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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디자인 사용계약 1

작가: 릴리
last update 게시일: 2026-06-08 17:01:55

지수는 강도진과의 불쾌한 만남이 지현이 선물해 준 차량에 타는 순간, 마치 라쿤의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조수석에 앉은 지현은 미약하게 밝아지는 지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야 안도의 숨을 묵묵히 삼켰다.

지수는 지현을 호텔에 내려주고 홀로 자신의 거처인 리버파크로 돌아왔다.

돌아온 리버파크는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지수는 외투를 벗어 던지지도 못한 채 곧장 서재로 향했다.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는 그녀의 손길은 평소보다 조금 더 더디고 신중했다. 이윽고 묵직한 철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벨벳 케이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 강도진이라는 사람에게 눈이 멀어 그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소망을 담아 설계했던 바로 그 컬렉션이었다. 사랑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위기에 처했던 CB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제 눈앞의 남자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 가장 찬란했던 진심을 쏟아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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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 잔인한 축복   113화 유진만을 위한 팀

    지수의 품에서 한참을 목 놓아 눈물을 쏟아낸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제 눈물로 얼룩이 져버린 지수의 고급스러운 실크 드레스를 민망한 듯 쳐다보았다.“괜찮아요. 이제 진정 좀 됐어요?”지수의 다정하고 따뜻한 물음에 유진의 눈가에 다시금 왈칵 눈물이 맺혔다. 지수는 그런 유진의 젖은 눈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그만 울어요. 눈가 짓물러져요.”지수의 다정한 달램에 유진은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그녀는 돌아서려는 지수를 붙잡고, 공방 옆에 위치한 자그마한 카페로 지수를 이끌었다. 따뜻한 음료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유진이 굳은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대가 없는 호의는 믿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제가 당신에게 받은 이 거대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유진의 절박한 말에 지수는 설핏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저랑 비슷하네요. 사실 저도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지수는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처음엔 유진 씨의 디자인이 탐났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뒷조사를 조금 해봤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태양>의 추악한 비밀도 알게 되었죠.”유진은 지수의 덤덤한 고백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완벽한 비밀이라 믿었었다. 스스로도 결코 떳떳하지 못한 선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그 지옥 같은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자식을 위해 똑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지수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하지만 아까 공방에서 한 말도 전부 사실이에요. 난 당신의 그 빛나는 재능이 꺾이는 것도, 가온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도 원치 않아요. 그래서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정을 내밀어 본 거예요.”

  • 가장 잔인한 축복   112화 윤유진의 영입

    경리단길의 후미진 골목, 낡은 공방의 문을 열었을 때 지수를 맞이한 것은 차가운 적막이었다.공방 안쪽, 빛바랜 작업대 앞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유진의 모습이 지수의 시야에 담겼다. 그곳에는 한때 촉망받던 천재 디자이너의 자부심도, 젊음으로 생기 있게 빛나던 여자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생활고와 비극에 처참하게 짓밟혀 바스러지기 직전인 아슬아슬한 어머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한수진은 병원비를 주었다고 생색을 냈지만, 그것은 겨우 가온이가 산소호흡기를 달고 기본 치료만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피 말리는 금액에 불과했다. 유진이 제 목숨보다 소중한 디자이너로서의 자부심과 모정을 통째로 판 대가는 그토록 비참하고도 적선 같았다.구두 굽 소리에 유진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지수의 단정한 실루엣이 맺혔다.“……누구시죠? 당분간 문 닫습니다. 나갈 차비도 없어서 개별 의뢰는 안 받아요.”기계처럼 차갑게 밀어내는 유진의 앞에, 지수는 조용히 다가가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놓았다. 그 위에는 대학병원의 로고와 가온이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윤유진 씨. 저는 제이아우라의 대표 이지수라고 합니다.”지수의 단정한 자기소개에 유진의 입가에 뼈아픈 실소가 걸렸다. 수진에게 영혼까지 착취당하고 버려진 유진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지수의 말을 가로챘다.“당신도 저의 디자인을 사러 오신 건가요?”또다시 제 재능을 헐값에 사들여 왕관을 치장하려는 귀부인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유진의 처절한 방어기제였다.하지만 지수는 유진의 날카로운 적대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유진에게 디자이너로서의 계약이나 제안을 대뜸 건넬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수는 유진의 쾡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수진과는 전혀 다른 나직하고 단단한 본론을 꺼냈다.“아니요. 저는 유진 씨의 재능을 사러 온 게 아니에요.

