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 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대신 말이다... 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 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 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부는 혼잣말처럼 계속 이어갔다. "권력을 더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자기가 쥐고있는 건... 절대 놓지않아." 잠시 침묵. "그 인간의 영지 안에 마법사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그렇게 못마땅해 했다. 위험하다고, 왕의 법 밖에 있는 힘이라고. 마법은... 왕이 허락한 것도 아니고, 궁정이 통제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림 하일드의 눈이 움직였다. "그 인간 눈에는 그게 그냥 통제가 안 되는 것이었어. 통제 안 되는 건 전부 위험한 거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냐." "처음엔 세금 붙이고, 등록하라고 하고,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다 기록하게 만들었지." 그림 하일드의 손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근데 그걸로 끝났겠냐. 마법사들 중에는 그걸 거부한 놈들도 있었거든." 짧은 숨. "그때부터야. 박해가 시작된 게." "허가 없이 마법 쓰면 처벌. 치유 마법도 금지. 의식도 금지. 모이면 불법." 마부는 앞만 보며 덧붙였다. "이유는 간단해. 그 인간은 왕보다 위에 있는 힘을 못 견디는 사람이거든."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부의 말은 끊기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였어. 소문이 돌았거든." "그 대신의 첫째 딸,"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조금 흔들렸다. "...지금 저 안에 타고 있는 저 어린 계집애가. 왕자랑 정략결혼을 한다는 거. 그 얘기 들었을 때 마법사들이 뭐라 했겠냐." 그림 하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부가 스스로 말했다. "이제 다 끝이라고 했지. 지금도 충분히 숨 막히는데... 딸이 왕자비가 되면 그 인간의 권력은.. 더 강해지는거다." "그럼 뭐겠냐. 마법사들? 더 박해당할 게 뻔하잖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그림 하일드의 눈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마부가 말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저 첫째 딸을 죽이자고."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순간 그림 하일드의 숨이 잠깐 멈췄다. 얼굴에 처음으로 분명한 당황이 스치고 있었다.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 마법사가 말이지... 정체를 숨기고 마부인 척 하면서 그 저택에 들어갔다." 마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낮아지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마부였지. 일도 잘했고, 말도 적었고. 아무도 의심 안했다." "계획은 간단했다. 저 첫째년을 마차에 태워 몰고가는 날,사고로 위장해서 죽이는 거." "그런데... 그 멍청한 둘째년이 끼어드는 바람에... 실수로 둘째를 죽여버렸지." 바람이 스쳤다. 그림 하일드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되었다. 마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원래 죽일 애는 따로 있었는데, 한 번 삐끗하니까 다 꼬여버리더라." "계획은 망가지고, 정체도 들통나고..." "결국 그 마법사도..." "...붙잡혔다." 그는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 마을에 있던 마법사들도... 전부 다 처형당했지." 그 말이 떨어지자 그림 하일드의 눈이 분명하게 흔들렸다. 작게 말을 꺼냈다. "그럼..."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 마법사가 우리 아버지였다." 그림 하일드는 완전히 굳은 얼굴로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이 숨겨지지 않은 채 눈에 얇게 번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은 듯, 그녀는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마부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앞을 보고 있었지만 보고 있는 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기억이 조용히, 하지만 피할 수 없게 떠올랐다.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공기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때, 마부, 아니, 소년의 귀에 소리가 들렸다. 귀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이었다. '도망쳐라.' 숨이 멎었다. 익숙한 목소리. 아버지였다. '—계획이 들통났다.' '—곧 병사들이 집으로 간다.' 소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른 도망쳐라.' 그 목소리는 급했고, 낮았고, 하지만 분명했다. 소년의 눈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아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도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의심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나가라.' 그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뒤돌아보지 마라.' 소년의 숨이 거칠어졌다. 몸이 그제서야 움직였다. '—넌—' 잠깐의 틈. '—꼭 살아남아라.' 그 말이 이상하게 가장 또렷하게 남았다. '—꼭 살아남아서... 우리 마법사들을 향한 박해를 막아다오.' 그 순간, 소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울 시간이 없었다. 문 쪽이 아니라, 뒤쪽으로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삼키며 도망쳤다. 집을 빠져나온 순간 멀리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늦지 않았다. 딱 그만큼 앞서 있었다.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찢어질 것처럼 뛰었고,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살아남았다. 혼자. 그래서 그는 다시 이곳에 있었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정체를 숨기고, 마부인 척하며. 이 가문에. 이 저택에. 저 아이를 죽이기 위해. 그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마차 위. 마부의 눈이 천천히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삐를 쥔 손이 움직였다. 말들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걸었고, 마차는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부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그 눈에는 아까와 달리 분명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내가 왜... 이 말을 너한테 하는 줄 아냐." 그림 하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마부는 또 다시 피식 웃었다. "넌 저 계집의 하녀니까. 암살에 방해가 될 수 있잖아. 만약.. 허튼짓이라도 했다간..."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부의 손이 고삐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이 아주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목이 갑자기 조여드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윽!"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목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을 보고 있었다. "너도 죽는다. 이해했지?" 