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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hor: 빅비5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3 20:12:01

그날 아침 식사 시간.

식당은 저택에서 두 번째로 빛이 많이 드는 공간이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은식기와 얇은 도자기 접시가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빵은 이미 적당한 두께로 썰려 있었고, 수프에서는 희미한 김이 올라왔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오른편,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시선은 낮게. 숨은 일정하게. 소리는 나지 않게. 아가씨는 자리에 앉아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어왔다. 아가씨의 아버지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말보다 시선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었다.

궁정 대신.

왕의 곁에서 재정을 맡고, 조약을 검토하고, 귀족들의 이해를 조율하는 사람. 그는 집에서도 걸음이 일정했다. 과장도, 낭비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 식탁을 한 번 훑어보았다. 식기, 접시, 딸의 표정, 그리고 딸의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

그 시선이 아주 잠깐 멈췄다. 짧았지만, 분명히 멈췄다.

그림 하일드는 그 멈춤을 느꼈다. 고개를 더 숙이지도, 더 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저 아이가.. 새로 들어왔다는 하녀냐."

"네. 며칠전부터 제 곁에 서기로 했어요."

아가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림 하일드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였다. 손을 먼저 보았다. 굳은 손. 짧게 정리된 손톱. 하녀장의 규칙을 잘 지킨 자세. 그는 천천히 말했다.

"손은 쓸 줄 아는군."

칭찬도, 감탄도 아니었다. 평가였다.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배운 대로 하겠습니다."

"배운 대로라."

남자는 딸을 보았다.

"마음에 드느냐."

"네. 마음에 들어요."

식당 안의 다른 하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 하일드의 심장은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남자는 다시 수프를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게 되면 바꾸면 된다."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날카롭지도 않았다. 위협도 아니었다. 그저 이 집의 질서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그 말의 무게를 몸으로 이해했다. 이 저택에서 바꾼다는 건 물건에도, 사람에게도 같이 쓰이는 단어라는 걸. 아가씨는 아무렇지 않게 빵을 작게 잘랐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림 하일드는 틀리지 않거든요."

"틀리지 않는 건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운은 언제든 바뀐다."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세요. 하지만 전 운보다 습관을 믿어요. 잘 길들여진 습관은 운보다 오래 가거든요."

그림 하일드의 등줄기가 식은 듯 서늘해졌다.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멈췄다. 이번에는 딸에게서 그림 하일드로.

잠깐의 침묵.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알았다. 자신은 이 집에서 단순히 아가씨의 하녀가 아니라, 관찰 대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틀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이제는 아가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아침의 식사는 끝까지 조용했다. 은식기는 정확히 부딪혔고, 빵 부스러기는 흩어지지 않았으며, 아가씨는 단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림 하일드는 그날 이후로 자신의 손뿐 아니라 등 뒤의 시선까지 의식하게 되었다.

그날 점심의 살롱 시간.

왕실과 가까운 몇몇 가문의 영애들이 모여 있었다. 이 모임은 사교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실상은 왕의 귀에 가장 가까운 두 가문의 딸들이 나란히 앉는 자리였다. 한쪽은 왕의 정책을 설계하는 궁정 대신 가문. 그리고 다른 한쪽은 왕실 재정을 장악한 재무대신 가문.

정책과 돈.

왕의 양쪽 팔이라고 불리는 두 가문은 겉으로는 협력했지만, 왕이 누구의 말을 더 오래 듣는가에 따라 궁정의 바람은 달라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각 가문의 외동딸이 있었다.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는 오늘도 단정하고 절제된 차림이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눈을 피하지 않는 옷. 자신의 집안이 실리를 다룬다는 걸 아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궁정 대신의 딸, 아가씨의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에게 향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아이가.. 새로 들어왔다는 영애의 하녀인가요?"

"네. 며칠전부터 제 곁에 두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림 하일드."

아가씨가 자연스럽게 말했다.

"과자 접시가 비었네. 가서 더 가져다 줄래?"

"네, 아가씨."

그림하일드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문쪽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그 영애가 찻잔을 들며 말했다.

