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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더러워.’ 홍시혁의 그 말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나의 감정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나만 알 수 있게 감춘 마음은 그런 것이다. 머리에, 마음에 새기듯 동의하자, 또 무엇에 화가 났는지, 나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당기며 말하는 홍시혁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저 이 상황이 무섭고 겁이 났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오늘 교복을 입고,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섰는데.
‘너! 이도진이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냐고!’
‘무슨…?’ ‘네 오디… 너, 이거 뭐야?’ ‘어…?’
목에 핏대가 서면서까지 고함을 치던 홍시혁은 갑자기 싸늘한 눈빛으로 거칠게 나의 교복 셔츠를 뜯어냈다. 반쯤 뜯어진 셔츠에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싸자, 몸이
도진이는 공식적으로 은퇴한 그날, 마지막 회식 이후…. 몇 주정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지내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제서야 겨우 도진이가 나를 걱정한 것이 이해됐다. 하지만 당사자는 만족하는 듯이 그간 해보지 못했던 취미생활에 집중하거나, 내게 붙어있거나…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미션처럼 클리어하고 있었다. 나 역시 사실상 백수인 상태라 집안에서 도진이에게 어울려주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하게도 내 것이 되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것이 되니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막상 영웅이의 결혼식이 곧 다가오는 것을 떠올리면 또 욕심은 용기와 함께 손잡고 어디론가 도망쳤다.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도 없이, 지금 저렇게 온 집중력을 퍼즐 조각에 쏟아붓는 도진이를 보니, 뭐 이렇게 있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율아.” “응.”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봐? 내 얼굴 뚫리겠어.”이미 알고 있었나?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미 흥미는 내게 넘어온 건지, 나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도진이는 은퇴한 지 몇 주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멋졌다.“응?” “잘… 생겨서 봤다! 왜!”결국 실토하자, 그 대답이 싫지는 않은지 잘게 웃었다.“이러다가 내가 못 생겨지면…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거 아니야?” “뭐?” “생각해 보니까, 넌 어릴 적부터 내 얼굴을 너무 좋아했어. 설마 얼굴만 보고 좋아한 거야?”종종 이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너는 귀엽다. 이런 소리를 듣는 순간이 행복했다.&
“하여튼, 이도진도 이도진이지만~ 누나도 이도진에게 참~ 약해.”결국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영웅이는 그 서류를 받고는 혀를 내둘렀다.“내가… 잘할 수 있을까?” “대표님은 이미 성공했다고 확신하던데?” “뭐?” “누나, 믿어. 대표님 직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어.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대단한 여자야.”그러고는 내 손에 자신의 청첩장을 쥐여줬다. 괜히 받아 든 청첩장에 마음이 또다시 꽁깃해졌다.“영웅아, 이거… 정말 내가 가도 될까?” “아니, 그럼 누나는 하나뿐인 나의 결혼식에 안 올 생각이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네 지인으로 몰래….” “이도진이가 그렇게 두겠어? 이제 곧 은퇴도 하겠다. 고삐도 풀릴 텐데.”영웅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도….” “뭐, 어쨌든 이도진이랑 같이 와도 서은율도 내 지인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 당당하게 들어와.” “난 그냥… 네 결혼식인데… 피해가 될까 봐….” “내 결혼식에 막 은퇴한 이도진이 오는 것만으로도 이미 뭐…. 그리고 그런 생각하지 마. 누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영웅이의 삐죽거리는 말에 웃음이 났다.“게다가 막말로, 도진이나 누나나 서류상으로도 문제 하나도 없는 사실상 남이잖아. 같이 살기만 했지. 언론도 몰라, 외부인도 아는 사람 거의 없어. 무슨 상관이야.” “엄마는… 아빠는… 이런 나나 도진이를…… 아, 아니야.”영웅이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진심에 조금 놀란 표정을 하더니, 입을 꾹 닫은 채 모르는 척
심장 소리가 불안감을 점점 잊게 했다.“서은율, 우리 돌아가면… 진짜 가족이 되자.”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소리에 시선을 회피했다. 지금 눈을 마주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나의 손을 꽉 잡고는 대답해 주지 않을 거냐고, 귀엽게 투정하며 재촉했다. 내 심정도 모르면서.“나랑 가족은 싫다며?” “누나로서 싫다는 거잖아.”괜히 퉁명스럽게 마음에 있던 응어리를 꺼내자,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을 하냐는 표정을 한 도진이를 보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불안감이 심장 소리에 덮인 것처럼, 이번엔 내 웃음소리에 심장 소리가 덮쳤다.“가끔 보면… 무드 깨는데, 뭐가 있어.”***“은율아, 얼굴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 누가 보면 피하는 줄 알겠네~” 뜨끔했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껄끄럽기는 했다. 대표님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내게 반갑다는 듯이 말을 걸었지만, 나는 몇 년 전에 진지하게 오해를 풀고 나서도 찜찜해서 괜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님이 내민 손을 잡고 어색하게 웃었다.“요즘 몸은 괜찮고?” “네….” “다행이네. 올 초만 해도 바짝 마른 콩나물 같더니.”바짝 마른 콩나물이라니. 그러고 보니, 홍시혁도 그 엇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나는 그런 이미지인가?“다음에 볼 때는 영웅 씨 결혼식장이겠네?” “아… 네, 네….” “와
