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설명은 결국 듣지 못했다. FDTC-2099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유진은 “잠깐”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이 너무 따뜻했다.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온기가 오래 비어 있던 외로움을 꼬옥 끌어안았다. 결국 유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꾹 삼켰다.
“괜찮아요. 이대로 편히 누우세요.”
조용한 침실. FDTC-2099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유진은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 때문에 작게 몸을 떨었다.
“추우세요, 주인님?”
“그…… 주인님이라는 말 그만해.”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이름?”
FDTC-2099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진이도 내 이름 불러줘.”
“네 이름? FDTC라고 부르라고?”
“좀 길긴 하지? 새로 지어줘도 돼. 너만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되었다는 증거로.”
FDTC-2099가 유진의 귓가에 쪽 입을 맞췄다. 입술은 천천히 턱으로, 목덜미로, 쇄골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유진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
“여기는 이름 불러줄 때까지 보류.”
숨결이 닿았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들었다. FDTC-2099가 재빨리 피해버리는 바람에 입술은 닿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에 유진은 괜히 침을 꼴깍 삼켰다.
“잔꾀는 안 통해, 자기야.”
능글맞게 말하는 FDTC-2099. 유진은 고개를 떨구며 피식 웃었다.
“자기?”
“이름 불러줄 때까지 나도 안 불러줄 거야.”
“바보 같은 이름으로 지으면 어쩌려고.”
“그럼 바보처럼 살게.”
FDTC-2099가 자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보기 좋게 붉은 입술로, 듣기 좋은 말을 참 쉽게도 한다. 유진은 도저히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빨간 종이 상자가 보였다. 잠이 안 올 때면 맥주 한 캔과 함께 먹던 과자 패키지였다. 상자에는 커다랗게 ‘제크’라고 과자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제이크는 어때?”
유진이 조심스레 제안하자 FDTC-2099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보가 아니라 과자처럼 살면 되는 건가?”
“아이돌 이름 같기도 하고 멋있지 않아?”
“글쎄, 뭐랄까. 나도 쟤처럼 이 예쁜 입에 먹힌다는 거지?”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FDTC-2099의 숨결이 유진의 입술로 넘어갔다. 뜨겁고, 달콤하고, 강렬한 키스였다. 유진은 키스만으로 녹아내릴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떨어지는 게 아쉬울 정도의 입맞춤이 끝나고, FDTC-2099, 아니 제이크는 말했다.
“응? 유진아.”
유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입안이 가득 찼다. 혀가 윗천장을 쓸고,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놓았다. 침이 섞였다. 숨이 막혀 고개를 젖히자 제이크는 능숙하게 그 목을 따라 내려갔다.
“제이크…….”
불러 주자 움직임이 달라졌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단숨에 벗겨버리고 가슴 위쪽, 브래지어 가장자리, 그 아래 순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천 너머로 이미 딱딱해진 젖꼭지를 물었다. 한 손은 유진의 허리를 감싸고, 한 손은 유진의 수면바지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유진의 허리가 침대에서 떴다.
“민감하네.”
제이크가 낮게 말했다. 말투가 꼭 칭찬을 하는 것 같았다. 브래지어 패드를 아래로 걷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먼저 닿고, 바로 뜨거운 타액으로 젖어들었다. 입술로 빨아들이고, 혀로 돌리고, 이가 살짝 스쳤다. 유진의 무릎은 꼭 제자리를 찾아가듯 자연스레 제이크의 허리에 감겼다.
“하아. 잠깐만. 너무…….”
“좋아? 싫어? 어느 쪽이야.”
“좋아…….”
제이크의 웃는 숨이 가슴에 떨어졌다. 이미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던 손은 천천히 수면바지를 벗겼다. 제이크의 손길이 부드럽게 유진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어찌나 부드럽던지 유진은 ‘극세사라더니 거짓말이었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있다니, 자존심 상하네.”
