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5화

Author: 빅비5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7 13:09:01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

엘로이즈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며 천천히 웃었다.

"지금..."

말끝이 부드러웠다.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그녀는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걸 발견한 사람의 조용한 감탄에 가까웠다.

그림 하일드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방 한쪽에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

하녀장은 두 손을 단정히 모은 채 서 있었다.

"이제 아침 식사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엘로이즈는 거울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노란 리본.

정돈된 머리.

그리고ㅡ

그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

잠깐. 아주 잠깐.

그녀의 시선이 다시 거울 속 그림 하일드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엘로이즈는 가볍게 말했다.

"가자."

식당 안.

긴 테이블 위에는 이미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은식기는 어제와 같은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창가로 들어온 햇빛이 식탁 위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상석에는 대신이 앉아 있었다.

오늘도 그의 오른편에는 부인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손은 포개져 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식당 문이 열렸다.

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왔다.

걸음은 일정했고 고개는 곧았다.

그 반 걸음 뒤에서 그림 하일드가 따르고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의자 뒤 정해진 자리에 멈췄다.

엘로이즈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ㅡ

궁정 대신의 시선이 딸에게서 다시 그림 하일드로 옮겨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그림 하일드의 얼굴 위에 잠시 더 머물렀다.

의심인지, 확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그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엘로이즈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궁정 대신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딸을 바라보았다.

"어서 먹자."

말투는 담담했다. 엘로이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식사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식탁 위에는 포크와 접시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오갔다. 대신은 천천히 빵을 잘라 접시 한쪽에 놓았다.

그러다ㅡ

마치 일정 하나를 떠올린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엘로이즈."

엘로이즈는 포크를 들고있던 손을 잠시 멈췄다.

"네, 아버지."

"오늘은..."

대신은 잠깐 말을 고르듯 멈췄다.

"네 동생의 기일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엘로이즈의 포크가 접시 위에서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ㅡ

그녀의 눈썹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움직였다.

입가가 살짝 굳었다.

인상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사라졌다.

엘로이즈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이미 평소처럼 담담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궁정 대신은 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보는 눈이 많은 날이다."

부인의 손도 포크 위에서 잠시 멈췄다.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 안의 공기가 아주 얇게 굳었다.

귀족 부인의 눈이 잠깐 남편에게 향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로이즈는 잠시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포크를 다시 들었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

대신은 그 말에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래."

그는 다시 빵을 집었다.

엘로이즈는 다시 포크를 들어 빵을 천천히 잘랐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방금 오간 말들이 이 집안의 공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점심 무렵.

저택의 앞마당에는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차체는 이미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마부는 이미 자리에서 고삐를 정리하고 있었다.

말들은 조용히 발을 굴렀다.

부인과 엘로이즈가 함께 묘지로 가는 시간이었다.

집 안에서는 소란 없이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녀들은 복도를 빠르게 지나갔고, 문은 필요할때만

열리고 닫혔다.

그림 하일드는 엘로이즈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엘로이즈에게 마차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복도 끝 엘로이즈의 방문 앞에 다다르자ㅡ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하녀장이었다.

벽에 기대지도 않고 두 손을 단정히 모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숙였다.

"하녀장님."

하녀장은 짧게 눈을 마주쳤다.

"마차는 준비됐나."

"네.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하녀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돌아가신 둘째 아가씨의 기일이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부인과 아가씨께서 무덤에 다녀오실 거다."

복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녀장은 말을 이어갔다.

"드 로베르 가문에서는 해마다 이 날

직접 묘지를 찾는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단단한 무게가 있었다.

그리고—

하녀장은 다시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너도 같이 간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잠깐 올라갔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하녀장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분명했다.

"아가씨의 시녀니까."

그림 하일드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하녀장은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그림 하일드는 조용히 기다렸다.

"거기 가서는 조용히 있어라."

하녀장의 눈이 조금 더 좁아졌다.

"말하지 마라. 눈에 띄지도 마라."