그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목에 아직도 조여 있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마부가 천천히 주먹을 풀었다. 그 순간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하아...!"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마부는 짧게 웃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말들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걸었고 마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의 목에는 방금 전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점점 짧아졌고, 말들의 걸음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앞쪽으로 낮은 철문과 그 너머로 이어진 공동묘지가 보였다. 묘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풀들이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마부가 고삐를 정리하며 낮게 말했다. "도착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그림 하일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기억해라. 넌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면 된다." 다시 짧은 침묵. "괜히 눈치 보지도 말고."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가에 아주 얇게 물기가 맺혔다. 숨이 조금 가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녀는 천천히 안장에서 내려섰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조금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아주 살짝 훔쳤다. 눈물이 더 번지지 않게. 표정도 정리했다. 그리고 마차 쪽으로 돌아섰다.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한 번 숨을 고른 후 문을 열었다. 안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 마님." 목소리는 다시 평소처럼 단정해져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부인이 먼저 안에서 몸을 내밀었다. 손을 가볍게 짚고 천천히 내려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천천히 바닥에 닿았다. 뒤이어 엘로이즈가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문가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막 땅을 밟는 순간, 엘로이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 너.. 무슨 일 있었니? 갑자기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닙니다, 아가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림 하일드의 손이 다시 굳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부 쪽으로 흘렀다. 마부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하지만 눈빛이 살짝 움직였다.말하지 말라는 신호. 조용히 있으라는 압박.그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그림 하일드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엘로이즈는 잠시 더 바라보았다. 마치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듯이.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그림 하일드에게 닿았다. 조용하고 깊은 시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엘로이즈에게 말했다. "가자." "네, 어머니." 두 사람은 묘지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랐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철문 앞에는 늙은 관리인이 서 있었다. 낡은 모자를 눌러쓴 채 고개를 숙였다. "드 로베르 가문입니다." "예, 마님.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는 무거운 철문에 손을 얹었다. 끼이익. 녹슨 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에는 묘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자 마른 풀들이 스쳤고, 어딘가에서 작은 종소리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엘로이즈와 귀족 부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 늦게 뒤를 따랐다. 철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끼이익. 그 소리가 등 뒤에서 길게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철문 밖. 마차 옆에 선 마부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하지만 그 눈빛만은 조용히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림 하일드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철문이 완전히 닫혔다. 그 순간, 묘지 안의 공기가 바깥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조용했고, 무거웠고, 어딘가 너무 늦게 닫힌 것 같은 느낌. 그림 하일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앞에는 엘로이즈 드 로베르가 서 있었고, 그녀가 향하는 곳에는 이미 하나의 무덤이 기다리고 있었다.대신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바로 일주일 전.자신과 부인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날. 그 길을 지나갔다. 분명히 지나갔다. 같은 산길이었다. 창밖으로 보였던 풍경까지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길, 숲, 산비탈, 그리고...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없었다.'사과나무. 그런 나무는 없었다. 적어도 마차 바로 옆으로 쓰러질 만큼 길 가까이에 서 있던 거대한 사과나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더구나 마부의 말대로라면, 오래되고 늙은 나무였다. 수십 년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법한 거대한 나무. 그런데.'...바로 일주일 전에는 사과나무 자체가 없었다.''일주일 만에...''그 정도 크기의 나무가 갑자기 생겨났다고?'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생각이 닿았다.루시안.오늘 두 딸을 태운 마차를 몰았던 마부. 사고가 난 직후 상황을 설명한 사람. 그리고, 사과나무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말한 사람.'...저 마부가.'대신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홀 한쪽.다른 하인들보다 조금 뒤쪽에 서 있는 늙은 마부에게로. 루시안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침통한 얼굴, 죄책감에 짓눌린 듯한 표정. 언뜻 보면 자신이 모시던 어린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늙은 하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신의 눈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거짓말을 하는 건가.'그 순간. 루시안의 눈이 아주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루시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정말 찰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하지만 대신은 보았다. 그 짧은 흔들림을.그러나 대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다시 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등 뒤로 모아둔 손은 어느새 꽉 쥐어져 있었다.'...확인해 봐야겠군.'그때."...클레르."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의 시선이 움직였다.
