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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Author: 은지아
송남지를 태운 차가 해안도로를 따라 매끄럽게 달렸다.

길은 굽이굽이 이어졌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늘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송남지는 생각했다.

‘하정훈도 이른 아침 이곳을 떠날 때 이 경치를 봤겠지?’

30분 뒤, 차는 공항 터미널 앞에 멈춰 섰다.

기사가 짐 내리는 것을 돕는 동안 송남지는 휴대폰을 꺼내 항공편 시간을 확인했다.

이륙까지는 약 세 시간 정도. 시간은 넉넉했지만, 그만큼 공항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고개를 든 송남지의 눈에 불청객 하나가 들어왔다.

은지영이었다. 명품 캐리어를 끌고 선 그녀는 오만한 태도로 송남지를 쏘아보았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그녀의 눈빛엔 숨길 수 없는 혐오감이 노골적으로 서려 있었다.

그녀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너도 하정훈 때문에 온 모양이네? 하정훈이 가버리니까 언니 약혼 파티고 뭐고 쫓아온 걸 보면 너희 자매 우정도 참 껍데기뿐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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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면을 쓴 남편   제1020화

    “하정훈 씨,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하정훈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틀렸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여 마치 제 내면을 향해 읊조리는 독백 같았다.“널 밀어내는 것만이 정답이라 여겼어.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미래 대신, 네가 더 온전하고 나은 앞날을 누리길 바랐지. 하지만 다 내 오만이었어. 사랑하기에 놓아준다는 비겁한 핑계를 댔고 소유보다 양보가 고결한 가치인 양 착각했지. 네가 날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과소평가했고, 무엇보다 내가 너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를 망각했던 거야.”송남지는 아무런 대답도 건네지 않았다.“지난 세월 동안 줄곧 자문해 봤어. 내게 허락된 삶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면, 내가 마지막에 움켜쥐고 싶은 게 과연 무엇일까 하고.”하정훈의 애절한 시선이 송남지에게 와닿았다.“성은에서 사업을 완전히 마무리 지어 두는 것도, 재산을 빈틈없이 분배해 놓는 것도, 아직 밟아보지 못한 이국의 땅을 방랑하는 것도 아니었어. 단지 너와 함께하는 것뿐이었지. 매일, 매분, 매초를 말이야. 설령 네 옆에 묵묵히 앉아 네가 캔버스 앞에 선 모습을 바라보고 네 잔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별것 아닌 일로 토라져 다투는 사소한 순간일지라도.”그의 눈가가 붉게 젖어 들었으나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남지야, 네게 무언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아. 널 밀쳐내고 깊은 상처를 주고, 이 무거운 짐들을 오롯이 혼자 짊어지게 만들었으니까.”하정훈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그럼에도 염치 불고하고 묻고 싶어. 내게 단 한 번만 기회를 줄 수 없을까? 내 남은 생 전체를 바쳐 속죄할 기회를 말이야.”송남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하정훈이 이대로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 단념하려던 찰나, 마침내 그녀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정훈 씨, 내가 어째서 이 먼 코다르까지 왔는지 알아요?”하정훈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일 때문이 아니에요.”송남지는

  • 가면을 쓴 남편   제1019화

    “은비야. 할 말이 있어.”하정훈의 말에 고은비의 미소가 찰나 멈칫했지만, 그녀는 이내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았다.“말해요.”하정훈이 오가은에게 시선을 던지자, 오가은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네가 코다르에 온 진짜 이유를 알아.”하정훈의 목소리는 오직 두 사람에게만 들릴 만큼 낮게 깔렸다.“네가 송남지의 사진을 찍어서 누구에게 보냈고, 또 무슨 말을 했는지도 다 알고 있고.”고은비의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지만, 샴페인 잔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는 꾹 힘이 들어갔다.“너를 탓하진 않아. 내 망설임과 미적지근한 태도가 네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거니까,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하지만 오늘부터는 네가 확실히 알아주었으면 해.”그는 고은비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송남지는 내가 평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고은비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이윽고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면 위에 내려앉는 나뭇잎처럼 아주 가볍고 아득한 웃음이었다.“알아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잠시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든 그녀의 눈시울은 조금 붉어져 있었지만 결코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정훈 씨, 행복하길 바랄게요.”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하정훈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몇 초간 잠자코 바라보다가, 다시 아래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송남지는 휴게 구역에 있었고 하정훈은 마침내 그곳에서 그녀를 찾아냈다.전시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어 인파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송남지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부푼 배를 감싸 안고 두 눈을 감고 쉬는 중이었다. 곁에서 따뜻한 물을 따라주던 권우빈은 다가오는 하정훈을 발견하고 미세하게 눈빛을 굳혔다.“누나.”권우빈이 낮게 속삭였다.“손님이 오셨네요.”송남지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하정훈이 서 있었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짙은 회색 슈트 차림에 셔츠 맨 위 단추는 하나