"저 아이.. 고아원 출신이라 들었는데... 생각보단 꽤 예쁘장하게 생겼더군요."

테이블 위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다른 아가씨들이 아주 작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가씨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저도 걱정했어요. 혹시 둔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생각보다 이해력도 빠르고, 일도 야무지게 잘하더라구요."

"그렇군요."

잠시 침묵. 그리고,

"그런데... 저런 근본도 모르는 고아원 출신 아이를 곁에 두면... 영애의 가문의 품격이 조금 떨어져 보이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걱정. 그 단어가 너무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게다가..."

그녀는 일부러 말을 멈췄다.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예전에, 영애의 동생이 알 수 없는 사고로 떠난 이후로... 가문의 소문도 조금은 뒤숭숭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출신도 모호한 아이를 곁에 두면... 괜히 더 말이 붙지 않겠어요?"

다른 아가씨 중 하나가 작게 숨을 삼켰다. 살롱 안의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게 팽팽해졌다. 아가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손에 들린 찻잔의 손잡이를 잡는 힘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품격은... 피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태도에서 나오는 거라고 저는 배웠어요. 그리고 소문은 늘 사실보다 빨리 자라죠.그걸 두려워해서 사람을 쓰지 않는다면 그건 품격이 아니라 겁이겠죠."

"역시.. 말씀은 참 곱게 하시네요. 다만 전, 예쁜 건 가까이 둘수록 위험하다고 배웠거든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문이 열렸다. 그림 하일드가 과자 접시를 들고 조용히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얼굴로. 하지만 공기가 아까와 다르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접시를 내려놓는동안 영애의 시선이 아주 노골적으로 그 얼굴 위에 머물렀다.

잠시. 그리고 다른 아가씨를 향해 돌아갔다.

아가씨는 그림 하일드를 한 번 보았다. 그 시선은 다정했지만, 그림 하일드의 얼굴에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날 저녁 식사 전, 아가씨의 방.

아가씨의 방에는 해가 거의 기울어 빛이 부드럽게 바닥을 스치고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커튼이 느리게 흔들렸다. 거울 앞에 앉은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은 리본이 아니라 얇은 진주 장식이 달린 핀을 꽂은 상태였다. 그림 하일드는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 저녁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아가씨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움직였다. 거울 속에 그림 하일드의 모습이 함께 비쳤다. 작고, 조심스럽고, 늘 반 걸음 뒤에 선 얼굴.

"그림 하일드."

"네, 아가씨."

"넌... 고아원에서 자랐다 했지."

질문은 가볍게 던져졌다. 마치 날씨를 묻는 것처럼. 그림 하일드의 손이 멈췄다.

"...네."

"거기선... 어떤 걸 배웠어?"

공기는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질문은 가볍지 않았다.

그림 하일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아원에서 배운 것.

울지 않는 법. 눈에 띄지 않는 법. 먼저 말하지 않는 법.

쓸모 있는 아이가 되는 법.

하지만 그 말들은 이 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그냥 일을 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일을?"

"네."

그림 하일드는 시선을 더 낮추었다.

"청소하는 법, 바느질하는 법,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법."

마지막 말은 아주 작게 흘러나왔다. 아가씨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직접,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았다.

"그건 기술이지. 난... 그게 아니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다가왔다.

"사람을 믿는 법이라든지, 누군가를 미워하는 법이라든지, 자기 걸 지키는 법 같은 건 배운 적 없는지 물어보는거야."

그림 하일드는 숨이 잠시 막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질문은 익숙하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누군가를 믿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미워하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지키는 건... 애초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네. 그냥... 쓸모 없는 아이가 되지 않는 게 중요했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가씨는 한동안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으로 하녀가 아닌 사람을 보는 것처럼.

"쓸모 없는 아이. 그럼 지금은?"

"지금은... 아가씨께 필요 있는 사람이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비굴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다. 그저 사실처럼 들렸다. 아가씨는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한참 보다가 다시 거울 쪽으로 돌아섰다.

"넌 참... 이상해."