  • 가장 잔인한 축복   111화 훔친 왕관의 유효기한

    ‘새로운 태양’의 정식 론칭은 대성공이었다. 브랜드가 시장에 안착해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기 시작하자, 한수진의 눈빛은 빠르게 계산적으로 변해갔다. 사내 입지를 굳히자마자 가장 먼저 아까워진 것은 매달 윤유진의 계좌로 빠져나가는 가온이의 막대한 병원비였다. 어차피 공정은 안정화됐고 데이터는 확보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었다.수진은 대표이사실 대기실로 유진을 불러 냉정하게 사직서를 던졌다.“이제 배가 제법 불러서요.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드니 몸이 무거워서 조만간 출산 휴가를 낼 예정이에요. 총괄 디렉터가 자리를 비우는데, 내 개인 어시스턴트인 유진 씨가 회사에 남아있을 명분이 없잖아요? 그동안 수고했어요.”출산 휴가를 핑계로 유진을 철저하게 용도 폐기하겠다는 잔인한 선언이었다. 유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진을 바라보았다. 당장 다음 달 가온이의 항암 치료비가 떠올라 눈앞이 아찔해졌다.“수진 씨, 제발요……. 제 디자인 권리 다 넘겨드렸잖아요. 가온이 완치될 때까지 병원비는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했으면서……!”“착각하지 마요. 내가 유진 씨 사생아 약값 대주는 자선사업가야? 더 구질구질하게 굴면 그동안 받아 간 돈까지 법적으로 다 토해내게 만들 테니까 조용히 나가요.”“그럼…… 퇴직금이라도…….”“퇴직금? 퇴직금은 입사 1년이 지나야 나오는 거야. 유진 씨 입사 1년 지났어?”수진의 냉정한 말에 유진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 유진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수진이 쾡한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아, 혹시 노동부에 신고라도 하면 안 되니까. 퇴직금은 아니고…… 위로금은 조금 줄게.”수진의 적선하는 듯한 말이 유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온이의 병원비 영수증 생각에 그 적선을 거부할 권리마저도 유진에게는 없었다. 영혼을 갈아 넣은 대가로 돌아온 것은 완벽한 배신과 모욕이었다. 유

  • 가장 잔인한 축복   110화 적반하장

    지수가 리버파크에서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던 그 시각, 강도진은 본가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성북동 저택으로 향했다. 가라앉은 가문의 공기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무겁고 서늘했다.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둠 속에 앉아 있던 부친 강수한 회장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쨍그랑―!“이 한심한 놈아!”도진이 미처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강 회장이 마시던 묵직한 찻잔이 도진의 구두 앞코를 때리며 요란하게 박살 났다. 뜨거운 찻물과 사방으로 튄 도자기 파편이 도진의 바지깃을 적셨지만, 도진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아버님, 갑자기 무슨…….”“네놈이 눈이 멀어 내쫓은 그 이지수가, 오닉스 가문의 유일한 직계 딸이라는 걸 왜 이제야 알게 만들어!”벽력을 지르는 강 회장의 음성에 도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옆에 서 있던 모친 김미자 역시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쥐어짜며 도진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수진의 뱃속에 든 핏줄 하나 때문에, 지수가 가진 ‘오닉스’라는 거대한 배경을 제 손으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아들의 둔함에 실망감이 극에 달한 얼굴이었다.부모의 서슬 퍼런 추궁을 전신으로 받으며, 도진은 그제야 이지수의 뒤에 도대체 무엇이 숨어 있었는지 정확하게 직시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거대한 폭풍을 만난 듯 어지럽게 뒤엉켰다.천재 디자이너 ‘Z’, K국 물류의 핵심을 쥐고 있는 ‘오닉스’, 그리고 오닉스의 자회사이자 CB 주얼리 라인의 원석 공급을 책임지던 글로벌 원석사 ‘아스테리아’까지. 그동안 자신이 CB를 이끌며 당연하게 누려왔던 거대한 인프라와 특권들이, 사실은 강도진 본인의 능력이 아닌 이지수가 뒤에서 베풀어준 호의였다는 잔인한 현실이 뼈아프게 맞춰졌다.동시에, 도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최근 오닉스를 통해 들어오던 물류가 각국의 세관 통과에 연

