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금...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걸 발견한 사람의 조용한 감탄에 가까웠다. 그림 하일드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방 한쪽에서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 하녀장은 두 손을 단정히 모은 채 서 있었다. "이제 아침 식사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엘로이즈는 거울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노란 리본. 정돈된 머리.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 잠깐. 아주 잠깐. 그녀의 시선이 다시 거울 속 그림 하일드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자." 식당 안. 긴 테이블 위에는 이미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은식기는 어제와 같은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창가로 들어온 햇빛이 식탁 위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오늘도 상석에는 대신이 앉아 있었다. 오늘도 그의 오른편에는 부인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손은 포개져 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식당 문이 열렸다. 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왔다. 걸음은 일정했고 고개는 곧았다. 그 반 걸음 뒤에서 그림 하일드가 따르고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의자 뒤 정해진 자리에 멈췄다. 엘로이즈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궁정 대신의 시선이 딸에게서 다시 그림 하일드로 옮겨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그림 하일드의 얼굴 위에 잠시 더 머물렀다. 의심인지, 확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그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엘로이즈의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대신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딸을 바라보았다. "어서 먹자." "네, 아버지." 식사는 조용히 시작되었다. 식탁 위에는 포크와 접시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오갔다. 대신은 천천히 빵을 잘라 접시 한쪽에 놓았다. 그러다 마치 일정 하나를 떠올린 사람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엘로이즈." "네, 아버지." "오늘은... 네 동생의 기일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 엘로이즈의 포크가 접시 위에서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눈썹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움직였다. 입가가 살짝 굳었다. 인상이라 부르기엔 너무 짧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사라졌다. 엘로이즈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이미 평소처럼 담담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보는 눈이 많은 날이다." 부인의 손도 포크 위에서 잠시 멈췄다.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 안의 공기가 아주 얇게 굳었다. 귀족 부인의 눈이 잠깐 남편에게 향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로이즈는 잠시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포크를 다시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대신은 다시 빵을 집었다. 엘로이즈는 다시 포크를 들어 빵을 천천히 잘랐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방금 오간 말들이 이 집안의 공기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점심 무렵. 저택의 앞마당에는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차체는 이미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마부는 이미 자리에서 고삐를 정리하고 있었다. 말들은 조용히 발을 굴렀다. 부인과 엘로이즈가 함께 묘지로 가는 시간이었다. 집 안에서는 소란 없이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녀들은 복도를 빠르게 지나갔고, 문은 필요할때만 열리고 닫혔다. 그림 하일드는 엘로이즈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엘로이즈에게 마차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복도 끝 엘로이즈의 방문 앞에 다다르자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하녀장이었다. 벽에 기대지도 않고 두 손을 단정히 모은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숙였다. "하녀장님." "마차는 준비됐나." "네.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신 둘째 아가씨의 기일이다. 그래서 부인과 아가씨께서 무덤에 다녀오실 거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하녀장이 말을 이어갔다. "드 로베르 가문에서는 해마다 이 날 직접 묘지를 찾는다."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단단한 무게가 있었다. 그리고 하녀장은 다시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너도 같이 간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아가씨의 시녀니까." "알겠습니다." "다만." 하녀장이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 하일드는 조용히 기다렸다. "거기 가서는 조용히 있어라." 하녀장의 눈이 조금 더 좁아졌다. "말하지 마라. 눈에 띄지도 마라. 아가씨 곁에 서 있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걸을 때는 항상 아가씨의 뒤에서 걸음을 맞춰라. 앞서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마라." "네." 그림 하일드에게는 이미 익숙한 규칙이었다. 하녀장은 그제야 문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낮빛이 가득했다. 엘로이즈는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검은 외출 드레스 위에 얇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손에는 장갑이 들려 있었다. 거울 앞에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문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 닿았다. "마차 준비됐어?" "네, 아가씨." "그래. 그럼 가자." 