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돌은 차가웠다.
아니, 차갑다는 감각조차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노파의 모습을 한 왕비는 숨을 들이마시려 했다. 그러나 좀처럼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슴 한쪽이 바위에 눌려 있었고, 목에서는 노파의 연약한 갈라진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노파. 주름진 손, 굽은 등, 한때 거울 앞에 서던 몸과는 전혀 다른 형체. 이게 지금의 자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지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끝이, 누구보다도 추악한 노파의 모습이라니. 웃음 비슷한 숨이 흘러나왔다. 젊었을 때의 목소리였다면, 이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왕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분노도, 저주도 아니었다. 이름이었다. 아직 왕비가 아니었고, 마녀도 아니었을 때 불리던 이름.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노파의 굳은 가슴이 잠시 풀리는 듯했다. 그때의 그녀는 귀족 가문의 하녀였다. 대리석 바닥을 새벽마다 닦았고, 주인 아가씨의 드레스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바느질을 했다. 손은 늘 바빴고, 시선은 항상 낮아야 했다. "눈 마주치지 마." "먼저 말하지 마." "웃어도 소리 내지 마." 그런 규칙 속에서 살았지만, 그녀는 그 생활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족 아가씨는 언제나 아름다웠고, 그녀는 언제나 그 곁에 있는 존재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누가 더 예쁜지를 묻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저 "손이 야무지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겠어."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거울을 오래 보지 않았다. 아가씨의 머리를 빗겨주며 자연스럽게 비치는 자기 얼굴을 스쳐 지나가듯 볼 뿐이었다. 그 얼굴은 특별할 것도, 흉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왕비는 돌 아래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려다 멈췄다. 노파의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관절은 굳어 있었고, 손톱은 부러져 있었다. 이 손으로, 아가씨의 드레스를 정리했었다. 이 손으로, 머리 장식을 닦았고, 왕관을 받쳐 들었고, 그리고 나중에는 사과를 깎았다. 독을 바른 것도, 바로 이 손이었다. 그 사실이 숨이 막히듯 늦게 와서 가슴을 눌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보는 사람이 아닌 보여지는 사람이 된 건. 아가씨 대신 연회에 나섰던 날.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멈칫했던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아름답군요." 그 말은 축복처럼 들렸지만, 곧 그녀를 갉아먹는 사슬이 되었다. 그 하녀 소녀는 이런 미래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족 아가씨의 뒤에 조용히 서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던 자신이,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절벽 아래에서 죽어가게 될 줄은. 왕비는 깨달았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건 백설공주가 아니었다. 다시 하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름다움을 잃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어야 하는 미래, 그 미래가 두려웠다. 숨이 크게 한 번 새어 나왔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왕비는 마지막으로, 이 노파의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그 하녀 소녀를 떠올렸다. 이름이 있었던 시절. 거울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 아무도 그녀에게 가장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던 시절. 그 시절의 그녀는 지금보다 덜 빛났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그보다 무거운 건, 이미 선택해버린 길이었다. 돌 아래에서, 노파의 숨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기억은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마치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떠올릴 수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처럼. 귀족 가문의 대리석 바닥도, 아가씨의 드레스도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그보다 훨씬 오래된 냄새가 떠올랐다. 눅눅한 나무 냄새. 비에 젖은 천.아침마다 끓이던 묽은 수프에서 올라오던 이름 없는 풀 냄새. 고아원이었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곳에 있었다.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이들은 많았고, 침대는 늘 부족했다. 같은 담요를 두세 명이 나눠 덮는 날도 있었다.울면 혼났고, 아프면 더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일찍 배웠다. 울지 않는 법. 부르지 않는 법. 눈에 띄지 않는 법. 착한 아이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선생들은 늘 말했다. "얌전해야 해." "말 잘 들어야 해." "쓸모 있는 아이가 되어야지." 그녀는 그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켰다. 다른 아이들이 투정을 부릴 때 그녀는 바닥을 닦았고,남은 빵 조각이 있을 때 가장 마지막에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벌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쫓겨나지 않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곳에는 거울이 없었다. 자기 얼굴을 확인할 이유도 없었다. 아름다움은 그 아이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었으니까. 대신 손이 중요했다. 빨래를 할 수 있는 손. 바느질을 배울 수 있는 손. 누군가에게 맡겨질 수 있는 손. 그녀는 그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다 어느 날, 고아원을 찾은 귀족 부인이 아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그 시선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물건을 고르는 눈이었다. 그녀는 그때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괜히 선택받지 않게. 하지만 손을 보던 그 여자는 말했다. "저 아이." 그 말 한마디로 그녀는 고아원을 떠났다. 그게 구원이었는지, 그저 다른 종류의 굴레였는지 그때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선택된 아이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이 훗날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아직은 몰랐다. 돌 아래에서, 노파의 입술이 떨렸다. 평생을 살아오며 수없이 선택을 해왔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녀는 언제나 선택당하는 쪽이었다. 고아원에서, 귀족 가문에서, 왕궁에서조차도. 