  • 가면을 쓴 남편   제1018화

    하정훈은 전시회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2층에서 내려왔다.본래 그는 아래로 내려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 먼 코다르까지 걸음 한 것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큐레이터, 미술품 소장가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으며, 전시관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는 오직 송남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하지만 그는 2층에 가만히 선 채 오랜 시간 그녀를 지켜보았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프랑스 출신 큐레이터와 유창한 프랑코니아어로 대화를 나누며 부드러운 미소로 사람들의 모든 질문에 기품 있게 답하는 그녀를 말이다.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서 있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그 누구의 보호막도 필요로 하지 않는, 온전히 홀로 빛나는 왕비의 모습과도 같았다.문득 하정훈은 송남지가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빛을 잃은 게 아니라 한층 더 굳건하고 강해진 것이다. 그 강인함은 겉으로 두른 단단한 껍데기가 아니라 내면의 확고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가 없어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이 깨달음은 그에게 긍지와 불안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긍지를 느낀 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직감이 단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연약한 카나리아가 아니라, 척박한 땅 어떤 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워내는 나무 같은 여자였다.반면 불안한 이유는 만약 그녀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면 대체 무슨 명분으로 그녀 곁에 머물러야 하느냐는 막막함 때문이었다.“하 대표님.”등 뒤에서 들려온 김서윤의 목소리에 하정훈이 돌아보자 그가 서류철을 들고 서 있었다.“알아보라고 하신 것들 여기 다 있습니다.”김서윤이 서류철을 내밀며 덧붙였다.“권우빈의 계약 날짜와 송남지 씨의 병원 기록, 그리고 수리스 호텔 투숙 내역까지요. 시간대가 오차 없이

  • 가면을 쓴 남편   제1017화

    “원망이라니, 내가 네게 무슨 원망을 하겠어?”오가은의 나직한 물음에 송남지는 고개를 숙인 채 부푼 배를 바라보았다.“사실대로 말씀드리지 않은 거요. 혼자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도, 정훈 씨에게 알리지 않은 것도 전부 다요...”오가은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남지야, 정훈이가 왜 너와 이혼하려 했는지 알고 있니?”송남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무너질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겠죠.”오가은은 몇 초간 침묵했다.“그 아인 어릴 때부터 그랬단다. 무슨 일이든 혼자 짊어지려 하고 집에 통 말하는 법이 없었지. 아픈 것도 성루이야 병원의 의사가 전화를 주지 않았다면 나랑 그 애 아빠는 끝까지 까맣게 몰랐을 게다.”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울컥 메었지만, 이내 감정을 추슬렀다.“남지야,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다만 그 녀석이 너무 고집스럽고 제멋대로 판단한 게 야속할 뿐이지. 널 밀어내는 게 다 널 위하는 길이라고 착각하다니 말이다. 둘이 함께한다는 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힘들 때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기 위함이라는 걸 그 애는 몰랐던 게야.”송남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아주머니...”오가은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가볍게 도닥였다.“너는 그저 몸조리에만 전념하거라.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정훈이 그 녀석은 제풀에 지치든 말든 내버려 두렴. 너한테 진 빚은 살면서 천천히 갚아 나가게 해야지.”송남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으나, 웃음 끝에 결국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오가은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울지 마라. 임산부가 울면 눈에 해롭단다.”송남지는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쳤다.“그런데 코다르에는 어쩐 일이세요?”오가은은 송남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전시회 보러 왔다. 재스민의 화전인데 당연히 와봐야지.”송남지는 그것이 핑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가은이 코다르까지 온 것은 전시회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 가면을 쓴 남편   제1016화

