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문가에서 권우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남지가 고개를 들어보니 소년이 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품에 안고 들어서고 있었고 그 뒤로 소피와 레아가 따르고 있었다. 소피는 손에 샴페인을 들고 있었고 레아는 케이크를 안고 있었는데, 세 사람의 얼굴에는 모두 미소가 가득했다.“축하해요, 송.”소피는 협탁 위에 샴페인을 놓으며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주었다.“전시회는 정말 대성공이었어요.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에요.”송남지는 미소를 지었다.“모두 여러분 덕분이에요. 전 그냥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인걸요.”“송은 여기 있었어요.” 소피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언제나 여기 있었죠.”권우빈은 창틀에 놓인 화병에 데이지를 꽂고 몸을 돌려 송남지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코다르의 햇살처럼 깨끗하고 밝았다.“누나, 저 다른 갤러리들 제안 다 거절했어요.”그의 말에 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민 실장이 말해주더라.”“전 재스민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영원히요.”권우빈이 말했다.송남지는 몇 초 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우빈아, 넌 앞으로 더 큰 무대에서 활동하게 될 거야. 내가 기회를 주어서가 아니라 네 스스로 그럴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야. 재스민은 네 시작점일 뿐, 최종 종착지가 아니란다.”권우빈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 특유의 고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몸짓이었다.“재스민은 제집이에요 그러니 전 집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송남지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금빛으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았다.세상에는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바람과 파도, 그리고 천재의 반짝이는 재능 같은 것들이다.하지만 그녀는 권우빈이 아무리 멀리 나아가더라도 자신의 시작점을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 아픈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리라는 것도 말이다.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아기가 태어난 지 엿새째 되던 날, 하정훈은 수리스에서
출산 다음 날, 송남지는 비로소 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아기는 그녀 곁의 작은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귀 옆으로 주먹을 쥔 작은 손이 마치 항복하는 아기 고양이 같았다. 쭈글쭈글하던 피부는 펴져 고운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얇은 입술과 오뚝한 코는 하정훈을 빼닮았으나, 옅게 휘어진 눈썹만큼은 영락없는 송남지였다. “너를 닮았어.”하정훈은 아기 침대 곁에 서서 딸을 내려다보았다. 이틀 내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그의 웃음은 도무지 거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코는 당신을 닮았어요.”베개에 몸을 기댄 송남지가 아직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입술도 당신이고.”그 말에 하정훈이 말했다“아직 눈을 안 떠서 모르겠지만, 널 닮았을 거 같아.”“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그는 딸의 닫힌 눈꺼풀을 응시하다 잠시 말을 골랐다.“예쁜 건 다 널 닮았을 테니까.”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송남지는 잠시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배의 상처가 땅겨 그녀가 아픈 듯 인상을 찌푸리자, 하정훈은 곧바로 긴장한 채 침대 곁으로 다가와 몸을 굽히고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저 웃음 때문에 아픈 것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하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복합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눈빛에 담았다. 안쓰러움, 죄책감, 고마움, 그리고 그보다 훨씬 깊고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감정이었다.“남지야.”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혹시 며칠 동안... 연아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둔 게 있어?”송남지는 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을 골랐다.“연지. 사모할 연에 치자나무 지.”하정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두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늘 간절히 사모한다는 연과 송남지의 지. 그것은 간절한 연모이자 미련이었다.“원래는 하연이라고 지을까 했어요.”송남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런데 연자 하나만으로는 너무 단출하더라고요. 연지라고 하면, 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이를 부르는 것
“머리가 보입니다.”분만대 끝에서 모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 한 번만 더 힘내요.”송남지는 이를 악물고 온몸의 힘을 쏟아부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힘을 주는 그녀의 표정에는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투혼이 서려 있었다. 하정훈은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화실에서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입술을 짓씹으며 멈추지 않고, 절대 포기하지 않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한 번 더, 아기 머리가 나왔어요.”송남지가 나직하면서도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녀답지 않은, 벼랑 끝에 몰린 채 모든 것을 내던진 어머니의 외침이었다.그리고 이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웠다.나약하거나 간신히 짜내는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세상이 자신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듯, 힘차고 우렁차며 심지어 분노까지 서린 쩌렁쩌렁한 울음소리였다.송남지는 긴장이 풀린 듯 분만대에 늘어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눈가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딸입니다.”모로 교수가 웃으며 축하를 건넸다.“작지만 아주 건강합니다.”간호사가 피가 묻은 채 쭈글쭈글한 아기를 송남지의 가슴팍에 내려놓았다. 살결이 닿자마자 울음이 뚝 그쳤다. 세상에 나온 지 1분도 되지 않은 작은 생명은 엄마의 체온을 느끼자마자 기적처럼 평온을 되찾은 것이다.송남지는 고개를 숙여 딸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맞추었다.“안녕, 연아.”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쉬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엄마야.”하정훈은 침대 곁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송남지에게 붙들려 있던 그의 손가락 마디엔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격리복에는 핏자국이 튀었고 셔츠 소매는 땀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붉게 충혈된 눈이었지만,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간호사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아버님, 안아보시겠어요?”하정훈은 하얀 속싸개에 싸인 작은 아기를 바라보며 목울대를 울렸다. 그가 손을