부드럽던 손길이 조금 거칠어졌다. 허벅지 안쪽은 이미 흥건히 젖어 천이 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위를 문지르자 질퍽한 소리가 났고, 손가락을 빨아들일 듯 움찔거렸다. 손가락은 기다렸다는 듯 속옷을 옆으로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 마디, 곧 두 마디. 안쪽이 꽉 물려 들었다. 유진이 숨을 삼키며 제이크의 팔뚝을 꽈악 잡았다. 제이크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조임을 확인하듯 손가락을 천천히 굽혔다 폈다. 엄지는 바깥의 볼록한 점을 원을 그리며 눌렀다. 유진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오래 안 했음을 너무 정직하게 표현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허리가 떨리고, 밑이 젖어갔다.
“그렇게 좋아?”
제이크는 손가락을 빼고 바지를 벗었다. 잔뜩 성이 난 물건을 자랑하듯 손바닥으로 한 번 슥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묻어있던 유진의 윤기가 제이크에게 옮겨갔다. 딱 좋은 길이. 딱 좋은 굵기. 그리고 자신의 것으로 젖어버린 그 물건을 보고 유진은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보채지 마. 지금 바로 넣어줄게.”
유진의 눈빛을 읽은 듯, 제이크가 피식 웃으며 유진의 다리를 벌렸다. 힘 좋은 팔로 유진의 몸을 확 끌어당겨 제 허벅다리 위에 올렸다. 자연스레 둘의 예민한 것들이 맞닿았다. 제이크는 허리를 파도처럼 움직이며 입구에 비볐다. 그리고 천천히 유진의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읏……!”
유진은 숨을 참았다. 아직 끝까지 넣지 않았음에도 쾌감으로 몸이 가득 찼다. 제이크는 반쯤에서 멈추고 입을 맞췄다. 허리를 아주 작게 흔들어 유진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렸다.
“숨 쉬고 힘 빼, 유진아.”
제이크가 쉬이─하고 귀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곤 움찔. 푸스스 웃었다.
“힘 빼라니까 더 주면 어떡해.”
귓가에 내려앉는 숨결과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는데 유진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물며 몇 년 만의 섹스인데. 유진은 괜히 제이크를 한 번 째려보았다. 제이크는 웃으며 입을 맞추곤 한 번에 쑥 밀어 넣었다.
“흐으읏─!”
유진의 발가락이 말렸다. 제이크는 멈추지 않았다. 부드럽게 빠져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방 안 가득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진아. 내 이름 불러줘.”
허리짓을 유지하며 제이크가 말했다. 그의 물건은 끝까지 넣었다가 거의 빠질 때까지 빼고, 다시 천천히 채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제, 제이크…….”
제이크는 눈동자만 움직여 유진을 바라보았다. 몽롱한 눈빛으로 달콤한 신음을 연신 내뱉으며 힘겹게 자신의 이름을 내뱉는 유진. 미간에 주름이 져있었지만 이건 만족스럽다는 표시다. 제이크는 각도를 바꿨다.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긁었다. 앞을 엄지로 문지르며 세게 박아댔다. 유진은 소리를 삼키지 못했다. 짧고 높은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제이크는 그 소리를 마치 먹듯이 입을 막았다. 찐득한 키스와 함께 허리짓이 더 빨라졌다.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커졌다. 유진의 다리가 허리를 조였다. 정점이 코앞까지 오자 제이크가 이마를 붙이고 낮게 말했다.
“같이.”
그 한마디에 유진의 허리가 먼저 접혔다. 안이 강하게 오므라들며 떨렸다. 제이크는 그 조임을 이기지 못한 듯 허리를 깊게 박고 멈췄다. 뜨거운 것이 안쪽에 퍼지는 감각이 왔다. 유진은 그 열을 느끼며 떨었다. 제이크는 꼬옥 안아주며 이마에 입 맞췄다. 유진은 움찔했다. 제이크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론 그저 자기와 함께 실컷 즐기기만 하면 된다고. 목덜미에 빛나는 연둣빛 작은 버튼 하나로.