엘로이즈의 얼굴에서 억지로 짓고있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사아아.노란 후레지아 꽃밭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나 아름답게. "...클레르?""...클레르.""클레르...?"엘로이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클레르. 장난치지 마.""...""클레르.""눈 떠봐.""클레르...!!""눈 떠봐!!!"동생의 뺨을 감싼 손이 미친듯이 떨렸다."클레르!! 언니 여기 있잖아!!"아무리 불러도 클레르의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아니야... 아니야..."한 번. 두 번. 현실 자체를 계속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결국,"클레르으으으!!!"엘로이즈의 울음 섞인 절규가 산속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쓰러진 동생의 곁에서 울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부모 앞에서조차 크게 울어본 적 없던 아이가. 예법도, 체면도, 가문의 이름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도 전부 잊어버린 채, 그저 동생의 이름만 계속 불렀다."클레르...""클레르... 제발...""눈 떠봐...""...언니가 잘못했어..."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노란 후레지아들도 다시 흔들렸다.조금 떨어진 곳.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르...!"엘로이즈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이 가득 피어난 바로 앞에서, 끝내 동생과 함께 꽃 한 송이 꺾어보지 못한 채.그날 밤.드 로베르 저택 안.저택 전체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넓은 홀 양옆으로 하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그 가운데, 작은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관 주변에는 수많은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흰 꽃과 보라색 꽃.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후레지아가 놓여 있었다. 클레르가 좋아했던 꽃. 낮에 유난히 꺾고싶어했던 꽃.그 꽃들에 둘러쌓인 채, 클레르는 관 안에 조용히 누
"아가씨!!"산속을 울리는 비명에 황급히 고개를 들은 루시안은 다급하게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흙바닥을 거칠게 밟았다. 조금 전까지 마력을 다루던 손을 황급히 감춘 채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마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에 놀란것처럼."아가씨!! 괜찮으십니까?!"그러나 마차 가까이 다가간 순간, 루시안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부서진 마차. 산산이 갈라진 천장. 그리고 길 위, 클레르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연한 크림색 드레스는 흙먼지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금빛 머리카락 사이에는 파란 리본들이 풀어진 채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붉은 피가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루시안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차 안에는 엘로이즈가 있었다. 다친곳은 보이지 않았고,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은 아직도 허공을 향해 뻗어져 있었다. 조금 전, 클레르의 손을 붙잡으려 했던 그 자세 그대로. 눈은 열린 마차 문 너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클...""...클...""...클레르...?""....클레르!!!"엘로이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드레스 자락이 부서진 마차 문 조각에 걸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계단을 제대로 밟지도 못한 채 거의 굴러 떨어지듯 땅으로 내려와 그대로 동생에게 달려갔다.엘로이즈는 클레르의 옆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이 허공을 헤맸다. 어디를 만져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엘로이즈의 손이 클레르의 뺨으로 향했다."클레르!!""눈 떠.""클레르!! 눈 떠!! 언니야!!"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곧 정신을 차린 듯 다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아가씨,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대로 여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서 작은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야 합니다."루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클레르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심스럽
"꺄악!!"지붕이 크게 흔들리고, 마차 전체가 옆으로 기울며 거칠게 요동쳤다. 엘로이즈와 클레르는 동시에 몸의 균형을 잃었다."뭐야...!"엘로이즈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콰직!!클레르의 머리 위 마차 천장이 산산이 갈라지며 굵은 사과나뭇가지 하나가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뭇가지는 클레르의 등을 그대로 관통했다."....윽!!"클레르의 몸이 충격과 함께 그대로 굳어 버렸다.엘로이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클레르?"그때. 우지직.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과나뭇가지가 거대한 소리와 함께 부러지기 시작했다. 클레르의 등을 관통한 채 박혀 있던 나뭇가지 역시 그대로 부러졌고, 갈라진 천장과 열린 마차 문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클레르의 몸은 등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꽂힌 채 그대로 마차 밖으로 휩쓸려 나갔다."클레르!!"엘로이즈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서로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 모두 담겨 있었다."잡아...!"엘로이즈의 손끝이 간신히 닿을 듯 다가갔다. 하지만 한순간 늦었다. 손가락 끝만 스친 채, 클레르의 손은 엘로이즈의 손을 빠져나갔다."...안 돼!!"엘로이즈의 절박한 외침과 함께, 클레르의 몸은 그대로 마차 밖으로 떨어졌다.끼이익!루시안은 마치 예상치 못한 사고라도 난 것처럼 다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들이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췄고, 마차도 겨우 멈춰섰다."이.. 이게 무슨..."겉으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급히 마차를 돌아보았다.마차 안.엘로이즈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직도 방금 전 클레르의 손이 자신의 손끝을 스쳐 지나간 감각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시선이 열린 마차 문 너머로 향했다."..."길 위에는 클레르가 쓰러져 있었다. 금빛 머리는 모두 흐트러져 있었고, 연한 크림색 드레스는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차는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돌길은 어느새 흙길로 바뀌었고, 바퀴는 부드럽게 흙을 밟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창밖을 바라보던 클레르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이 산 진짜 예쁘다!!"