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 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대신 말이다..." 고삐를 쥔 손을 살짝 비틀었다. "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 짧은 웃음. "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 잠시 후 "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는 혼잣말처럼 계속 이어갔다. "권력을 더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인간이다." 고삐를 조금 더 당겼다. "그리고 자기가 쥐고있는 건... 절대 놓지않아." 잠시 침묵. "그 인간의 영지 안에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말들이 고개를 흔들며 걸었다. "그걸 그렇게 못마땅해 했다. 위험하다고, 왕의 법 밖에 있는 힘이라고. 마법은... 왕이 허락한 것도 아니고, 궁정이 통제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인간 눈에는 그게 그냥 통제가 안 되는 것이었어. 통제 안 되는 건— 전부 위험한 거니까." 마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말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엔 세금 붙이고, 등록하라고 하고,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다 기록하게 만들었지." 그림 하일드의 손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근데 그걸로 끝났겠냐." 마부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들 중에는 그걸 거부한 놈들도 있었거든." 짧은 숨. "그때부터야."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졌다. "박해가 시작된 게." 바퀴가 돌을 세게 밟았다. "허가 없이 마법 쓰면 처벌. 치유 마법도 금지. 의식도 금지. 모이면 불법." 마부는 앞만 보며 덧붙였다. "이유는 간단해." 짧은 정적. "그 인간은 왕보다 위에 있는 힘을 못 견디는 사람이거든."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부의 말은 끊기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였어." 그는 옆을 흘끗 보았다. "소문이 돌았거든." 짧은 침묵. "그 대신의 첫째 딸—"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 저 안에 타고 있는 저 어린 계집애가." 마부의 말은 아무렇지 않게 이어졌다. "왕자랑 정략결혼을 한다는 거." 말발굽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그 얘기 들었을 때 마법사들이 뭐라 했겠냐." 그림 하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부가 스스로 말했다. "이제 다 끝이라고 했지." 짧은 숨. "지금도 충분히 숨 막히는데—" 고삐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딸이 왕자비가 되면 그 인간의 권력은.. 더 강해지는거다." 그는 낮게 웃었다. "그럼 뭐겠냐." 잠깐 멈췄다가— "마법사들? 더 박해당할 게 뻔하잖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마부가 말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짧은 침묵. "저 첫째 딸을 죽이자고."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순간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잠깐 멈췄다. 얼굴에 처음으로 분명한 당황이 스치고 있었다.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 마법사가 말이지..." 그는 다시 앞을 본 채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마부인 척 하면서 그 저택에 들어갔다." 마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마부였지. 일도 잘했고, 말도 적었고. 아무도 의심 안했다." 마부가 다시 짧은 숨을 내뱉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저 첫째년을 마차에 태워 몰고가는 날ㅡ 사고로 위장해서 죽이는 거." 말은 담담했지만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가 피식 웃었다. "그 멍청한 둘째년이 끼어드는 바람에..." 잠깐의 정적. "...실수로 둘째를 죽여버렸지." 바람이 스쳤다. 그림 하일드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되었다.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원래 죽일 애는 따로 있었는데, 한 번 삐끗하니까 다 꼬여버리더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계획은 망가지고, 정체도 들통나고..." 말발굽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결국 그 마법사도..."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붙잡혔다." 그는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 마을에 있던 마법사들도... 전부 다 처형당했지." 그 말이 떨어지자 그림 하일드의 눈이 분명하게 흔들렸다. "그럼..." 그녀가 작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문장은 끝내지 못했다. 마부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마법사가 우리 아버지였다." 그림 하일드는 완전히 굳은 얼굴로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이 숨겨지지 않은 채 눈에 얇게 번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은 듯, 그녀는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마부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앞을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기억이 조용히,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떠올랐다.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공기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때— 마부, 아니, 소년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귀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이었다. '도망쳐라.' 숨이 멎었다. 익숙한 목소리. 아버지였다. '—계획이 들통났다.' '—곧 병사들이 집으로 간다.' 소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른 도망쳐라.' 그 목소리는 급했고, 낮았고, 하지만 분명했다. 소년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의심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나가라.' 그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뒤돌아보지 마라.' 소년의 숨이 거칠어졌다. 몸이 그제서야 움직였다. '—넌—' 잠깐의 틈. '—꼭 살아남아라.' 그 말이— 이상하게 가장 또렷하게 남았다. '—꼭 살아남아서... 우리 마법사들을 향한 박해를 막아다오.' 그 순간—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울 시간이 없었다. 문 쪽이 아니라, 뒤쪽으로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삼키며— 도망쳤다. 집을 빠져나온 순간 멀리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았다. 딱 그만큼 앞서 있었다.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찢어질 것처럼 뛰었고,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살아남았다. 혼자. 그래서 그는 다시 이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마부인 척하며. 이 가문에. 이 저택에. 저 아이를— 죽이기 위해. 그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마차 위. 마부의 눈이 천천히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삐를 쥔 손이 움직였다. 말들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걸었고— 마차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부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아까와 달리 분명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내가 왜... 이 말을 너한테 하는 줄 아냐." 그림 하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부는 또 다시 피식 웃었다. "넌 저 계집의 하녀니까. 암살에 방해가 될 수 있잖아. 만약..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부의 손이 고삐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목이 갑자기 조여드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윽—!"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목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을 보고 있었다. "너도 죽는다. 이해했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목에 아직도 조여 있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마부가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그 순간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하아...!"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마부는 짧게 웃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말들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걸었고 마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의 목에는 방금 전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점점 짧아졌고, 말들의 걸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앞쪽으로 낮은 철문과 그 너머로 이어진 공동묘지가 보였다. 묘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마부가 고삐를 정리하며 낮게 말했다.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림 하일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억해라."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 된다." 다시 짧은 침묵. "괜히 눈치 보지도 말고."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가에 아주 얇게 물기가 맺혔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녀는 천천히 안장에서 내려섰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조금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아주 살짝 훔쳤다. 눈물이 더 번지지 않게. 표정도 정리했다. 그리고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한 번 숨을 고른 후 문을 열었다. 안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 마님." 목소리는 다시 평소처럼 단정해져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부인이 먼저 안에서 몸을 내밀었다. 손을 가볍게 짚고 천천히 내려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뒤이어 엘로이즈가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문가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막 땅을 밟는 순간, 엘로이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너.."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그림 하일드의 얼굴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무슨 일 있었니?" 