아름다움조차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라 요구받은 것이었다. 그 사실이 이제야, 돌보다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숨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아주 어린 시절, 그 고아원 바닥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잠들던 아이는 단 한 번도 왕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 아이가 원했던 건 그저, 내일도 쫓겨나지 않는 것. 오늘보다 아프지 않는 것.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지 않는 것. 그 소망이 이렇게까지 비틀려 이 노파의 몸으로 돌아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왕비는 아니, 노파는 그 아이를 처음으로 불러보고 싶어졌다. 이름이 있었던 아이를.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 바퀴가 자갈을 밟을 때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됐다. 소녀는 마차 안쪽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한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그 손은 작았지만 이미 굳어 있었다. 귀족 부인은 창밖을 보고 있다가 문득 시선을 돌려 소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넌 왜 손이 이렇게 굳었니." "일을... 많이 해서요." "그래서 널 데려가는 거야." 소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부인은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부드러웠지만 단정했다. "널 하녀로 데려가는 건 내 딸을 잘 보필할 것 같아서야." 소녀는 그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보필이라는 단어는 고아원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다. 부인은 소녀의 손을 한 번 더 보았다. "다른 아이들 손은 말랑하지. 아직 굳을 필요가 없는 손들이거든. 그런데 넌 달라. 이 손은... 일을 잘하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손이야." 칭찬처럼 들렸지만 소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저택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멀리서 높은 담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딸은 말이야, 조금 예민한 성격이야. 쉽게 상처받고, 쉽게 화를 내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아이지." 부인은 소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러니까 네가 비위를 맞춰가며 잘 돌봐야 해." 그 말은 부탁이 아니었다. 조건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아원에서 배운 대답이었다. 부인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먹을 건 줄게." 잠시 후, "잘 곳도." 그 두 마디가 마차 안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먹을 것. 잠잘 곳. 소녀의 가슴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건 약속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선택지의 끝이었다. 소녀는 그 순간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늘 밤 비를 맞지 않아도 되는 곳. 내일 아침 쫓겨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것이면 충분했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소녀는 창밖을 보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자기 손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굳은 손. 일하는 손.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데 쓰일 손. 그 손이 훗날 무엇을 쥐게 될지, 무엇을 깎고, 무엇에 독을 바르게 될지 그때의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이 손이 자신을 오늘 하루 더 살아 있게 해줄 거라 믿었을 뿐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소녀는 처음으로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숨이 아주 잠깐 멎었다. 담장은 고아원보다 훨씬 높았고, 돌은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 금이 간 곳 하나 없이 모서리까지 단정했다. 무너지지 않겠다는 얼굴의 건물이었다.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자갈이 깔린 길이 길게 이어졌고, 그 길의 끝에 저택이 있었다. 소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크다...' 하지만 그 말조차조심스러웠다. 마치 소리를 내면 이 풍경이 깨질 것 같아서. 계단은 넓었고, 손잡이는 차가운 금속이었다. 손을 대자 자기 손의 거칠음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문이 열리자 공기가 달랐다. 고아원의 공기는 늘 눅눅하고 무거웠다. 사람의 숨과 냄새가 겹겹이 쌓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비누 냄새가 났고, 햇빛 냄새가 났다. 소녀는 신발을 벗으며 바닥을 힐끗 보았다. 나무 바닥은 자기 얼굴이 어렴풋이 비칠 만큼매끄러웠다. '이걸 매일 닦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천장은 높았고, 창은 컸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아무 장애물 없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고아원에서는 빛이 늘 부족했다. 사람보다 먼저 어둠이 자리를 잡곤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빛이 남아돌았다. 소녀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감탄했다. '여기서는 밤도 덜 무서울 것 같아...' 복도를 따라 걸을 때마다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소녀는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괜히 눈이 마주칠까 봐. 하지만 옷은 보였다. 비단. 레이스. 주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소매. '저 옷을 입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은 금방 접었다. 자기 몫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자기에게 허락된 것만 떠올렸다. 이 집에서는 비를 맞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겨울에 손이 얼어붙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밤에 몰래 일어나 자리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조금 따뜻해졌다. 소녀는 자기 마음이 이렇게 쉽게 움직인다는 게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그 무서움보다 안도감이 더 컸다. '여기서는... 조금 오래 살아도 되겠다.' 그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소녀는 곧 만날 귀족 아가씨를 떠올리며 자세를 더 낮췄다. 이 집이 이렇게 아름다운 만큼, 그 안에서 요구될 것들도 분명 많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면서. 그래도. 그래도 이 저택은 그녀가 지금까지 본 어떤 곳보다 안전해 보였다. 