출처를 추적해 보니 ‘노턴 바이오테크’라는
하지만 모든 것을 털어내고 나니, 오히려 한결 홀가분했다.정석주 부부의 편애에 상처받고 억장이 무너질 일도, 구태윤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흔들리며 전전긍긍할 일도 이제는 없었다.앞으로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했다.정루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보름만 더 지나면 외할머니도 퇴원해 집에서 편히 요양할 수 있을 터였다.그 무렵이면 업무도 전부 마무리될 테니 외할머니를 간호하는 일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다만 향후 커리어에 대해서는 아직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습격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이혼 절차 역시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기껏 다시 일에 뛰어들었다가 또다시 이런 사고에 발목이 잡히긴 싫었다.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주변의 모든 골칫거리를 말끔히 해결한 뒤에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는 것이다.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병상 맡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장옥경이 보였다.얼굴을 마주한 순간, 정루아의 매끄러운 눈썹이 대뜸 일그러졌다.“사모님께서 여긴 웬일이세요?”그녀가 입을 열었다. 호칭마저 낯설게 바뀌었다.장옥경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 그래도 네 외할머니가 이렇게 오래 누워 계시는 동안 얼굴 한 번 못 비춰서 계속 마음에 걸렸지 뭐니. 이젠 몸도 많이 추스르셨을 것 같아서 문병 겸 들러봤단다. 요즘 일하느라 많이 바쁘니?”“네, 그럭저럭.”정루아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가득했다.지금 시점에서 자신이나 외할머니 주변을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인간들은 전부 시꺼먼 속내를 감춘 독사로 보였다.장옥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마침 잘 왔어, 너한테 할 말이 있단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송문애를 바라보았다.“사돈어른, 저는 이만 방해하지 않을게요. 루아랑 단둘이 잠깐 얘기 좀 하고 갈게요.”송문애가 다녀오라고 손짓했다.“그래요.”병실을 나와 향한 곳은 비상계단이었다.정루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하실 말씀이 뭐죠?”장옥경의 눈
“멀쩡하게 살아 숨 쉬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리가.”정루아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아예 해외에 숨어 있었거나,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 발자취를 지워버렸거나 둘 중 하나겠죠.”도대체 왜 정시연 부모의 흔적을 철저히 은폐해야만 했던 걸까?그들은 원래 뭘 하던 사람이었지?어쩌다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었을까?정석주 부부와는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게다가 친딸인 자신을 외면한 채 정시연에게만 애정을 쏟아부었던 이유는 뭐지?정루아는 호기심에 휩싸였다.이내 김철웅을 응시하며 말했다.“최대한 정시연 부모에 대한 단서를 캐내 줘요. 그분들이 우리 부모님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김철웅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는 남은 물을 마저 비우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정루아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다실에 홀로 남아 김이 식은 차를 전부 비워냈지만,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정시연 부모의 미스터리와 김철웅이 언급했던 허도준의 존재까지.그녀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자신을 향한 끔찍한 습격이 설마 허도준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허도준은 지금도 그녀를 돕고 있었다.그가 아니었다면, 구태윤은 여전히 외할머니의 수술 건을 빌미로 이혼을 못 하게 협박했을 것이다.그런 사람이 대체 왜 자신을 암살하려 들겠는가?따라서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한 가설이었다.어쩌면 전부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하물며 해외의 용병 조직이라니?정작 그녀조차 자신의 정체가 언제부터 그런 위험한 인물의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이쯤 되니 진짜 신분마저 궁금할 지경이었다.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정루아는 찻집을 빠져나왔다.그동안 겪었던 끔찍한 일들 덕분에 차에 타기 전, 습관처럼 차량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며 꼼꼼히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올라탔다.운전석에 앉자, 휴대폰이 진동했
김철웅 역시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루아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혹시 본인도 모르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고 계신 거 아니에요? 평범한 민간인 상대로 해외 용병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이유가 없잖아요.”정루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 난 정석주랑 임혜숙 딸이 맞아요. 유전자 검사까지 직접 해봤는걸요.”김철웅의 험상궂은 얼굴에도 의문이 스쳤다.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낮게 중얼거렸다.“참 희한한 일이네.”...한편, 또 다른 병원 VIP 병실.한민혁이 새로 캐낸 조사 결과를 구태윤에게 보고했다.“허도준?”구태윤이 나지막이 읊조렸다.문득 지난번 정루아가 허도준의 힘을 빌려 윌리엄 박사를 압박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허도준의 이력과 배경 자체는 단순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해외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있었다.구태윤은 한민혁을 돌아보며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했다.“허도준이 해외에 머물던 시절의 족적을 낱낱이 파헤쳐.”“알겠습니다.”한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심쩍은 듯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혹시 과도한 억측 아닐까요? 