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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Author: 빅비58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8 20:09:56

철문이 완전히 닫힌 뒤에도 마부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여전히 고삐 위에 얹혀 있었고, 시선은 묘지 한쪽ㅡ 그림 하일드의 뒷모습이 사라진 방향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한번 스쳤다.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고, 철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부는 그제야 고개를 조금 숙였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쪽을 향해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괜히 겁줘서... 미안했다."

말은 조용했지만, 아까의 위협과는 전혀 다른 결이였다.

"암살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ㅡ"

잠깐 말을 멈췄다.

"...어쩔 수 없었어."

그의 시선이 다시 철문으로 향했다.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마부의 머릿속에 그림 하일드의 얼굴이 아주 잠깐 떠올랐다.

놀란 눈.

숨이 막히던 순간.

그래도 울음을 터뜨리지 않던 표정.

마부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너라도..."

짧은 정적.

"내 마지막 푸념을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 전해지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정리하는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마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흐린 구름 사이로 햇빛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마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

그 한 단어가 아주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떨어졌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지만 돌아오는 건 바람 소리 뿐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아주 작게.

"저도..."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오늘 저 첫째 계집을 죽이고..."

고삐를 쥔 손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당신 곁으로 갈게요."

그 말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정해둔 결론처럼.

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마부,아니,'카일 로웬'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고삐를 정리했다. 말들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 있었고, 마차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안에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끝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그 시각, 묘지 안.

바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마른 풀들이 서로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엘로이즈는 조용히 걷고 있었다.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정해진 속도. 흔들림 없는 걸음. 그 옆에선 부인이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반 걸음 뒤. 그림 하일드가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시선은 낮게. 발걸음은 맞춰서.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게.

묘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줄지어 선 묘비들 사이로 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하나의 묘지가 보였다. 다른 묘지들보다 더 정돈되어 있고, 누군가가 자주 손을 보는듯한 자리. 묘지 주변에는 신선한 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얀 꽃, 옅은 분홍빛 꽃, 막 시들기 시작한 꽃과 방금 가져다 놓은 듯 생기가 남아있는 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부인은 그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뒤로 옮겼다.

그림 하일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아이. 발걸음은 정확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존재감조차 스스로 낮추고 있었다. 마치 이 공간에 있지 않는 사람처럼. 부인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생각했다.

'...우리 애와... 조금만 더 맞추면...'

부인의 시선이 다시 엘로이즈의 옆모습으로 향했다. 햇빛을 받으며 걷는 딸의 모습. 흐트러짐 없는 자세. 단정한 걸음.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그림 하일드. 두 사람의 거리가 아주 미세하게 겹쳐 보였다. 부인의 눈이 조용히 가라 앉았다.

'될 것 같은데.'

그 생각은 확신도 아니고, 경계도 아니었다. 그저 가능성을 재는 사람의 조용한 판단이었다. 그 사이 묘지 앞에 다다랐다. 꽃들 사이로 드러난 묘비에 '클레르 드 로베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스쳤다. 꽃잎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세 사람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엘로이즈는 꽃들 사이로 드러난 이름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클레르 드 로베르. 돌 위에 새겨진 글자는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은 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주변에 놓인 꽃들이 바람에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엘로이즈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가 들고있었던 꽃다발이 시야 아래로 내려왔다. 옅은 노란빛을 머금은 꽃들.

후레지아.

막 피어난 듯한 생기가 남아 있었고, 은은한 향이 바람을 타고 퍼졌다. 엘로이즈는 잠시 그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르."

짧은 호흡.

"잘 있었어...?"

그 말은 누군가에게 들리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들렸다. 엘로이즈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드레스 자락이 조용히 바닥에 닿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후레지아 꽃다발을 묘지 앞에 내려놓았다. 이미 놓여 있던 꽃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손을 떼기 전ㅡ 아주 잠깐, 꽃잎 하나를 손끝으로 정리했다.

흐트러지지 않게. 그녀는 다시 입을 천천히 열었다.

