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진우의 사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평화가 아닌, 거대한 폭풍을 앞둔 바다의 침묵이었다. 밤새 도진의 복잡하게 얽힌 어둠의 자금을 추적하던 사라는 이른 새벽에야 푄 현상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했고, '블루 오션'의 덫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박성재와 김철수는 이미 외근을 나간 뒤였다.
진우는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모니터 속 명멸하는 숫자들을 응시했다. 지수가 남겨준 RV의 시드머니 300억. 이 자금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도진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지수가 걸어온 처절한 인내와, 진우가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지불해야 할 복수의 판돈이었다.
"보스, 요즘 월가와 H국의 자금 흐름이 심상치 않아."
에너지 드링크를 생수 마시듯 들이켜던 이현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진우를 불렀다. 이현의 자금 흐름 파악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특출했다. 시장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거대한 해일
‘검은 태양’ 리미티드 에디션 쇼케이스가 열린 CB 그룹 본관 메인 홀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상류층 VVIP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수진의 아동학대 스캔들로 사전 계약의 절반이 날아가는 수모를 겪었지만, 도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은 절반의 VVIP들의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기 위해 홀의 분위기를 몽환적이고 어둡게 연출했다. 메인 쇼케이스 위로는 비스듬하게 꺾인 할로겐 핀 조명이 블랙 다이아몬드를 기괴하고도 화려한 각도로 비추고 있었다.본질을 감추기 위한, 철저하게 계산된 눈속임이었다.하지만 홀에 들어선 VVIP들의 표정은 도진의 기대만큼 경탄으로 물들지 않았다. 도진은 수진이 망쳐놓은 준비 과정을 단기간에 만회하고자, 과거 지수가 CB의 안주인으로 있을 때 기획했던 전설적인 파티들의 콘셉트를 고스란히 베껴왔다. 동선, 플라워 데코, 심지어 식전 샴페인의 종류까지."……어머, 이거 2년 전 신규 브랜드 런칭 파티 때 썼던 인테리어랑 완전히 똑같네?""그러게. 대단한 걸 보여줄 것처럼 굴더니, 결국 아이디어 고갈이군. 예전에 짜놓았던 판의 재탕이잖아?"귀족들의 날카로운 속삭임이 도진의 귓가를 스쳤다. 지수의 그림자를 지우려 발악했던 도진이었지만, 정작 위기에 몰지자 지수의 유산에 기대어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꼴이었다. 도진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 미소를 유지했다.같은 시각, 홀의 입구에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보석 세공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인식 명장이었다.사실 오늘 아침, 김인식은 성수동에 있는 지수의 사무실을 찾았었다.‘지수야, 오늘 CB에서 채준영이 녀석이 세공한 블랙 다이아몬드가 공개된다더구나.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스승의 제안에 지수는 그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었다.‘아니요,
청담동의 밤은 깊었지만, CB 그룹 본사 지하의 특별 검수실은 대낮처럼 환한 불빛 아래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강도진은 타들어 가는 속을 감추며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벨벳 상자를 노려보았다. 상자 안에는 이번 ‘검은 태양’ 리미티드 에디션의 메인 피스인 블랙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기괴할 정도로 묵직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도진이 직접 외부에서 초빙한 세공사, 채준영의 작품이었다.명장 김인식의 제자라는 타이틀, 그리고 ‘Z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는 날 검은 태양도 함께 베일을 벗겨달라’던 그 오만한 자신감에 도진은 기꺼이 거액을 지불했었다. Z를 꺾고 제이아우라를 짓밟겠다는 준영의 열등감 섞인 독기가 도진의 목적과 완벽히 부합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도진의 눈앞에 있는 결과물은, 그의 기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채 작가. 이게 정말 최선입니까?”도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검수실 한구석에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얽고 있던 채준영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최선이라니요, 강 사장님. 김인식 명장의 공방에서 나온 블랙 다이아몬드의 결을 가장 극적으로 살린 세공입니다. 감히 단언컨대 Z 그 인간은 흉내도 못 낼…….”“입 다물고 여기 와서 똑바로 봐!”도진이 거칠게 루페(보석 감정용 확대경)를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보석에 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안목을 가진 도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채준영의 실력은 스승인 김인식은커녕, 그 밑에서 함께 배웠다던 Z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Z에게 평생 품어온 열등감이 준영의 눈을 가린 것이 분명했다.도진이 나직하고 날카로운 손가락으로 목걸이의 중심부를 가리