엘로이즈가 먼저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림 하일드는 반 걸음 뒤에서 따랐다. 하녀장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를 따랐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자 앞마당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여정은 단순한 외출이 아니라, 드 로베르 가문의 또 하나의 보여지는 장면이 될 예정이었다. 앞마당, 마차 앞. 마부는 자리에서 고삐를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망토의 자락이 걸음에 맞춰 가볍게 흔들렸다. 마차 문 앞에 멈춘 그녀는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자, 마차 안에는 이미 부인이 앉아 있었다. 부인은 엘로이즈를 보자 부드럽게 말했다. "왔구나. 어서 타렴." "네, 어머니." 그녀는 천천히 마차에 올라탔다. 드레스 자락이 조심스럽게 정리되었고, 부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림 하일드는 마부 쪽으로 걸어갔다. 마부는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같이 가는 건가." "네." 마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옆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림 하일드는 천천히 발을 올려 마부 옆 자리에 올라탔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 당겼다.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자갈을 밟으며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마차 안. 바퀴가 굴러가는 진동이 마차 안으로 잔잔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장갑을 낀 손이 무릎 위에 조용히 올려져 있었다. 부인은 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물었다. "엘로이즈." 엘로이즈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가도...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어머니." "그래. 다행이구나." 마차가 길을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부인은 창문을 한 번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덤은 이미 정리해 두었다. 꽃도 새로 두라고 했어. 클레르가... 꽃을 좋아했었지." 마차 밖. 마차는 돌길 위를 천천히 굴러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작은 소리가 반복되었다. 말들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고 마부는 고삐를 느슨하게 쥔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엔 여전히 그림 하일드가 앉아 있었다. 등은 곧게 세워져 있었고 두 손은 무릎 위에 얹혀 있었다. 잠시 후, 마부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림 하일드를 힐끗 바라보았다. "너. 아가씨께 돌아가신 동생이 있다는 얘긴 들어봤겠지." "...돌아가신 둘째 아가씨가 계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궁금하지 않냐." 그림 하일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첫째 아가씨의 시중을 들기 위해 온 겁니다. 둘째 아가씨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게 아닙니다." "그래? 말은 똑바로 하네." 잠시 후, 마부는 낮게 덪붙였다. "그런데 말이다. 너... 이 가문 사람들 너무 믿지 마라." 말들은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마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하지. 전통 있는 귀족 가문. 궁정 대신 집안.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그림 하일드가 조용히 마부를 바라봤다. 마부는 고삐를 쥔 손을 조금 움직였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그가 낮게 말했다. "둘째 아가씨... 사고로 돌아가셨단 얘긴 들어봤겠지."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대답없이 마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부는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마차를 타고 어딜 가시던 날이었다. 마차 사고였지." "그 마차를 몬 마부가..." "...우리 아버지였거든."대신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바로 일주일 전.자신과 부인이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날. 그 길을 지나갔다. 분명히 지나갔다. 같은 산길이었다. 창밖으로 보였던 풍경까지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길, 숲, 산비탈, 그리고...대신의 눈이 가늘어졌다.'...없었다.'사과나무. 그런 나무는 없었다. 적어도 마차 바로 옆으로 쓰러질 만큼 길 가까이에 서 있던 거대한 사과나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더구나 마부의 말대로라면, 오래되고 늙은 나무였다. 수십 년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법한 거대한 나무. 그런데.'...바로 일주일 전에는 사과나무 자체가 없었다.''일주일 만에...''그 정도 크기의 나무가 갑자기 생겨났다고?'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생각이 닿았다.루시안.오늘 두 딸을 태운 마차를 몰았던 마부. 사고가 난 직후 상황을 설명한 사람. 그리고, 사과나무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말한 사람.'...저 마부가.'대신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홀 한쪽.다른 하인들보다 조금 뒤쪽에 서 있는 늙은 마부에게로. 루시안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침통한 얼굴, 죄책감에 짓눌린 듯한 표정. 언뜻 보면 자신이 모시던 어린 아가씨를 지키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늙은 하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신의 눈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거짓말을 하는 건가.'그 순간. 루시안의 눈이 아주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루시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정말 찰나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하지만 대신은 보았다. 그 짧은 흔들림을.그러나 대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다시 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등 뒤로 모아둔 손은 어느새 꽉 쥐어져 있었다.'...확인해 봐야겠군.'그때."...클레르."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신의 시선이 움직였다.