"...후레지아. 너가 제일 좋아하던 거잖아."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숨이 섞인 목소리로 덪붙였다.

"장미꽃보다.. 이걸 더 좋아했었잖아."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엘로이즈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묘비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른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그 날도, 이렇게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마차 안.

엘로이즈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에 클레르가 앉아 있었다. 클레르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창밖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부드럽게 내려 앉았다. 옅은 금빛이 감도는 밝은 머리. 결이 고와서 빛을 받으면 거의 투명하게 번졌다. 얼굴은 아직 어린 기운이 남아 있었고, 둥글게 살아있는 윤곽 위로 잘 웃는 입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눈은 엘로이즈보다 조금 더 크고, 빛을 더 많이 담는 눈이었다. 무언가를 보면 그대로 드러나는 눈. 숨기지 못하는 눈.

클레르는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몸을 더 앞으로 기울였다.

"언니, 저기 봐."

목소리는 밝았다.

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뭔데."

"꽃."

엘로이즈의 눈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클레르는 창밖을 가르키며 웃고 있었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눈동자가 더 또렷하게 빛났다.

"저거 후레지아 아니야?"

엘로이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마차 밖, 길가에 노란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이 반짝였다.

"저거 진짜 좋아하는데. 난 장미보다 저게 더 좋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꽃을 한 번 보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

짧은 대답.

클레르는 그 반응에도 개의치 않았다.

"언니는 장미 좋아하잖아."

"그냥— 무난하니까."

"난 싫어."

클레르는 웃으며 말했다.

입가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억지로 만든 웃음이 아니라, 그저 기분이 좋으면 바로 드러나는 웃음.

"너무... 보여주기 같아."

그 말이 끝난 직후ㅡ 마차가 갑자기 흔들렸다.

덜컹—

바퀴가 돌을 잘못 밟은 듯 차체가 크게 기울었다.

엘로이즈의 몸이 순간 앞으로 쏠렸다.

책이 손에서 떨어졌다.

"—!"

마차가— 통제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속도가 붙었다. 바퀴가 돌을 튕겨내며 거칠게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손이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 몸이 계속 밀렸다. 문 쪽으로.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 틈이 점점 벌어졌다. 바람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엘로이즈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때—

"언니!"

클레르의 목소리.

다음 순간—

몸이 강하게 밀렸다. 엘로이즈의 시야가 흔들렸다. 자기 몸이 안쪽으로 튕겨 들어갔다. 대신 다른 무게가 문 쪽으로 쏠렸다.

찰나.

눈이 마주쳤다.

클레르였다.

밝던 눈이 그 순간만큼은 또렷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대로 몸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문이 완전히 열렸다. 바람이 한 번 크게 휘몰아쳤다.

그리고ㅡ

"—클레르!"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은 닿지 않았고, 몸은 잡히지 않았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차가 멈췄을 때, 엘로이즈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손이 떨렸고, 숨이 이어지지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고, 바깥에는 부서진 흔적과,피와,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클레르가 있었다.밝았던 머리카락이 흙 위에 흩어져 있었고, 아까까지 웃고 있던 얼굴은 너무 조용하게 멈춰 있었다.

"...언니."

마지막으로 들은 목소리였는지, 아니면 기억이 만들어낸 것인지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묘지.

엘로이즈의 눈이 아주 천천히 돌아왔다. 후레지아 꽃다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멈췄다. 표정은 이미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묘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그날. 넌... 망설이지 않았지.'

바람이 스쳤다. 꽃잎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시선은 여전히 묘비 위에 머물러 있었다. 후레지아 꽃잎이 바람에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아주 작게.

"...그날."

숨이 짧게 이어졌다.

"...나만 아니였으면."

말끝이 흐려졌다.

시선이 꽃 위에서 조금 더 아래로 떨어졌다.

"...넌 지금도..."

그 문장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더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

엘로이즈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가 다시 멈췄다.

그 순간 옆에서 조용한 움직임이 닿았다.