작게 웃었다.

"화도 안 내고, 바라는 것도 없어 보이고.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누군가한테 다 빼앗기지 않을까?"

그림 하일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빼앗길 것.

애초에 자기 것이라 부를 만한 게 무엇이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빼앗길 게 있다면, 그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넌... 누가 빼앗아도 괜찮은 아이구나."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잠시 후, 아가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바꾸었다.

"가자. 저녁 늦겠다."

"네, 아가씨."

문을 나서기 전 아가씨는 거울을 한 번 더 보았다. 거울 속에는 자신과, 그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가 함께 비쳤다. 잠깐, 아주 잠깐 아가씨의 시선이 그림 하일드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고아원 출신. 예쁘장한 얼굴. 바라는 게 없는 아이.

그 조합이 왜인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가씨는 처음으로 자기 옆에 선 하녀의 얼굴을 조금 더 또렷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식당 안.

촛대의 불빛이 길게 늘어진 테이블 위를 따라 차분히 흔들리고 있었고, 은식기는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있었다. 상석에는 아가씨의 아버지, 궁정 대신이 앉아 있었다.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지는 않았지만, 몸은 단단히 중심을 잡고 있었다. 하루 종일 궁정에서 말을 다루던 사람의 피로가 아주 얇게 남아 있었다. 그의 오른편에는 귀족 부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표정은 단정했고, 손은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문이 열렸다.

아가씨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고개는 곧았다. 그 반 걸음 뒤를 그림 하일드가 따르고 있었다. 궁정 대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딸에게 닿았다가, 곧 그 뒤에 선 그림 하일드에게 옮겨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림 하일드의 얼굴에서 잠시 더 머물렀다.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그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더 숙이지도, 들지도 않았다. 그저 정해진 위치에 서 있었다. 궁정 대신은 아주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의자에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늦었구나. 어서 먹자."

그날 밤.

저택의 복도는 낮보다 더 고요했다. 촛불이 벽을 따라 길게 흔들렸고, 하인들의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신의 서재 문이 닫혔다. 안에는 책장과 문서 더미, 그리고 낮게 타는 촛불 하나가 있었다. 귀족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대신은 책상에 놓인 문서를 덮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

짧은 두 음절. 귀족 부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혹시.. 그림 하일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떤 아이 같소."

"그 아이라면... 그냥 묵묵히 일 잘하는 아이로 보이던데요. 말도 많지 않고, 우리 애 시중도 잘 들고 있고... 우리 애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부인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왜 그러십니까."

"난... 그 아이가 탐탁지 않소."

"탐탁지 않다니요."

"그 아이의 얼굴을 보았소."

"..."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눈은 죽어 있지 않았소. 무엇이든 다 이루고야 말겠다는 욕심이 담긴 눈이었소."

"고아원 출신 아이에게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출신과 욕심은 다르오."

대신이 천천히 말했다.

"관상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다고 했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아이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야욕이 있소."

대신은 단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얌전해 보이오. 하지만 그런 눈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오."

"우리 애는... 그 아이를 아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요."

짧은 침묵.

"우리 애 곁에 두는 건 좋소. 하지만... 너무 가까이 두지는 마시오."

"설마... 하녀 하나가 우리 애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영향은 힘 있는 자에게서만 오는 게 아니오."

촛불이 흔들렸다.

