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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Author: 빅비5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7 22:15:15

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

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대신 말이다..."

고삐를 쥔 손을 살짝 비틀었다.

"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

짧은 웃음.

"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

잠시 후

"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는 혼잣말처럼 계속 이어갔다.

"권력을 더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인간이다."

고삐를 조금 더 당겼다.

"그리고 자기가 쥐고있는 건... 절대 놓지않아."

잠시 침묵.

"그 인간의 영지 안에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말들이 고개를 흔들며 걸었다.

"그걸 그렇게 못마땅해 했다. 위험하다고, 왕의 법 밖에 있는 힘이라고.

마법은... 왕이 허락한 것도 아니고, 궁정이 통제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인간 눈에는 그게 그냥 통제가 안 되는 것이었어.

통제 안 되는 건— 전부 위험한 거니까."

마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말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엔 세금 붙이고, 등록하라고 하고,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다 기록하게 만들었지."

그림 하일드의 손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근데 그걸로 끝났겠냐."

마부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들 중에는 그걸 거부한 놈들도 있었거든."

짧은 숨.

"그때부터야."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박해가 시작된 게."

바퀴가 돌을 세게 밟았다.

"허가 없이 마법 쓰면 처벌. 치유 마법도 금지. 의식도 금지. 모이면 불법."

마부는 앞만 보며 덧붙였다.

"이유는 간단해."

짧은 정적.

"그 인간은 왕보다 위에 있는 힘을 못 견디는 사람이거든."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부의 말은 끊기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였어."

그는 옆을 흘끗 보았다.

"소문이 돌았거든."

짧은 침묵.

"그 대신의 첫째 딸—"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 저 안에 타고 있는 저 어린 계집애가."

마부의 말은 아무렇지 않게 이어졌다.

"왕자랑 정략결혼을 한다는 거."

말발굽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그 얘기 들었을 때 마법사들이 뭐라 했겠냐."

그림 하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부가 스스로 말했다.

"이제 다 끝이라고 했지."

짧은 숨.

"지금도 충분히 숨 막히는데—"

고삐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딸이 왕자비가 되면 그 인간의 권력은.. 더 강해지는거다."

그는 낮게 웃었다.

"그럼 뭐겠냐."

잠깐 멈췄다가—

"마법사들? 더 박해당할 게 뻔하잖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마부가 말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짧은 침묵.

"저 첫째 딸을 죽이자고."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순간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잠깐 멈췄다.

얼굴에 처음으로 분명한 당황이 스치고 있었다.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 마법사가 말이지..."

그는 다시 앞을 본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마부인 척 하면서 그 저택에 들어갔다."

마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마부였지. 일도 잘했고, 말도 적었고. 아무도 의심 안했다."

마부가 다시 짧은 숨을 내뱉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저 첫째년을 마차에 태워 몰고가는 날ㅡ

사고로 위장해서 죽이는 거."

말은 담담했지만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가 피식 웃었다.

"그 멍청한 둘째년이 끼어드는 바람에..."

잠깐의 정적.

"...실수로 둘째를 죽여버렸지."

바람이 스쳤다. 그림 하일드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되었다.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원래 죽일 애는 따로 있었는데, 한 번 삐끗하니까 다 꼬여버리더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계획은 망가지고, 정체도 들통나고..."

말발굽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결국 그 마법사도..."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붙잡혔다."

그는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 마을에 있던 마법사들도... 전부 다 처형당했지."

그 말이 떨어지자 그림 하일드의 눈이 분명하게 흔들렸다.

"그럼..."

그녀가 작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문장은 끝내지 못했다.

마부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마법사가 우리 아버지였다."

그림 하일드는 완전히 굳은 얼굴로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이 숨겨지지 않은 채 눈에 얇게 번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은 듯, 그녀는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마부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앞을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기억이 조용히,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떠올랐다.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공기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때—

마부, 아니, 소년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귀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이었다.

'도망쳐라.'

숨이 멎었다. 익숙한 목소리. 아버지였다.

'—계획이 들통났다.'

'—곧 병사들이 집으로 간다.'

소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른 도망쳐라.'

그 목소리는 급했고, 낮았고, 하지만 분명했다.

