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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Author: 빅비5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8 20:09:56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잠깐 말을 멈췄다.

"...어쩔 수 없었어."

그의 시선이 다시 철문으로 향했다.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마부의 머릿속에 그림 하일드의 얼굴이 아주 잠깐 떠올랐다.

놀란 눈. 숨이 막히던 순간.

그래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던 표정.

마부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너라도... 내 마지막 푸념을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정리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마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린 구름 사이로 햇빛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마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

그 한 단어가 아주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떨어졌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지만 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 뿐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아주 작게.

"저도... 오늘 저 첫째 계집을 죽이고... 당신 곁으로 갈게요."

그 말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정해둔 결론처럼. 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마부, 아니,'카일 로웬'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고삐를 정리했다. 말들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마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끝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그 시각, 묘지 안.

바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마른 풀들이 서로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걷고 있었다.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정해진 속도. 흔들림 없는 걸음. 그 옆에선 부인이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반 걸음 뒤. 그림 하일드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시선은 낮게. 발걸음은 맞춰서.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게.

묘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줄지어 선 묘비들 사이로 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하나의 묘지가 보였다. 다른 묘지들보다 더 정돈되어 있고, 누군가가 자주 손을 보는듯한 자리. 묘지 주변에는 신선한 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얀 꽃, 옅은 분홍빛 꽃, 막 시들기 시작한 꽃과 방금 가져다 놓은 듯 생기가 남아있는 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엘로이즈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부인은 그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뒤로 옮겼다.

그림 하일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아이. 발걸음은 정확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존재감조차 스스로 낮추고 있었다. 마치 이 공간에 있지 않는 사람처럼. 부인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생각했다.

'...우리 애와... 조금만 더 맞추면...'

부인의 시선이 다시 엘로이즈의 옆모습으로 향했다. 햇빛을 받으며 걷는 딸의 모습. 흐트러짐 없는 자세. 단정한 걸음.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 두 사람의 거리가 아주 미세하게 겹쳐 보였다. 부인의 눈이 조용히 가라 앉았다.

'될 것 같은데.'

그 생각은 확신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었다. 그저 가능성을 재는 사람의 조용한 판단이었다. 그 사이 묘지 앞에 다다랐다. 꽃들 사이로 드러난 묘비에 '클레르 드 로베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스쳤다. 꽃잎이 흔들렸다. 세 사람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엘로이즈는 꽃들 사이로 드러난 이름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레르 드 로베르. 돌 위에 새겨진 글자는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은 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주변에 놓인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엘로이즈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들고있었던 꽃다발이 시야 아래로 내려왔다. 옅은 노란빛을 머금은 꽃들.

후레지아.

막 피어난 듯한 생기가 남아 있었고, 은은한 향이 바람을 타고 퍼졌다. 엘로이즈는 잠시 그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르. 잘 있었어...?"

그 말은 누군가에게 들리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들렸다. 엘로이즈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드레스 자락이 조용히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후레지아 꽃다발을 묘지 앞에 내려놓았다. 이미 놓여 있던 꽃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손을 떼기 전 아주 잠깐, 꽃잎 하나를 손끝으로 정리했다. 흐트러지지 않게. 그녀는 다시 입을 천천히 열었다.

"...후레지아. 너가 제일 좋아하던 거잖아. 장미꽃보다.. 이걸 더 좋아했었잖아."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엘로이즈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묘비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른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그 날도, 이렇게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마차 안.

엘로이즈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 클레르가 앉아 있었다. 클레르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창밖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내려 앉았다. 옅은 금빛이 감도는 밝은 머리. 결이 고와서 빛을 받으면 거의 투명하게 번졌다. 얼굴은 아직 어린 기운이 남아 있었고, 둥글게 살아있는 윤곽 위로 잘 웃는 입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은 엘로이즈보다 조금 더 크고, 빛을 더 많이 담는 눈이었다. 무언가를 보면 그대로 드러나는 눈. 숨기지 못하는 눈. 클레르는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몸을 더 앞으로 기울였다.

"언니, 저기 봐."

"...뭔데."

"꽃."

엘로이즈의 눈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클레르는 창밖을 가르키며 웃고 있었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눈동자가 더 또렷하게 빛났다.

"저거 후레지아 아니야?"

엘로이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차 밖, 길가에 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이 반짝였다.

"저거 진짜 좋아하는데. 난 장미보다 저게 더 좋아."

"...그래."

"언니는 장미 좋아하잖아."

"그냥, 무난하니까."

"난 싫어."

클레르는 웃으며 말했다. 입가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억지로 만든 웃음이 아니라, 그저 기분이 좋으면 바로 드러나는 웃음.

"너무... 보여주기 같아."

그 말이 끝난 직후, 마차가 갑자기 흔들렸다.