엘로이즈의 얼굴에서 억지로 짓고있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사아아.노란 후레지아 꽃밭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나 아름답게. "...클레르?""...클레르.""클레르...?"엘로이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클레르. 장난치지 마.""...""클레르.""눈 떠봐.""클레르...!!""눈 떠봐!!!"동생의 뺨을 감싼 손이 미친듯이 떨렸다."클레르!! 언니 여기 있잖아!!"아무리 불러도 클레르의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아니야... 아니야..."한 번. 두 번. 현실 자체를 계속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결국,"클레르으으으!!!"엘로이즈의 울음 섞인 절규가 산속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쓰러진 동생의 곁에서 울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부모 앞에서조차 크게 울어본 적 없던 아이가. 예법도, 체면도, 가문의 이름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도 전부 잊어버린 채, 그저 동생의 이름만 계속 불렀다."클레르...""클레르... 제발...""눈 떠봐...""...언니가 잘못했어..."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노란 후레지아들도 다시 흔들렸다.조금 떨어진 곳. 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레르...!"엘로이즈가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이 가득 피어난 바로 앞에서, 끝내 동생과 함께 꽃 한 송이 꺾어보지 못한 채.그날 밤.드 로베르 저택 안.저택 전체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넓은 홀 양옆으로 하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그 가운데, 작은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관 주변에는 수많은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흰 꽃과 보라색 꽃.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후레지아가 놓여 있었다. 클레르가 좋아했던 꽃. 낮에 유난히 꺾고싶어했던 꽃.그 꽃들에 둘러쌓인 채, 클레르는 관 안에 조용히 누
"아가씨!!"산속을 울리는 비명에 황급히 고개를 들은 루시안은 다급하게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발이 흙바닥을 거칠게 밟았다. 조금 전까지 마력을 다루던 손을 황급히 감춘 채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마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에 놀란것처럼."아가씨!! 괜찮으십니까?!"그러나 마차 가까이 다가간 순간, 루시안의 걸음이 멈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 부서진 마차. 산산이 갈라진 천장. 그리고 길 위, 클레르만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연한 크림색 드레스는 흙먼지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금빛 머리카락 사이에는 파란 리본들이 풀어진 채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로 붉은 피가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루시안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차 안에는 엘로이즈가 있었다. 다친곳은 보이지 않았고,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은 아직도 허공을 향해 뻗어져 있었다. 조금 전, 클레르의 손을 붙잡으려 했던 그 자세 그대로. 눈은 열린 마차 문 너머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클...""...클...""...클레르...?""....클레르!!!"엘로이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드레스 자락이 부서진 마차 문 조각에 걸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계단을 제대로 밟지도 못한 채 거의 굴러 떨어지듯 땅으로 내려와 그대로 동생에게 달려갔다.엘로이즈는 클레르의 옆에 주저앉았다. 떨리는 손이 허공을 헤맸다. 어디를 만져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엘로이즈의 손이 클레르의 뺨으로 향했다."클레르!!""눈 떠.""클레르!! 눈 떠!! 언니야!!"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시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곧 정신을 차린 듯 다급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아가씨,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대로 여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서 작은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야 합니다."루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클레르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심스럽
"꺄악!!"지붕이 크게 흔들리고, 마차 전체가 옆으로 기울며 거칠게 요동쳤다. 엘로이즈와 클레르는 동시에 몸의 균형을 잃었다."뭐야...!"엘로이즈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콰직!!클레르의 머리 위 마차 천장이 산산이 갈라지며 굵은 사과나뭇가지 하나가 그대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뭇가지는 클레르의 등을 그대로 관통했다."....윽!!"클레르의 몸이 충격과 함께 그대로 굳어 버렸다.엘로이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클레르?"그때. 우지직.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과나뭇가지가 거대한 소리와 함께 부러지기 시작했다. 클레르의 등을 관통한 채 박혀 있던 나뭇가지 역시 그대로 부러졌고, 갈라진 천장과 열린 마차 문이 동시에 무너져 내렸다. 클레르의 몸은 등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꽂힌 채 그대로 마차 밖으로 휩쓸려 나갔다."클레르!!"엘로이즈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서로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 모두 담겨 있었다."잡아...!"엘로이즈의 손끝이 간신히 닿을 듯 다가갔다. 하지만 한순간 늦었다. 손가락 끝만 스친 채, 클레르의 손은 엘로이즈의 손을 빠져나갔다."...안 돼!!"엘로이즈의 절박한 외침과 함께, 클레르의 몸은 그대로 마차 밖으로 떨어졌다.끼이익!루시안은 마치 예상치 못한 사고라도 난 것처럼 다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들이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췄고, 마차도 겨우 멈춰섰다."이.. 이게 무슨..."겉으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급히 마차를 돌아보았다.마차 안.엘로이즈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아직도 방금 전 클레르의 손이 자신의 손끝을 스쳐 지나간 감각이 남아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시선이 열린 마차 문 너머로 향했다."..."길 위에는 클레르가 쓰러져 있었다. 금빛 머리는 모두 흐트러져 있었고, 연한 크림색 드레스는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차는 어느새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돌길은 어느새 흙길로 바뀌었고, 바퀴는 부드럽게 흙을 밟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창밖을 바라보던 클레르의 눈이 크게 반짝였다. 설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이 산 진짜 예쁘다!!"엘로이즈는 잠시 책에서 시선을 떼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햇살을 머금은 잎사귀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였다.