오랜만에 그날의 꿈을 꿨다. 목에서 피가 나오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너의 질겁한, 새파랗게 질린 표정이…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이 너무 신경 쓰여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눈앞이 어질어질하며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와 함께 내 세상은 암전됐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얼굴부터 가슴까지 온갖 거추장스러운 기구들이 붙어있었다.‘목소리가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생각해야 해요.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일단은 체력 회복에 힘씁시다. 서은율 씨, 시간과의 싸움이니… 먼저 지치면 안 돼요.’제대로 정신이 들었을 때, 의사는 말했다. 몸은 더 이상 수술을 버틸 수 없고, 회복도 더디고 오래갈 것이니 장기전으로 봐야 한다고. 처음에는 실감 나지 않았다. 회복이 되면 일상생활에 가벼운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했었고, 그 당시 나에게는 더 이상 노래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와서 노래를 불러 봤자,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저 회복을 끝마치게 되면 나는 그 집에서 나와,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면 될 것이라 약을 먹으며 몽롱한 정신 속에서 막연하게 생각했다.하지만 뒤늦게 불안했다. 그날, 그곳에서 있었던 공포감과 목에서 느껴지는 이물감과 절망감, 뒤늦은 서러움이 밀려왔다. 극심한 정신 이상 상태는 생각보다 오래갔고,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지만… 문득문득 아빠나 영웅이에게 추태를 부렸던 것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는 어려웠다.‘괜찮아. 우리 딸은 강하니까. 이겨낼 수 있어. 얼른 일어나서 다시 노래도 하고 해야지.’수척한 얼굴로, 뼈가 도드라진 손으로 나를 안으며 진정시키던 아빠는, 얼른 회복하자고… 나의 노래가 얼른 듣고 싶다고
“컨셉?” “남친 컨셉으로 찍는다더라? 사랑하는 연인만 볼 수 있는 모습, 표정… 뭐 그런 거라던데. 완전 웃기지 않아!?” “아….” “엥? 생각보다 반응이 별론데?” “너는 이도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그래도 나름 탑배우잖아.“그런 것보다는… 나도 치정멜로 찍는 이도진이 더 궁금해.”그 말에 촬영스텝 말이 떠오른 건지 빵 터진 영웅이는 핸들을 치며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차 안으로 훅 들어온 짙은 향수 냄새와 맞춰 정색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운전대를 움직였다. 그 모습에 가는 눈을 뜨며 나와 영웅이를 번갈아 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자, 잠시 뒤 나의 어깨 위로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아까 차 안에서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어?” “어떻게 온 거야? 다른 스텝들 보면 어쩌려고.” “못 오고, 못 봐.”값비싼 호텔에서의 야경에 흠뻑 취했을 때,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 쳐들어온 도진이는 어울리지 않게 머리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따뜻한 곳이지만, 그래도 감기에 걸릴까 싶어 얼른 방안으로 끌고 오자마자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렇지 않게 ‘네가 치정멜로를 찍는 것을 상상했다.’라고 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곁에 바짝 붙은 도진이를 올려본 순간, 나른하게 내려보는 시선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머릿속에서 위험한 상상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을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옮기는 나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모습은 분명 어리광쟁이 이도진이 맞는데.“뭐.”왜
<서은율>“뭐…?”지금 도진이가 뭐라고 한 거지? 잘못 들은 건가?“대표님이 싱글….” “싫어!”아직 한 소절도 제대로 못 끝내는 실력으로 무슨 싱글이란 말인가? 게다가 어찌 됐든 정식으로 싱글을 발매한다는 것은 ‘데뷔’라는 의미 있는 행동이다. 그것 한 곡 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맥으로 덥석 물기에도 미안한 실력이다. 게다가 이제 와서 내게 그런 미련은 없다. 그저 홍시혁의 앨범에 참여한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이다음은 조금 더 후에, 조금 더 내게 용기가 생기면, 조금 더 목 상태가 나아지면… 그때로 미뤄도 괜찮다고 아직은 생각한다.“그거… 그냥 너 은퇴 막아 달라는 뇌물 아냐?” “그럴지도.”난 진심으로 말한 건데, 장난으로 받아들인 건지… 픽 웃는 모습에 괜히 심장이 쫄깃쫄깃했다. 솔직히 대표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은퇴를 번복하는 게 수월하다고는 하다만, 이도진의 성격상 절대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얼굴을 영영 묵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그건 영화계에 엄청난 손실이란 마음과 온전히 나만 볼 수 있다는 마음이 서로 부딪혀 괴로웠다.“왜 그렇게 봐? 뭐 묻었어?” “못 생겨서….” “거짓말.” “진짠데.”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이제는 능구렁이처럼 말하는 모습이 꽤 익숙해졌다. 괜히 그 허리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나를 끌어안는 모습도 익숙해졌다. 나는 여전히, 아직도 이 관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더 이상 복잡한 생각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