엘로이즈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햇살을 머금은 잎사귀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였다.숲 사이로는 맑은 계곡물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야생 과일 나무들이 탐스럽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쥐저기고 있었고, 다람쥐 한 마리가 줄기를 타고 재빠르게 오르내리는 모습도 보였다.엘로이즈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 미소지었다"...그래. 예쁘네.""언니! 저기 참새도 있어!""우와! 다람쥐다!""저 계곡도 엄청 시원해보인다!!"클레르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해맑게 웃는 얼굴에는 꾸밈도, 망설임도 없었다. 좋으면 좋다고, 예쁘면 예쁘다고, 그 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아이였다.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잠시 부러운 듯한 눈빛이 스쳤다.'언니도 너처럼...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 생각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다시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한편, 마차 밖.안장 위에 앉은 루시안은 묵묵히 고삐를 쥔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도 푸른 숲과 햇살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그의 눈에 조금도 아름답게 들어오지 않았다.루시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죄 없는 아이를 죽이려 하다니...''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구나.'루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마차는 더욱 깊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루시안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잠시 후. 드 로베르 저택 앞마당. 따뜻한 햇살이 돌바닥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며 두 자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은은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부드러운 색감은 그녀의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옆에는 연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곱게 땋은 금빛 머리에 파란 리본을 단 클레르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파란 리본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클레르의 얼굴에는 꽃밭으로 향한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저택 앞에는 검은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준비되어 있었다. 말들은 숨을 내쉬며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 앞에는 늙은 마부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안 로웬.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미소를 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인사를 마친 루시안은 조용히 마차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엘로이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오르기 전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늘 보던 온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얼굴에는 어딘가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의 눈빛은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슬퍼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엘로이즈는 클레르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클레르는 밝게 웃으며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계단을 오르다가 몸을 홱 돌려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니! 우리 가면 후레지아 꽃 많이 따와서 꽃병에 예쁘게 장식해놓자! 언니 방에도 놓고 내 방에도 놓으면 진짜 예쁘겠다!" "그래, 그래. 일단 타. 조심히." "응!" 클레르는 신이 난 듯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엘로이즈도 뒤이어 조용히 올랐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루시안은 문을 천천히 닫았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철컥. 작게 울렸다. 그는 천천히 마부석으로 걸어가 안장 위에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ㅡ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ㅡ" 잠깐 말을 멈췄다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금...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그녀는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
귀족 부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대신의 얼굴 윤곽이 짧게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했다. "당신은 늘... 너무 앞을 보세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열여섯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야심은 비례하지 않소." 대신의 답은 짧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아이일수록 더 멀리 보게 되지." 귀족 부인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멀리 본다 해서 다 위로 오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신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오르느냐가 아니오."
그날 아침 식사 시간.식당은 저택에서 두 번째로 빛이 많이 드는 공간이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은식기와 얇은 도자기 접시가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빵은 이미 적당한 두께로 썰려 있었고, 수프에서는 희미한 김이 올라왔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오른편,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시선은 낮게. 숨은 일정하게. 소리는 나지 않게.아가씨는 자리에 앉아있었다.잠시 후.문이 열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어왔다. 아가씨의 아버지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말보다 시선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었다.궁정 대신.왕의 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