그녀는 단정하게 덪붙였다.

"아가씨 곁에 서 있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몇마디를 더 보탰다.

"걸을 때는 항상 아가씨의 뒤에서 걸음을 맞춰라."

하녀장의 시선이 잠시 그림 하일드의 발끝에 머물렀다.

"앞서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마라."

그림 하일드는 잠시 그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차분히 대답했다.

"네."

그녀에게는 이미 익숙한 규칙이었다.

하녀장은 그제야 문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낮빛이 가득했다.

엘로이즈는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검은 외출 드레스 위에 얇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장갑이 들려 있었다.

거울 앞에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 닿았다.

"마차 준비됐어?"

그림 하일드가 조용히 대답했다.

"네, 아가씨."

엘로이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며 조용히 덪붙였다.

"그럼 가자."

엘로이즈는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림 하일드는 반 걸음 뒤에서 따랐다.

하녀장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앞마당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여정은 단순한 외출이 아니라, 드 로베르 가문의 또 하나의 '보여지는 장면'이 될 예정이었다.

앞마당, 마차 앞.

마부는 자리에서 고삐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망토의 자락이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렸다.

마차 문 앞에 멈춘 그녀는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자, 마차 안에는 이미 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엘로이즈를 보자 부드럽게 말했다.

"왔구나."

짧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어서 타렴."

엘로이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그녀는 천천히 마차에 올라탔다.

드레스 자락이 조심스럽게 정리되었고,

부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림 하일드는 마부 쪽으로 걸어갔다.

마부는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같이 가는 건가."

그림 하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림 하일드는 천천히 발을 올려 마부 옆 자리에 올라탔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자갈을 밟으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마차 안.

바퀴가 굴러가는 진동이 마차 안으로 잔잔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장갑을 낀 손이 무릎 위에 조용히 올려져 있었다.

부인은 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엘로이즈."

엘로이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가도... 괜찮겠니."

짧은 질문이었다.

마차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의 그림자가

창문을 가볍게 지나갔다.

그리고ㅡ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어머니."

목소리는 담담했다.

부인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 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행이구나."

마차가 길을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부인은 창문을 한 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덤은 이미 정리해 두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꽃도 새로 두라고 했어."

잠시 침묵.

그리고 조금 더 낮게 덧붙였다.

"...클레르가 꽃을 좋아했었지."

마차 밖.

마차는 돌길 위를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반복되었다.

말들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고

마부는 고삐를 느슨하게 쥔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엔 여전히 그림 하일드가 앉아 있었다.

등은 곧게 세워져 있었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잠시 후ㅡ

마부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림 하일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너."

그가 낮게 말했다.

"아가씨께 돌아가신 동생이 있다는 얘긴 들어봤겠지."

그림 하일드는 잠시 생각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돌아가신 둘째 아가씨가 계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마부는 짧게 코로 숨을 내쉬었다.

"그래."

말들이 고개를 흔들며 걸었다.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궁금하지 않냐."

마부의 말이 공기위에 잠시 남아 있었다.

말발굽 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말을 고르듯 잠깐 멈췄다.

"오늘 첫째 아가씨의 시중을 들기 위해 온 겁니다."

마부가 조금 고개를 돌렸다.

그림 하일드는 앞을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둘째 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게 아닙니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했다.

잠시 정적.

그리고ㅡ

마부의 입가가 피식 올라갔다.

작은 웃음이었다.

"그래?"

그는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말은 똑바로 하네."

잠시 후ㅡ

그는 낮게 덪붙였다.

"근데 말이다."

고삐를 조금 고쳐 잡았다.

"너... 이 가문 사람들 너무 믿지 마라."

말들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마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하지.

전통 있는 귀족 가문. 궁정 대신 집안."

그는 코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말끝이 조금 흐러졌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그림 하일드가 조용히 마부를 바라봤다. 마부는 고삐를 쥔 손을 조금 움직였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그가 낮게 말했다.