진통은 새벽 두 시부터 격렬해지기 시작했다.송남지는 잠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랫배 깊은 곳을 천천히 그러나 단단히 쥐어짜는 듯했다.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침대 시트를 꼭 쥔 채 통증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몇 초 후 통증이 물러갔다. 조수처럼 빠르게 찾아왔다가 빠르게 사라진 통증은 온몸에 식은땀과 가쁜 호흡만을 남겼다.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다음 진통이 찾아왔다. 먼젓번보다 더 강하고 주기도 짧았는데, 마치 무딘 칼이 몸속을 오가는 것 같았다.“정훈 씨.”그녀가 불렀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조용한 병실 안에 유독 또렷하게 울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오늘 밤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병상 옆 의자에서 밤을 새웠다. 양복 외투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었고 셔츠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그의 눈 밑은 거뭇하게 그늘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얼음물처럼 맑아서 졸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왜 그래?”그는 침대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송남지는 그의 팔을 붙잡았고 손톱이 그의 셔츠 천 속으로 파고들었다.“아파요.”그녀는 한 단어만 말했지만 그 끝 음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하정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의 호출 벨을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쥔 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심호흡하자, 남지야. 나를 따라서 들이마셔 봐...”송남지는 그의 템포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고 진통의 정점은 몇 차례의 호흡 속에서 서서히 물러갔다. 그녀는 땀에 젖어 기진맥진한 채 침대에 누웠는데 꼭 물에서 건져 올린 사람 같았다.잠시 후 의사와 간호사들이 도착했다. 검사를 마친 모로 교수는 고개를 들며 영어로 하정훈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한마디를 던졌다.“자궁문이 벌써 4센티미터 열렸습니다. 분만실로 옮겨야 해요.”송남지는 그 소리에 온몸이 굳었다. 31주 하고도
창밖의 달은 무척이나 밝아서 테라스 위에 핀 부겐빌레아의 윤곽까지 선명하게 보였다.먼바다는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일렁였고 마치 고요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길처럼 뻗어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하정훈 혼자 걷는 길이 아니었다.사흘 뒤, 송남지는 퇴원했다.모로 교수는 퇴원 전 검사에서 그녀와 아기의 상태가 모두 안정적임을 확인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지만 휴식에 주의하고 과로를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하정훈은 의사의 지시를 메모장에 하나하나 기록했는데, 그 어떤 계약서에 서명할 때보다 진지했다.권우빈이 병원으로 송남지를 마중 나왔다. 소년은 손에 하얀 데이지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르 파티오의 정원에서 꺾은 것이었다. 클로딘은 송남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게 문을 닫고 찾아오려 했으나 권우빈이 겨우 말렸다고 했다.“클로딘 할머니가 전해달라 하셨어요.”권우빈은 송남지에게 꽃을 건네며 말했다.“정원의 올리브 나무가 오늘 꽃을 피웠으니 얼른 와서 보래요.”송남지는 꽃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았다. 데이지 향은 아주 옅어서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맡아본 꽃 중 가장 좋은 향기라고 생각했다.하정훈은 한쪽에 서서 권우빈과 송남지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맑고 순수했으며 송남지를 볼 때 아주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했지만 이성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고마움이자 존경이었고 가족애와 우정 사이의 때 묻지 않은 감정이었다.하정훈은 문득 유경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권우빈이 나타나기 전에 송남지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는 것을.이 소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남지의 보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송남지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남편 대역을 맡은 것도 그녀를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권우빈.”하정훈이 입을 열자 권우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고맙다.”하정훈이 말하자, 권우빈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별말씀 다 하세요. 누나가 제게 해준 게 제가
검사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양호했다.결과지를 들고나온 모로 교수는 하정훈에게 긴 영어 문장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요점은 송남지의 자궁 수축이 가짜 진통이며 자궁 경부 상태도 정상이라 조산 위험은 없지만, 며칠간은 무리하지 말고 침대 위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퇴원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출혈이나 파수, 혹은 자궁 수축이 잦아지면 즉시 병원으로 오십시오.”하정훈은 모로 교수가 말한 내용을 하나하나 숙지한 뒤 검사실로 들어갔다.송남지는 침대에 누워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조금 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안색을 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별일 없대요. 아기는 아직 나올 생각이 없나 봐요.”하정훈은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집으로 가자.”“어느 집으로요?”송남지의 물음에 하정훈은 찰나 멈칫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좋아.”송남지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르 파티오로 가요. 클로딘이 걱정할 거예요.”하정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여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그의 동작은 마치 깨지기 쉬운 귀한 도자기를 다루듯 지극히 부드럽고 느릿했다.송남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를 응시했다.그는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 손으로는 그녀의 발목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신발 끈을 매고 있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그의 눈매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짙은 회색 캐시미어 니트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그의 손목에는 그녀가 선물했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제니스 시계였다.그는 여전히 그것을 차고 있었다.송남지는 문득 수리스에서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서 있었던 탓에 온몸이 젖어 사시나무 떨듯 떨었던 그 밤을 떠올렸다.그는 우산을 받쳐 들고 다가왔고 우산을 온통 그녀 쪽으로 기울여 자신의 어깨는 흠뻑 젖고 말았다.춥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는 아니라고 답했지만, 그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의 건강 상태로는 빗속에 노출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