덜컹.

바퀴가 돌을 잘못 밟은 듯 차체가 크게 기울었다.

엘로이즈의 몸이 순간 앞으로 쏠렸다.책이 손에서 떨어졌다.

"...!"

마차가 통제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속도가 붙었다. 바퀴가 돌을 튕겨내며 거칠게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손이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 몸이 계속 밀렸다. 문 쪽으로.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틈이 점점 벌어졌다. 바람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엘로이즈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때,

"언니!"

클레르의 목소리.

다음 순간, 몸이 강하게 밀렸다. 엘로이즈의 시야가 흔들렸다. 자기 몸이 안쪽으로 튕겨 들어갔다. 대신 다른 무게가 문 쪽으로 쏠렸다.

찰나. 눈이 마주쳤다.

클레르였다. 밝던 눈이 그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대로 몸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문이 완전히 열렸다. 바람이 한 번 크게 휘몰아쳤다. 그리고,

"클레르!"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은 닿지 않았고, 몸은 잡히지 않았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차가 멈췄을 때, 엘로이즈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손이 떨렸고, 숨이 이어지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바깥에는 부서진 흔적과,피와,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클레르가 있었다.밝았던 머리카락이 흙 위에 흩어져 있었고, 아까까지 웃고 있던 얼굴은 너무 조용하게 멈춰 있었다.

"...언니."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기억이 만들어낸 것인지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묘지.

엘로이즈의 눈이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후레지아 꽃다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멈췄다. 표정은 이미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그날. 넌... 망설이지 않았지.'

바람이 스쳤다. 꽃잎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시선은 여전히 묘비 위에 머물러 있었다. 후레지아 꽃잎이 바람에 다시 흔들렸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아주 작게.

"...그날... 나만 아니였으면."

말끝이 흐려졌다. 시선이 꽃 위에서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넌 지금도..."

그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더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 엘로이즈의 손이 미세히 떨렸다가 다시 멈췄다.

그 순간, 옆에서 조용한 움직임이 닿았다. 부인의 손이었다.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엘로이즈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한 번. 천천히 토닥였다. 말은 없었다. 위로도,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표시처럼. 엘로이즈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이미 다시 정리되어 있었다. 아주 단정하게.

그 모든 모습을 조금 뒤에서 그림 하일드가 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정해진 자리에 서 있었지만, 시선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 하일드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가슴 안쪽이 묘하게 불편하게 조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집에서의 감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르게 흐른다는 걸.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엘로이즈의 시선이 묘비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손에 남아 있던 미세한 떨림도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또 올게. 그때까지... 잘 있어."

그 말은 약속처럼 남았다.

엘로이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레스 자락이 조용히 정리되었다.

귀족 부인의 손도 그제야 어깨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더 묘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다시 걸음이 이어졌다.

엘로이즈가 앞에서 걷고, 그 뒤를 부인이, 그보다 반 걸음 뒤에서 그림 하일드가 따랐다. 묘지 안쪽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 나갔다. 바람이 한 번 더 스쳤다. 꽃잎이 살짝 흔들렸고,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다.

그때, 귀족 부인의 시선이 한쪽으로 옮겨갔다. 묘지 가장자리.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크지 않은 나무였지만, 가지마다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햇빛을 받아 윤기가 돌았다.

귀족 부인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올해도 사과가 참 탐스럽게 열렸구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딘가 부드러웠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나무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클레르가 사과를 참 좋아했었지."

바람이 가지를 스쳤다. 사과 하나가 조금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발걸음이 잠깐 멈춘 듯했지만 곧 다시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묘지 안의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진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철문 밖.

마차 옆에 서 있던 마부, 아니, 마부의 탈을 쓴 마법사, 카일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기다리는 마부였다. 고삐를 느슨하게 쥔 손, 흐트러짐 없는 자세, 움직임 없는 시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모습.

하지만 그의 손끝이 조금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가 고삐 위에서 아주 느리게 눌렸다가, 다시 풀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공기가 반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주변에서 아주 천천히 모이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공기층이 마치 끌려오듯, 그의 주변으로 정렬되었다. 카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호흡을 아주 느리게, 일정하게 내쉬었다. 그 숨결이 그대로 바람의 방향이 되었다.

흐름이 하나로 이어졌다. 묘지 안쪽에서 철문을 향해, 그리고 그를 향해.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처럼 보였지만 그 흐름은 흩어지지 않았다. 양쪽으로 새지 않았다. 좁게, 가늘게, 그러나 끊기지 않고 정확히 이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카일의 손가락이 한 번 더 움직였다. 그 순간 바람이 조금 더 압축되었다. 흐름이 얇아지고, 밀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 위로 소리가 실려왔다.

"...사과를..." "...클레르가..." "...좋아했었지..."