"둘째 아가씨..."

잠시 말을 멈췄다.

"사고로 돌아가셨단 얘긴 들어봤겠지."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대답없이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부는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마차를 타고 어딜 가시던 날이었다."

말발굽이 돌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마차 사고였지."

그는 담담하게 덪붙였다.

"그 마차를 몬 마부가..."

고삐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을 마쳤다.

"...우리 아버지였거든."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3화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그녀의 얼굴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커튼 끝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에는 아주 옅은 바람 소리만 남았다.엘로이즈는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전의 햇빛이 다시 떠올랐다.몇 년 전.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햇빛이 눈부시게 맑던 오후였다. 테라스 한쪽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어가는 차와 펼쳐진 책 한 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엘로이즈는 테라스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세는 이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조차 조용했다.정원에는 바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언니이이!!"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움직였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잔디를 가로질러 빠르게 가까워졌다.타다닥. 그리고 다음 순간,"언니!! 이것 좀 봐!!"클레르가 그대로 테라스까지 뛰어 올라왔다.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클레르."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레스. 연한 크림빛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치맛단은 흙투성이였고, 소매 끝에도 풀잎이 엉겨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가 걸려 있었다.엘로이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클레르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나 후레지아 꺾어왔어!"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도 그 꽃만큼 반짝이고 있었다."엄청 예쁘지?!"엘로이즈는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너 또 정원사 아저씨 몰래 꺾어온 거야?"클레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아닌데?"대답이 너무 빨랐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녀를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2화

    살롱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그림 하일드의 손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고, 흐트러짐없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아까와 달랐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이네스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급하지도 않았고,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숨 막히는 걸음.엘로이즈는 이네스의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하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넘치시는 우리 영애께서..."말은 웃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얇게 차가웠다."왜 제 하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는 그렇게 당황하시는 걸까요?"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엘로이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었다."아, 아니에요."그녀는 손끝으로 자기 드레스 소매를 아주 가볍게 정리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서늘했다."하인, 평민들을 향한 영애의 사랑은 이미 유명하니까요."엘로이즈는천천히 이어갔다."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신다는 얘기는 저도 자주 들었습니다."살롱 안 공기가 순간 흔들렸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네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엘로이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번 달만해도... 일자리 없는 평민들을 위해 직접 하인들을 3명이나 들이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남자로요."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 위로 열이 번졌다.살롱 안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른 영애들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인을 들였다.'귀족 사회에서는 때때로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말.특히 젊은 남자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1화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괜히 더 천천히 들었고, 누군가는 시선을 애매하게 창밖으로 돌렸다.한 영애가 아주 작게 한숨을 삼켰다.또 시작이구나.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손끝에 들어간 힘만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신히 유지된, 그러나 완벽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였다."...글쎄요..."엘로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는..."말끝은 부드러웠다.하지만 이네스는 그 틈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제가 영애였어도... 저 아이에게 잘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이네스는 천천히 이어갔다."아무리 고아원 출신의 하녀라지만... 동생분과 얼굴이 닮았다면..."이네스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돌아가신 동생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되거든요."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한 것이었다.다른 영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겠죠."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0화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네, 어머니."짧은 대답.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괜찮니."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많이 놀랐을 텐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들어가서 쉬렴."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9화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찰싹.짧은 소리."...가자."낮은 목소리.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너."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8화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급하게 다가와 엘로이즈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 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어야 할 가지. 그리고 바로 옆에 박혀 있는 무게.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맞지는 않았어요."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하마터면ㅡ"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 가지를 확인했다. 굵기. 무게. 낙하 위치."...큰일 날 뻔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떨어진 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이상하네."혼잣말처럼 낮게. 하지만 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표정은 다시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손이 굳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방금 전. 나무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철문 밖에서 느껴졌던 그 시선.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철문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카일.'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목이 조여오던 감각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숨이 막히던 순간.'...너도 죽는다. 이해했지?'그 목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림 하일드의 입술이 아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