제이크가 왜 집에 있는 것인지 여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유진의 몸은 쾌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반대로 머리는 복잡했다. 이젠 정말로 설명을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으음! 밥 맛있다.”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집에서 밥은 잘 해먹지 않아 먼지만 뽀얗게 쌓여가던 밥솥이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 밥솥을 끌어안고 들어가는 샤머니즘 섞인 세리머니 이후론 크게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제이크는 그걸 꺼내 깨끗하게 닦고 씻어 묵은 쌀로 밥까지 지었다.“오래된 쌀인데 너무 맛있어.”“아, 새로 사 온 쌀이야. 유진이한텐 좋은 것만 먹이고 싶어서.”묵은 쌀을 어찌 먹겠냐는 말을 참 예쁘게도 돌려 말하는 제이크다.“찌개 재료도 다 사 온 거야? 이 조개도?”유진이 먹음직스러운 순두부찌개 속 바지락을 하나 건져 올리며 물었다. 제이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겠지. 먹을 거라곤 레토르트 식품과 제로 콜라가 전부인 집에 바지락이라는 고급(?) 식재료가 있을 리가.“빨래도 다 됐나 보다. 나 옷 입고 올게.”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슈베르트 송어 멜로디가 들려오자 제이크가 벌떡 일어났다. 유진의 시선도 무의식적으로 제이크를 쫓았다. 하지만 바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적절하게 근육이 붙은 단단해 보이는 엉덩이 두 짝과 그 사이로 튀어나온 그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앞모습도 충분히 숭했지만 뒷모습이 수십 배 숭하고 자극적이었다.생각해 보면, 유진의 옷 중 조금 큰 걸 골라 입어도 됐을 터였다. 유진은 그렇게 마른 체형이 아니었고 나이 때문에 편한 옷을 선호해, 큼지막한 티셔츠와 바지도 여러 장 가지고 있었다. 옷장을 열면 바로 보였을 텐데 제이크는 왜 미련하게 발가벗고 있었을까.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똑똑한 인공지능인 그가. 답은 뭐 뻔했다. 일부러. 그 일부러가 서비스가 되었든 입력된 설정값이 되었든 어쨌든 일부러인 건 맞다. 유진을 위한 일부러.“밥 다 먹으면 옷 사러 가자!”유진은 눈을 새하얀 쌀밥에 똑똑히 박은 채 말했다. 뒤에서 대답 대신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주말의 백화점은 꽤나 시끌벅적했다. 하나같이 어여쁜 FDTC와 사이좋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그 사이에는 혀를
아침 공기는 차갑지 않았다. 이불도 포근했다. 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천장만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만 남아있었다. 역시 꿈이었나 생각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부엌에서 국이 끓는 소리, 도마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와 같은 리듬이었다. 유진은 지난밤 자기 전 제이크와 함께 읽었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밤새 켜놓은 탓에 방전이 되어 있어 다시 읽지는 못했다.“유진이 일어났어?”제이크가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맨몸에 앞치마만 두른 낯부끄러운 차림이었다.“그것도 무슨 서비스 같은 거야?”유진의 말에 제이크가 푸핫 웃었다.“어제 입었던 건 지저분해져서 빨래 돌리고 있어. 아무것도 안 두르고 있기도 뭐 해서 그런 건데 너무 숭한가?”“그럼 이따 백화점에 옷 사러 가자. 격일로 알몸으로 만들 순 없으니까.”“난 매일 알몸이어도 좋은데.”제이크가 능글맞게 웃으며 한쪽 눈썹을 찡긋 들어 올렸다. 유진은 어휴 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는 그런 유진의 모습이 마냥 귀여운 듯 앞치마 끈을 천천히 풀며 다가왔다.“하루아침에 내가 익숙해졌나 보네? 다시 낯설게 만들어줄까?”이미 단단해진 물건을 유진의 허벅지 사이에 꾸욱 누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제이크. 유진은 다급하게 그를 밀어냈다.“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어제도 아침에 했잖아.”빨개진 얼굴로 제이크를 밀어내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제이크도 그걸 알고 더욱 들이밀었다.“제, 제이크. 하아…….”겨우 두 번째 섹스지만 제이크는 항상 부드럽고 따뜻하게 유진을 탐했다. 시작은 늘 키스부터. 이마, 볼, 코, 귓가를 차례로 쪽쪽 따뜻한 입맞춤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입술엔 조금 더 길고 깊게. 유진이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리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밀어 넣었다. 서로의 따뜻한 타액이 뒤섞였다. 제이크의 타액은 유독 달콤했다.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맛이 안 났을 텐데. 유진은 키스를 하는 와중에 FDTC-2