“너 때문에 오늘 내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아?!”수진은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박 팀장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도진에게 감금당한 채 30억을 마련해야 하는 벼랑 끝 상황. 한참의 망설임 끝에 고객 정보를 빼낼 수 있는 유일한 권한자이자, 어쩌면 제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진짜 아빠일지도 모를 남자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하지만 과거 침대 위에서 속삭이던 그의 다정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애초에 수진이 임신 사실을 알리고, 이 아이를 도진의 아이로 만들자고 작당했을 때부터 그의 다정함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수진이 박 팀장을 처음 만난 건, 도진과 함께 참석했던 어느 상류층 사교 파티장에서였다.당시 도진은 상류 사회의 문법에 어설픈 수진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그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통제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때 업무차 잠시 파티장에 들렀던 박 팀장은 도진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진에게 다가왔다. 그는 수진이 실수하지 않도록 와인 잔을 쥐는 법부터 가벼운 사교술까지 속성으로 알려주며, 다정하게 명함을 남기고 사라졌다.수진은 도진의 오만함에 무시를 당하고 상처받을 때마다 묘하게 그 다정했던 박 팀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도진이 길거리에 수진을 매몰차게 버려두고 가버렸을 때, 수진은 홀린 듯 박 팀장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그것이 두 사람이 얽힌 질척한 인연의 시작이었다.그 이후 수진은 도진의 눈을 피해 수시로 박 팀장을 만났고, 어떤 날은 도진과 몸을 섞은 직후에 박 팀장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그 문란한 이중생활이 결국 누구의 씨인지 알 수 없는 임신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박 팀장의 반응은 차갑고도 치밀했다.‘수진아, 이 아이의 아빠는
CB 그룹 대표실 안은 흡사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고급 대리석 바닥에는 온갖 기획서와 서류 뭉치들이 날카롭게 찢긴 채 사방으로 흩날려 있었고, 가죽 소파는 거칠게 발로 차인 듯 볼품없이 밀려나 있었다. 그 난장판의 중심에서, 강도진은 핏발이 선 눈으로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한수진의 아동학대 재판 결과가 ‘집행유예’로 나오자마자,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CB를 향해 불타오르는 분노를 퍼부었다.[돈으로 판사를 샀다], [아동학대범을 안주인으로 모시는 부도덕한 기업]이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포털 사이트 메인을 도배했고, 성난 여론은 곧장 조직적인 CB 제품 불매 운동으로 번졌다.하지만 진짜 치명타는 대중의 불매 운동이 아니었다. 격조와 평판, 브랜드의 백그라운드를 목숨보다 여기는 상류층 VVIP들의 움직임이었다.탁, 탁, 탁.도진의 기다란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대표실의 무거운 침묵을 깨고 문이 열리며, CS(고객만족) 총괄 책임자인 박 팀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안고 있는 패드 화면에는 붉은색 취소 마크가 선명한 명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어떻게 됐어.”도진이 씹어뱉듯 물었다. 박 팀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민원실과 VVIP 전담 안내 데스크를 총동원해 VIP 고객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있습니다만, 여론이 워낙 험악하다 보니 쉽지 않습니다. 격조를 중시하는 상류층 커뮤니티 내부에서 이미 CB의 브랜드 이미지가 바닥을 친 탓에…….”“누가 그따위 변명 들으려고 불렀어?! 결론만 말해, 결론만!”도진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박 팀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우는 텅 빈 자신의 오피스텔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급하게 수진의 손에서 현수와 현지를 데려오긴 했지만, 모노톤의 가구들로만 채워진 삭막한 집은 아이들이 거주하기에는 영 부적합했다. 상처받은 남매에게는 숨이 막히는 사방의 벽 대신, 따스한 온기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그때 진우의 머릿속을 스친 곳이 있었다. 그동안 지수와 예인이를 멀리서나마 보기 위해 수없이 드나들었던 고급 타운하우스, ‘리버파크’였다.그곳은 남향의 따뜻한 햇살이 하루 종일 거실 가득 들어차고, 아이들이 발을 구르며 뛰어놀 수 있는 넓은 개인 정원이 딸려 있었다. 무엇보다 국내 최고 수준의 철저한 보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하지만 진우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은 따로 있었다. 지수와 예인이를 언제든 지켜줄 수 있고, 숨소리마저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감.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부드럽게 걸렸다.진우는 아이들을 데려온 바로 다음 날, 마침 기적처럼 비어 있던 지수의 바로 옆집을 구입해 곧바로 극비리에 인테리어 공사에 착수했다.남매의 방은 진우가 직접 도면을 확인하며 세심하게 꾸몄다.