  • 가장 잔인한 축복   109화 축하파티

    자신의 디자인이 ‘Z’라는 이명이 아닌, 오롯이 '이지수'라는 제 이름 석 자로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강도진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회수하겠다는 계획이 마침내 실행되고 있다는 현실감이 온몸으로 전해지는 하루였다.지수는 이 행복한 순간을 홀로 만끽하는 것이 아닌, 오랜만에 자신과 함께해 준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친오빠인 지현이 함께해 주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한 달 가깝게 국내에 머물며 지수의 뒤를 받쳐주던 지현은 오늘 아침 서둘러 A국으로 돌아가 버린 후였다.지수는 휴대폰을 들어 가장 먼저 혜진과 진경에게 연락을 취했다. 두 사람은 쇼를 위해 해외로 출국하기 전 아주 까다로운 관리 기간을 거치는 중이었지만, 지수의 파티가 백번 천번 중요하다며 흔쾌히 참석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뒤이어 진우의 디자인 팀원들에게도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선약이 있어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어쩐 일인지 팀장인 진우에게서만큼은 한 통의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지수는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미미한 서운함을 애써 추슬러내며 작은 홈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이윽고 약속 시간이 되자, 리버파크의 펜트하우스는 두 톱모델의 화사한 활기로 채워졌다.“대박……! 그럼 그 강도진이라는 인간, 결국 군말 없이 도장 찍고 간 거예요? 요율 5% 인상에 연 2회 정산 조건으로?”화려한 이목구비의 혜진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계약서를 톡톡 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소파에 길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진경 역시 와인잔을 흔들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안 찍고 배기겠어? 당장 다음 달부터 주얼리 라인 전체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주기 싫어서 눈 뒤집히기 직전인 얼굴로 손을 떨면서 찍고 가더라.”지수가 나른하게 찻잔을 들며 대답하자, 진경이 청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꼴좋다. ‘영원한 사랑’ 매출의 5%면 그 자식 입

  • 가장 잔인한 축복   108화 디자인 사용계약 2

    준비는 끝났다. 7년의 미련을 완벽하게 장사 지낸 자리에 피어난 진짜 '사업가 이지수'의 칼날이, 이제 강도진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질 차례였다.CB그룹 대표이사실 비서실의 내선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비서실입니다.”태준이 수화기를 들자 1층 안내 데스크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1층에 사모님께서……,그 순간, 직원의 말을 정정하는 서늘하고 단정한 음성이 수화기 본체를 뚫고 태준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흘러들었다. 안내원 곁에서 조용히, 하지만 힘 있게 쐐기를 박는 지수의 목소리였다.“저는 이제 사모님이 아닙니다. 이지수 씨라고 알려주세요.”과거의 인연에 완벽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지수의 차가운 육성을 실시간으로 들은 태준의 눈이 순간 당황으로 커졌다. 한때 누구보다 따뜻했던 그녀의 완벽한 변화에 태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혼이라는 현실이 이토록 잔인하게 선을 그어버렸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씁쓸해지기까지 했다.태준은 멍해진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사장실 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와 도진에게 알렸다.“사장님, 지금 1층에 이지수 씨께서 오셨다고 합니다!”태준의 다급한 보고에 도진의 심장이 크게 덜컥였다. 도진은 다급하게 외투 매무새를 다듬으며 지시했다.“내 방으로 안내해. 그리고…… 지수가 좋아하던 블루베리 스무디도 당장 준비하라고 일러.”비즈니스 회의를 위해 찾아온 지수를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겠다는 의미로 제 집무실을 열라는 지시였다.태준이 서둘러 안내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집무실 문을 열며 지수가 걸어 들어왔다.도진은 이혼 후 그녀가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 더 이상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었건만, 오늘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품에서 완벽하게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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