처음에는 흐릿했다. 바람에 흩어진 단어 조각들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손이 고삐를 쥔 채 틀어졌다. 그에 따라 바람의 흐름이 한 번 더 정리되었다. 흩어지던 소리가 한 줄로 모였다. 이어졌다. 또렷해졌다. 문장이 완성되었다.

카일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 바람은 그의 앞에서만 작게 맴돌았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후.

카일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 당신 둘째딸이 좋아하던 게... 사과였다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묘지 안쪽, 사과나무로. 카일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움직였다. 쥐었다가 풀었다. 그 짧은 동작과 동시에 바람의 성질이 바뀌었다. 부드럽게 흐르던 공기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퍼져 있던 흐름이 하나의 방향으로 강하게 잡아당겨졌다.

"...그럼, 둘째가 좋아하던 걸로 첫째도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의 손이 고삐 위에서 천천히 닫혔다. 그와 동시에 묘지 안쪽의 바람이 쥐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공기를 움켜쥔 것처럼. 흐름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자연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정확하게. 사과나무 한 그루를 향해.

묘지 안.

엘로이즈와 부인, 그리고 그림 하일드는 사과나무를 지나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은 일정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때.

나뭇잎 하나가 혼자서 흔들렸다.

사각. 아주 작은 소리.

그림 하일드의 눈이 위로 움직였다.

사과나무.

햇빛을 받고 있는 가지들 사이에서 한 줄기의 흐름이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움직임. 그 바람은다른 곳과 달랐다. 한 방향으로만 좁게, 정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가지 하나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흔들림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 계속 비틀렸다. 삐걱. 소리가 났다. 나무가 내는 소리라기엔 너무 인위적인 소리. 억지로 힘을 주어 꺾는 것 같은 소리였다. 가지가 점점 더 휘어졌다. 그 위에 달려 있던 사과들이 흔들렸다. 하나가 떨어졌다.

툭.

작은 소리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 다음.

휙.

보이지 않는 힘이 한 번 더 당겨졌다.

가지의 중심이 순간적으로 틀어졌다.

그리고,

툭.

짧고, 결정적인 소리. 끊어지는 소리였다. 그 다음 순간,

쾅!!

굵고 무거운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속도는 빨랐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이. 방향은 정확했다. 엘로이즈의 머리 위. 햇빛이 가려졌다.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내려앉았다. 그저 사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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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드 로베르 저택은 이미 깊은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복도에는 촛불 몇 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창밖 정원은 달빛 아래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인들의 발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저택 뒤편, 사람들의 눈이 잘 닿지 않는 오래된 마굿간 쪽으로 한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망토를 깊게 눌러쓴 젊은 남자 하인. 그는 몇 번이고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는 최대한 죽여져 있었다.끼익.낡은 마굿간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른 짚 냄새. 낡은 나무 냄새. 그리고 말들의 낮은 숨소리. 남자 하인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마굿간 안쪽 구석. 낡은 의자 하나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늙은 마부. 해진 외투. 거칠게 갈라진 손. 깊게 눌러쓴 모자 아래로는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공기만큼은, 평범한 늙은이의 것이 아니었다. 카일 로웬의 아버지.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 온 마법사, 루시안 로웬.남자 하인이 낮게 고개를 숙였다."...루시안 님.""말해라.""...다음 주에 후레지아 꽃을 꺾으러 산으로 간답니다.""...산으로.""예. 둘째 영애와 큰 영애 둘이서요.""...그래. 드디어 때가 왔구나. 꽃을 좋아하는 계집 아이들은... 늘 경계가 없지.""...그리고 마침, 그 산으로 가는 길에 사과나무를 심어놓기 좋은 장소가 있다고 합니다.""...사과나무.""예. 햇빛도 잘 들고, 땅도 꽤 깊다고 들었습니다."루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 아래 그림자 속에서, 그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사과나무.그 단어가 마굿간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등불 불꽃이 다시 한 번 길게 흔들렸다. 루시안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그래. 좋군."루시안은 천천히 몸을 뒤로 기대었다. 늙은 마부의 허름한 그림자 아래로, 서늘한 미소가 아주 얇게 드러나고 있었다.마굿간 안은 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21화