FDTC-2099의 탄생 비화로 다시 돌아가보자.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확보한 대표적 AI 기업들은 피지컬 AI 산업으로 손을 뻗어, 집안일이나 간병을 돕는 전형적인 가정용 로봇 라인을 구축했다. 기업은 해당 라인의 방향성만 조금씩 틀어 더욱 다양한 로봇을 적극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건 애완 로봇이었다. 강아지, 고양이 같은 동물의 모습을 한 것은 물론 일반 로봇을 작게 축소한 외형의 로봇도 있었는데 모두 생각지 못한 방식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펫로스 증후군으로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먼저 떠난 반려동물의 성격, 버릇 등을 AI 특성에 입력하면서 추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영역은 점점 확대되어 사람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먼저 떠난 가족, 사랑하는 사람, 그리운 사람…… 잠깐. 그리운 사람이 꼭 죽은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법이다.여기서 스타 구독 서비스가 생겨났다. 특정 스타의 모든 특성을 설정해놓고 외형도 커스텀으로 똑같이 꾸민다. 배우, 가수, 유튜버, 인플루언서 그 누구도 상관없다. 좋아하는 스타의 아바타를 바로 내 곁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뭐든 할 수 있다. 정말이지 뭐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차피 연예계는 인간을 뛰어넘는 외모와 실력의 AI 스타들의 등장으로 진짜 인간 스타들이 설자리를 많이 잃어가는 추세였다. 일감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에서 스타 구독 서비스에 등록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경쟁력을 잃은 지금, 선택지는 몇 없었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라는 말은 많았으나 사람들은 점차 익숙해져 갔다. 스타들도 막상 등록한 이후에는 크게 만족했다. 자기의 데이터를 한 번 등록하는 것만으로 매달 꼬박꼬박 커다란 수익이 들어오니 당연했다.물론 스타의 모든 특성을 구현한다는 광고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었다. 음식 취향과 잠버릇, 웃을 때 어느 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가는지, 당황하면 어디를 만지는지, 인터뷰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받으면 표정이 굳기 시작하는지도 자료만 있
설명은 결국 듣지 못했다. FDTC-2099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유진은 “잠깐”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이 너무 따뜻했다. 사람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온기가 오래 비어 있던 외로움을 꼬옥 끌어안았다. 결국 유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꾹 삼켰다.“괜찮아요. 이대로 편히 누우세요.”조용한 침실. FDTC-2099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유진은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 때문에 작게 몸을 떨었다.“추우세요, 주인님?”“그…… 주인님이라는 말 그만해.”“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이름?”FDTC-2099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진이도 내 이름 불러줘.”“네 이름? FDTC라고 부르라고?”“좀 길긴 하지? 새로 지어줘도 돼. 너만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되었다는 증거로.”FDTC-2099가 유진의 귓가에 쪽 입을 맞췄다. 입술은 천천히 턱으로, 목덜미로, 쇄골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올라와 유진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여기는 이름 불러줄 때까지 보류.”숨결이 닿았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들었다. FDTC-2099가 재빨리 피해버리는 바람에 입술은 닿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에 유진은 괜히 침을 꼴깍 삼켰다.“잔꾀는 안 통해, 자기야.”능글맞게 말하는 FDTC-2099. 유진은 고개를 떨구며 피식 웃었다.“자기?”“이름 불러줄 때까지 나도 안 불러줄 거야.”“바보 같은 이름으로 지으면 어쩌려고.”“그럼 바보처럼 살게.”FDTC-2099가 자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보기 좋게 붉은 입술로, 듣기 좋은 말을 참 쉽게도 한다. 유진은 도저히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빨간 종이 상자가 보였다. 잠이 안 올 때면 맥주 한 캔과 함께 먹던 과자 패키지였다. 상자에는 커다랗게 ‘제크’라고 과자의 이름이 쓰여있었다.“제이크는 어때?”유진이 조심스레 제안하자 FDTC-2099가 어깨를 으쓱했다.“바보가