소년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의심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나가라.'

그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뒤돌아보지 마라.'

소년의 숨이 거칠어졌다. 몸이 그제서야 움직였다.

'—넌—'

잠깐의 틈.

'—꼭 살아남아라.'

그 말이— 이상하게 가장 또렷하게 남았다.

'—꼭 살아남아서... 우리 마법사들을 향한 박해를 막아다오.'

그 순간—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울 시간이 없었다.

문 쪽이 아니라, 뒤쪽으로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삼키며—

도망쳤다.

집을 빠져나온 순간 멀리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았다. 딱 그만큼 앞서 있었다.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찢어질 것처럼 뛰었고,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살아남았다.

혼자.

그래서 그는 다시 이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마부인 척하며.

이 가문에. 이 저택에. 저 아이를— 죽이기 위해.

그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마차 위.

마부의 눈이 천천히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삐를 쥔 손이 움직였다.

말들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걸었고—

마차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부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아까와 달리 분명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내가 왜... 이 말을 너한테 하는 줄 아냐."

그림 하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부는 또 다시 피식 웃었다.

"넌 저 계집의 하녀니까. 암살에 방해가 될 수 있잖아.

만약..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부의 손이 고삐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목이 갑자기 조여드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윽—!"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목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을 보고 있었다.

"너도 죽는다. 이해했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목에 아직도 조여 있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마부가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그 순간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하아...!"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마부는 짧게 웃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말들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걸었고 마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의 목에는 방금 전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점점 짧아졌고, 말들의 걸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앞쪽으로 낮은 철문과 그 너머로 이어진 공동묘지가 보였다.

묘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마부가 고삐를 정리하며 낮게 말했다.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림 하일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억해라."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 된다."

다시 짧은 침묵.

"괜히 눈치 보지도 말고."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가에 아주 얇게 물기가 맺혔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녀는 천천히 안장에서 내려섰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조금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아주 살짝 훔쳤다. 눈물이 더 번지지 않게.

표정도 정리했다. 그리고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한 번 숨을 고른 후 문을 열었다.

안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 마님."

목소리는 다시 평소처럼 단정해져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부인이 먼저 안에서 몸을 내밀었다.

손을 가볍게 짚고 천천히 내려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뒤이어 엘로이즈가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문가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막 땅을 밟는 순간, 엘로이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너.."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그림 하일드의 얼굴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무슨 일 있었니?"

짧은 질문.

"갑자기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림 하일드의 손이 다시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부 쪽으로 흘렀다.

마부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하지만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말하지 말라는 신호. 조용히 있으라는 압박.

그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림 하일드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닙니다, 아가씨."

짧고 단정한 대답.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로이즈는 잠시 더 바라보았다.

마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이.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조용하고 깊은 시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엘로이즈에게 말했다.

"가자."

짧은 한마디.

엘로이즈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두 사람은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랐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철문 앞에는 늙은 관리인이 서 있었다. 낡은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였다.

"드 로베르 가문입니다."

귀족 부인이 짧게 말했다. 관리인은 곧장 허리를 굽혔다.

"예, 마님.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는 무거운 철문에 손을 얹었다.

끼이익— 녹슨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에는 묘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마른 풀들이 스쳤고, 어딘가에서 작은 종소리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엘로이즈와 귀족 부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랐다.

철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끼이익—

그 소리가 등 뒤에서 길게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철문 밖. 마차 옆에 선 마부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하지만 그 눈빛만은 조용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림 하일드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철문이 완전히 닫혔다.

그 순간 묘지 안의 공기가 바깥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조용했고, 무거웠고, 어딘가 너무 늦게 닫힌 것 같은 느낌.