    엘로이즈는 끝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손이 굳어 있었다. 마침내 클레르의 떨리는 목소리가 다시 작게 이어졌다. "...언니. 정말... 어머니, 아버지도 나 싫어하시고...언니도 나 싫어할 거야?" "아니야." 엘로이즈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괜히 심술 부린거야." "아니야.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고 웃어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고.. 어머니도.. 항상 나만 보면 한숨 쉬셨고... 방금도 아버지가 나 조심성없다고 혼내신 것도..." "아니야." 엘로이즈가 조금 더 빠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두 분 다. 너가 걱정돼서 그러신거야. 네가 다칠까봐, 또 남들이 함부로 말할까봐. 그래서 엄하게 말씀하시는 거지." "...나. 그런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야." 엘로이즈의 눈이 멈췄다. 클레르는 울먹이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사람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 볼 때 어떤 눈 하는지는 나도 알아..."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식당 안 공기가 아주 조용히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동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아주 작게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클레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춰섰다. 클레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 툭. 엘로이즈의 손이 조용히 클레르의 어깨를 붙잡았다. 클레르의 몸이 아주 작게 움찔했다. "...클레르. 너 언니 눈 똑바로 봐."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언니 말 못 믿겠어?" 클레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선 너머로, 엘로이즈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이즈는 그런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언니는 거짓말 안 해." 그녀가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20화

    엘로이즈는 잠시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금방 "죄송해요..."하고 웃어 넘겼을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클레르는 달랐다. 너무 조용했다. 엘로이즈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클레르..." 클레르의 어깨가 움찔했다. 엘로이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푹 숙인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은 잠시 더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 테이블 위에 번진 소스. 굳어버린 손끝.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쯧." 그리고 냅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밀며 낮은 소리를 냈다. 부인이 눈을 들었다. "왜, 더 안 드시고요?" "입맛이 없어졌소." 대신은 아무 말도 더 하지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졌다. 식당 안은 더 조용해졌다. 클레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포크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입술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클레르... 아버지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면..." 말이 거기서 멈췄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큰 눈 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울음을 참고있는 얼굴.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클레르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한숨에는 피곤함과 복잡한 감정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부인은 결국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 위를 조용히 스쳤다. "...먼저 일어나마." 그녀는 잠시 두 딸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곧 문이 조용히 닫혔다. 덜컥. 이제 식당 안에는 엘로이즈와 클레르 둘만 남았다. 엘로이즈는 한동안 말없이 클레르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고있는 동생. 평소처럼 밝게 웃지도 못하고, 포크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모습. 엘로이즈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9화

    덜컥. 살롱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고, 다시 조용함이 내려 앉았다. 복도에는 늦은 오후의 햇빛만 길게 깔려 있었다. 클레르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넘어졌던 자세 그대로. 작은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하녀가 다가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작은 아가씨. 괜찮으세요?"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은 멍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네스가 서 있던 자리. 부드럽게 웃던 얼굴. 다정했던 목소리. '언니분까지 영애를 창피해하시고, 싫어하게 되실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클레르의 손이 떨렸다. "...아가씨?" 하녀가 다시 조심스럽게 불렀다. 클레르는 그제야 아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손수건. 자기 손 안에 쥐어진 새하얀 천. 조금 전까지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 손가락이 천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꾸깃. 하얀 천이 손안에서 천천히 구겨졌다. 하녀의 얼굴이 더 굳었다. "...작은 아가씨, 어디 다치신 건 아니시죠?" "...진짜.." "...네?" "내가 진짜로... 언니를 창피하게 만들어?" "아가씨..." "내가 자꾸 뛰어다녀서... 말도 안 듣고... 그래서 언니도...나 싫어하게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작은 아가씨." 하녀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클레르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렇게 신나게 뛰어다니던 아이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복도 창문 사이로 바람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에 클레르의 금빛 머리카락 끝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안에서, 하얀 손수건이 점점 더 작게 구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드 로베르 저택의 식당은 조용했다. 하인들이 벽 쪽에 조용히 서 있었고, 식당 안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작은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엘로이즈는 평소처럼 단정한 자세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8화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6화

    마부의 말이 끝난 뒤에도 마차는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이어졌다.그림 하일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가 있었다.그때,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 대신 말이다..."고삐를 쥔 손을 살짝 비틀었다."겉으로 보기엔 참 점잖지."짧은 웃음."말도 조용하고, 체면도 챙기고."잠시 후"근데 그런 인간일수록 더 무서운 법이다."그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5화

    거울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잠시 맞물려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직도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희미하게 입가를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미소였다. 마치 웃는 방법을 천천히 떠올리는 사람처럼. "칭찬 감사합니다, 아가씨.." "지금... 웃은거야?" 그림 하일드는 잠깐 당황한 듯 눈을 내렸다. 엘로이즈의 미소가 조금 더 깊어졌다. "너 웃는 거..." 그녀는 거울 속에서 그림 하일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았다.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은 놀림도 아니었고 비난도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4화

    귀족 부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대신의 얼굴 윤곽이 짧게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했다. "당신은 늘... 너무 앞을 보세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는 아직 열여섯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이와 야심은 비례하지 않소." 대신의 답은 짧았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아이일수록 더 멀리 보게 되지." 귀족 부인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멀리 본다 해서 다 위로 오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신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오르느냐가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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