부인의 손이었다.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엘로이즈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한 번. 천천히 토닥였다. 말은 없었다. 위로도,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표시처럼. 엘로이즈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대로 묘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이미 다시 정리되어 있었다. 아주 단정하게.

그 모든 모습을 조금 뒤에서 그림 하일드가 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정해진 자리에 서 있었지만, 시선은 완전히 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 하일드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가슴 안쪽이 묘하게 불편하게 조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집에서의 감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조금 다르게 흐른다는 걸.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엘로이즈의 시선이 묘비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손에 남아 있던 미세한 떨림도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니.. 또 올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흔들림도 없었고,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잘 있어."

그 말은 약속처럼 남았다.

엘로이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레스 자락이 조용히 정리되었다.

귀족 부인의 손도 그제야 어깨에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더 묘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다시 걸음이 이어졌다.

엘로이즈가 앞에서 걷고, 그 뒤를 부인이, 그보다 반 걸음 뒤에서 그림 하일드가 따랐다. 묘지 안쪽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 나갔다. 바람이 한 번 더 스쳤다. 꽃잎이 살짝 흔들렸고, 마른 풀들이 낮게 스쳤다.

그때 귀족 부인의 시선이 한쪽으로 옮겨갔다. 묘지 가장자리.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크지 않은 나무였지만, 가지마다 붉은 열매가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햇빛을 받아 윤기가 돌았다.

귀족 부인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올해도 사과가 참 탐스럽게 열렸구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어딘가 부드러웠다.

잠시 그녀의 시선이 나무에 머물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클레르가 사과를 참 좋아했었지."

바람이 가지를 스쳤다.

사과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로이즈의 발걸음이 잠깐 멈춘 듯했지만 곧 다시 이어졌다.

그림 하일드는 그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묘지 안의 공기가 조금 더 무거워진 것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철문 밖.

마차 옆에 서 있던 마부—

아니, 마부의 탈을 쓴 마법사, 카일 로웬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기다리는 마부였다.

고삐를 느슨하게 쥔 손, 흐트러짐 없는 자세, 움직임 없는 시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모습.

하지만 그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가 고삐 위에서 아주 느리게 눌렸다가, 다시 풀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공기가 반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 주변에서 아주 천천히 모이기 시작했다.

흩어져 있던 공기층이 마치 끌려오듯, 그의 주변으로 정렬되었다. 카일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호흡을 아주 느리게, 일정하게 내쉬었다. 그 숨결이 그대로 바람의 방향이 되었다.

흐름이 하나로 이어졌다. 묘지 안쪽에서 철문을 향해—

그리고 그를 향해.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처럼 보였지만—

그 흐름은 흩어지지 않았다. 양쪽으로 새지 않았다.

좁게, 가늘게, 그러나 끊기지 않고— 정확히 이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카일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한 번 더 움직였다. 그 순간 바람이 조금 더 압축되었다. 흐름이 얇아지고, 밀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그 위로 소리가 실려왔다.

"...사과를..."

"...클레르가..."

"...좋아했었지..."

처음에는 흐릿했다.

바람에 흩어진 단어 조각들이었다.

하지만 카일의 손이 고삐를 쥔 채 아주 미세하게 틀어졌다.

그에 따라 바람의 흐름이 한 번 더 정리되었다.

흩어지던 소리가 한 줄로 모였다. 이어졌다. 또렷해졌다.

문장이 완성되었다.

카일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

바람은 그의 앞에서만 작게 맴돌았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후.

카일의 입가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래."

낮은 목소리.

거의 들리지 않는 높이.

"당신 둘째딸이 좋아하던 게... 사과였다고."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묘지 안쪽— 사과나무.

카일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움직였다.

쥐었다가 풀었다. 그 짧은 동작과 동시에 바람의 성질이 바뀌었다. 부드럽게 흐르던 공기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퍼져 있던 흐름이 하나의 방향으로 강하게 잡아당겨졌다.

"...그럼—"

짧은 숨.

"둘째가 좋아하던 걸로 첫째도 보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의 손이 고삐 위에서 천천히 닫혔다.