첫째 현수의 방은 차분한 그린 톤의 벽지에 따뜻한 원목 가구를 배치해, 아이가 언제든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아늑한 아지트처럼 연출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현수가 좋아하는 블록을 마음껏 펼쳐놓고 조립할 수 있는 커다란 아일랜드 테이블을 두었다. 그동안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제 장난감 하나 마음 편히 가지지 못했던 아이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던 진우의 깊은 배려였다.반면, 사랑에 굶주렸던 막내 현지의 방은 포근한 파스텔 핑크와 베이지 톤의 색감으로 채웠다. 한쪽 벽면에는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가득한 진열장을 짜 넣었고, 다른 한쪽에는 마음껏 낙서하며 억눌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커다란 드로잉 보드를 설치했다. 나중에
“대표님, 예강 주식회사를 비롯한 우호 지분 명의로 폭락하는 CB 그룹의 주식을 빠르게 매집하고 있습니다. 도진 측에서는 현재 터진 스캔들로 주가 방어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우리가 밑바닥에서 지분을 줍줍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강이현의 차분한 보고에 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차가웠다. 한수진에게 사법 처벌이라는 합당한 지옥을 선물하고, 마침내 아이들을 제 품에 안은 진우의 다음 타깃은 애초부터 강도진과 CB의 경영권이었다. 그들의 거대한 성을 통째로 무너뜨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같은 시각,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지는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도 오만의 정점에 선 강도진의 뇌 회로는 기괴한 희망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그래…… 하수진 저 여자는 돈이 모자라면 제 자식도 팔아넘기는 독하고 천박한 년이야. 저런 전과자에게 내 아이의 양육을 맡길 수는 없지.’도진은 집무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수진이 아닌 오직 한 사람, 이지수였다. 지수는 다정하고 모성애가 깊은 여자였다. 수진이 낳을 제 핏줄을 지수에게 맡긴다면, 지수는 분명 예인이와 함께 그 아이까지 친자식처럼 품어줄 터였다.‘박진우가 현수와 현지를 데려갈 테니, 이지수가 박진우 곁에 맴돌 명분도 완전히 사라졌어. 지수도 혼자 예인이를 키우느라 슬슬 한계에 부딪혔을 테니, 내가 다시 손을 내밀면 돌아올 수밖에 없다.’수진이라는 오물은 언제든 완벽하게 치워버릴 수 있었다. 이제 지수와 재결합하여 그녀가 키워낸 제이아우라를 CB의 날개 아래 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괴하고도 거대한 착각에 사로잡힌 도진이었다.한편, 한수진의 하루하루는 펄펄 끓는 지옥의 불길을 걷는 듯했
고급 주택 단지 ‘포레스트’의 입주민 전용 앱은 며칠째 특정 게시글로 서버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시작은 ‘포레스트 맘’이라는 닉네임이 올린 사진과 영상이었다.[이런 게 텃세인가요? 우아한 겉모습에 속았네요.] (첨부 이미지: 찰과상과 피멍이 든 아이의 무릎과 손 사진) “단지 내에서 애가 다쳤는데 사과 한마디 없네요. 유명한 분이라길래 인품도 남다를 줄 알았는데... 아이들도 잘못하면 사과할 줄 아는데, 어른이 참...”댓글창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ㄴ 헐,
이른 새벽, 고요를 찢는 마찰음과 함께 안방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수는 불쾌한 예감에 눈을 떴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 천장의 조명이 눈동자를 찔러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도진이 침대 머리맡에서 지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이지수, 일어나 봐. 일어나서 내 말 좀 들어.”몸을 일으키던 지수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다. 코끝에 지독한 악취가 스쳤다. 병원 특유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끈적하고 화려한 장미의 향 . 수진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온몸에
공방의 김인식 장인의 손에서 탄생하고 있는 복귀작 ‘이별’은 지수의 생각보다 더 서늘하고 잔인한 모습이었다. 그 서늘함은 마치 자신의 지난 7년, 공들였던 결혼생활을 정면으로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생각보다 더 좋은데요? 역시 장인님의 실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네요.” “네 복귀작이라기에 내 노안이 올 때까지 힘 좀 썼지. 또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지면, 다시는 네 작품 안 만들 거다!”장인의 애정 어린 호통에 지수의 마음은 최상급 팬시 옐로우 다이아몬드 속에 갇힌 햇살처럼 따뜻하게 물
그토록 기다렸던 임신 소식이었지만, 지수와 도진에게 허락된 기쁨은 야속할 정도록 짧았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확신을 유보한 채 일주일 후에 다시 검사하자는 말만을 나겼다. 그 일주닝은 도진과 지수에게 평생보다 긴 지옥이었다. 손끝하나 대면 깨질 것 같은 불안 속에서 부부는 서로를 위로하며 버텼으나, 운명은 그들에게 자비롭지 않았다.일주일 후 다시 마주한 초음파 화면에는 생명의 고동 대신 기괴한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 포상기태 입니다." 의사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 임신유지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태