그 착각이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아직 알지 못한 채로.떨어진 사과의 붉은 껍질은 천천히 빛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작은 검은 점 하나였다. 그러나 계절이 지나고, 비를 맞고, 햇빛에 마르기를 반복하는 사이 그 점은 조금씩 번져갔다. 붉음은 검게 물들었고, 단단했던 과육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껍질이 갈라진 틈 사이로 짙은 갈색이 스며들었고, 달콤한 향 대신 축축하게 썩어가는 냄새가 남았다. 한때 가지에 매달려 햇빛을 받던 사과는, 이제 아무도 찾지않는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갔다. 시들어 버린 사과꽃 잎 하나가 허공을 천천히 맴돌았다. 꽃잎은 검게 변한 사과 위를 스치듯 지나더니, 힘없이 그 곁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그것을 주워들지 않았다. 아무도 시간을 되돌리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흩날리던 꽃잎들이 천천히 흩어지고, 풍경은 아주 조금씩 흐려졌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물결 속으로 가라앉듯, 눈 앞의 정원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 엘로이즈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방 안에는 저녁빛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며들었고, 얇은 커튼이 느리게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시선은 느리게 창밖을 향했다. 저택 뒤편.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사과나무가 보였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 나무가 아니라, 그 아래에 남겨두고 온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내가... 후레지아 꽃을 꺾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클레르는 아직도...." "...아가씨." 그림 하일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사과나무를 향하고 있었다. 저녁 바람이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가지 끝이 느리게 흔들렸다. 엘로이즈는 그 흔들림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 나무가 아니라, 그 날의 기억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일주일 후. 점심 햇살이 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현관 앞에는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검은 말들이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하인들은 양옆으로 가지런히 서 있었다. 끼익. 현관문이 열렸다. 먼저 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외출복 차림으로. 그 뒤로 부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 엘로이즈와 클레르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엘로이즈는 오늘도 단정했다. 흑발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햇빛 아래에서 그녀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부모를 바라보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어머니,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대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역시 아주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늘도 중요한 연회가 있어서... 좀 늦을 거란다." "...네." 그 순간, 부인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클레르. 연한 노란빛 드레스를 입은 둘째 딸이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처럼 들떠 뛰어나가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처럼 풀이 죽은 얼굴도 아니었다. 부인은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클레르." "네, 어머니." "어머니, 아버지 없는 동안 언니 말 잘 듣고. 말썽 피우지 말고." "...네, 어머니." 클레르의 대답은 얌전했지만, 고개를 들던 순간, 슬쩍 옆에 있는 엘로이즈를 바라봤다. 그리고, 싱긋. 아주 작게 웃었다. 엘로이즈 역시 그 시선을 느꼈다. 잠시 눈을 깜빡인 그녀의 입가에도 아주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부인은 그런 두 딸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궁정 대신이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뒤이어 부인이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천천히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마차 문이 닫혔다. 찰싹. 고삐가 움직였다. 바퀴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덜커덩. 검은 마차는 아침 햇살 아래를 지나 천천히 저택 밖으로 멀어져 갔다. 계단 위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두 사람만 남았다. 그리고 마차가
그날 밤.드 로베르 저택은 이미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는 촛불 몇 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창밖 정원은 달빛 아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인들의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저택 뒤편,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오래된 마굿간 쪽으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 하인. 그는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여져 있었다.끼익.낡은 마굿간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짚 냄새. 낡은 나무 냄새. 그리고 말들의 낮은 숨소리. 남자 하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굿간 안쪽 구석. 낡은 의자 하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늙은 마부. 해진 외투. 거칠게 갈라진 손.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만큼은, 평범한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카일 로웬의 아버지.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 온 마법사, 루시안 로웬.남자 하인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루시안 님.""말해라.""...다음 주에 후레지아 꽃을 꺾으러 산으로 간답니다.""...산으로.""예. 둘째 영애와 큰 영애 둘이서요.""...그래. 드디어 때가 왔구나. 꽃을 좋아하는 계집 아이들은... 늘 경계가 없지.""...그리고 마침, 그 산으로 가는 길에 사과나무를 심어놓기 좋은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사과나무.""예. 햇빛도 잘 들고, 땅도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 아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사과나무.그 단어가 마굿간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등불 불꽃이 다시 한 번 길게 흔들렸다. 루시안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그래. 좋군."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었다. 늙은 마부의 허름한 그림자 아래로, 서늘한 미소가 아주 얇게 드러나고 있었다.마굿간 안은 다