"때로는 곁에 서 있는 사람이 가장 깊이 스며드는 법이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 아이를 우리 애와 너무 가까이 두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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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꺄악!!"지붕이 크게 흔들리고, 마차 전체가 옆으로 기울며 거칠게 요동쳤다. 엘로이즈와 클레르는 동시에 몸의 균형을 잃었다."뭐야...!"엘로이즈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콰직!!클레르의 머리 위 마차 천장이 산산이 갈라지며 굵은 사과나뭇가지 하나가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뭇가지는 클레르의 등을 그대로 관통했다."....윽!!"클레르의 몸이 충격과 함께 그대로 굳어 버렸다.엘로이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클레르?"그때. 우지직.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과나뭇가지가 거대한 소리와 함께 부러지기 시작했다. 클레르의 등을 관통한 채 박혀 있던 나뭇가지 역시 그대로 부러졌고, 갈라진 천장과 열린 마차 문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클레르의 몸은 등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꽂힌 채 그대로 마차 밖으로 휩쓸려 나갔다."클레르!!"엘로이즈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서로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 모두 담겨 있었다."잡아...!"엘로이즈의 손끝이 간신히 닿을 듯 다가갔다. 하지만 한순간 늦었다. 손가락 끝만 스친 채, 클레르의 손은 엘로이즈의 손을 빠져나갔다."...안 돼!!"엘로이즈의 절박한 외침과 함께, 클레르의 몸은 그대로 마차 밖으로 떨어졌다.끼이익!루시안은 마치 예상치 못한 사고라도 난 것처럼 다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들이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췄고, 마차도 겨우 멈춰섰다."이.. 이게 무슨..."겉으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급히 마차를 돌아보았다.마차 안.엘로이즈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직도 방금 전 클레르의 손이 자신의 손끝을 스쳐 지나간 감각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시선이 열린 마차 문 너머로 향했다."..."길 위에는 클레르가 쓰러져 있었다. 금빛 머리는 모두 흐트러져 있었고, 연한 크림색 드레스는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27화

    마차는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돌길은 어느새 흙길로 바뀌었고, 바퀴는 부드럽게 흙을 밟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창밖을 바라보던 클레르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이 산 진짜 예쁘다!!"엘로이즈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햇살을 머금은 잎사귀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였다.숲 사이로는 맑은 계곡물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야생 과일 나무들이 탐스럽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쥐저기고 있었고, 다람쥐 한 마리가 줄기를 타고 재빠르게 오르내리는 모습도 보였다.엘로이즈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 미소지었다"...그래. 예쁘네.""언니! 저기 참새도 있어!""우와! 다람쥐다!""저 계곡도 엄청 시원해보인다!!"클레르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해맑게 웃는 얼굴에는 꾸밈도, 망설임도 없었다. 좋으면 좋다고, 예쁘면 예쁘다고, 그 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아이였다.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잠시 부러운 듯한 눈빛이 스쳤다.'언니도 너처럼...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 생각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다시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한편, 마차 밖.안장 위에 앉은 루시안은 묵묵히 고삐를 쥔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도 푸른 숲과 햇살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그의 눈에 조금도 아름답게 들어오지 않았다.루시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죄 없는 아이를 죽이려 하다니...''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구나.'루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마차는 더욱 깊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루시안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26화

    잠시 후. 드 로베르 저택 앞마당. 따뜻한 햇살이 돌바닥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며 두 자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은은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부드러운 색감은 그녀의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옆에는 연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곱게 땋은 금빛 머리에 파란 리본을 단 클레르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파란 리본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클레르의 얼굴에는 꽃밭으로 향한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저택 앞에는 검은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준비되어 있었다. 말들은 숨을 내쉬며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 앞에는 늙은 마부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안 로웬.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미소를 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인사를 마친 루시안은 조용히 마차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엘로이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오르기 전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늘 보던 온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얼굴에는 어딘가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의 눈빛은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슬퍼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엘로이즈는 클레르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클레르는 밝게 웃으며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계단을 오르다가 몸을 홱 돌려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니! 우리 가면 후레지아 꽃 많이 따와서 꽃병에 예쁘게 장식해놓자! 언니 방에도 놓고 내 방에도 놓으면 진짜 예쁘겠다!" "그래, 그래. 일단 타. 조심히." "응!" 클레르는 신이 난 듯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엘로이즈도 뒤이어 조용히 올랐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루시안은 문을 천천히 닫았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철컥. 작게 울렸다. 그는 천천히 마부석으로 걸어가 안장 위에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8화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7화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ㅡ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ㅡ" 잠깐 말을 멈췄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6화

    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 대신 말이다..."고삐를 쥔 손을 살짝 비틀었다."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짧은 웃음."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잠시 후"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그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5화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금...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그녀는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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