숲 사이로는 맑은 계곡물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야생 과일 나무들이 탐스럽게 열매를 맺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서는 참새 몇 마리가 쥐저기고 있었고, 다람쥐 한 마리가 줄기를 타고 재빠르게 오르내리는 모습도 보였다.엘로이즈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다 미소지었다"...그래. 예쁘네.""언니! 저기 참새도 있어!""우와! 다람쥐다!""저 계곡도 엄청 시원해보인다!!"클레르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해맑게 웃는 얼굴에는 꾸밈도, 망설임도 없었다. 좋으면 좋다고, 예쁘면 예쁘다고, 그 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아이였다.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잠시 부러운 듯한 눈빛이 스쳤다.'언니도 너처럼...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 생각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다시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한편, 마차 밖.안장 위에 앉은 루시안은 묵묵히 고삐를 쥔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도 푸른 숲과 햇살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그의 눈에 조금도 아름답게 들어오지 않았다.루시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죄 없는 아이를 죽이려 하다니...''평생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구나.'루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마차는 더욱 깊은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루시안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잠시 후. 드 로베르 저택 앞마당. 따뜻한 햇살이 돌바닥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며 두 자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은은한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햇살을 머금은 듯한 부드러운 색감은 그녀의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옆에는 연한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곱게 땋은 금빛 머리에 파란 리본을 단 클레르가 종종걸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파란 리본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클레르의 얼굴에는 꽃밭으로 향한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저택 앞에는 검은 마차 한 대가 조용히 준비되어 있었다. 말들은 숨을 내쉬며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차 앞에는 늙은 마부가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안 로웬. 겉으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미소를 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인사를 마친 루시안은 조용히 마차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엘로이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에 오르기 전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늘 보던 온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도 얼굴에는 어딘가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의 눈빛은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슬퍼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엘로이즈는 클레르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클레르는 밝게 웃으며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계단을 오르다가 몸을 홱 돌려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니! 우리 가면 후레지아 꽃 많이 따와서 꽃병에 예쁘게 장식해놓자! 언니 방에도 놓고 내 방에도 놓으면 진짜 예쁘겠다!" "그래, 그래. 일단 타. 조심히." "응!" 클레르는 신이 난 듯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엘로이즈도 뒤이어 조용히 올랐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앉자, 루시안은 문을 천천히 닫았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철컥. 작게 울렸다. 그는 천천히 마부석으로 걸어가 안장 위에
그날 아침 식사 시간.식당은 저택에서 두 번째로 빛이 많이 드는 공간이었다. 긴 테이블 위에는 은식기와 얇은 도자기 접시가 정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빵은 이미 적당한 두께로 썰려 있었고, 수프에서는 희미한 김이 올라왔다. 그림 하일드는 아가씨의 오른편,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시선은 낮게. 숨은 일정하게. 소리는 나지 않게.아가씨는 자리에 앉아있었다.잠시 후.문이 열리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어왔다. 아가씨의 아버지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말보다 시선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었다.궁정 대신.왕의 곁에서
복도를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그들은 한 번 멈춰 섰다.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린 나이 많은 하녀가 다가와 있었다. 저택 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 특유의 굳은 기척이 있었다. 하녀장은 귀족 부인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이 아이가 오늘 새로 들어온 아가씨의 하녀입니까."질문이었지만 확인에 가까운 말투였다.귀족 부인은 소녀를 한 번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말은 짧았고, 망설임이 없었다."손을 보니 일은 할 줄 알겠더군요."하녀장은 그 말에 더 묻지 않았다.
돌은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는 감각조차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노파의 모습을 한 왕비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그러나 좀처럼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바위에 눌려 있었고, 목에서는 노파의 연약한 갈라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파. 주름진 손, 굽은 등, 한때 거울 앞에 서던 몸과는 전혀 다른 형체. 이게 지금의 자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끝이, 누구보다도 추악한 노파의 모습이라니. 웃음 비슷한 숨이 흘러나왔다. 젊었을 때의 목소리였다면, 이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요 등장인물 소개 그림 하일드 : 고아원 출신의 귀족가 하녀, 훗날 사악한 왕비,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워온 소녀. 고아원에서는 울지 않는 법을 배웠다. 부르지 않는 법을 배웠다. 눈에 띄지 않는 법을 배웠다. 쓸모 없는 아이는 남겨지지 않는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는 항상 마지막에 손을 내밀었고, 항상 조용히 있었고, 항상 문제되지 않는 존재로 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귀족가에 들어온 뒤, 그 규칙은 더 정교해진다. 틀리지 않는 법. 말보다 먼저 표정을 읽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