제가 따로 확인해 봤는데, 허도준의 가족이 하필 그 요양원에 입원 중이더군요.”하지만 구태윤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이 세상에 과연 우연이 있을 것 같아?”애초에 의심이 갈만한 점은 허투루 넘길 생각이 없었다.정체 모를 자들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정루아의 목숨이었으니까.어찌 제 울타리 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하겠는가.한민혁이 금세 납득했다.“네.”그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가자, 구태윤은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정루아에게 연락했다.“연결이 닿지 않아...”귓가를 파고드는 차가운 안내음에 이마의 핏줄이 불끈 튀어 올랐다.자신을 차단하다니?그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지만, 이내 억지로 숨을 골랐다.바로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화면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구태윤이 급히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루아야
정루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더니,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왠지 나보다 네가 더 안달이 난 것 같다?”휴대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억울하게 당하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못 보겠었어서 그러지, 뭐. 게다가 나중에 이혼하면 내가 냉큼 낚아채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기도 하고.”정루아의 눈썹이 씰룩였다.“농담도 꽤 그럴싸하게 하네.”허도준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히 농담이지. 설마 나 진심으로 한 소리라 생각했냐? 근데 네가 속 썩이는 거 못 보겠다는 말은 진심이야. 지금이야 뾰족한 수가 없으니 기다린다지만, 구태윤이 보통 악랄한 놈이 아니잖아. 재판 날짜까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이번엔 우연히 사고가 터졌다 쳐도, 다음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니까.”“그래, 알았어.”정루아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이번 사건은 온전히 자신을 타깃으로 했기에 구태윤이 모든 걸 예측해 가며 판을 짰을 리 없었다.전화를 끊고 병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김철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루아 씨, 지금 시간 좀 되십니까? 얼굴 좀 보죠.”정루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첫 번째 일에 대해 뭐가 좀 나왔나요?”“네.”정루아가 짧게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조용한 데로 장소 잡아서 연락할 테니까, 그쪽으로 오세요.”“알겠습니다.”...다실 안은 은은한 찻내음으로 그득했다.방과 방 사이의 간격이 널찍한 데다 창밖으로 탁 트인 풍경까지 내다보이는 구조라, 엿듣는 이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김철웅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나지막이 말했다.“루아 씨, 이런 데는 어떻게 찾아낸 겁니까? 아주 고풍스럽고 좋네요.”정루아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예전에 남 따라 한 번 와본 적 있어요.”이내 맞은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일단 앉아요. 차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얘기하죠.”하지만 김철웅은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다.“
다만 정루아는 임혜숙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눈도, 마음도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문득 임혜숙의 가슴 속에 묘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그토록 굳게 믿었던 확신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정루아는 딸이니까, 제 몸에서 태어난 혈육이기에 언제든지 같은 편에 서 있을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이제는 장담할 수 없었다....정시연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어느새 눈물은 멈추었고, 흩어진 머리카락 뒤로 표정을 감추었다.정루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몇 년 동안 생쇼를 해대려니 너도 참 힘들지?”정시연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무릎을 펴고 똑바로 서 있었다.볼 위에 벌겋게 부어오른 손자국 때문에 전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보였다.그녀는 정루아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시종일관 나긋나긋했다.“루아야, 정말 회사 망하게 할 작정이야? 거긴 부모님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잖아.”정루아는 눈살을 찌푸렸다.뭔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여자는 어딘가 느낌이 쎄했다.이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연기를 하다니?결국 말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기만 했다.정시연은 부어오른 뺨을 손으로 감싸 쥐며 눈을 깜박였다.“왜 아무 말도 안 해?”“너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기묘한 이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정루아의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정시연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난 뭐 한 게 없는데...”말을 마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정루아는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하지만 당최 짐작이 안 갔고, 짚이는 것도 없었다.정시연이 굳이 병원까지 찾아온 건, 철저히 부모 앞에서 쇼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굴었다.이제 관객이 퇴장했으니 연기할 의욕도 사라진 건가?설마 아직도 옛날 버릇을 못 고쳤나?자신을 피해자로 포장한 뒤, 일부러 꼬리를 내려 부모의 죄책감을 유도하고 모든 탓을 그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