짧은 질문. "갑자기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림 하일드의 손이 다시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부 쪽으로 흘렀다. 마부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하지만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말하지 말라는 신호. 조용히 있으라는 압박. 그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림 하일드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닙니다, 아가씨." 짧고 단정한 대답.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로이즈는 잠시 더 바라보았다. 마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이.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조용하고 깊은 시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엘로이즈에게 말했다. "가자." 짧은 한마디. 엘로이즈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두 사람은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랐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철문 앞에는 늙은 관리인이 서 있었다. 낡은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였다. "드 로베르 가문입니다." 귀족 부인이 짧게 말했다. 관리인은 곧장 허리를 굽혔다. "예, 마님.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는 무거운 철문에 손을 얹었다. 끼이익— 녹슨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에는 묘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마른 풀들이 스쳤고, 어딘가에서 작은 종소리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엘로이즈와 귀족 부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랐다. 철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끼이익— 그 소리가 등 뒤에서 길게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철문 밖. 마차 옆에 선 마부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하지만 그 눈빛만은 조용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림 하일드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철문이 완전히 닫혔다. 그 순간 묘지 안의 공기가 바깥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조용했고, 무거웠고, 어딘가 너무 늦게 닫힌 것 같은 느낌. 그림 하일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엘로이즈 드 로베르가 서 있었고,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이미 하나의 무덤이 기다리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그녀의 얼굴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커튼 끝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에는 아주 옅은 바람 소리만 남았다.엘로이즈는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전의 햇빛이 다시 떠올랐다.몇 년 전.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햇빛이 눈부시게 맑던 오후였다. 테라스 한쪽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어가는 차와 펼쳐진 책 한 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엘로이즈는 테라스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세는 이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조차 조용했다.정원에는 바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언니이이!!"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움직였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잔디를 가로질러 빠르게 가까워졌다.타다닥. 그리고 다음 순간,"언니!! 이것 좀 봐!!"클레르가 그대로 테라스까지 뛰어 올라왔다.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클레르."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레스. 연한 크림빛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치맛단은 흙투성이였고, 소매 끝에도 풀잎이 엉겨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가 걸려 있었다.엘로이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클레르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나 후레지아 꺾어왔어!"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도 그 꽃만큼 반짝이고 있었다."엄청 예쁘지?!"엘로이즈는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너 또 정원사 아저씨 몰래 꺾어온 거야?"클레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아닌데?"대답이 너무 빨랐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녀를
살롱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그림 하일드의 손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고, 흐트러짐없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아까와 달랐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이네스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급하지도 않았고,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숨 막히는 걸음.엘로이즈는 이네스의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하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넘치시는 우리 영애께서..."말은 웃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얇게 차가웠다."왜 제 하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는 그렇게 당황하시는 걸까요?"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엘로이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었다."아, 아니에요."그녀는 손끝으로 자기 드레스 소매를 아주 가볍게 정리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서늘했다."하인, 평민들을 향한 영애의 사랑은 이미 유명하니까요."엘로이즈는천천히 이어갔다."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신다는 얘기는 저도 자주 들었습니다."살롱 안 공기가 순간 흔들렸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네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엘로이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번 달만해도... 일자리 없는 평민들을 위해 직접 하인들을 3명이나 들이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남자로요."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 위로 열이 번졌다.살롱 안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른 영애들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인을 들였다.'귀족 사회에서는 때때로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말.특히 젊은 남자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괜히 더 천천히 들었고, 누군가는 시선을 애매하게 창밖으로 돌렸다.한 영애가 아주 작게 한숨을 삼켰다.또 시작이구나.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손끝에 들어간 힘만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신히 유지된, 그러나 완벽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였다."...글쎄요..."엘로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는..."말끝은 부드러웠다.하지만 이네스는 그 틈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제가 영애였어도... 저 아이에게 잘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이네스는 천천히 이어갔다."아무리 고아원 출신의 하녀라지만... 동생분과 얼굴이 닮았다면..."이네스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돌아가신 동생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되거든요."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한 것이었다.다른 영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겠죠."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네, 어머니."짧은 대답.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괜찮니."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많이 놀랐을 텐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들어가서 쉬렴."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찰싹.짧은 소리."...가자."낮은 목소리.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너."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급하게 다가와 엘로이즈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 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어야 할 가지. 그리고 바로 옆에 박혀 있는 무게.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맞지는 않았어요."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하마터면ㅡ"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 가지를 확인했다. 굵기. 무게. 낙하 위치."...큰일 날 뻔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떨어진 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이상하네."혼잣말처럼 낮게. 하지만 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표정은 다시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손이 굳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방금 전. 나무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철문 밖에서 느껴졌던 그 시선.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철문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카일.'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목이 조여오던 감각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숨이 막히던 순간.'...너도 죽는다. 이해했지?'그 목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림 하일드의 입술이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