    개막식은 이튿날 저녁 여섯 시에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아에로포르 엑스포 센터의 1층 로비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팔리에서 온 큐레이터, 알비온의 갤러리스트, 밀란시아의 컬렉터, 그리고 코다르의 현지 아티스트들과 언론 기자들이 가득했다. 조명을 받은 샴페인 잔들이 투명한 호박색으로 반짝였고 프랑코니아어, 영어, 인타리어가 공기 중에 섞여 지휘자 없는 교향악처럼 공간을 채웠다.송남지는 전시장 입구에 서 있었다. 맞춤 제작한 검은색 롱드레스는 허리 위로는 몸에 꼭 맞고 아래로는 여유롭게 흘러내려 그녀의 31주 차 만삭 배를 감쪽같이 가려주었다.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 어깨 위로 늘어뜨렸고 화장은 얼굴에 혈색만 돌게끔 립스틱만 약간 바른 정도였다. 그 모습은 도무지 출산을 앞둔 임산부로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오롯이 큐레이터이자 갤러리스트로서, 자신이 기획한 작품들 앞에 확고하고 평온하게 서 있는 한 명의 여자였다.그 옆에는 그녀가 직접 세팅해 준 짙은 파란색 정장을 입은 권우빈이 섰다.앳된 얼굴엔 긴장감이 서렸지만, 등은 꼿꼿했고 눈동자는 투명하리만치 단단했다.발표는 순조로웠다.송남지는 영어로 3분, 프랑코니아어로 2분간 연설을 진행했다. 그녀는 소피와 스태프들, 참여 작가들, 그리고 전시를 위해 애써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정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전시와 무관한 사람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2층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눈으로 본 것도, 귀로 들은 것도 아닌, 거의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더 깊은 차원의 감각이었다.하정훈은 2층,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모퉁이의 인파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고집스럽게, 그리고 방해되지 않게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발표가 끝나자 사람들은 전시장 안으로 흩어졌고, 송남지는 프랑스 큐레이터들에게 둘러싸여 향후 협업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권우빈 역시 몇몇 컬렉터들에게 이끌려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

  • 가면을 쓴 남편   제1015화

    아래층의 창문은 여전히 어두웠다. ‘송남지는 이미 잠들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잠 못 든 채 파도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진 않을까.’하정훈은 차가운 유리창에 손을 얹었다. 닿을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이 손끝을 타고 번져나갔다.“남지야.”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읊조렸다.“다시는 너를 밀어내지 않을게.”달빛이 그의 눈가에 어린 눈물 자국과 비로소 굳게 다져진 그의 결심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전시회 개막을 앞둔 밤, 아에로포르 전시 센터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송남지는 전시장 정중앙에 서서 마지막 작품이 벽면에 고정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르 파티오 정원의 고목이 된 올리브 나무를 담은 권우빈의 그림이었다. 짙게 드리워진 녹색 그늘 아래, 복부가 살짝 솟아오른 여인의 흐릿한 뒷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그녀는 권우빈에게 굳이 그 부분을 수정해달라 청하지 않았다.어떤 건 애써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법이다. 불러온 그녀의 배가 그러하듯,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눈가에 일렁이는 감정 또한 그러했다.“누나, 내일 개막식에서 인사말 할 건가요?”권우빈이 그녀의 곁에서 줄자를 든 채 마지막 작품의 수평을 확인하며 물었다.“응.”송남지는 그림에서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에 띄워둔 연설문을 내려다보았다.“5분 정도, 짧게 하려고.”권우빈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전시장 반대편에서 구두 굽 소리가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송남지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고은비였다. 짙은 녹색 벨벳 드레스 자락을 우아하게 휘날리며 나타난 그녀, 단정하게 올린 머리 아래로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내고 있었고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든 채, 이런 자리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다는 듯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송 여사님.”고은비가 다가와 미소 지었다.“전시 준비는 잘 되어가나요?”“네, 순조롭습니다.”송남지는 차분하게 대꾸했다.“고은비 씨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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