그림 하일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엘로이즈 드 로베르가 서 있었고,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이미 하나의 무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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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로이즈는 끝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굳어 있었다. 마침내 클레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작게 이어졌다. "...언니. 정말... 어머니, 아버지도 나 싫어하시고...언니도 나 싫어할 거야?" "아니야." 엘로이즈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괜히 심술 부린거야." "아니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고.. 어머니도.. 항상 나만 보면 한숨 쉬셨고... 방금도 아버지가 나 조심성없다고 혼내신 것도..." "아니야." 엘로이즈가 조금 더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러신거야. 네가 다칠까봐, 또 남들이 함부로 말할까봐. 그래서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나.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야." 엘로이즈의 눈이 멈췄다. 클레르는 울먹이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볼 때 어떤 눈 하는지는 나도 알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식당 안 공기가 아주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아주 작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클레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클레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툭. 엘로이즈의 손이 조용히 클레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클레르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클레르. 너 언니 눈 똑바로 봐."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언니 말 못 믿겠어?" 클레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선 너머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언니는 거짓말 안 해." 그녀가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20화

    엘로이즈는 잠시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죄송해요..."하고 웃어 넘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클레르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클레르..."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은 잠시 더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테이블 위에 번진 소스. 굳어버린 손끝.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부인이 눈을 들었다. "왜, 더 안 드시고요?" "입맛이 없어졌소." 대신은 아무 말도 더 하지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식당 안은 더 조용해졌다. 클레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말이 거기서 멈췄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 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울음을 참고있는 얼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복잡한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부인은 결국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조용히 스쳤다. "...먼저 일어나마." 그녀는 잠시 두 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덜컥. 이제 식당 안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둘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있는 동생.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하고, 포크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모습. 엘로이즈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9화

    덜컥. 살롱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조용함이 내려 앉았다. 복도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만 길게 깔려 있었다. 클레르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넘어졌던 자세 그대로. 작은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녀가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 부드럽게 웃던 얼굴. 다정했던 목소리. '언니분까지 영애를 창피해하시고, 싫어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클레르의 손이 떨렸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클레르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자기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천. 조금 전까지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꾸깃. 하얀 천이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하녀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작은 아가씨,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진짜.." "...네?" "내가 진짜로... 언니를 창피하게 만들어?" "아가씨..." "내가 자꾸 뛰어다녀서...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언니도...나 싫어하게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복도 창문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클레르의 금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하얀 손수건이 점점 더 작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드 로베르 저택의 식당은 조용했다. 하인들이 벽 쪽에 조용히 서 있었고, 식당 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엘로이즈는 평소처럼 단정한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3화

    그날 아침 식사 시간.식당은 저택에서 두 번째로 빛이 많이 드는 공간이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은식기와 얇은 도자기 접시가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빵은 이미 적당한 두께로 썰려 있었고, 수프에서는 희미한 김이 올라왔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오른편,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시선은 낮게. 숨은 일정하게. 소리는 나지 않게.아가씨는 자리에 앉아있었다.잠시 후.문이 열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어왔다. 아가씨의 아버지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말보다 시선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었다.궁정 대신.왕의 곁에서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2화

    복도를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은 한 번 멈춰 섰다.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나이 많은 하녀가 다가와 있었다. 저택 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 특유의 굳은 기척이 있었다. 하녀장은 귀족 부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이 아이가 오늘 새로 들어온 아가씨의 하녀입니까."질문이었지만 확인에 가까운 말투였다.귀족 부인은 소녀를 한 번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은 짧았고, 망설임이 없었다."손을 보니 일은 할 줄 알겠더군요."하녀장은 그 말에 더 묻지 않았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화

    돌은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는 감각조차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노파의 모습을 한 왕비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그러나 좀처럼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바위에 눌려 있었고, 목에서는 노파의 연약한 갈라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파. 주름진 손, 굽은 등, 한때 거울 앞에 서던 몸과는 전혀 다른 형체. 이게 지금의 자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끝이, 누구보다도 추악한 노파의 모습이라니. 웃음 비슷한 숨이 흘러나왔다. 젊었을 때의 목소리였다면, 이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프롤로그

    주요 등장인물 소개 그림 하일드 : 고아원 출신의 귀족가 하녀, 훗날 사악한 왕비,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워온 소녀. 고아원에서는 울지 않는 법을 배웠다. 부르지 않는 법을 배웠다. 눈에 띄지 않는 법을 배웠다. 쓸모 없는 아이는 남겨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항상 마지막에 손을 내밀었고, 항상 조용히 있었고, 항상 문제되지 않는 존재로 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귀족가에 들어온 뒤, 그 규칙은 더 정교해진다. 틀리지 않는 법. 말보다 먼저 표정을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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