엘로이즈는 끝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굳어 있었다. 마침내 클레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작게 이어졌다. "...언니. 정말... 어머니, 아버지도 나 싫어하시고...언니도 나 싫어할 거야?" "아니야." 엘로이즈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괜히 심술 부린거야." "아니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고.. 어머니도.. 항상 나만 보면 한숨 쉬셨고... 방금도 아버지가 나 조심성없다고 혼내신 것도..." "아니야." 엘로이즈가 조금 더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러신거야. 네가 다칠까봐, 또 남들이 함부로 말할까봐. 그래서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나.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야." 엘로이즈의 눈이 멈췄다. 클레르는 울먹이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볼 때 어떤 눈 하는지는 나도 알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식당 안 공기가 아주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아주 작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클레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클레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툭. 엘로이즈의 손이 조용히 클레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클레르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클레르. 너 언니 눈 똑바로 봐."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언니 말 못 믿겠어?" 클레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선 너머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언니는 거짓말 안 해." 그녀가
엘로이즈는 잠시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죄송해요..."하고 웃어 넘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클레르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클레르..."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은 잠시 더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테이블 위에 번진 소스. 굳어버린 손끝.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부인이 눈을 들었다. "왜, 더 안 드시고요?" "입맛이 없어졌소." 대신은 아무 말도 더 하지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식당 안은 더 조용해졌다. 클레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말이 거기서 멈췄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 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울음을 참고있는 얼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복잡한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부인은 결국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조용히 스쳤다. "...먼저 일어나마." 그녀는 잠시 두 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덜컥. 이제 식당 안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둘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있는 동생.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하고, 포크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모습. 엘로이즈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덜컥. 살롱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조용함이 내려 앉았다. 복도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만 길게 깔려 있었다. 클레르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넘어졌던 자세 그대로. 작은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녀가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 부드럽게 웃던 얼굴. 다정했던 목소리. '언니분까지 영애를 창피해하시고, 싫어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클레르의 손이 떨렸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클레르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자기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천. 조금 전까지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꾸깃. 하얀 천이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하녀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작은 아가씨,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진짜.." "...네?" "내가 진짜로... 언니를 창피하게 만들어?" "아가씨..." "내가 자꾸 뛰어다녀서...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언니도...나 싫어하게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복도 창문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클레르의 금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하얀 손수건이 점점 더 작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드 로베르 저택의 식당은 조용했다. 하인들이 벽 쪽에 조용히 서 있었고, 식당 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엘로이즈는 평소처럼 단정한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ㅡ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ㅡ" 잠깐 말을 멈췄다
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 대신 말이다..."고삐를 쥔 손을 살짝 비틀었다."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짧은 웃음."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잠시 후"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그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금...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그녀는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