환호성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유진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 있는 이곳은 집이 맞다. 꼬집으면 아픈 걸 보니 꿈도 아닌데.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눈이 시릴 정도의 외모를 자랑하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굴까. 설마 어제 마지막으로 들른 혼술바에서 콱 물어온 남자일까? 대박인데! 내 수준에? 내 수준이 뭐가 어때서! 이 정도의 남자를? 그건 그래! 근데 잠깐만. 분명 아까 일어났을 땐 집에 아무도 없었는데? 역시 그냥 빈집털이 같은 거 아닐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거고? 근데 이렇게 잘생겼는데 좀도둑이라고? 끝없이 이어지는 물음표에 느낌표를 달 수 없을 경지에 이르자, 유진은 물었다.“누, 누구세요?”남자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생긋 예쁘게 웃었다.“서운한 질문이네요.”완벽한 얼굴에 완벽한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 유진은 자신이 감히 이 천사 같은 남자의 마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석고대죄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미, 미안……”“제 이름은 FDTC-2099 ver.7.1입니다.”“……예?”유진은 다급히 남자의 목덜미를 살폈다. 빛나는 연둣빛 점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버튼이 보였다.“뭐야. 로봇이잖아?”갑자기 긴장이 턱 풀렸다. 다리에 힘이 빠지자 몸이 저절로 주르륵 내려앉았다. FDTC-2099가 재빨리 유진의 허리를 잡았다.“괜찮으세요?”남자가 로봇이라는 건 알았지만 여전히 상황 파악은 안 되는 상태. 유진은 FDTC-2099의 부축을 받아 식탁 의자에 앉았다.“정부 지원 로봇이 왜 우리 집에 있지.”유진이 중얼거렸다. 정신 사나웠던 어젯밤을 돌이켜보며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 회상을 돕기라도 하듯, TV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2099년 10월 1일 목요일 오전 10시. FDTC-2099의 업데이트가 진행됩니다. 이번 업데이트는 버전 7.1의 단점 보완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무료 커스텀 패키지가 20종 추가됩니다. 용량 부족 시 자동 업데이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사전에 메모리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유진은 잠에서 깼다. 침대 옆자리를 더듬어도 손에 잡히는 건 없고, 미니스커트에 끈나시, 속옷까지 착실히 입고 있는 자신만 있었다. 날씬해 보이려 입은 압박 거들은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다. 잠결에 불편해 벗어던진 모양이었다. 어제 몇 시까지 마셨더라. 남자 하나, 아니 이젠 여자여도 상관없다. 그저 말라비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제 꽃잎을 촉촉이 만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물 한 방울이 절실한 그녀는 지난밤, 아슬아슬한 옷차림과 진한 화장으로 본모습을 가리고 클럽이다, 술집이다 여기저기를 전전했다. 하지만 말을 걸어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진짜 늙어 보이나?”유진은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요리조리 비춰보았다. 곧 마흔을 앞둔 눈가에 미세한 주름이 끼었다. 그 사이엔 짙게 펴 바른 파운데이션도 하얗게 떠 있었다. 남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든 관심을 얻어보려 방긋방긋 웃어 보인 결과였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예전엔 미소 짓기만 해도 남자들이 우르르 넘어왔었는데, 이젠 클럽 도어맨에게 웃돈을 얹어주지 않으면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아직까진 웃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려나.유진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결국 이번 주말도 혼자구나. 쓸쓸한 마음이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큰 성공을 거둔 위인이 되지도, 짭짤한 돈을 모은 인물이 되지도 못했다. 예쁜 얼굴? 늘씬한 몸매? 시원시원한 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냥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 A. 이야기 속에서라면 콘셉트는커녕 이름 석 자 하나 얻지 못할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좋게 말하자면 다양한 방면에서 무소유를 수행 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그녀의 자의가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샤워를 마친 유진은 빗질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로 집을 나섰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찾은 곳은 고작 편의점. 숙취 해소를 위한 불닭볶음면과 더블에그햄버거를 구입했다.“불닭 바질 마르게리따 맛 새로 나왔네. 으음…… 에이, 불닭은 역시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