그와 동시에 묘지 안쪽의 바람이 '쥐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공기를 움켜쥔 것처럼.

흐름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자연이 아니라, 의지에 따라.

정확하게. 사과나무 한 그루를 향해.

묘지 안.

엘로이즈와 부인, 그리고 그림 하일드는 사과나무를 지나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은 일정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때.

나뭇잎 하나가 혼자서 흔들렸다.

사각—

아주 작은 소리.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위로 움직였다.

사과나무.

햇빛을 받고 있는 가지들 사이에서 한 줄기의 흐름이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움직임. 그 바람은다른 곳과 달랐다. 한 방향으로만 좁게, 정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가지 하나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흔들림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한 방향으로 계속 비틀렸다. 삐걱— 소리가 났다. 나무가 내는 소리라기엔 너무 인위적인 소리. 억지로 힘을 주어 꺾는 것 같은 소리였다. 가지가 점점 더 휘어졌다. 그 위에 달려 있던 사과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나가 떨어졌다.

툭.

작은 소리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 다음.

휙—

보이지 않는 힘이 한 번 더 당겨졌다.

가지의 중심이 순간적으로 틀어졌다.

그리고ㅡ

툭.

짧고, 결정적인 소리. 끊어지는 소리였다. 그 다음 순간—

쾅—!!

굵고 무거운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속도는 빨랐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이. 방향은 정확했다. 엘로이즈의 머리 위. 햇빛이 가려졌다. 그림자가 순간적으로 내려앉았다. 그저 사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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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롱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그림 하일드의 손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고, 흐트러짐없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아까와 달랐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이네스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급하지도 않았고,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숨 막히는 걸음.엘로이즈는 이네스의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하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넘치시는 우리 영애께서..."말은 웃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얇게 차가웠다."왜 제 하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는 그렇게 당황하시는 걸까요?"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엘로이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었다."아, 아니에요."그녀는 손끝으로 자기 드레스 소매를 아주 가볍게 정리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서늘했다."하인, 평민들을 향한 영애의 사랑은 이미 유명하니까요."엘로이즈는천천히 이어갔다."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신다는 얘기는 저도 자주 들었습니다."살롱 안 공기가 순간 흔들렸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네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엘로이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번 달만해도... 일자리 없는 평민들을 위해 직접 하인들을 3명이나 들이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남자로요."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 위로 열이 번졌다.살롱 안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른 영애들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인을 들였다.'귀족 사회에서는 때때로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말.특히 젊은 남자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1화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괜히 더 천천히 들었고, 누군가는 시선을 애매하게 창밖으로 돌렸다.한 영애가 아주 작게 한숨을 삼켰다.또 시작이구나.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손끝에 들어간 힘만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신히 유지된, 그러나 완벽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였다."...글쎄요..."엘로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는..."말끝은 부드러웠다.하지만 이네스는 그 틈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제가 영애였어도... 저 아이에게 잘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이네스는 천천히 이어갔다."아무리 고아원 출신의 하녀라지만... 동생분과 얼굴이 닮았다면..."이네스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돌아가신 동생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되거든요."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한 것이었다.다른 영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겠죠."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10화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네, 어머니."짧은 대답.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괜찮니."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많이 놀랐을 텐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들어가서 쉬렴."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9화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찰싹.짧은 소리."...가자."낮은 목소리.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너."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 가장 아름답지 못했던 왕비    8화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급하게 다가와 엘로이즈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 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어야 할 가지. 그리고 바로 옆에 박혀 있는 무게.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맞지는 않았어요."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하마터면ㅡ"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 가지를 확인했다. 굵기. 무게. 낙하 위치."...큰일 날 뻔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떨어진 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이상하네."혼잣말처럼 낮게. 하지만 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표정은 다시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손이 굳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방금 전. 나무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철문 밖에서 느껴졌던 그 시선.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철문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카일.'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목이 조여오던 감각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숨이 막히던 순간.'...너도 죽는다. 이해했지?'그 목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림 하일드의 입술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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